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만 3회차-7화 (7/278)

제 7화

시험을 위한 길거리 여자 헌팅 (3)

“남자친구 있는 여자에게 딱히 관심이 없어서.”

시운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대로 걸어가려 했다.

그러자 싸늘한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이익! 잠깐 거기 서봐!”

“즐거웠어.”

“이게 날 갖고 놀아?”

타타타탁!

갑작스레 뛰어와 시운을 낚아챈 이지현은 잔뜩 씩씩거리며 육두문자를 뱉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다소 어이없는 상황일 수도 있으리라.

먼저 자신을 꼬신 건 시운이면서 즉석에서 만난 지 몇 시간 만에 헤어지잔 통보를 받은 이 상황이.

순간.

그녀의 턱 근육이 움찔거리는 모습이 현미경으로 보듯 세세히 느껴졌다.

턱 근육이 움직였고, 그녀가 입을 앙 다무는 광경까지 슬로우 모션으로 눈에 들어오자 생각한다.

‘사람은 감정에 치우쳐 돌발적인 행동을 할 때 턱에 힘을 주게 되어있지. 그것을 토대로 보자면, 입을 꽉 다문다는 것은 나에게 손찌검을 하려는 것이다. 사람이 손이나 발로 무언가를 내려칠 때, 자신도 모르게 입을 꽉 다물고 어금니를 무는 습관.’

휘익.

시운은 잽싸게 몸을 틀었다.

그러자 그녀가 시운의 얼굴을 표적으로 휘두른 손바닥이 닿지 못하고.

부-웅! 빈 허공을 요란히 갈랐다. 그 여파로 그녀의 몸은 휘청거렸다.

시운의 예상대로였다.

“피, 피했어?”

“이제 그만 좀 가지?”

살기를 내담아 말한 시운은 돌아서서 빠르게 걸어갔다.

등 뒤로 씩씩거리며 분하다는 듯 거친 그녀의 숨소리가 들려왔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야…. 야!! 길거리에서 여자나 꼬시는 호빠나 다닐 거 같은 자식이! 내가 너같은 새끼랑 말 섞은 내가 병신이다!!”

아랑곳 않고 걸어가는 시운의 입가에 미소가 슬쩍 번지기 시작했다.

‘바디 시그널 이론을 응용하여 사람 마음을 읽는 것을 성공했다.’

어차피 시운은 여자를 꼬시려는 목적으로 헌팅을 한 것이 아니다.

반드시 실험을 해야할 것을 했을 뿐.

미안함 따윈 사실 없다.

남친이 있으면서 다른 남자에 홀리는 여자에게 안겨준 이 정도의 수모는,

어쩌면 그녀에게 인과응보 였다.

이 능력을 앞으로 활용한다면?

앞으로 시운의 누울 자리가 확실히 편해지리라.

***

다음날.

딩동, 딩동.

초인종이 연신 울렸다.

“누구세요?”

“…….”

누구냐는 말에 대답이 없다.

지금은 오후 세 시. 이 시간에 집에 올 사람이 없는데.

시운은 현관의 외시경을 통해 밖을 내다본 시운은 순간 흠칫 놀랐다.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천세정.

“나다! 내가 왔으니 문을 조속히 열기 바란다.”

“천세정? 네가 왜 이 시간에…?”

“일단 문부터 열어!”

덜커덕.

빗장을 풀고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천세정이 씩, 웃으며 오른손을 설렁설렁 흔든다.

“역시 이 시간에 집에 있었구만.”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네 얼굴 보려고 왔지. 아주머니 안 계시지?”

시운은 세정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가볍고 후줄근한 옷차림. 그러나 수려한 얼굴. 시원시원한 몸매 덕택에 편안한 스타일의 옷도 빛나 보이는 착시현상이 일었다.

보면 절로 시선이 꽂힐 만큼 커다란 가슴. 그 밑으로 매끈하게 뻗은 허리.

아치 형태의 섹시한 골반 밑으로 솟아있는 아찔한 애플 힙.

‘하아….’

순간 침이 꿀꺽 넘어갔다.

어렸을 적부터 유독 친한 사이라지만.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된다.

이성적인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야! 뭘 그리 멀뚱히 보고 있어?”

“아, 아니다. 근데 내가 없으면 어쩔 줄 알고 이렇게 왔어? 설마 오늘 저번에 내기했던 저녁 사려고?”

“뭐, 저녁도 사고, 그냥 놀려고 온 거야. 그나저나 아주머니는 안 계셔? 오랜만에 인사나 드려야 되는데.”

“엄마? 회사 가셨지.”

천세정은 목선이 훤히 드러나도록 묶은 머리를 흔들며 소파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자기 집인 것 마냥 떡하니 드러누웠다.

“아아… 너네 집에 진짜 오랜만에 와보네! 간만이야, 진짜.”

“그러게.”

“인마. 손님이 왔는데……. 커피라도 하나 안 내 오냐? 날씨가 워낙에 더워서 목이 타들어갈 지경이야.”

