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화
여신이지만 나에게는 먼 여자
세정은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어, 세정이?”
시운은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리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본다.
눈부신 세정의 아우라에 잠시 넋이 나간 듯하다.
“그래, 내 얼굴 하루이틀 보냐? 제대하고 처음 보는 거라서 얼굴마저 까먹은 거냐? 자식!”
“근데 여긴 어쩐 일이야?”
시운은 들고 있던 책을 툭, 내려놓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잠깐 머리도 식힐 겸 왔지. 근데 네가 서점에 웬일이야? 기가 찬다.”
“나도 뭐, 독서로 머리 좀 식히고 있었지.”
“참나…. 네가 독서로 머리를 식힌다고? 근데 옆에다가 책을 왜 이렇게 쌓아두고 있는 거야?”
세정은 시운의 옆에 쌓여진 책들을 훑으며 물었다.
“이거 오늘 다 읽었어.”
“뭐~어?”
세정은 코웃음을 픽 치더니 말을 덧붙였다.
“군대에서 남자 선임들한테 다나까 말투만 쓰다가 오랜만에 사회로 나오니 이상한 개그코드가 생겼구나. 너?”
“아니, 여기 있는 책들 오늘 다 읽은 건데…….”
근데 시운은 절대 장난이 아니라는 듯 의연한 눈빛이었다.
세정은 그의 옆에 쌓여있는 책들을 훑었다.
등등등...
모두 헌터에 관한 책들이었다.
그것도 한손으로 잡기 힘들 정도로 두꺼운 책들만 서른네 권.
“이걸 다 읽고 있었다고요? 그래. 이제 갓 제대해서 유머의 감각을 완전히 상실했나보구나. 우리 시운이~”
“……….”
“뭐, 죄다 헌터에 대한 책들이네? 근데 그 옆에 들고 있는 건 뭐야?”
세정은 그가 읽었다는 책 중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 갑자기 이런 분야에 관심이 생겨서 읽고 있었어. 바디시그널이란….”
“사람이 어떤 감정을 느꼈을 때 자동적으로 신체에서 신호를 보내는 그런 심리학적인 글을 담은 내용이냐, 설마?”
“역시… 아는구나. 서울대생 답네.”
“네가 이런 분야에 관심이 생겼다고?”
천세정은 아까부터 진지하게 말하던 시운에 의문이 들었다.
세정은 시운과 초등학교 시절부터 쭉- 알아왔다.
집도 가까웠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중학교까지 같은 반이 된 적도 많았는데….
책은 일절 쳐다보지도 않고 수업시간에 친구들과 잡담만 늘어놓아 매일 선생에게 꾸중만 듣던 녀석이 시운이었다.
‘얘가 군대 갔다 오니 철이 든 건가?’
세정은 시운의 옆에 앉은 뒤에 책 한 권을 펼쳤다.
“여튼 서점에서 이렇게 보니까 좋다. 같이 책이나 보면서 시간이나 때우자.”
“그래, 세정이 너는 일하다 오는 길이야?”
“응…. 오늘 컨셉 화보도 찍고, 커피 브랜드 메인표지에 들어갈 사진까지 찍느라 진땀 좀 뺐다. 죽겠네~ 아휴.”
시운은 일류 명문대학교를 휴학하고 모델 활동을 하고 있는 세정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
그런 그녀 앞에 서면, 겨우 고졸에 이제 갓 군대를 제대한 자신이 비루하고 초라하게 느껴진다.
철썩- 철썩-.
책 페이지를 일 초 만에 휙휙 넘기는 시운을 본 세정.
“뭐하니, 너. 무슨 한 컷짜리 웹툰 읽냐?”
“왜?”
“무슨 책 페이지 글자를 보지도 않고 그렇게 넘겨? 역시~ 너 책 읽으려고 온 게 아니구나. 혹시 가출이라도 했냐? 그래서 여기에 짱박혀 있는 거야?”
세정이 이상하게 볼만도 했다.
‘솔직하게 내가 책 한 권을 몇 분만에 싹 읽어버린 다는 걸 말해봤자 믿지도 않겠지.’
“그냥… 난 이렇게 읽어.”
“그게 책을 읽는 거냐?”
철썩-철썩.
시운은 세정이 그러건 말건 책장을 시계의 초침이 돌아가는 속도로 넘긴다.
“에휴...”
천세정은 그런 시운을 보며 탄식을 뱉고는 자신이 들고 있던 책을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운은 바디 시그널을 다룬 묵직한 책장을 툭, 덮었다.
‘이 바디시그널이란 거 굉장히 흥미롭다. 게다가 난 이제 남들이 볼 수 없는 미세한 것까지 볼 수 있으니까 이걸 잘만 활용한다면 대박이야…. 가령 바디 시그널에 나오는 부분 중에 사람이 어떤 감정을 느끼면 어떤 신체 신호를 보이는지 파악한 뒤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그 사람의 동작을 캐치한다면 난 지금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무슨 감정을 품고 있는지 읽어낼 수 있어….’
