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화
천세정 그녀를... (2)
천세정.
가지기 힘든 그 이름.
생각만 하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 이름.
“……….”
해가 저물어가고 점점 어둑해지는 하바나 초원에 말없이 서있던 시운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떠올렸다.
그녀와 만났던 어제를.
***
“후우….”
시운은 빠른 걸음으로 인근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를 만날 때면 언제나 빨라지는 걸음.
내일은 드디어 이계로 진입하여 헌터생활을 시작하는 날.
이제 헌터가 된 나를 보면 그녀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에게 처음으로 무슨 말을 해줄까?
갖가지 상념이 뇌리에 빙글빙글 돈다.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시운은 약속장소인 삼성역 1번 출구로 나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어느새 날은 완전히 저물어져 있다.
어두운 하늘 속으로 구름의 형태가 시운의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일반인이라면 야밤에 보이지도 않을 구름의 움직임과 형태부터 세세한 색까지 눈 안에 들어옴에.
‘먹구름이 살짝 끼어있군…. 오늘 비가 오겠는데.’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즈음 누군가가 어깨를 탁 치는 느낌에 뒤를 돌아봤다.
“뭐하냐. 어딜 보는 거야? 하늘?”
세정이었다.
“응. 근데 오늘 비 올 것 같다.”
“기상청에는 그런 소식 없었는데….”
“그런가.”
시운은 고개를 내리고 세정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녀의 얼굴이 수척하다.
시운은 눈으로 세정의 혈색을 살피려고 하는데 세정이 시운의 얼굴을 꼬집는다.
“기가 다 빨린 표정이네. 그동안 얼마나 열공을 했으면….”
“조금 고생했지.”
“나 사실 엄~청 놀랐다?”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내가 티비에 나온 것 봤어?”
“당근, 봤지! …사실 아직까지 안 믿겨. 으이구, 대견해! 이제 헌터님이라 불러드려야 되나?”
세정이 시운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이 썩 좋았다.
‘……음?’
그런데 오늘따라 세정의 얼굴이 야위어 보인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세정아….”
“응?”
“얼굴이 며칠 굶은 사람 같아.”
“다이어트 한다. 바보야.”
바디시그널을 자연스레 살핀다.
‘근심으로 가득한데?’
동공이 열려있고 눈 밑이 붉어져 있는데다 혈색도 안 좋다.
퀭한 세정의 얼굴을 보자 걱정이 치민다.
“무슨 일 있어, 세정아?”
“일은 무슨…. 야! 밥 먹으러 가자. 저번에 저녁 사주기로 한 거 이제야 사주네. 네가 헌터가 됐는데 누나가 뭔들 못 사주리? 뭐 먹을까? 레스토랑 갈까?”
급하게 말을 돌린다.
분명 근심에 대한 이유가 있으리라.
항상 남의 고민은 자기 일처럼 들어주면서 정작 자기 일은 툭 터놓지 못하는 세정.
식사를 하면서 차차 물어보기로 하고 일단 걷는다.
세정과 나란히 길가를 걸으면서 삼성동의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부산한 차들 속에 걸어가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표정. 그 주위로 줄을 잇는 음식점.
“레스토랑 굳이 안 가도 돼. 뭘 그렇게 좋은 걸 사주려고.”
“너 살 좀 찌워야 돼.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줄게.”
세정이 눈웃음을 발그레 지으며 시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원래 누군가가 머리를 만지면 마치 애완견이 된 기분이라 싫은데.
유독 세정의 손길은 익숙하고 또 나쁘지 않다.
시운은 지그시 세정을 바라본다.
다시 옛날의 그 감정이 꽃피려고 한다.
‘완벽한 외모보다도 이런 자상하고 매력적인 면에 내가 빠진거 였지.’
어느 건물 앞에 도착했다.
“여기야. 들어가자.”
세정이 시운의 어깨를 살포시 떠밀었다.
