소설리스트

남자로 살아가는 법-134화 (134/137)

〈 134화 〉 chapter 132. 넘어져도 괜찮아

* * *

기다리고 기다리던 9월.

막연하게만 보였던 F/W 해외 패션위크의 서막이 올랐다. 5일간 진행되는 뉴욕 패션위크가 그 첫 시작이었으며

모든 F/W 컬렉션들이 쇼가 되어 끝나는 시간까지 1분 1초가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완벽, 그리고 또 완벽을 추구했다.

당연히 실수란 용납할 수 없는 일이고.

쇼가 열리는 장소와 시간이 전부 달랐지만, 굉장히 엄격했기에 하루에도 몇 개의 쇼장을 오가면서 차질이 없게끔 미리 계획을 세워둬야 했었다.

‘물론 내가 아니라 에이전시가.’

패션위크 기간 동안에는 다른 스케줄이 일절 없었기에 오로지 쇼에만 집중할 수 있었지만.

몸이 힘든 게 더 낫냐, 머리가 힘든 게 더 낫냐 그 차이였다.

돌이킬 수 없는 런웨이이자 쇼인만큼 심리적 부담감은 커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또 스피드가 생명이었기에, 하루하루를 정신없게 보내야 했다.

순식간에 지나버린 4일.

하루에 몇 번씩은 이동하면서 바로 리허설, 혹은 리허설을 아예 하지 못한 채로도 쇼에 서는 경우가 간혹가다 있었으며

한 끗 차이로 실수할 뻔했지만 실수를 안 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대망의 뉴욕 패션위크 마지막 날이 됐을 때는.

“...... 아.”

“괜찮아요?”

“네. 감사합니다.”

어지러워지면서 몸을 못 가누고 넘어질 뻔했지만.

다행히도 근처에 있던 헬퍼가 나를 잡아줘서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어디 잘못 부딪혀서 멍들거나 다치면 큰일이다. 정신이라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또 쓰러질 테고 옆에서 누가 잡아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아니면 바로 응급실 행이니까.

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무거운 두 눈덩이가 느리게 감았다 떠졌다.

“어이, 너무 긴장하지 마.”

“긴장 안 했어. 너야말로 긴장한 거 같은데?”

“워워. 내 사전에 긴장이란 없다고?”

“허세는.”

고개를 돌리니 손으로 제스처를 취하면서 씨익 웃고 있는 얼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메이크업을 받아서 더 뚜렷해진 이목구비, 그리고 깊게 파인 눈의 파란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남자 모델.

에반드로 스미스는 이번 뉴욕 패션위크를 통해서 친해진 모델이었다.

‘지금까지 전부 쇼가 겹쳤었던 거 같은데.’

처음에는 눈이 몇 번 마주치는 정도였지만 에반드로의 친화력으로 인해 셋째날에는 아웃스타그램 맞팔까지 한 상태였다.

그도 어느 정도 인지도와 실력이 있는 모델이었고.

사실 뉴욕 패션위크의 마지막 쇼인 이곳에서도 겹칠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지금까지 봤었던 모습들 중에서 제일 새로운데.”

“칭찬이야?”

“아마도. 근데 넌 5:5 가르마 하면 안 되겠다.”

“칭찬 아니잖아 죽을래?”

주먹을 치켜세우니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에반드로.

그런 그를 보면서 나는 똑같이 너도 머리를 넘기면 안 되겠다고 말하면서 되갚아주었다.

‘확실히, 우리 둘의 모습만 봐도 제일 새롭기는 하지.’

이번 F/W 뉴욕 컬렉션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색상과 패턴이었다. 메이크업도 그렇고 5:5 올백으로 넘긴 머리는 조금 어색했지만.

지금 나의 모든 스타일링을 더불어 의상까지 하나의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했기에.

마리 로렌의 패션쇼는 굉장히 독특했다. 정작 디자이너인 그녀는 한두 번 본 게 다지만 마리 로렌의 패션쇼에 서게 된 건 정말이지 영광이니까.

IMG 에이전시의 피팅으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진행된 쇼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섰어야 했다.

‘디자이너 마리 로렌.’

세계 패션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은 패션 디자이너 중 하나,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특유의 독특한 컬러감, 젊음의 에너지, 위트가 넘치는 재기발랄한 디자인 등의 평이 잇따르고 디자이너였다.

“이제 마주칠 일은 없겠네.”

“그러게.”

“끝나면 연락할게. 내가 파티에 초대해 줄 테니 같이 가자고!”

“좋아. 될 수 있다면 말이지.”

에반드로는 뉴욕 패션위크에만 참가했기에 앞으로 다른 패션위크의 패션쇼에서 만날 일은 없었다.

‘그래도 아는 얼굴이라고.’

지금처럼 쇼가 시작되기 전에 혹은 시간이 빌 때마다 종종 대화를 나누는데 그럴 때마다 잡생각을 조금씩 떨쳐냈다.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느낌이었고.

안타깝게도 파티를 가려면, 좀 까마득한 미래긴 하지만.

“이리 와! 빨리 헤어 수정해야 돼!”

“네.”

에반드로와 대화를 나눈지 얼마 안 지나, 급하게 달려온 스타일리스트들에 의해 다시 끌려가 자리에 앉혀졌다.

