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새로운 한 주의 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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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사귄다면 이런 세상일지라도, 나랑 비슷한 급의 사람과 사귈 것이라 생각해왔다.
지혜 씨 정도면 최고의 애인 반열에 들어가지만, 잘나가는 대기업인이 지혜 씨를 보니 자격지심이 안 생길 수가 없다.
나도 헌터가 하고 싶었는데, 나도 대기업에 들어가보고 싶었는데 등등
만약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기회라 생각하면서 그저 지혜 씨를 잡으려 하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
‘이전부터 생각해왔지만 그러면 싸 보이잖아?’
이게 이 세상에서의 최후의 자존심 같은 것이었다.
혼자가 되었어도 아득바득 살면서 왔기에, 능력을 모를 때도 정신적으로 내 몰렸을 때 자살하기 직전까지 갔더라도 나 스스로 지켜온 자존심 같은 것이었다.
“네? 성화 씨 뭐라고요?”
“지, 지혜 씨랑 사, 사, 사귀는 거, 것!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뭐어…. 그래도 지혜 씨의 반응을 보아하니 사귀는 정도야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마 능력을 사용한 게 내 생각을 바꾸게 한 결정타였다.
‘아니 지혜 씨가 절실한 표정을 지을지는 몰랐지….’
그렇다고 해서 바로 좋다고는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유리 잔을 닦는 척하면서 지나가는 듯한 발언으로 말을 하였지만, 상상 이상으로 부끄러웠다.
솔직히 누군가에게 좋아합니다 사귀어 주세요 같은 발언을 당당하게 말할 정도면 흔히들 말하는 인싸 아닐까?
눈치 빠른 현준 씨는 대충 대화의 뜻을 알고는 환호하기 시작하였다.
나리씨도 눈치가 있는지 같이 환호를 하였고….
지혜 씨는 예상치 못한 말을 들어서 그런지 어버버 하다가 깜짝 놀랐는지 되물었다.
“예…? 정말로요!? 꺄아아! 정말로요!? 나리야 어떻게 해!!”
헌터 조직의 팀장을 맡고 있어서 그런지 귀엽다고 느낀 첫 만남을 빼면 성공한 커리우먼 같이 느껴져 왔는데, 나리씨를 찾으면서 껴안는 모습이…. 이런 모습을 보면 또 전생에 알던 여성의 모습처럼 느껴져서 오묘한 기분이다.
‘이 세상 알다가도 모르겠네.’
셋 다 취한 느낌이라 그런지 흐느적 거리는 느낌도 있지만, 나리 씨를 껴안고 기분이 매우 좋음을 어필하는 지혜 씨를 보는 것 또한 눈 호강이 될 만한 상황이다.
현준씨도 슬쩍 나리씨를 껴안는데 저거 은근 노린 거 아닐까 싶을 정도다.
양옆으로 껴안긴 나리씨만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이다.
“저어 팀장님?! 현준아아아!?”
“나리야아아! 나 모쏠탈출이다!!”
“와아! 팀장님 축하드려요! 그보다 나리 선배 뱃살좀 찐거 아닌가요?”
“현준아! 너! 또! 햐응!”
현준씨는 은근슬쩍 나리씨의 옆구리를 만지는데, 이 세상의 남자가 저렇게까지 행동하던가?
아까 전에 현준 씨가 핑크 레이디라 말할 뻔했지…. 다음에 한번 혼자 오시게 된다면 말로 한번 떠봐야지.
그보다 다들 너무 들뜬 것 같은데, 취해서 사고가 나기전에 말려야겠다.
“저어 지혜 씨?”
나리씨를 껴안고 들떠 있던 기분의 지혜 씨는 나의 말을 듣고는 나의 양손을 잡으면서 두 눈을 반짝여 온다.
바 안쪽에 서 있어서 그런지 내가 내려다보는 시선이 되었다.
앉아있는지혜씨를 아래로 내려다 보니…. 가슴골이…. 크흠, 아직 추운 날씨가 아니라 그런지 약간 얇은 옷을 입고 있다.
일단, 지혜 씨는 내 손을 잡은 채로 질문을 해 왔다.
“성화 씨 저희 사귀는 건가요?!”
“어…. 나쁘지 않겠네요라 한 것 같은데요?”
기대가 한 가득한 모습으로 올려보던 모습이…. 마치 강아지 같아서 자연스레 장난을 쳐 버렸다.
“어…그랬죠….”
나의 장난에 혼나서 기가 죽은 듯한 강아지처럼 귀가 축 처진 듯한 모습이 된 지혜 씨였다.
이놈의 장난기는….
입이 방정이다.
