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신맛 커피&쓴맛 커피(2)
* * *
주방에서 많은 일이 있었다.
음료를 만들기 전에 배달한 음식을 밀폐 용기에 넣어서 냉장고에 넣고, 나머지 정리를 같이하니 뭔가…부부 같은 느낌?
어딘가 간질간질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새삼 생각을 해보니. 헌터일에 집중하다 보니 연애를 해볼 시간이 없긴 했었다.
그렇게 마실 음료 제조를 돕다가,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먼저 방에 들어왔지만.
사장님 방은 정말이지 기묘했다.
필요한 가구만 있으며, 그 외에는 인형과 베개로 가득한 방.
인형들은 대부분, 솜으로 이루어진 동물 형상의 인형들로 가득했다.
아마도 사장님의 정신상태를 나타낸다고 여겨진다.
그래도 안 좋은 쪽이 아니라 아직은 가능성이 있는 쪽이라 여겨진다.
언젠가 목격해버린…칼로 난도질해버린 방안보다는 훨씬 양호하다.
나름 항우울제를 챙겨 드시는 건지, 책상 위에 있는 약통을 보면…음, 괜찮겠지…?
게다가, 가게에서부터 자해 상처가 있는 것은 봤지만, 자상의 흔적 외에 긁은 자국만이 남아있어서 못 본 척을 하였다.
상처 흔적을 보고 호들갑을 떨게 되면, 오히려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동료 헌터들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어온 경험일지도 모르겠다.
괜히 상처에 관해서 말하기 시작하면, 경계를 하기 시작하거나 숨기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먼저 말을 해줄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물론, 심각한 자해를 한다면 무력으로 제압해야한다.
그보다. 이 방에서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있는데. 구석진 곳의 진열장에 보관된 무기들이다.
헌터라도 지망하신 걸까? 냉병기와 열병기가 한가득했다. 헌터라면 다양한 무기를 갖춰두긴 하지만…혼자 쓰기에는 너무 많다.
자세히 확인해보니, 사장님의 신체 사이즈와 맞지 않는 무기인 장검과 창 그 옆에 있는 소총과 산탄총을 포함한 총기류는 정말 깔끔하게 손질되어 장식된 상태지만, 단검과 권총 등은 그냥 방치되고 있다.
손질을 안 한 지 꽤 되었는지, 단검의 손잡이 부분이 녹이 슬어있으며, 권총은 광택을 잃었다. 그런 무기 위에 소복이 쌓인 먼지. 아마 이 무기가 사장님이 쓰던 무기였고…손질된 무기는 가족 혹은 지인의 무기인 걸까?
가족이라….
가게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지금은 혼자이신가…?
여러 생각을 하다 보니, 사장님이 방에 들어오셨다.
그렇게, 자기 전에 따뜻한 우유 한잔 정도면 이라 생각하며 시작된 대화시간.
대부분 나 혼자 이야기를 하였다. 우울증을 겪고 있으시다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우울해질지도 모르시니 내가 선수를 쳤지만.
나의 말솜씨로는 부족한 것일까? 갑작스럽게 기분이 가라앉는 듯한 모습을 보이시길래. 손목을 잡아주며 안심을 시켜주었다.
내일 어떻게 될지 몰라서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다독이면서 안심을 시켜주었더니…
‘혹시, 원하시는 것이라도 있으신가요?’
솔직히, 없다 하면 거짓말이고….
그래도 만난 지 하루가 겨우 지난 사이에, 이런 이야기는 아니다.
그 대신, 빠른시일 이내로 팀원과 가게를 방문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취했는지,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한 사장님.
‘다리 좀, 벌려 봐요.’
엣…? 잠깐 사장님 그렇고 그런 …! 아니 사장님이 먼저 그런 것을 요구해올 줄 몰랐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사장님이 안 보이더니 네발로 엎드려서 내 앞에 있었다.
솔직히…여러 감정이 오갔다.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고. 나쁘지 않은 기분이기도 했고…
아니, 지배욕 정도야…’여성’이면 누구나 있을법한데….
너무 돌발적으로 일어난 일이기에, 아니, 나, 나,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라면서 ‘남성’ 같은 생각을 해버렸지만, 기대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사장님은 내 앞에 앉았다.
솔직히…솔직히 말해서, 기대해서 배신당한 그런 기분을 느꼈다.
그래도, 작고 귀여운 ‘남성’이 내 품에 안겨서 애교를 부린다 생각해보면 정말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이야기 아닌가?
정말로 이 모든 것을 전부 예상했다는 듯이, 무덤덤하게 전부 받아줄 ‘여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게 사장님의 어리광을 받아주기 시작하니,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갈 듯한 성격이셨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정말 초면이나 다름없는 나에게까지 이러는 걸까?
즐거워했다가 우울해 해하는 감정의 변화가 격해지기 시작하여서, 억지로 재우기는 했다.
그렇게 사장님을 재운 뒤…분명 나는 바닥에서 혼자 잤을 텐데…
어째서 사장님이…내 옆에서 자고 있는거지…??
