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화
퀘스트는 꽃길이다 (1)
[영생의 펜던트]
발카스 왕국의 희귀수로 만들어진 목걸이로 신의 가호가 깃들어져 있다고 한다.
보유 효과
-사망 상태에 돌입하였을 때 체력을 1%로 그 자리에서 즉시 부활 남은 횟수: 2번.
‘굉장해.’
말 그대로 부활시켜주는 목걸이였다.
그 뜻은 헌터 던전에서도 사용 가능하단 말이었다.
아이템의 등급은 나와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히든 아이템에 속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 아이템은 헌터 던전에 진입할 때만 착용하면 딱이겠군.’
“난 불꽃을 고르겠어.”
“으음. 그러면 난…….”
연희와 성혜도 고민을 마쳤는지 손을 뻗어 각자 하나씩 물건을 집어들었다.
물건은 그들의 손아귀에서 빛나더니 형체를 갖춘 아이템으로 변했다.
[보상이 주어졌으니 원래 있던 지점으로 이동합니다…… 5…… 4 ……3 ……2]
몸이 부웅 뜨는 느낌과 함께 주변의 경치가 확 비틀어지면서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시운!! 이제부터 말 놓을게. 그리고 이번에 진 빚은 다음에 내가 밥 사는 걸로 퉁치자!”
연희가 두 손을 입에 모으고 소리쳤다. 그녀의 몸이 점점 투명해졌다.
“...이제 원래 지점으로 이동하는 건가? 다음에 꼭 또 봐요, 시운 씨.”
성혜는 손을 흔들며 시운에게 인사를 했다.
'오늘 나 때문에 다들 고생 많았네.'
이계에서 알게된 인연들이지만 내심 고맙단 마음이 들었다.
끝으로 그녀들의 몸이 완전히 사라지고 시운 또한 몸이 번쩍 타면서 이동하는 것을 느낀다.
“헉!”
눈을 떠보니,
어두운 방 안의 천장이 보였고,
친숙하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온다.
‘돌아왔군.’
친숙한 침대와 이불, 그리고 낡고 조그마한 티비, 더럽게 어지럽혀진 방을 보니 원룸텔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고된 하루였다. 허수아비와 씨름하랴 근육이 터져라 힘을 썼는 데다가 제멋대로 히든 던전으로 이동해서 개고생을 하랴.
물론 그 덕에 히든 스탯과 히든 아이템을 손에 넣었지만 말이다.
‘오늘 하루는 정말 고생 많았다. 이제 눈 좀 붙여야지.’
슬슬 눈이 감겨왔다.
***
다음 날.
시운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곧바로 잡화점에 들려서 포션들과 지도, 포탈 메모리를 구입하고 나왔다.
포탈 메모리는 고가의 아이템으로 최근에 기억하고 있는 장소 세 개를 지정하고 이동할 수 있는 스크롤 개념의 아이템이었다.
이제 마을을 여러군데 오가야 하는 처지이다 보니, 하나쯤은 필요했다.
태초 시티에는 다신 들릴 일은 없을 것 같다. 헤르빈 지역 또한 마찬가지일 터.
그대로 헤르빈 도시를 나와 서쪽으로 향해 걸어갔다.
***
모스칼로 향하는 길.
경사가 가파른 길을 지나고 지나고 또 걸었다.
어느새 땀이 줄줄 얼굴을 타고 흘렀다. 숲을 넘어왔고, 도로를 넘어왔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마을로 순식간에 이동시켜 주는 아이템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아이템은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이계의 세상.
게임 속처럼 금방 걸어서 다음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제 저녁부터 계속 굶었네.’
[공복도가 누적되었습니다.]
[갈증도가 누적되었습니다.]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는 알람이 친절히도 울려왔다.
공복도와 갈증도가 높아져서 일정 수준 이상에 달하면 이동 속도가 굉장히 느려진다.
게다가 그 수준에서 방치하면 빈사 상태 등과 같은 상태에 빠지게 된다.
