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만 3회차-3화 (3/278)

제 3화

아니, 의사 양반 내 눈이?! (2)

드르륵-!

“어?”

핸드폰 액정이 금세 다른 화면으로 바뀌며 진동을 울려댔다.

핸드폰 액정에는 ‘천세정’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천세정.

시운과 굉장히 친한 이성친구.

이 이름을 떠올리자 목이 메이고 가슴이 쓰라려 왔다.

어린 시절부터 유달리 예쁘고 매력 있는 성격으로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오던 친구.

배려 가득한 세세한 마음씨에 항상 남자들이 득실거렸다.

그러나 세정은 시시한 남자와는 만나지 않았다.

능력이 되는 남자들이나 자기만의 확실한 매력을 가진 남자들만 만나왔다.

그렇다고 성격이 헤픈 것도 아니었다.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스타일이랄까.

드르르륵!

진동이 계속해서 울려온다.

시운은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

지난 생에 세정 때문에 위가 뒤집힐 정도로 눈물을 쥐어짠 기억이 있다.

시운에게 세정은 단순히 친구 그 이상의 존재였다.

세정도 그렇게 생각할 진 모르겠지만.

“휴우...”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야! 전화를 왜 이렇게 안 받냐?

청아하면서도 싱긋한 그녀의 목소리.

가슴이 움찔거렸다.

‘전생에 대한 기억은 덮자.’

시운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한다.

“아, 전화했었어?”

- 이틀 동안 내가 전화 몇 통이나 했는지 아냐! 새꺄.

“아, 미안, 미안. 내가 아파서 한동안 핸드폰을 들여다보질 못했어.”

- 아파?

“응.”

시운이 아프다는 말에 윽박지르던 그녀의 톤이 확 바뀌었다.

- 어디가 아픈데?

“그냥 눈이…. 이상하게 아팠어. 그래서 핸드폰은커녕 눈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 바보! 너 군대 제대했다고 피시방 같은데서 게임만 주구장창 했지? 그러니까 눈에 피로가 쌓인 거 아니야!

“게임? 내가?”

- 그래. 게임! 너 게임 중독자잖아. 그놈의 게임은 여자보다도 좋아하던 놈이 새삼스럽게 아닌 척은.

시운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희미하게 떠오른 기억 속 스물세 살의 자신은?

게임에 빠지면 누가 자신의 귓방망이를 확, 후려 갈겨도 게임에 열중하던 놈이었다.

헌터가 되고 싶은데 그건 힘드니까.

헌터가 되어 세상을 누비는 그런 게임으로 대리만족 했었다.

“아 그랬었지.”

- 그랬었지. 라니?

“아아, 그랬지.”

‘난 지금 서른네 살이 아니라, 스물세 살이다. 정신 차리자 이시운, 이 새꺄.’

- 몸 관리 좀 잘해. 바보야……. 어째 제대하고 이 누나한테 연락 한 번 없었냐? 내가 얼마나 서운했는지 알아?

“아, 내가 정신이 없다.”

- 치. 그나저나 병원은 가봤어?

마치 여자친구처럼 걱정해주는 세정이의 다정함.

절로 몸이 노곤해지는 기분이다.

이런 친절하고 세심한 배려심이 세정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응… 갔다 왔어.”

- 의사가 뭐라디?

“그냥 뭐, 며칠 간 푹 쉬고 눈에 안약 넣어주고 그러면 낫는대.

- 다행이네. 너 아프지 않으면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시간 좀 내서 볼까 했는데.

“아쉽네.”

- 몸 다 낫고 그러면 꼭 얼굴 보자.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줄게.

“그래… 보고 싶다.”

- 푸흡. 바보. 여튼 간에 몸 괜찮아지면 연락해. 알았지?

“알았어.”

- 그럼 쉬어라! 누난 이만 일하러 간다.

뚝.

“하아…….”

통화를 마치자마자 시운은 한숨부터 뱉는다.

잠시 그녀에 대한 나날들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려던 찰나, 어느새 내려야 할 정류장에 다다랐다.

집에 도착하니 저녁 여섯 시.

병원에서 처방받아 사온 안약을 눈에 톡톡 넣었다.

아까 그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 뒤로 눈의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고 있다.

‘확실히 이제 눈은 아프지 않다. 근데 시신경이 이상하단 말은 왜 나왔던 걸까?’

쓰나미 같던 통증이 가라앉자 이제야 살 것 같다.

그런데 의사의 육성이 자꾸만 떠오른다.