그녀와 함께 찾은 어느 고급 프렌치 레스토랑.
야경이 만연히 비치는 창가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종업원에게 세정은 익숙히 음식을 이것저것 주문한다.
“세정아. 난 그냥 삼겹살에 소주 한 잔만 사줘도 괜찮은데 뭘 이런 곳까지 와서 사주냐?”
“맛있는 거 사줘도 이래…. 사주는 사람 마음이거든.”
“고맙게 먹을게. 나중에 내가 더 맛있고 비싼 데서 살게.”
“엄연히 저녁내기 졌으니까 사주는 거야. 다음에 안 사줘도 돼요.”
“이런 걸 바라려고 내기한 건 아니었는데.”
“그냥 조용히 드시면 됩니다, 근데 시운아 누나는 아직 믿기지가 않아.”
“믿기지가 않는다고?”
세정은 고개를 힘차게 주억였다.
“완전 꿈 같아. 네가 헌터가 됐다는 게…. 진짜 그 소식 듣고 며칠을 벙쪘다니깐!”
하긴 그럴만도 했다.
공부라면 치를 떨던 시운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세정이니까.
‘근데 호감의 눈빛이 아니야.’
시운은 세정을 응시했다.
그녀는 아직 놀람이 풀리지 않는다는 바디시그널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시운을 바라보는 그녀의 바디시그널에서 호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의사, 검사, 판사 보다 위, 사회적 신망이 두터운 직업인 헌터. 헌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 여자들이 혹 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일상다반사.
그러나 세정에게 그런 반응의 바디시그널은 없었다.
‘난 너한테 아직, 그저 친구구나.’
냅킨, 포크 스테이크 나이프와 물이 담겨있는 글라스만 있던 테이블에 음식이 하나둘 씩 세팅되기 시작했다.
맛있는 크림소스가 버무려진 파스타를 비롯해서 이 프렌치 레스토랑만의 스테이크까지.
시운의 눈이 번뜩 뜨인다!
마침 배가 고프기야 고팠다. 그런데 음식보다 그녀가 신경 쓰인다.
수척한 세정이 걱정되어 그녀의 눈을 바라본다.
세정은 초점 없는 눈으로 음식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더 지체할 수가 없다.
세정이의 근심을 덜어주고 싶으니까.
“너 고민 있잖아. 뭐야?”
시운이 진지하게 물었다.
세정은 입술을 꾹 깨물고 얼굴을 도리도리 내젓는다.
“너랑 나랑 몇 년 지기 친구인데 내가 널 모르겠냐? 지금 네 표정에 다 써있거든.”
“휴우….”
세정은 한숨을 내쉬더니, 힘없는 손길로 냅킨 위의 포크를 집었다.
집은 포크를 천천히 파스타를 향해 내젓다가 포크를 툭, 떨어뜨리고 얼굴을 손바닥에 파묻었다.
그녀의 상체가 흔들릴 만큼 코를 훌쩍거리며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숨죽이며 울기 시작했다.
시운 또한 그녀의 반응에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나이프를 냅킨 위에 슬쩍 내려놓았다.
“이 나이에 가출하면 참 웃기겠지…?”
“뭐? 가출?”
시운이 반문했다.
“응….”
“집에 무슨 일이 있구나.”
훌쩍.
세정은 티슈로 눈물을 살짝 훔치고서, 오른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하면서 시선을 공중 위로 던졌다.
아무래도 시운에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듯하다.
“뭔데. 이야기 해. 우리가 좀 친한 친구냐?”
“아빠가 말이야.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모두 접고 자기 회사로 들어오래. 회사에 들어와서 몇 년 만 일하면 좋은 직위 준다고 하면서. 그럴 맘 없으면 짐 싸고 집 나갈 준비하래….”
세정은 이마를 짚으며 여전히 부채질을 했다.
그러더니.