다이어트 같은 일은 이계에선 하기 힘든 것이었다.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김밥과 물을 꺼내어 그 자리에서 입에 구겨넣었다.
우적우적.
어느새 저 너머로 체인 메일을 두른 병사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모스칼에 거의 다다른 것이었다.
헤르빈 보다 더욱 크고 왕성한 대도시 축에 속하는 모스칼은, 발카스 왕국의 병사들을 훈련하는 대훈련소가 있는 곳으로도 유명했다.
그 밖에 맛집, 먹을 거리가 많고 유흥이 많으며 발전이 잘 되어있는 도시이기도 했다.
마지막 언덕을 넘고 경비 초소에 다다랐다.
척.
경비병 하나가 창대를 내밀고 앞을 가로막았다.
“신분증을 제시 바랍니다.”
시운은 차분하게 헌터합격증을 꺼내어 경비병에게 제시했다.
“안으로 들어가도 좋습니다.”
***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붐볐다.
중앙의 커다란 홀 건물이 하나 보였다. 저 곳은 헌터들과 용병들이 감각을 익히며 전투(PK)를 벌이는 무투장이었다.
그 무투장 주위로 넓은 광장이 펼쳐져있었다.
광대한 광장에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다니고 있다. 그들 틈으로 많은 헌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오…. 지금껏 봐왔던 헌터들하곤 달라.’
그랬다.
초반 지역에 속하는 태초 시티와 헤르빈 과는 달리 고렙의 헌터들이 많았다. 처음 보는 장비를 착용한 헌터들과 고급펫을 데리고 다니는 헌터부터 커다란 새를 환수로 이용하여 하늘을 드라이브하는 헌터까지 다양했다.
대체로 클래스는 전사 계열과 매지션 계열이 가장 많았다.
탄탄한 방어력과 안정적인 대미지를 주는 전사 계열이 헌터들에겐 독보적으로 인기였고, 그 다음이 매지션 계열이었다. 원거리 마법에 특화된 매지션 계열은 딜러와 서브 딜러의 역할을 하는 데 가장 알맞춤이었다.
게다가 파티나 레이드를 하면 반드시 대우를 받는 직업군인 사제계열의 헌터들이 많았다.
사제, 힐러, 전사 계열 이 직업들이 거의 주류의 직업이었고, 비주류에 속하는 직업이 활을 다루는 레인져, 암살 스킬을 사용하는 어쌔신, 초근접 거리에서 활약하는 격투가 등등이었다.
‘내 직업은 비주류에 속하지도 않지.’
그랬다.
시운의 클래스인 맹인은 헌터들이 거의 찾지 않는 클래스였다. 눈까지 바쳐가며 이 직업을 택하는 멍청한 자는 없을 테니까.
몇몇이 있긴 있었다.
맹인이 한 때 히든 클래스라는 입소문이 돌 때, 부푼 마음에 눈을 바치고 맹인이 되었다가 맹인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울증으로 자살하거나 헌터 던전에 가서 적응하지 못하고 죽음을 당하거나 이 중 하나였다.
‘확실히 병사들이 많군.’
이곳 모스칼은 경비병들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많았다.
그 밖에 정예병들을 비롯해 왕국의 기사단까지 있어서 치안이 아주 탄탄한 도시이기도 했다.
일단 들러야할 곳이 있었다.
그곳은 바로 스킬 상점이었다.
***
끼이익.
문을 비집고 들어가자 체구가 좋은 남성이 씩 웃었다. 남성의 주위로 스킬북들이 가득 놓여있다.
“어서오세요!”
“보조 스킬북 채집, 채굴, 도축 주세요.”
“알겠습니다! 모두 다해서 18만 골드입니다.”
[채집 스킬북을 획득하였습니다.]
[도축 스킬북을 획득하였습니다.]
[채굴 스킬북을 획득하였습니다.]
1차 직업을 선택하면 보조 스킬을 두 개 익힐 수 있다.
반면에 히든 직업인 맹인을 택한 시운은 보조 스킬을 세 개까지 익힐 수 있었다.