- 이시운 님의 시신경은 비약적으로 발달한 것 마냥 이상합니다.

그리고 아까 그 지하철 안의 일도 신경이 쓰인다.

‘에이, 신경 끄자. 눈만 안 아프면 된 거지.’

생각을 정리한 시운은 자신의 방 컴퓨터 앞에 앉은 뒤에 컴퓨터 전원 버튼을 살포시 눌렀다.

위이잉-

시신경에 대해 서핑을 해볼 참이었다.

포털 사이트가 익스플로러 화면에 떴고,

시운은 무언가 낯선 느낌을 받았다.

“뭐지?”

포털사이트에 나열된 수많은 시사, 연예, 생활부문 기사들의 수많은 글씨가 한눈에 들어왔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단 일초만에,

그 기사들의 내용이 머릿속에 온전히 박혀 둥둥 떠다니는 것이 아닌가.

시운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포털 사이트에 시신경이라는 단어를 검색했다.

시신경에 대한 정보를 담은 수많은 글자들과 내용들이,

머릿속에 수집되어 읽혀지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인간이 글자를 머리에 넣으려면 한 글자 한 글자 눈을 움직여 내다보고 읽으며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하거늘.

이렇게 수많은 글자들이 단 일 초라는 시간 만에 어떻게 들어온단 말인가.

‘잠깐만. 혹시 글자들을 한 번에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 거라면?’

책상 위 책꽂이로 시선을 옮겼다.

책꽂이에 꽂혀있는 소설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더블 메이징

판타지 장르의 소설책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시운은 그 책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허얼, 이, 이럴 수가!’

시운은 기어코 이 이상한 기분의 원인을 알아내고야 말았다.

2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단 3분 만에 정독해버린 상황을 겪고.

놀랍게도 읽은 책의 내용들은 머릿속 기억회로에 고스란히 박혀있다.

“이 책의 내용은 주인공 김서현이 철인의 육체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 테르산 이라는 명칭의 이계에 떨어지게 되었고, 그 와중에 동료 제인을 만나 …… …… …… …… …… …….”

읽은 지 정확히 3분 만에 200페이지가 넘는 책 줄거리를 읊고 있었다.

자신도 놀라웠다.

책을 설렁설렁 읽은 것이 아니었다.

보통 시운의 책을 일독하는 속도라면?

이 정도 분량은 최소 하루에서 이틀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3분이다. 3분.

‘아까 홈런을 맞춘 것도 이렇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시신경 덕분이야.’

시운은 떠올렸다.

며칠 전 의사가 차트로 보여주었던 자신의 울긋불긋하고 기괴한 자신의 시신경 모양을.

‘이거 잘만 하면 …… 이번 생은 대박이겠는데?’

***

강남의 어느 유명 스튜디오.

천세정은 매끈한 가슴골이 확연히 돋보이는 검은 민소매, 블랙 버튼 스커트, 프레쉬한 데님자켓에 하얀 도화지 같은 캔버스를 신고 포즈를 취했다.

“오케이. 좋아요! 다른 포즈.”

찰-칵!

플래시 세례가 터진다.

백옥 같은 피부.

주먹만 한 얼굴의 세정은 차분하게 덮은 긴 머리칼을 한 번 쓸어내린 뒤.

골반을 틀고 허벅지를 움직여 요염히 포즈를 바꾼다.

뇌쇄적이고 도발적인 그녀의 눈빛.

자연스럽다.

“오케이 좋고! 세정 양, 다음 포즈로~”

디렉터는 카메라 플래시를 연신 터뜨리며, 모델 천세정을 사진에 담았다.

셔터를 두어 번 더 누르고.

디렉터는 흡족히 웃었다.

“좋아! 오늘 컷은 여기까지. 수고했어요! 세정 양.”

“수고하셨습니다.”

천세정은 옷매무새를 고쳐 매고서 스튜디오 세트장에서 꾸벅꾸벅 걸어 나왔다.

유명 명품 브랜드 더블즈의 모델로서 잡지 메인을 장식할 사진을 촬영한 뒤에 디렉터는 사진을 보정하는 스텝에게 다가갔다.

“미소 씨, 어때? 이번 컷도 죽여주지?”

“네. 워낙 세정 씨의 본판이 완벽해서 보정 작업 그렇게 안 들어가도 될 것 같아요.”

“킥킥, 역시.. 좋아! 내 솜씨와 세정 양의 비주얼의 조화지.”

디렉터 동우는 세정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이야~ 촬영한 이 사진들 봐봐. 만족해? 세정 양?”