“아…. 음식 놔두고 이게 뭔 주책이야. 너 밥 사 먹이려고 부른 건데. 배고프지? 어여 먹어.”
“난 괜찮아. 그보다도 그것 때문에 한동안 맘고생 많이 했구나….”
이상하게 시운의 마음도 쓰라렸다.
친구가 눈물을 흘리니 덩달아 마음이 쓰라린 걸까.
자신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세정의 눈물을 보고 가슴이 아팠었다.
그때는, 세정이 자신을 걱정해서 흘려주는 고마운 눈물이었지만,
지금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도 못하고 괴로워 흘리는 눈물이었기에 가슴이 더 아팠다.
마치 내 일처럼 느껴진다.
세정은 눈물을 마저 닦더니 종업원을 부르고 와인 한 병을 시켰다.
“술 한 잔 해야겠어. 같이 마셔줄 거지?”
“당연하지. 안 그래도 나도 술이 고팠는데….”
와인을 한 잔 하면서 음식이 식기 전에 시운과 세정은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한 입 입에 베어 물었다.
“맛있다아~”
시운이 천연덕스레 말하니 세정이 씩 웃는다.
“시운이, 많이 먹어, 그리고 진심으로 헌터가 된 거 축하해.”
“고맙다.”
“그래….”
다시 와인 잔을 부딪쳐 건배를 하고 쭉 들이킨다.
와인을 몇 잔 먹으니 세정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라 있다.
“난 모델 일을 계속 해나가고 싶어. 이 일을 하는 순간만큼은 정말 내가 사는 느낌이랄까? 그런 생각이 들어. 근데 왜 우리 아버지는 이해해주지 않는 걸까.”
“너희 아버지도 아버지만의 입장이 있으시겠지…. 본인의 회사에 너를 입사시켜서 좋은 직위를 달아주고 경영에 보탬이 되게 하려는….”
세정의 얼굴이 굳어진다.
시운이 말을 잇는다.
“넌 스펙도 좋고 워낙 뭐든지 잘하는 아이니까, 너희 회사에 고위직으로 빠르게 입사해도 어떤 직원도 너를 낙하산이라고 무시하지 못할 거야.”
“그런 걸까…? 근데 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
세정이 또 고개를 파묻었다.
시운은 그녀의 글라스에 와인을 부드럽게 따라줬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은 것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야…. 근데 말이야. 그 소망을 품은 사람 중에 그 소망을 이룬 사람은 몇이나 될까? 꿈과 소망은 엄연히 다르다고 봐.”
시운은 어쩌면 냉철하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세정의 나이는 이제 스물세 살.
하지만 시운은 여러 번의 회귀 끝에 총 35년의 인생을 살아봤기에 그녀에게 인생에 대한 충고를 해줄 수 있었다.
희망적인 충고 보다는 쓴 충고.
그것이 필요할 때가 반드시 있다.
“천세정. 많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 그래도 정말 생각이 바뀌지 않고 그 생각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하고 싶은 걸 해.”
시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세정의 죽어있던 눈빛이 일순간 빛났다.
“고마워.”
“고맙기는…. 매일 내 뒤치다꺼리에 신경 써주고 고민 매일 들어주고 그런 건 넌데.”
“우리 시운이도 이제 다 컸네?”
“다 큰지가 언젠데…. 멍청아.”
시운은 속으로 흐뭇했다.
전생이나 그 전의 생이나 세정에게 득 되는 말은 한 번도 못 해주고 그저 사랑만 했었다.
이번 생만큼은 세정에게 신경 쓰고 잘 하리라.
‘난 그럴만한 능력을 얻었으니까.’
어느새 포만감이 불러왔다.
시운의 일상에서는 좀처럼 먹기 힘든 음식이 뱃속으로 들어가자 기분좋은 포만감이 든다.
“네가 방금 해줬던 말들 잘 새겨들을게.”
세정이 말하고서 와인 잔을 들어 기울인 뒤 와인을 음미한다.