역시 술에 취하면 사람이 달라지는 것일까? 아니면 자제력이 낮아지는 것일까?
나의 장난에 이내 지혜 씨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하였다.
완벽한 커리우먼 느낌의 여성이 취한 다음 우는 모습은 마치 가학심을 자극하지만 이 이상 장난을 칠 수는 없을 것 같고….
고백의 승낙이 아니었어? 라는 의문이 섞인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리씨 라던지, 눈치를 챘다는 듯이 재미있게 웃는 현준씨의 둘의 시선이 따갑다.
“아, 아니, 자, 장난이었어요!”
“네 이번도 장난이었겠죠. 사귀자는 것도 장난이겠네요.”
“아악! 아니예요! 그런 거! “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서 장난을 쳐봤더니, 본전도 못 건진기분이다.
지혜 씨는 그렇게 말 하면서 나를 올려다보다가 씨익 하면서 웃는다.
모델 같은 여성이 웃는 모습에 내성이 부족해서 그런 건지 내 얼굴까지 붉어진 기분이다.
“저도 장난이었어요.”
“으음. 제가 한 게 있어서 뭐라 말도 못 하겠네요.”
역으로 장난을 당하니까…. 그렇게까지 기분은 나쁘지는 않았다.
나에게 역으로 되갚았다는 듯이 배시시 웃는 모습을 보니 뭐라 할 말도 없다.
지혜 씨 외모가 워낙 모델 같아서 그런 걸지도?
그렇게 가게 안에는 순간 말이 없어졌는데.
나머지 두 명은 지혜 씨와 나의 눈치를 보는 중인 듯하다.
아, 이거 내가 뭔가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일까?
으음, 으음…
“이걸로 끝내기는 아쉬우니까 같이 술이라도 할래요? 제가 쏘는 건 아니지만 전에 받은 아이스 와인이라도?”
“아, 아직 안 드셨나요?”
“그때 진열장에 둔 그대로죠.”
지혜 씨에게 받은 아이스 와인이 생각나서 백 바의 진열장에 전시된 아이스 와인을 꺼내어 바 테이블 위에 올렸다.
“오…. 팀장님 아이스 와인이면 저희도 마셔도 되나요? 오늘 작업주 종류로 마셨는데 마무리로는 딱 아닐까요?”
역시 현준씨는 아이스 와인을 아는 듯한 눈치다.
아이스 와인이 작업주에 가장 어울리는 술 일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먹을 만한 디저트류가 없어서 유감인 정도?
치즈나 건과류는 있지만 아이스 와인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지혜 씨는 같이 마시는 것을 반기는 듯이 하이톤의 목소리로 말 하였다.
“자! 같이 마시는 거야! 오늘은 좋은 날이잖아! 그럼 다 같이 마셔야지! 성화 씨 괜찮죠?”
“네~ 사람이 많을수록 좋지요.”
저번에는 취해서 진상을 부리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기분이 좋아서 텐션이 매우 높은 느낌이다.
“그럼 잠시 차갑게 해 둘 게요”
“이럴 때는 원소 계열 능력자가 있으면 편할 텐데 말이죠.”
“능력을 이런 곳에 쓰기에는 아깝지 않을까요?”
“에이, 아깝기는요. 능력은 써라고 있는 거예요. 성화 씨도 능력 조절하다 보면 곧 알게 될거예요.”
“제 능력은 어디에 써먹을지 전혀 감도 안 잡히는 걸요?”
“성화 씨라면, 아마 쓸 곳이 많을 거예요. 아니 많아질지도 모르겠지요.”
“그런가요?”
지혜 씨는 조금 취해서 그런 건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진지한 표정이 된다.
으음, 아마도 애인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
애인…애인…. 아직은 저항이 있는 것인지 생각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니,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고 아이스 와인을 차갑게 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아이스 와인은 차게 마시는 편이 좋기 때문에 얼음 통 혹은 아이스 버킷이라 불리는 통에 얼음을 한가득 넣고 아이스 와인 병을 넣었다. 이렇게 해 두면 와인의 온도를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잠깐 기다리는 시간이 생기기에 침묵이 이어질까 생각했지만, 지혜 씨가 내 능력에 관해 묻기 시작하였다.
“그보다 성화 씨 정말로 능력 제어 방법을 터득 한 건가요? 우연이라 보기에는 그런 장난도 치시는 것보면….”
“어떻게 들리실지는 모르겠는데.... 최대한 약하게 움직여 본 게 전부예요.”
“와…약하게 한 게 그 정도 인 거였어요?”
지혜 씨는 정말로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능력 발동 중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못 하는 눈치다.
조금 전까지는 지혜 씨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묻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좋아져서 그런 걸까? 나리씨가 정말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눈망울을 반짝이면서 질문하기 시작하였다.