팔이 무겁다고 생각했더니, 내 팔을 베개 삼아 자고 있다.
얼굴이 이쪽을 향해있는 것이…너무 겨드랑이에 가까운 거 아닐까…?
아…아니 지금 생각 해보면, 어제 씻지도 않고 자버렸다…!
일단은 사장님을 깨워야….
아, 아니…아직 주무시고 계신다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 하고 싶다.
“저…사, 사장님 주무시고 계세요오…?”
“…”
정말 주무시고 계신다면, 조용히 침대로 옮기려 했지만…분명히 깨어있다….
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숨소리가 조금 달라진 것이…깨어있으시다면 몰래 옮기기는 불가능할지도.
“사, 사장니이임…?”
“…부끄러워 주, 죽을 거 같으니까 아무 말 하지 마세요….”
으음….
여성들의 로망 같은 상황이기에 나쁘지는 않지만, 다른 의미로 정말 서로 곤란한 상황이다.
내가 더 부끄러워 죽을 거 같은데…냄새 안 나겠지?
그보다. 이 사장님은 ‘여자는 늑대’라는 말을 모르는 건가!?
게다가, 아랫배 부분이 저릿한 기분이….
사장님이 일어나시는 대로 화장실을 빌려야겠다.
빨리 안 씻으면 냄새가 날지도….
***
분명 난 어제…어제… ….
음, 현실적 도피를 하고 싶다.
부끄러워 미칠 거 같다.
아니, 알고는 있지만.
매번 취한 뒤의 뒷감당은 다음 날의 내가 한다는 점이다.
그만큼 힘들었던 건지, 대화상대가 생겨서 기쁜 나머지 폭주를 한 것인지.
대부분 만취한 날 이후의 뒷감당은 심각한 숙취였지만, 이렇게 이성 앞에서 큰 실수를 한 것은 전생 현생 다 포함해서 이번이 처음이다.…!
부, 부끄럽기도 한데,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그런 느낌 있지않는가? 부끄러운데도 웃고싶은 기분.
근데 난 왜…지혜씨의 품 안에서 자고 있던 거지…?
분명…침대에서 잔거까지는 기억하지만….
아, 새벽 즈음 내려온 거구나….
그래도 품 안에 안겨있을 때 너무 따뜻해서…나도 모르게….
아니, 나도 남자다! ‘남자는 늑대’인걸!
첫눈에 반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여성과 이야기하면 ‘남자’로서 신경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잘나가는 헌터가 나 같은 소시민과 사귈 리는 없고….
아무리 남녀 역전 세계라고는 하지만, 허황된 꿈은 좋지 않다.
“저…사, 사장님 주무시고 계세요오…?”
“…”
으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와서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이거, 분명히 걸렸다….
“사, 사장니이임…?”
“…부끄러워 주, 죽을 거 같으니까 아무 말 하지 마세요....”
정말 부끄러워서 죽을 지경이다.
그래도 나쁘지 않다….
이렇게 옆에 누워있으니 사람 냄새가 나서 좋다.
“저…팔베개 안 불편하세요…? 제 팔보다는 푹신한 베개가 더 좋을 거 같은데…”
“이, 이게 좋아요.”
그렇게 다시 찾아온 침묵.
나는 멍청이다. 이 부끄러운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할 유일한 기회였는데.
부끄러운 나머지 더욱더 부끄러운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
그보다. 사장님이라…
“…성화…요…”
“네…?”
내 목소리가 너무 작은 것일까?
“이…조성화요…제, 제이름요오…”
“아, 계속 사장님이라 불렀네요.”
“서, 성화로도 괜찮아요…”
내 본명을 내 입으로 말해보는 것이 얼마만일까?
안 그래도 부끄러운 상황인데, 더욱더 부끄럽다.
“성화…성화씨? 여성스러운 이름 같으면서도 괜찮네요.”
“그…그런가요? 중성스러운 느낌이라 생각했는데....”
"그, 그럼 둘만 있을 때는 성화씨...라 불러도 될까요?”
“네, 녯!...그걸로도 괜찮으시다면…!”
그렇게 다시 ‘에헤헤’ 하면서 서로를 마주보며 웃어보니.
아무런 관계도 아니지만, 사귀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 이제 일어날까요? 시간도 오후가 다되어 가는…데…빨리 가야겠죠?”
“아! 그렇네요! 사장님 이제 일어날까요...?”
그렇게 서로 일어나서 바닥에 앉아있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이 서로 등을 돌린 채로 앉게 되었다.
등 돌린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이...여자가 된 기분이다. 아니 이 세계기준으로는 맞는 건가?
아침밥이야…아니, 아침 겸 점심은 어제 주문한 음식들로 적당히 먹을 수 있고.
일단은 나갈 준비를 하지않으면 안될거 같다.
“일단은 먼저…씻으실래요?”
쿨럭! 쿨럭!!
갑작스럽게, 사레가 들린 듯이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아, 아니! 사장님 먼저 하세요……! ...아니, 그건 그거대로 곤란한데! 아, 우으…어쩌지…?”
아니…왜?
주인보다 손님 우선 아니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