그러더니 리허설까지만 해도 잘 세팅되어 있던 내 머리가, 5:5였던 가르마에서 7:3으로 수정되었다고 말해줬고.

‘아 내 머리.....’

이미 스프레이 1통을 다 뿌려서 고정시킨 머리였기에 다시 빗질을 하려니 두피가 지끈거렸다. 누가 내 머리카락 다 뽑아가는 거 같은데.

고통을 꾹 참아내며 시간이 좀 흐르자

“됐어!”

거울 속에는 7:3 가르마를 타고 있는 내 머리가 보였다.

‘이건 다른 의미로 정신을 번쩍 들게 한 거 같네.’

머리는 여전히 아팠다.

****

마치 콜로세움을 연상한듯한 세트장이 마리 로렌의 F/W 뉴욕 컬렉션 쇼장이었다.

그 안에 있는 원을 중심으로 모델들이 워킹했고 역시 마리 로렌,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완벽한 F/W 신상이었다.

원색적인 컬러 디테일이 더해진 무드.

그리고 무대의 스케일, 구성이 함께 어우러져 빛을 발했고. 다시 한번 그녀가 루이비통의 디자이너였다는 사실이 믿기기도 하면서 안 믿어졌다.

어김없는 뛰어난 독창성과 그것을 보여주는 의상들. 그중에서도 신발과 가방을 좌시할 수도 없었다.

‘이번에도 히트 치겠군.’

모델들의 사진을 하나하나 꼼꼼히 찍었다. 다른 의미로 무난한 쇼.

그렇게 가을 의상이 끝나고 테마가 바뀌면서 겨울 의상이 나오고 있던 찰나

“아......”

걷고 있던 모델 한 명이 넘어졌다.

주위에서 탄식이나 놀란 소리가 들려왔지만, 휘청거린 것도 아닌 완전히 넘어져 버리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뒤에서 나오고 있던 이들까지도 정체될 수밖에 없었는데.

‘어라?’

넘어졌던 모델이 급하게 일어서서 다시 걸음을 옮기기까지 별다른 혼선 없이 다시 워킹이 이어지고 있었다.

빠른 비트와 템포로 인해 이미 흐름이 한 번 끊긴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누가 조절했지?’

아까 넘어진 모델의 뒤로 한 동양인 모델이 눈에 들어왔다.

‘저런 모델이 있었나?’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이후에는 별다른 문제 없이 쇼가 이어졌기에 다시 사진을 찍으면서 쇼를 감상했다.

하필이면 마리 로렌의 쇼에서 넘어지다니, 아마 저 모델은 무난하게 성공적인 이번 쇼에서 사진으로 박제되고 매체에 한 줄 정도 기재될 게 분명했다.

이런 정상급 패션쇼에서는 저런 실수도 잘 일어나지 않으니까.

아무튼 간에, 다시 쇼에 집중하면서 시선은 오버사이즈의 니트를 입고 나온 동양인 모델에게 옮겨갔다.

아까 한 번 눈에 띈 이후로 계속 눈에 밟히는 거 같은데.

‘안정적이란 말이지.’

그가 옮기는 안정적인 워킹을 보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당당하면서도 음악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주 제대로였으니까.

적어도 저렇게만 걷는다면 넘어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쇼가 막바지를 향해가면서 피날레가 시작되자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번 F/W 컬렉션 중에서는 스케일이 제일 크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그 말에 공감했다.

피날레 무대에는 디자이너인 마리 로렌이 중앙에 서 있었고, 그 장면까지 사진으로 전부 담아낸채

“흐음......”

대강 머릿속에서 마리 로렌의 F/W 뉴욕 컬렉션 패션쇼에 대해 어떻게 쓸지 정리해 나갔다.

****

“우연아, 조심.”

“아 고마워요.”

“너 이러다가 다치면 큰일 나는 거 알지?”

“알죠.”

나는 예진에게 조심하겠다고 말한 뒤 제대로 중심을 잡았다.

진이 빠지기도 했고, 심력을 많이 소모했다 보니 또 몸에 힘이 빠져 옆으로 쓰러질 뻔했으니까.

마리 로렌의 쇼를 끝으로 F/W 뉴욕 패션위크는 완전히 끝났다.

이대로 호텔에 가서 몇 시간 자고 난 뒤 바로 비행기를 타야 하겠지만.

‘첫 단추가 잘 끼워졌으니.’

짐을 하나 덜어낸 기분이었다. 마지막이었던 마리 로렌의 쇼도 내 딴에는 더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게 되었으니까.

후회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비록 바로 앞에 있는 모델이 넘어졌을 때는 좀 많이 놀라긴 했다만.

전생의 기억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나온 대처가 잘 먹혀서 다행이었다.

그때는 패션쇼를 보는 입장이었는데, 무대 위에 있던 모델이 크게 넘어져 버렸고 그 뒤에 이어진 대처가 굉장히 인상 깊어서.

나 또한 천천히 템포를 조절하면서 쇼를 진행시킨 덕에 마리 로렌으로부터 고맙다는 말까지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조심하라니까.”

“아.”

물론, 무대 밖에서는 휘청거리면서 누가 잡아줘야 하는 신세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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