톡. 톡. 톡.
세정은 생각에 깊게 잠겨있는 시운의 어깨를 검지로 두드렸다.
“이시운. 무슨 생각에 그렇게 잠겨있는 거야?”
“아, 아니야.”
“얘가 오늘따라 참 이상해. 아 잠깐….”
말끝을 흐린 세정은 검지로 자신의 턱을 톡톡 두드리면서 읽을 만한 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책꽂이에서 책 한 권을 슥 꺼냈다.
“이시운.”
“응.”
“너 방금 누나한테 농담한 게 아니라면 이 책 방금 그 속도로 읽어봐.”
“뭐?”
그녀가 시운 앞에 떡하니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더 잡.
알록달록한 표지 위에 쓰여있는 책 제목을 본 시운이 물었다.
“이건 무슨 책이야? 더 잡(The Job)? 취업 난 뭐 그런 거 다룬 책인가?”
“밀리언셀러야. 그 유명한 소설가 더글라스 케네디가 쓴 소설.”
“……….”
세정은 자신이 건넨 책을 시운이 받지 않자, 그의 앞에서 책을 요리조리 흔들었다.
“역시 거짓말이었어. 못 읽겠지? 역시 책 하고 너하곤 안 어울린다니까…….”
조소가 섞인 세정의 웃음에 시운은 책을 살포시 건네받았다.
“만약 내가 이 책을 5분 만에 읽는다면?”
“5분? 소설을 쓰세요.”
“5분 안에 다 읽으면 나중에 네가 저녁 사기. 콜?”
“뭐,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내가 이 책 줄거리 다 아니까. 다 읽고 줄거리 나한테 자세하게 말해봐. 물론 못 읽겠지만, 풉.”
시운은 진지한 눈빛으로 세정을 훑더니 자신의 검지를 입에 대었다.
나는 책을 읽을 테니 넌 조용히 해라.
뭐 이런 제스처였다.
세정은 어이가 없어서 킥, 웃었다.
“그래, 그래. 읽어봐라~ 근데 그 책 300페이지가 넘는 걸로 기억하는데, 잘도 5분 안에 읽겠다.”
펄럭.
시운은 말없이 책장을 펼쳤다.
‘소설이군….’
세정은 왼쪽 손목에 두른 에르메스 시계를 슬쩍 바라봤다.
“지금이 6시 35분이야. 40분까지 읽고 줄거리를 내가 납득할 만큼 말하면 인정. 아니라면 넌 저녁은 없어.”
철썩-철썩-
시운은 미친 듯이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세정은 멀뚱히 짝다리를 짚고서 그의 모습을 관찰했다.
‘뭐야? 이 녀석. 군대 갔다 오더니 장난도 이렇게 진지하게 치나? 근데 표정은 진짜 진지한데……. 이런 모습 처음이야.’
툭-
책장을 덮은 시운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다 읽었어.”
“뭐? 다 읽었다고?”
세정은 곧장 시간을 살폈다.
“지금 39분이야. 겨우 4분 지났다구. 그래, 뭐. 장난이겠지만 누나가 속는 셈 치고 들어주지. 줄거리 하나하나 읊어봐. 만약 책 표지에 적혀있는 시놉시스 달랑 읽고 말하는 거면 인정 못 해.”
세정은 시운이 편법을 쓰지 못하게 책을 휙 낚아챘다.
“해봐. 해보라고, 바보야.”
고개를 끄덕인 시운은 침을 한 번 삼키고 말했다.
“이거 재밌네. 묘한 반전 스릴러라 재밌게 읽었어. 1인칭 소설이며, 주인공 네드는 컴퓨월드라는 회사의 본부장이고.. 여기서 네드라는 남자는… … … … … ….”
시운은 30초 동안 연설이라도 하듯 책의 줄거리를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동공이 커진 세정은 자그맣게 벌어진 입을 손으로 막으며 경악했다.
“결말은, 뒤통수 제대로 때린! 제리라는 배신자 놈을 처절히 응징하면서 주인공 네드는 통쾌한 복수에 성공하게 되지!”
“아아…….”
세정이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운이 낭독한 줄거리는 더 잡이라는 소설의 줄거리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정말 방금 책을 일독한 사람처럼 이 방대한 페이지의 줄거리를 무려 30초가량 논리정연하게 토해냈기에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다.
“놀랐어?”
“뭐, 뭐야? 정말 다 읽은 거야? 아니지?”
“다 읽었지. 방금 확인했잖아.”
“말도 안 돼. 혹시 줄거리를 알고 있던 책 아니야?”
세정은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다.
“저녁 사기 내기는 이렇게 내가 이겼네요.”
드르륵.
시운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핸드폰에서 진동소리가 들렸다.