“팀장님 분위기상 핑크 빛 분위기의 대화가 있었던 거 같은데 뭔 대화를 하신 건가요?”
“어허. 나리 선배 그런 거 묻는 거 아니야.”
“야! 혀, 현준아 그만 좀 떨어져!”
눈치가 빠른 현준씨가 나리씨를 꼭 껴안으면서 제지해주어서 다행이지만, 지혜 씨는 말할까 말하지 말까? 라는 표정을 보여주면서 나를 보고 웃고 있다.
아, 장난 좀 쳐본 대가가 조금 많이 비싼 기분이 든다.
“살려만 주세요….”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어요.”
“그, 장난쳐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장난을 쳐주셔서 오히려 잘 된 일 같기도 하면서 조금 그렇기도 하네요.”
샐쭉한 표정을 짓는 지혜 씨에게 할 말이 없기도 하면서, 장난을 쳐본 나에게 대견함을 느끼고 있다.
장난을 안쳐봤다면 이렇게까지 발전하지 못하였겠지.
그보다 사귀자고 말 하였지만, 뭔가 두루뭉술하게 지나간 기분이 강하게 들기에 ‘사귀는 건가?’ 라는 느낌은 들지만 실감이 오지 않는다.
“으음, 사귀는 중인 걸까요.”
“그러게요 저도 사실 감이 조금 안 와요. 약간 취해서 그런 걸지도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웃음이 나와 버렸다.
우리 둘 다 연애를 전혀 모르는 구나.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다.
어쩌다가 사귀게 되었다가 중요한 게 아닐까?
이제 슬슬 와인이 차가워졌을 것 같기에 아이스 버킷에서 와인을 꺼내었다.
다행히 코르크로 막은 와인은 아니 라서 스크류 캡을 돌렸다.
스크류 캡의 밀봉이 열리는 손가락의 감각과 따다닥 거리는 소리가 좋게 느껴진다.
현재의 기분이 좋다면 뭐든 좋은 법이겠지.
“자 여기 새 잔입니다. 나리씨도 드시죠?”
“네! 아이스 와인은 듣기만 했지 마시기는 처음이네요.”
와인 잔은 대체로 밑이 넓고 잔의 입구가 좁아지는 물방울 모양 잔을 사용하게 된다.
물방울 모양 잔을 술의 향이 좀 더 모일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일단 아이스 와인을 사 주신 지혜 씨에게, 병의 아랫 부분을 깨끗한 행주로 살짝 감싼 뒤 병의 아랫 부분을 잡은 채로 한잔을 따랐다.
그렇게 석 잔을 다 따른 뒤에 내 잔을 따르려 하니까 지혜 씨가 슬쩍 가져간다.
“자, 자작은 안 돼요. 그렇잖아요 성화 씨?”
“아 네 그렇죠.”
그렇게 지혜 씨가 따라주는 와인을 바라봤다.
진한 호박색의 액체가 가득 차오르는 잔.
그런 잔 입구로부터 흘러 올라오는 향긋한 냄새와 꽃 내음.
아마 이 종족 노동력으로 만든 와인이기에 조금 그렇다는 느낌도 들지만, 이미 그러한 기반위에서 움직이는 사회에서 살아왔다 생각하면…생각이 약간 복잡해지면서도, 신경을 쓰고 싶지 않은 주제다.
그보다 지금을 즐기는 편이 좋지 않을까?
“이번에도 건배 하실 건가요?”
“그렇죠? 딱히 건배사 같은 건 안 할 생각이예요. 자 애들아?”
아이스 와인 자체는 병이 작기에 들어 있는 내용물 또한 적은 양이다. 그렇지만 다들 한 잔씩 맛을 보기에는 충분한 양이다.
지혜 씨는 이번에 나를 향해서 잔을 들었다. 남은 두 사람은 그냥 건배를 하지 않고 우리를 지켜만 보고 있었다.
아. 그런 건가.
나는 말없이 지혜 씨의 잔에 건배를 하였다.
가게 안에 울려 퍼지는 투명한 음색의 유리 울림 소리.
유리잔 자체가 약한 소재라서 그런지, 큰 울림은 아니지만, 나름 분위기는 있었다.
그리고 지혜 씨와 나는 서로를 보면서 살짝 웃었다.
지혜 씨와 잔을 부딪치니, 이제 건배하기 위해서 나리 씨와 현준 씨가 잔을 부딪혀 왔다.
한 번 더 울려 퍼지는 소리.
울림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마음속에 남는 무언가 있다고 느껴만 진다.
그렇게 우리는 말없이 와인을 음미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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