“괜찮네요….”

“좋아, 좋아. 세정 씨 이제 촬영도 끝났으니까 스텝들하고 다 같이 저녁 식사 하지.”

“아, 전 갈 데가 있어서.”

“뭐?”

동우의 얼굴이 굳어진다.

“중요한 선약이 아니면 좀 빼, 우리 스텝들 고생도 했으니까… 같이 회포나 풀 겸 소주 한잔하자고. 비즈니스가 원래 그런 게 아니겠어? 이렇게 헤어지면 섭하지~”

동우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세정을 채근했다.

회식을 빌미 삼아 한번 들이대볼 생각으로.

‘후…. 또 시작이군.’

본래의 성미 같아선 한 마디 당차게 쏘아붙이고 싶은 세정이었으나, 모델계의 마당발인 동우에게 밉보이면 좋을 게 없기에 애써 참는다.

사실 동우가 세정에게 질척거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예쁘장한 모델들만 보면, 일단 껄떡대고 보는 동우.

이미 이 업계에서 그는 ‘발정수’로 유명하다.

발정수.

발정난 수컷의 줄임말이다.

이미 그에게 당한 모델만 수두룩 할 정도.

“저기 제 기사님이 기다리고 있어서……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세정은 앞머리를 정갈하게 앞으로 넘기고 묵묵히 이 광경을 지켜보는 한 사내에게로 향했다.

“에이! 어이, 세정 씨. 완전 섭섭한데? 회식도 내빼고 갈 만큼 중요한 선약이야?”

세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이러기야? 오늘 세정 양 컷도 스무스하게 나온 데는 내 수고의 결실인데... 너무 서운하게 구네. 무슨 선약인데?”

“가족들과 오랜만에 외식을 하기로 해서요.”

“가족들과는 다음날에도 식사할 수 있잖아. 매일 보는 게 가족인데. 그러지 말고…….”

“죄송합니다.”

“아이, 진짜 잠깐만. 세정 씨!”

세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철벽을 치고 눈길 한번 안 주고 동우를 스쳐 지나간다.

동우는 침을 꿀꺽 삼키며 세정의 걸어가는 뒤태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봤다.

‘썅년. 비싼 척은... 어떻게든 오늘 술 좀 맥이고 한 번 따먹어야 하는데.’

동우는 쫓아가서 세정에게 말을 더 걸려는 찰나.

세정을 기다리는 건장한 사내가 다가와 앞을 턱, 막는다.

사내는 턱을 슬쩍 들어 올리고 눈에 힘을 주어 동우를 바라본다.

세정에게 더 집적대지 말라는 눈빛.

순간 더 다가갈 수 없었다.

“크흠!”

동우는 못마땅히 돌아섰다.

또각. 또각.

슈트 차림의 남성이 구두 굽 소리를 내며 세정에게 걸어왔다.

“아가씨. 회장님께서 오늘 외식하자고 하십니다.”

“아, 오늘은 머리도 복잡하고 집에 가기는 싫네요.”

“저어… 그래도 회장님께서 오랜만에 시간 내셨는데.”

기사는 밖에 주차되어 있는 고급 외제 승용차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녀는 뒷좌석에 탑승한 뒤에 말했다.

“머리도 식힐 겸 서점에나 가고 싶네요. 거기로 가주세요. 어딘지 아시죠~”

***

도착한 곳은 그녀가 항상 향하던 대형 서점.

안에 들어서니 많은 사람들이 책들에 빠져 있다.

그녀는 이리저리 서점 안을 활보하면서 눈에 들어오는 책들을 살폈다.

‘휴우….’

이곳에 와 독서를 할 때만큼은 세상 걱정이 모두 떨쳐나가는 기분을 만끽한다.

그래서 빡빡한 일정 스케줄로 인해 심신이 지칠 때면 항상 찾는 이곳.

‘오늘도 독서 삼매경에 빠져 스트레스나 좀 풀어볼까나?’

책꽂이에 꽂힌 많은 책들을 요리조리 훑다가.

익숙한 누군가를 발견하자 멈칫했다.

“어?”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엉성하게 쭈그려 앉아 옆에 책 몇십 권을 쌓아두고 책을 읽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탁!

세정이 그의 어깨를 툭 치자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남성이 화들짝 놀랐다.

“음?”

“얀마! 이시운! 너 여기서 뭐해?”

드디어 그녀와 그가 시운의 3회차 인생에서 첫 만남을 가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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