채집은 몬스터의 사체에 사용하여 사체의 일부분을 획득하는 스킬이고, 도축은 육식류의 몬스터를 도축할 수 있으며, 채굴은 광석을 채굴할 때 쓰는 스킬이었다.
[채집 스킬북을 사용하였습니다.]
-보조 스킬 ‘채집’을 습득하였습니다.
[도축 스킬북을 사용하였습니다.]
-보조 스킬 ‘도축’을 습득하였습니다.
[채굴 스킬북을 사용하였습니다.]
-보조 스킬 ‘채굴’을 습득하였습니다.
[보유 금액: 405만 골드.]
‘그 다음은.’
시운은 스킬북을 모조리 사용하고 판매원을 넌지시 보았다.
“혹시 요즘 투척 스킬 중에 잘 나가는 스킬이 뭐 있나요?”
“투척 스킬 중에요? 레벨이 어떻게 되시는데?”
“38입니다.”
“가만히 있어보세요~ 보자, 보자.”
판매원은 스킬북이 꽂혀 있는 책장으로 가서 고민하더니 몇 가지 스킬북을 가지고 나왔다.
툭.
판매원이 책상 위에 스킬북 다섯 권을 놓더니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요즘 투척 스킬은 닌자 계열의 스킬이 잘 나가요~ 이건 수리검 투척 스킬이고, 이거는 표창 투척 스킬, 그리고 요거는 비수 투척의 스킬이고….”
“으음….”
하나하나 스킬북을 바라봤다.
원거리 계열의 스킬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쯤은 투척 스킬이 필요하긴 했다.
‘비수는 던지기엔 커서 대미지는 좋지만 인벤토리에 넣고 다니기가 불편해.’
눈이 다른 스킬북으로 돌아갔다.
표창 투척 스킬북.
수리검 투척 스킬북.
‘음….’
대미지는 수리검이 더 좋았고 투척 거리는 표창이 더 길었다.
표창을 던져대면 너무 닌자 같을 것 같긴 하고.
고민을 마친 시운이 말했다.
“수리검 투척 스킬북으로 주세요.”
“네에~ 잘 선택하셨습니다. 32만 골드입니다.”
[수리검 투척 스킬북을 획득하였습니다.]
[보유 금액: 373만 골드.]
‘돈을 모아놔서 다행이군.’
사실 지금 타이밍의 헌터들은 돈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보조 스킬도 익히지 못하고 물약값에 허덕이는 게 태반이었다.
게다가 스킬북은 스킬을 획득할 수 있는 수단인 만큼 하나당 비싼 가격이었다.
[수리검 투척 스킬북을 사용하였습니다.]
-수리검 투척 스킬을 획득하였습니다.
[수리검 투척][Lv.1]
소지하고 있는 수리검을 앞으로 투척한다.
최대 거리: 9M
대미지: 근력의 125%
‘좋았어, 다음 갈 곳은.’
스킬을 모두 익힌 시운은 상점을 나섰다.
“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또 오시길~”
스킬북을 단번에 많이 팔아 기분좋은 중년 남성의 인사를 뒤로하고 다음으로 향한 곳은 무기 상점이었다.
무기 상점에서 쇼트 단검 하나와 투척할 수리검 등을 구입하였다.
[쇼트 단검][레어]
보조용으로 주료 사용하는 단검. 날이 굉장히 날카롭다.
-공격력: 108
-내구력: 150/150
사용 제한: 레벨 30 이상.
곧바로 쇼트 단검을 허리춤에 넣었다.
보조용으로 사용할 생각도 있었지만 지금 착용하고 있는 홍란검 외에 무기가 하나 필요했다.
‘트롤의 공모자 숲으로 가야 하니깐….’
근처 트롤의 공모자 숲으로 가서 사냥할 계획이었다.
트롤의 공모자 숲은 트롤들이 등장하는 던전이지만 휘두르기만 해도 불길을 만들어내는 홍란검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숲을 태워버리면 공모자 숲의 NPC와의 관계가 적대로 변하면서 최초 퀘스트를 받을 수도 없고, 결국엔 숲도 이용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사냥 준비 완료. 이제 가볼까.’
