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세계의 음료가게-132화 (132/140)

〈 132화 〉 혼자가 아닌 건 좋은데 이건좀(5)

* * *

타인의 경험을 듣는 것은 즐겁기도 하면서 기대되는 일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경험의 다양성을 늘리는 방법 중 하나다.

경험 이전에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가게에서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이다. 이거라도 없어봐, 돈 버는 낙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아 커피나, 홍차캔, 술을 모으는 덕업일체 정도?

어떠한 동기로 헌터가 되었는지 궁금하기에 기다리고 있으니, 그녀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말해도 될지 말지 고민하더니 이내 입을 열기 시작하였지만, 생각했던 것과 다른 질문하였다.

“헌터가 된 이야기 이전에, 처음에 이 몸뚱어리에 빙의되었을 때 든 생각이 무엇이었을까? 넌 뭔생각이 들던데? “

전혀 다른 질문에 당혹스러웠지만, 관련이 있는 이야기라 생각하고는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처음 기억을 자각했을 때라….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그런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음, 글쎄요… 전 기억도 안 나네요. 좀 오래돼서요. 첫 생각? 아마 ‘이 상황은 뭐냐?’ 라는 느낌 아니었을까요?”

빙의가 아니라 이곳에서 태어난 것이지만 차이가 없는 것 같기에 말을 얼버무렸다. 첫 기억이라기보다는 유치원생 때 이런 일 했다 정도의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 있지, 본격 전생자라 자각한 것은 초등학생 시절 부터라서, 전생의 첫 기억은 나지 않는 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보다 선배일지도 모르겠네? 뭐, 난 이제 6년차 겠지. 생각보다 짧지?”

노트북을 보면서 보고서를 작성하는 모습 등, 일에 찌들어 있는 모습이 최소10년은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짧은 시기였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 것일까?

“그런 것치고는 적응 엄청 잘하신 것 같은데요?”

“그러네, 새삼 생각해 보니 어떻게 적응 한 거래?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일이네.

“그러게요.”

지금 생각해도 나도 어떻게 적응한 것일까 죽지 못해 살아온 것 같은데 뒤를 돌아보니 살아온 자취가 남아 있었다. 이 또한 내가 걸어온 길이겠지.

오랜만에 과거를 회상하려 했지만, 그리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아서 그녀의 말에 집중하는데, 정말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한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그보다 어떤 생각이 드냐고 물어 봤지? 나 같은 경우에는 조졌다? 딱 그생각이 들더라고.”

“네? 그런 생각이 드나요?”

난 기억도 나지 않아서 되묻자 그녀는 마시던 얼음만 남은 아이스티 잔을 빙글빙글돌리기 시작했다.

아련한 듯이 회상하는 표정이기도 하면서, 어처구니없다 생각하는 표정. 다양한 표정이 지나갔을 때 그녀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 생각이 들지. 자고 일어나니까 다른 세상이라잖아? 아니 다른 세상이라고 지적해주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지. 내가 아는 상식이 박살 나는 순간 그 기분은 어떨까?”

상식이 박살 나는 그 기분이라…. 어릴쩍부터 이 세계에서 살아서 그런지 그런 느낌은 잘 들지 않는다. 게다가 그런 기분을 경험하지 못해서 공감해주기가 조금 난해하였다.

“음 이세계에 오게 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아할 것 같은데…. 그쪽은 그런 쪽은 아니었나 봐요?”

내 말에 정말 당연하다는 듯이 답변을 하는데, 너무 진지하게 말해서 그런지 첫인상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렇지, 갑자기 다른 세상에서 눈을 떠서 좋아하는 경우가 있을까?”

“음…. 없겠죠?”

“맞아 없어. 모임에서도 사람들에게 한 번씩 묻지만 다들 눈을 뜨자마자 뭔 일인가 싶어서 패닉에 빠졌다고 하더라고.”

자기 말하고는 담담히 얼음 한알을 입 안에 넣고 씹기 시작하는데, 보는 내 이가 시릴 정도로 아그작아그작 씹고 있었다.

“음. 그래도 현 상황을 파악한 후에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얼음을 씹고 있던 그녀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는 입 안에 있던 얼음을 다 삼켰다.

“그런 건 소설이나 만화의 주인공이나 가능한 이야기 아닐까?”

“음, 그정도인가요?”

“맞아. 다들 현재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파악한 뒤, 좋아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어.”

“흐으음….

그렇다 해서 정말 단 한 명도 없을까? 내가 못 믿겠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자, 역시나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뒤통수를 긁었다.

며칠간 안 씻었는지 어깨 위로 떨어지는 비듬은 못 본척하자.