“알겠어. 냉커피?”

“당근이지. 이 더위에 뜨거운 커피 먹으리?”

세정은 소파에 덩그러니 눕더니 다리를 꼬았다.

삑삑.

소파에 드러누운 채 에어컨 리모컨을 집어 들어 버튼을 눌렀다.

위이이잉-

거실에 설치된 에어컨이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시원한 바람이 흘러나왔다.

“아이고…… 좋다.”

자기 집인 것 마냥 구는 세정을 보며 시운은 어이없어서 피식 웃었다.

“여기가 너희 집이냐?”

“뭐, 우리 집이나 다름없지. 기억 안 나냐. 너 군입대하기 전만 해도 거의 매일 놀러오다시피 왔는데? 그리고 우리 어렸을 적에는 뭐… 이곳을 달고 살았지, 뭣보다 너희 어머니가 날 그렇게 예뻐해 주셨는데에~”

주방으로 가서 미니스푼으로 커피를 타던 시운은 세정의 말을 들으니 옛 생각이 떠올랐다.

거리낌 없이 세정과 티격태격하며 지내던 유년기 시절.

‘그땐 마냥 행복했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고… 그저 순간을 즐기며 세상 모든 만물들이 흥미롭고 궁금하던 그 시절.

스물세 살.

지금의 나이도 좋지만 시운은 조금 더 어렸을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고민 없이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지금도 난 어려. 앞으로 행복하게 살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하자.’

시운은 머리에 그려지는 어린 나날의 기억을 애써 떨친다.

달그락-

시운이 젓는 미니스푼에 의해 얼음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냉커피 두 잔을 탄 시운은 양손으로 컵 받침대를 집은 뒤에 그녀에게 다가갔다.

꽉 끼는 하얀 면 티 주위로 보이는 세정의 뽀얀 살결을 보자 시운의 머릿속에 또다시 심란한 생각이 드려고 한다.

‘지금 세정이는 내 친한 친구야.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자…….’

시운은 슬며시 고개를 젓고 상념을 접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냉커피도 타 올 줄 아시고…… 우리 시운이에게 감사해서 이 누나가 절이라도 해야 겠습디다?”

세정이 허리를 일으키며 커피를 받아들더니 오른손으로 시운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야! 뭐하는 거야.”

시운이 부끄러워서 몸을 뒤로 뺐다.

“뭐가? 귀여워서 엉덩이 좀 주물렀다. 꼽냐?”

천세정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더 다가오려 하자 시운은 손사래를 쳤다.

“야, 야. 커피나 마셔.”

“흐흐흐…. 녀석. 부끄럼이라도 타는 거야?”

“아닌데.”

“아니긴……. 얼굴이 시뻘개졌어, 너.”

“뭐래.”

시운은 퉁명스레 말했다.

이런 세정의 털털한 성격을 모르는 건 아니다. 단지 오랜만에 이렇게 웃고 있는 세정을 대면하고 있음에 적응이 되지 않는다.

두 번째 생.

즉, 전생의 그날이 어렴풋이 머리 위로 떠올랐다.

가슴이 사무치도록 아린 그 기억의 파편을 꺼내자 눈시울이 뜨겁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

전생의 어느 날.

창문 밖 너머로 하늘에서 가랑비가 내려와 세상을 촉촉하게 적시는 날이었다.

톡톡 거리며 땅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마치 선율처럼 들려온다.

잊고 지내던 감성이 지그시 내 가슴을 건드리는 날.

난 오늘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말끔한 스타일로 무장했다.

오늘 역시 여느 때만큼 예쁘고 희연 세정의 얼굴을 바라봤다.

근데 오늘따라 세정이의 얼굴이 수척해.

무슨 일이라도 있나?

평소와는 다르게 말수도 적고 무언가 뜸을 들이는 듯한 모습에 난 물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없어?”

“시운아.”

그녀는 무언가 체념한 듯 나직이 이름을 부른다.

“응?”

“나…….”

숨김없고 털털한 세정이 다른 때와는 다르게 조신하게 몸을 구부리고 냅킨 하나를 손으로 꼼지락 거리며 운을 떼지 못한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설마 세정이가 나에게 고백을 하려는 걸까?

아직 난 세정이에게 고백조차 하지 못했어.

헌터도 못 되었고, 난 번듯한 직장 하나 없는 새끼거든.

그래, 나 존나게 병신새끼야.

근데 나도 남자라고.

오늘은 반드시.

너에게 내 마음을 전하겠다.

피어오르는 한 낱의 소망을 가슴에 누르고 난 물었다.

“오늘따라 너 이상한 거 알고 있냐?”

“시운아.”

나를 부르는 그녀의 표정이 무거워진다.

“응.”

“나… 아이를 가지게 됐어.”

“뭐, 뭐라고?!”

말을 듣는 순간.

간만의 빗소리에 촉촉해졌던 내 감성이 찢기고 눈으로 보이는 만물이 처절하게 느껴졌다.

………….

잘못 들은 거야.