***
트롤의 공모자 숲.
-트롤을 처치하였습니다.
-트롤을 처치하였습니다.
-트롤을 처치하였습니다.
-트롤을 처치하였습니다.
쇼트 단검을 이용하여 트롤들의 몸뚱이를 쑤시고, 베고 박았다.
확실히 홍란검의 대미지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지만, 단검이라 굉장히 가벼워서 빠르게 휘두를 수는 있었다.
“그으아아아.”
트롤 두 마리가 두 손을 뻗으며 다가왔다.
[트롤 Lv. 45]
[트롤 Lv. 45]
“일참.”
푸슉!
“그으악.”
번개같이 트롤의 얼굴에 단검을 꽂자마자 뺀 후에, 다시 휘둘렀다.
들짐승이 초식 동물을 사냥하듯이.
-트롤을 처치하였습니다.
옆에 있던 트롤이 굵직한 나무 팔을 휘둘렀다.
차앙!
단검으로 놈의 팔을 쳐내고 그대로 발차기로 녀석을 처밀어낸 뒤에, 도움닫기를 통해 뛰어 올라 그대로 트롤의 머리통에 단검을 꽂았다.
“그으윽.”
-트롤을 처치하였습니다.
대미지가 다소 약한 단검을 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시운의 근력 스탯은 넘사벽 수준에 가까웠기에 레벨 40대의 트롤을 손쉽게 잡기에 충분했다.
뒤이어,
[적색 트롤 Lv. 55]
[적색 트롤 Lv. 55]
[적색 트롤 Lv. 55]
방금 트롤보다 더욱 크고 몸이 온통 빨간색인 트롤 세 마리가 시운을 노려보며 돌진해왔다.
적색 트롤은 트롤보다 강하고 상대에게 출혈 효과를 입히는 몬스터로 접근전에서 조심해야 했다.
그러나 시운에게는 상관없었다.
“맹인불괴.”
-일정 시간 동안 상태이상 무적의 효과가 지속됩니다.
“화룡의 도약.”
곧바로 시운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적색 트롤 세 마리가 있는 품으로 쇼트 단검을 들고 무섭게 뛰어내린다.
샥! 샤샥! 샥!
“그억!”
“그우우욱….”
“그엑.”
리드미컬하게 터지는 나무들의 단말마-
착지 타이밍에 중력을 실은 단검 세 합에 적색 트롤 세 마리의 몸통이 찢겨져 나간다.
-적색 트롤을 처치하였습니다.
-적색 트롤을 처치하였습니다.
-적색 트롤을 처치하였습니다.
“와, 저 사람 봐. 단검 한방으로 트롤들을 잡고 있잖아?”
“파티 좀 넣어달라고 해볼까?”
옆에서 사냥하던 레벨 30대의 헌터 두 명이 사냥에 열중하던 시운을 바라봤다.
그들의 눈으로는 시운의 사냥 모습이 굉장해 보였다.
자신들은 대검과 활로 트롤 한 마리를 두고 피하고, 또 피하면서 열 번은 가격해야 트롤의 생명력이 반피가 되는데.
“레벨이 몇일까? 아니, 여기는 레벨 45까지 밖에 출입이 불가능하잖아?”
“저 사람 45치고는 너무 세 보여. 단검을 들고 있는 걸로 봐서 어쌔신 같은데….”
“사용하는 스킬은 어쌔신 과가 아닌데?”
“그으아아아!”
“그아아!”
시운의 주위로 트롤들이 또다시 모여들었다.
샥! 샤샥! 샥!
번개같은 단검질.
트롤 세 마리의 육체가 그 자리에서 찢겨져 나무껍데기가 되어버린다.
“와아, 진짜 죽이는데?”
구경하며 감탄하던 레인저 계열의 헌터가 시운에게 다가갔다.
