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푸근한 양 한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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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언덕길을 걸을 때 고백 아닌 고백을 했는데, 나로서는 나쁘지는 않지만, 역시 서로 만난 지 1일도 안 됐고…아…1일도 안 됐으면서 집에 하룻밤 자는 것은, 그거대로 문제겠다.
그래도 내일 일어나면, 모든 일이 꿈이었다는 듯이 사라질까 봐 너무 무섭기에 집에 초대하였지만, 내 억지로 인해서 이지혜 헌터의 일정이 다 꼬였을까 봐 미안해지기는 한다.
그래도 사귀자 하였을 때, 이지혜 헌터의 얼굴은 정말이지 볼만했다. 만화처럼 붉어지는 얼굴을 기대했는데, 역시 만화의 표현은 만화에서만 기대해야 하나 싶다. 대신 어떤 말을 할지 몰라서 입을 벙긋 거리 다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며, 안절부절못하던 모습이 오히려 귀여웠다. 그렇게 고민하면서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다, 한숨을 푹 쉬더니 항복선언을 하는 모습이란. 남녀역전 세상이 아니었다면 볼 수 없는 모습일지도?
어찌 됐든 집까지 왔는데… 인스턴트 식품만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일까?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냉장고를 슬쩍 확인해보더니, 한 손을 이마에 짚고서는 고민을 하고 있다.
저거, 분명히 한숨까지 쉬려 하였지만, 손님의 입장으로 방문하였기에 참은 게 분명하다. 나 또한 찔리는 구석이 많기에 조용히 있지만…
“사장님…평소에 어떻게 드세요…?”
돌직구가 들어온다…평소라…평소…음, 적당히 잘?
아니 대부분 인스턴트이긴 해도, 매일 단백질 파우더도 마신다.고기보단 단백질 가성비가 좋다.
“어…인스턴트랑, 아침에 일어나면 단백질 파우더 한…잔?”
“하아… 본인 자신도 인지하고 계시죠…?”
안쓰러운 눈빛일까? 걱정하는 눈빛인 걸까? 그래도 오랜만에 걱정 받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이라는 소리가 조금 들리긴 하지만…못들은 걸로 하자.
“그래서 사장님, 정말 밥도 못 먹을 정도로 수익이 없는 건가요?”
“그…그건 아닌데…하하하…”
진실을 어떻게 말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말을 들으면 화를 낼 것이 분명하다.
“혹시 곤란한 사정이라도 있으신가요?”
정말 걱정해주는 눈빛에 진심이 담겨있다. 헌터의 일반적인 평판은 나쁜데, 그녀는 원래 인품이 이런 걸까? 아니면 남녀역전세상이기에 여성이 남성을 보호하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으로 인해 신경을 써주는 걸까?
그보다 진실을 말해주지 않으면 안 될 듯하다.
“아니 그, 저….어…수울...”
입이 정말 안 떨어진다. 타인과 이렇게 편하게 대화하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예? 수울…? 혹시?”
“네…지출 대부분이… 마실 술을…산다고 써버리네요…하하하…”
눈을 도저히 못 마주치겠다. 오늘만 해도 어색한 침묵이 몇 번째일까?
이지혜 헌터도 어떠한 말을 할지 고르는 듯한 표정이고, 나 또한 죄를 지은 죄인처럼 눈을 못 마주치고 있다.
생각해보니,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사용하는데 뭐가 문제지…? 왠지 모르게 억울해진다.
“하아…사장님, 인스턴트만 먹는 생활 언제부터 해오셨어요?”
“으음…성인이 된 이후일까요? 망각현상이 심해지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다 보니.”
어떤 말을 할지 고민하던 그녀는, 망각현상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말문이 막힌 듯한 표정이 되어버린다.
아니 뭐…삶에 의욕이 천천히 마모되던 시기였고, 그때 술과 담배를 시작하지 않았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기에, 어쩔 수 없던 선택이지만…
“후…일단은 여기까지 할게요, 단 오늘 저녁 배달음식은 제가 살 테니 많이 드셔야 해요? 키는 어쩔 수 없지만, 사장님 걱정될 정도로 너무 마르셨어요.”
평소 식단을 생각하면 체중이 적은 것은 인정하지만, 아니 내 키가 왜? 남성의 평균 아니었나…?
아니, 애초에 평균을 알기는 하는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무기질적으로 바라보는 눈빛이 무서워서 평소에 바닥만 보며 생활하거나, 손님의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 이런 남녀역전이라 생각해서 키가 작은 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이런, 당연하다 생각되는 것들이 대부분 틀린 정보라니…정말이지 전생의 기억 도움 하나도 안 된다.
그렇게 여러 생각을 하는 동안, 이지혜 헌터는 배달음식 주문들을 다 끝냈다. 내가 너무 말랐다며 먹어야 한다 등, 전생에서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끝없이 계속 먹이려는 할머니와 이지혜 헌터를 겹쳐보니 재미있기도 하다.