시운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어, 시운아. 어디야?
시운의 엄마였다.
“나 지금 밖인데. 왜 엄마?”
- 또 어디를 돌아 다니니? 지금 집으로 들어와. 큰 이모 하고 네 사촌들 집으로 왔어.
“뭐?”
시운은 눈살을 확 찌푸렸다.
“그런 이야기 없었잖아!”
- 네가 들어오기 싫어할 거 알아. 그래도 우리 보려고 어른들 오셨는데 얼굴은 봐야지.
“나 밖에서 할 일 있단 말이야.”
- 네가 밖에서 하는 일이 뭐 있어? 잠자코 들어와.
“하아…….”
전화를 신경질적으로 끊어버린 시운은 인상을 구기고 머리를 박박 긁었다.
‘또 그 잘나디 잘난 인간들의 얼굴을 봐야 한다니. 젠장할!’
침통하기 그지없었다.
보기만 하면 항상 들들볶아대는 사촌들.
그들과 마주한다는 게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시운이었기에.
“너 표정이 왜 그래? 누구 전화길래…….”
“반가웠다, 세정아. 나 급히 가봐야 할 것 같아.”
“어? 급한 일인가 보네.”
“나중에 연락할게.”
“무슨 일인데?”
“가야겠다. 저녁내기 잊지 마.”
“으응.”
시운은 신경질적으로 몸을 툭, 털고 일어나더니 책 한 권을 집고서 출구 쪽으로 향했다.
세정은 멍한 눈초리로 책 한 권을 사들고 나가는 시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설마. 원래 줄거리를 알고 있었던 걸 거야.’
***
자신의 집 현관 앞에 도착한 시운.
시운은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고개부터 푹 떨궜다.
“휴우…”
들어가기가 꺼려졌다.
망할 인간들과 또 겸상을 해야 하는게.
내키지 않았지만 초인종을 눌렀다.
- 시운이니?
“응, 엄마 나야.”
문이 덜컥- 열리자,
지글거리는 고기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시운은 굳은 얼굴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 겸상을 하고 있는 친척들을 향해 목례한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래, 오랜만이다. 너희 사촌 형들하고 누나들 왔어. 이리 와서 밥 먹어라.”
큰 이모부가 냉랭한 목소리로 시운을 맞았다.
“네.”
밥맛이 없었지만 일단 자리에 앉았다.
커다란 상에는 한우 갈비가 불판 위에 노릇노릇 구워져 있고 각종 밑반찬들이 그 옆을 수놓고 있다.
“잘 지냈냐?”
시운의 옆에서 밥을 먹던 사촌 형 김태석이 시운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으며 물었다.
“예. 형도 잘 지냈어요?”
“나야 잘 지내지. 근데 어디 갔다 오냐?”
“그냥 밖에 잠깐 나갔다 왔어요.”
“또 놀다가 왔겠지. 인마. 넌 대학 안 가냐?”
“…….”
역시 시작이다.
언제나 그래왔다. 이 친척이라는 인간 놈들은.
태석이 말도 못하는 시운을 기분나쁘게 아래 위로 훑며 다시 말한다.
“정신줄 좀 단단히 챙기라고! 니가 나이가 몇이냐. 이제 정신 좀 차리고 살아야지 않겠냐.”
표정관리가 좀처럼 되지 않았다.
김태석.
대형로펌 변호사로 재직 중인 그는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서 싸늘하게 웃고 있는 태석의 친형 태훈은 억대연봉의 대기업 엘리트 사원.
그 맞은편에 앉은 사촌 이혜원은 대학병원 의사이며, 또 그 옆에 있는 대환은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명문대학교의 학생이다.
이런 이들 앞에서 어깨부터 축 늘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태석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시운이 못마땅한지 혀를 소주를 홀짝 들이켰다.
“인마. 형이 너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야. 아니꼽게 생각하지 말고 …….”
태석이 잠시, 시운을 위아래로 훑더니 말을 이었다.
“고졸이면 지금 당장 기술이라도 배울 생각을 해. 부모님 생각해서라도 정신 좀 챙기라 이거야.”
“예.”
시운은 부끄러운 마음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태석을 비롯한 사촌들은 이런 시운의 반응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시운아. 태석이 형아가 인생에 조언을 해 주잖아. 뭐 그리 건성으로 대답 하냐? 하이고….”
태석의 어머니이자 시운의 큰 이모가 가세해 핀잔을 줬다.
“대학 가야죠.”
시운은 덤덤히 말했다.
“어떻게? 공부도 안 하고 집에 처박혀서 밥이나 축 내고 똥이나 쌀 줄 아는 네가? 푸하하! 대학은 아무나 가는 줄 아나보네?”
이번엔 태석이 아니라 혜원이 껴들어 물어왔다.
더 이상은 못 참을 것 같다.
한마디 쏘아주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