“잘 할 거야. 넌 뭘 해도 될 애니까.”
지금 쯤 몇 시나 되었을까.
시간이 궁금해서 시운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PM 11:14]
핸드폰을 바라보는 시운을 본 세정이 물었다.
“바빠?”
“아니야…. 몇 시인지 보려고 봤어.”
“그동안 헌터 시험 공부한다고 많이 힘들었지?”
“하, 진짜 죽을 뻔 했지~”
시운이 한탄을 했다.
사실, 속독으로 남들보다 편하고 쉽게 공부했으나.
투정 좀 부리고 싶었다.
“대단해, 우리 시운이. 만점으로 그 시험을 통과하다니 진짜, 진짜! 놀랐어. 대단해, 진짜 다시 봤다.”
“훗, 뭐 그냥 좀 열심히 했어.”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칭찬이 너무나 달달하게 느껴진다.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었다.
내 앞에 있는 이 여자에게 말이다.
주륵-.
세정은 빈 글라스에 와인을 따르더니 다시 입에 넘겼다.
“너 술 약하잖아. 오늘 과음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 짜식아.”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차가워진 공기.
세정은 오늘따라 옷을 얇게 입고 와서 쌀쌀한지 살결을 문지르고 있다.
영화라도 한 편 보자고 할까?
세정과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시운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늦은 시간이야. 행여나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자.’
와인의 도수에 살짝 취했는지 걸으면서도 비틀거리는 세정을 보자 시운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괜찮아. 나 안 취했거든….”
“그냥 이렇게 걸어. 너 비틀거리는 거 다 보여. 아까 와인을 그렇게 빨리 마실 때부터 알아봤다.”
“하… 나도, 하나도 안 취했어요, 헌터뉘이임!”
그녀의 혀가 꼬여 발음이 새어나온다.
세정이의 어깨를 쓸어안고 거리를 걸으니, 자꾸만 심장에서 신호가 전해진다.
쿵쿵!
심장이 뛴다.
신체가 접촉하자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려고 했다.
‘안 돼. 이상한 마음 먹으면….’
세정은 시운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나 알까.
시운의 부축으로 간신히 걸어가다가도 걸음걸이가 꼬여 넘어질 뻔했다.
“아야!”
그녀가 귀여운 신음을 흘린다.
시운은 애써 그녀를 일으킨다.
어깨가 아닌 허리를 감싸 안고 조금 더 균형 있게 그녀를 부축했다.
“많이 취했네….”
“안 취했단 말이야.”
“취한 사람들한테 취했냐고 물어보면 항상 안 취했다고 하지.”
세정은 동공이 풀려 엉성하게 걷다가 또 비틀거린다.
그 주위로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남성들의 눈이 세정에게로 쏠렸다.
시운은 본능적으로 세정과 자신을 번갈아보는 남성들의 바디시그널을 읽었다.
욕망과 부러움이 뒤섞인 남성들의 바디시그널.
‘저 자식들, 술 취한 세정이와 날 보고 이상한 생각들을 하고 있네. 내가 세정이를 모텔로 데려가 확, 따먹겠구나 하는…. 부러워 안 해도 된다, 새끼들아. 그럴 일은 없을테니까.’
시운은 자꾸만 비틀거리는 세정이의 허리를 확, 감싸 안고서 세정이의 가방 지퍼를 열어 그녀의 핸드폰을 꺼내든다.
“세정아. 잠깐만. 너희 집 기사 불러줄게….”
그런데.
세정이 갑자기 두 팔을 벌려 시운의 목덜미를 와락 껴안았다.
‘!!’
순간 세상이 멈춘 듯 했다.
강렬한 느낌이. 그리고 숨결이 턱 막히는 기분.
그녀의 가슴이 자신의 가슴팍에 맞닿자 물컹이는 감촉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허벅지가 시운의 하체에 맞닿자 시운의 하체에 남성적 반응이 오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