그래,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그녀는 말을 잇는다.

“이제 애 엄마가 돼. 내 입으로 속도위반이라고 말하기 쑥스럽고 민망하지만…… 그 누구보다 절친인 너에게 미리 말해둬야 할 거 같아서.”

확인사살!

이제는 우주가 폭발하는 기분이 일었다.

너무도 경악스러워 그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믿고 싶지 않다.

이 상황이 흔히 ‘몰래카메라’ 였으면 하는 소망이다.

그러나 내 앞에 앉은 세정이의 얼굴은 너무도 진지하다.

이미 무너져버린 음성으로 난 말했다.

“무슨 소리냐. 너 남자친구 있다고 나한테 말 한 번도 한 적 없잖아.”

“그게…….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야. 게다가 그 사람은 공인이고. 그래서 함부로 말하지 못했어. 배가 더 불러오기 전에 결혼식은 올리려고. 축하해 줄래? 민망하지만…….”

내가 지금 너를

어떻게

축하해 주겠어?

있잖아.

비록 지금은 친구지만 준비하고 있는 공무원만 합격 하게 되면.

친구가 아닌 이성으로 다가가 고백할 것이라고 난 이미 결심하고 있었다.

오늘 그런 내 속내를 털어놓으려 했고!

그렇게… 너 때문이라도 더욱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공부에 매진하고 했는데.

이제 내 목소리는 증오심으로 바뀌었다.

“나 말이다.”

“응.”

“이런 비루한 나라도 할말은 해야겠다. 안 하면 속이 뒤집어 질 것 같으니까. 나 너 좋아한다, 아니 존나 많이 좋아한다, 병신같이도.”

“………어?”

세정이의 눈이 커졌다.

어차피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다.

내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이젠 모든 게 끝나고 말았네. 네가 날 오늘 이후로 안 본다고 해도 말해야 했다. 나는 천세정. 너를 진짜 너무너무 사랑한다. 미칠 정도로.”

결국 속내를 이렇게 뱉어내고야 말았다.

이렇게 처절한 상황에 임박해서야.

결국 난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그녀와 난 영원한 이별을 맞았다.

그 이후 몇 년간을 술독에 빠져 지냈다.

하루하루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힘이 없었다.

공무원 시험이고 뭐고….

내 가슴 전체를 차지하고 있던 그녀가 떠나가니 내 눈에 뵈는 게 없었다.

헌터 시험에 계속 실패했을 때 보다도 절망에 빠졌었다.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흉측한 몰골로 일상을 보냈고.

어느새 나이는 서른네 살이 훌쩍 되어있었다.

그리고 난 오매불망으로 가득한 삶을 이제 그만 접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죽자. 뒈져버리자, 씨팔! 전생에서 그랬듯이, 어쩌면 다시 스물세 살의 그 날로 돌아갈 수도 있잖아.’

결국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단념하고 집 밖의 택시를 불렀다.

그리고 택시기사에게 마포대교로 가달라고 나직이 말하며.

***

“시운아.”

“아, 응?!”

회상에 빠져 있다가 자신을 부르는 한 마디에 덜컥 시운이 정신이 들었다.

“뭘 그렇게 멍 때리고 있어?”

“음, 아니야.”

“표정이 굉장히 안 좋았어. 내가 물끄러미 네 표정을 관찰했거든? 근데 너 3분이나 그러고 있었던 거 알아?”

“아…. 내가 그랬나.”

“표정이 진짜 암울해 보였어.”

“그랬나.”

시운이 진땀을 뺀다.

“혹시 고민이라도 있냐? 있으면 이 누나한테 말해봐. 속 시원하게 해결해줄게.”

시운은 고개를 저었다.

“고민 같은 거 없어.”

“정말이야?”

끄덕인다.

“안 좋은 일 있는 거 아니지?”

“응. 걱정해줘서 고마워.”

“고맙기는……. 힘든 일 있을 때는 서로 의지하자.”

“힘든 일 없어. 아… 그나저나 요즘 하고 있는 모델 일은 어때?”

“뭐, 할만 해.”

시운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바디시그널을 살폈다.

순간적으로 경직된 얼굴.

일반인이라면 포착해낼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한 미간의 일그러짐.

아무래도 하고 있는 모델 일이 고된 듯 했다.

“복학은 언제 하게?”

“글쎄…… 몇 달 후에?”

“서울대학교 졸업하면…… 정말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 네가 얼굴이 빠지냐, 그렇다고 성격이 모났냐. 모델 일 하는 게 힘들면 얼른 졸업하고 대기업으로 취직해. 너 정도면 그 어느 기업에서라도 뽑아줄걸.”

“완벽하긴……. 참나. 그리고 모델 일 안 힘들다니까?”

세정이 울대에 힘을 주어 말했다.

힘들어도 안 힘든 척, 괜찮은 척 하는 것이 세정의 성향임을 잘 알고 있는 시운이다.

“세정아. 근데, 나 너한테 할 말이 있다.”

“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