“저어…. 혹시 레벨이 몇이세요?”
“38인데요.”
“예? 38이요?!”
질문을 던진 헌터는 믿을 수 없단 얼굴이었다.
레벨 38이라면 자신과 같은 레벨인데 어떻게 대미지의 차이가 이렇게 날 수 있는 거지?
“38인데 어떻게 트롤들을 한두 방에 킬할 수 있는 거죠? 혹시 클래스가 어쌔신은 아니죠?”
“맹인입니다.”
“뭐, 뭐요? 맹인이요?”
헌터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놀란다. 그 옆에 있던 전사 계열의 헌터가 시운을 이상하게 쳐다본다.
‘강하긴 한데 그냥 미친 놈인가 보네. 맹인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헌터 둘은 서로 눈빛 교환을 한 뒤에 시운을 보며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 놀이 옆을 빙빙 돌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또.라.이 로 취급한다는 이야기였다.
“야, 가자, 가자. 요즘 헌터들 중에 미친놈 많긴 하다더라. 괜히 갑자기 우리한테 칼 들이댈라.”
“풉. 클래스가 맹인이래…. 정신병자인가봐.”
그 둘은 시운을 흘겨보고 지나가버렸다.
시운은 속으로 가소롭게 웃었다.
‘귀여운 것들. 믿지 못하겠지.’
***
-트롤을 처치하였습니다.
-트롤을 처치하였습니다.
-트롤을 처치하였습니다.
“후우…. 드디어 100마리를 채운건가.”
트롤 100마리를 학살했다.
시운 주위에는 나무 껍데기가 되어버린 트롤 시체들로 가득했다.
이곳 공모자의 숲에서 트롤 100마리를 학살하면 발동되는 이벤트가 하나 있었다.
그 이벤트를 노린 것이었다.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되셨는데?”
터벅터벅.
[헌터인가?]
굉장히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렸다. 인간의 육성은 아니었다. 순간 시운의 눈이 빛났다.
‘드디어 나타나셨군.’
새로운 이벤트가 발동한 것이었다.
시운. 그의 앞으로 누군가가 걸어왔다. 공모자의 숲 한복판을 가
로지르며 천천히 걸어온 것은.
땅딸막한 키에 다부진 체형. 그리고 갈색 콧털이 배까지 늘어져 있는 드워프였다.
‘드디어 나타나셨군.’
드워프가 시운의 코앞까지 다가와 고개를 들어 시운을 올려다본다.
“트롤을 백 마리나 사냥하다니 자네 힘 좀 쓰는 헌터인가?”
“그렇습니다.”
시운은 이미 드워프가 나타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지도 말이다.
“그래, 그렇다면 말이지.”
드워프는 코를 손으로 비비며 시운을 뚫어지게 관찰했다.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줄 수 있겠는가? 트롤의 뼈로 갑옷을 만드려고 하는데 트롤의 뼈를 구해다 줄 수 있겠는가 말일세.”
난쟁이 드워프가 시운을 올려다보며 말하자 시운 앞으로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드워프의 부탁][퀘스트]
공모자의 숲 지킴이 드워프 케르만이 재료가 부족하다고 한다. 그 재료를 가져다 주자.
성공 조건: 트롤의 뼈(0/50)
보상: 소량의 경험치.
‘형편없이 쉬운 퀘스트군. 보상도 흥미없다. 여기서는….’
시운은 태석의 유튜브 영상을 떠올렸다.
-공모자의 숲에서 트롤 백마리를 학살하면 그 드워프가 나옵니다. 그때! 그 녀석이 퀘스트를 줄 거에요. 그런데 그보다 더욱 좋은 퀘스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바로 드워프를 도발하는 거에요.
‘그때 박태석이 그랬지, 그렇다면….’
드워프는 망설이는 시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힘 좀 쓰는 헌터라면서 트롤의 뼈도 못 구해다 주나?”
“똥자루만한 난쟁이답군.”
시운이 낮은 음성으로 말하자 드워프의 눈이 커졌다.
“뭐, 뭐라고?”