나쁘지 않네, 이런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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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끝난 저녁 식사.
피자에 족발, 떡볶이, 순대까지 생각보다 과한 양의 음식에 놀라 이지혜 헌터를 보니, 남은 음식은 꼭 챙겨 먹고 그사이에 장을 봐두라고 한다. 거의 어머니 잔소리를 듣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대부분 음식점 구석에서 혼자 밥을 먹거나, 내 가게에서 적당히 먹은 기억뿐이었는데. 누군가와 이야기하며 식사하는 것 또한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가슴 어딘가가 간질하다.
나의 경우, 할 이야기가 우울한 이야기일 것 같기에, 듣는 대부분 듣는 쪽이었다.
그렇게 나는 침대에 등을 기댄 채로 바닥에 앉았으며, 그녀는 바닥에 앉은 채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녀 품에 안겨서 앉는 거는…맨정신으로 못 할 거 같다. 아까는 무슨 정신으로 한 것인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해질 정도로 부끄럽다.
그렇게 시작된 식후 잡담 시간.
최근 게이트의 빈도가 늘어난 거 같다.
돈은 잘 벌리는데 몸이 힘들긴 하다. 그때 너무 지쳐서 실수한 거를 내가 인정하니 편해지더라.
총괄팀장한테 화해하니까 바로 받아 주시더라.
팀원이랑 싸운 거 화해 할 건데 사장님 가게에서 모임을 해도 괜찮은가.
결국, 내 마음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자존심 던지고 말하니 편해지더라
그래도 가끔 총괄팀장이 히스테리를 부리는 게 귀찮다.
등등, 정말 본인 주변의 이야기 이기도 하며, 일상적인 대화다.
얼마만 일까?
이야기하면서 씁쓸해하면서도, 이제 와서 인정하고 보니 실은 아무것도 아닌 자존심이었다고 말하며 후련해하는 표정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그렇게 대화를 듣기만 해도 나쁘지 않았다. 가끔 추임새를 넣어주거나, 행동으로 고개를 갸웃거려주는 거만 해도 그녀에게 충분한 반응 같았다. 반응 해줄 때마다 좋아 해주는 표정이 이쪽도 기분이 좋아져서 과한 반응을 해준 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다 정신을 차려보니, 저녁 10시다.
“아, 벌써 시간이…이르지만, 내일 오후에 본사를 가야 하니까 지금이라도 잘까요? 서로 어제 마신 것도 있어서 피곤할 거 같은데.”
하긴, 그녀는 러스티네일을 음료 마시듯 마셨기에, 숙취가 상당하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잔 두통을 참으면서 나를 상대해주거나…? 그런 생각 하니 미안해진다.
“그럼…한 잔만 마시고 잘래요? 아! 숙취 때문에 힘드시면 저만 마실게요.”
“읏, 사장님 그렇게 마시고도 또 마시려는 거예요? 두통 괜찮으세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는 그녀지만, 나는 문제 없다. 애초에 숙취가 없도록 위스키 위주로만 마셨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스피리터스 넣은 러스티네일 때문에 잔 두통이 나지만 이 정도야 허용 범위다. 게다가 마셔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 시간대는 일하는 시간이기도 하고, 마시지 않으면 잠을 못 자거든요. 그래도 이번엔 도수 매우 낮은 술로 충분해요, 알콜이 조금 들어가도 들어간 맛만 나면 돼서요.”
할 말이 많은 표정을 짓지만, 말을 하지 않는다. 표정만으로도 보이긴 한다. 어떠한 말을 할지.
아마 사장님 몸을 소중히 생각하셔야죠. 같은 말 아닐까?
알콜이 몸에 안 좋은 것은 알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버티게 해준 친구 같은 녀석이다.
“에헤헤…이상하죠? 괜찮아요. 저 혼자 마실게요”
역시 남에게 자기 전에 술 권유는 좀 아닌 거겠지?
“아뇨, 저도 주세요. 도수가 낮다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네요.”
“아…저만 마셔도 되는데…”
여성이지만 씩 웃으면서 자신도 마시겠다는 모습이 참 예쁘다...보다는…멋지네.
어떤 술이 좋을까...? 그녀에게는 좀더 낮은 도수의 술이 좋을 거 같고...
딱 떠오르는 술이 하나 있다.
지금의 분위기와 나의 기분에 딱 맞는 칵테일일지도 모르겠다.
“그, 그러면, 양 한 마리 어떠세요?”
“네에?”
재미있는 표정이다. 나는 틀린 말은 안 했다. 정말로 양이다.
다들 잠이 안 오면 양의 마릿수를 세지 않는가?
그러한 의미로 정말 푸근한 양 한잔이 마시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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