“진짜야. 생각해 봐 이미 가지고 있던 인프라와 새로 구축해야 하는 인프라, 넌 어느 쪽이 좋아?”

“선택한다면 이미 있는 인프라겠죠?”

“바로 그거야. 뜬금없이 이세계에서 눈을 떴는데 있다 해도 ‘나’라는 개체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 이걸 마냥 좋아할 수 있을까?”

“없겠죠….”

하긴, 이세계에 뜬금 넘어오게 된다는 것은 내가 현재 가진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게 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 바로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미 오래 살아온 나로서는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 겠지만….

“나 또한 말이지….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시작하는 그 느낌이 얼마나 좇같던데.”

“그런가요…. 저는 너무 오래돼서 기억도 안 나네요. 기억나도 초등학생 이전 같은데….”

“와 겁나 높으신 선배였네.”

“뭔가…. 팍 삭아진 기분인데요?”

갑자기 선배 취급을 받아도 그리 썩 좋지는 않았다. 뭔가 늙어보이잖아?

그보다. 나의 경우에는 다른 빙의자 보다는 상황이 좋았던 것일까? 각자의 입장이나 처지는 알 수는 없지만, 이야기만 듣기로는 나쁘지 않은 상황에서 시작한 기분이 든다.

“쨌든, 그런 좇 같은 상황을 좋게 보는 경우는 이전 세상에 미련 없는 사람 정도겠지.”

“그런 것치고는 현준 씨는 엄청 즐기는 것 같던데…요?”

갑작스레 머릿속에서 겁나게 얄미운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누구는 못 즐겼는데 누구는 실컷 즐기는 그 모습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현준이? 걔 그거 달관한 거야.”

“달관?”

“원 세상으로 돌아가길 포기한 거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 내용이라 그런지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그런 나의 표정을 보았던 것일까? 피식 웃으면서 답하였다.

“뭐, 게이트가 존재하니 원 세계로 돌아갈 방법도 있을 거라고 말하면서 몇 년간 열심히 헌터일을 했지.”

게이트가 존재하니 원래 세상도 갈 방법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너무 오래 살아서 이전 세상에 대한 미련은 없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결과를 묻게 되었으나 그리 좋은 대답은 오지 않았다.

“그, 그래서 찾았나요?”

“찾았으면 여기에 계속 있을까 봐?”

“그렇죠…. 아니 있어도 문제 아닐까요? 이쪽 인류정부는 정복 전쟁을 즐기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게이트는 이 세상의 중요한 자원취급을 하기에, 조사한 뒤 그 게이트를 공략하려 한다.

말이 공략이지 그냥 전쟁이다.

그렇기에 그런 게이트가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아닐까 싶었지만, 그녀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까지 게이트 관련 뉴스나 소식을 보면 ‘인류’ 가 게이트에서 발견된 적 있었어?”

“없죠…?”

생각해 보면 인간 외의 종족은 게이트에서 쉽게 발견되지만, 인간이 발견되었다는 게이트는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현준 씨의 이전 세상 찾기가 실패로 돌아간 것일까?

“뭐, 정부가 숨기는 것인지 진짜 없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일반인이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나오는 게이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그래서 그것을 깨닫고는….”

“맞아. 그 길로 삐뚫어진 건지 마음이 꺽인건지…. 최근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 모습은 보이는데,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정도?

그렇게 생각하면 현준 씨에게 동정은 간다.

이유가 있어서 자포자기한 상태구나 정도? 평소의 모습은 의도적으로 밝은 모습을 보이려고 그랬던 것일까?

그런 것치고는 성희롱을 엄청 하는 것 같던데…. 마음이 꺽이고 뭐고는 변명이고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본인에게 직접 묻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이야기다.

그보다 뭔가 이야기가 엄청 돌아간 것 같은데?

“그렇겠죠…. 그래서 헌터가 된 동기랑 관계가 있는 이야기인가요?”

이때까지 이야기를 쭉 해왔지만, 결국 신세 한탄 같은 이야기 같았다.

그녀도 그것을 아는지 살짝 웃고는 몇 안 남은 얼음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햄스터처럼 볼을 가득히 부풀린 채로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하였다.

“뭐, 크게 연관은 없지?”

“에에….”

“완전히 관계없는 이야기도 아니니 하게 된 말이야. 오랜만에 신입 동향 사람이기도하고.”

“그래서 헌터가 된 동기가 뭐죠?”

신세 한탄을 들어줬으니 헌터가 된 동기에 대해서 꼭 듣겠다는 듯이 자세를 잡았다.

지나가던 손님이 헌터가 된 동기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냥 그렇구나 하면서 넘어가겠지만, 동향사람이 이런 말을 하니 신경이 쓰이기도하고,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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