“난쟁이 답다고. 이런 허접한 퀘스트나 쥐어주다니 날 뭘로 본건지 모르겠군.”
드워프의 눈가는 어느새 독기로 변해있었다. 드워프는 키가 작은 종족으로 잘 알려져있다. 그런 드워프들도 자신들이 키가 작은 것을 알지만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자 경멸하는 말이 바로 난쟁이였다.
“이, 이, 이이이…… 이 놈이!!”
드워프가 든 도끼가 떨려왔다.
[드워프 케르만과의 친밀도가 하락하였습니다.]
[퀘스트 드워프의 부탁이 자동으로 취소 되었습니다.]
‘일단 쓰레기 같은 퀘스트 넘기긴 성공. 근데, 저 도끼에 한 대 맞는 건 아니겠지?’
시운은 태석의 공략대로 실행에 옮겼지만 걱정은 되었다.
-드워프를 도발하기만 해선 안 돼요. 그를 적당히 도발하면서 구슬려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퀘스트는커녕 드워프 종족 전체와 사절하는 일이 발생하니 조심하세요.
분노심에 얼굴을 덜덜 떨며 시운을 쏘아보는 드워프에게 시운이 말했다.
“포부가 큰 퀘스트를 달란 말이다. 고작 나무껍대기같은 몬스터나 잡아서 얻는 뼈나 갖다달라고 하지 말고.”
“건방진 노옴!”
콰앙!
드워프가 도끼로 땅을 내리쳤다.
그 여파로 주위의 나무가 크게 흔들릴 정도였다.
시운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드워프는 무기제작에 용한 종족으로 알려졌지만 그들의 근력은 상상이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녀석한테 한 대 맞으면 골로 갈 것 같은데. 조심하자.’
“네 놈이 헌터라고 감히 드워프인 나에게 난쟁이라고 하였다?”
“저기 잠깐만.”
시운은 이를 바득바득 가는 난쟁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드워프의 도끼서린 눈이 시운의 손으로 따라 움직였다.
시운은 말했다.
“나는 드워프라는 종족을 존중해. 무기도 탄탄하게 잘 만들지. 의리 좋지. 힘 세지. 다만 나는 당신에게 방금 서운했을 뿐이야.”
“서운했다니? 그 무슨 말인가!”
드워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건 무슨 소리인가 하는 반응이었다.
“나는 엘프보다 드워프라는 종족을 더 존중하는 사람이다.”
‘엘프’라는 단어에 드워프의 눈빛이 요동쳤다.
엘프와 드워프는 서로 적대시하는 관계다.
엘프는 키크고 우월한 외모를 지닌 대신 드워프들을 난쟁이라고 항상 깔봐왔고, 드워프들은 외적인 열등감이 심해 엘프들을 그저 얼굴만 반반한 무능력 쟁이라고 욕하며 대립하는 시국이었다.
시운은 드워프의 반응을 살피고 말을 이었다.
“엘프들이 솔직히 활 잘 쏘고 피부 하얀 거 빼면 뭐가 있어? 반면에 드워프들은 힘 세지, 진솔하지, 사람냄새 나지, 거기다가 엘프들은 죽.어.도 못 만드는 대단한 장비들을 만들어내잖아?”
“크흠, 그거야 틀린 말은 아니지.”
드워프는 콧수염을 손으로 늘어뜨렸다. 어느새 드워프의 얼굴은 화가 다 풀린 듯 누그러져 있었다.
‘순진하긴.’
시운이 속으로 웃었다.
“그런 대단한 드워프께서 나에게 그런 하찮은 퀘스트를 선사해준다니 내가 실망을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어려운 일을 원하는 건가?”
시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러면 크레이트 성에 갇힌 포로를 구출해다주게.”
“뭐? 포로?”
시운이 순간 놀랐다.
태석의 유튜브 공략에는 이러한 설명이 없었는데.
전개가 달리 흘러가고 있었다.
그 순간 시운의 눈 앞으로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감옥의 포로][히든 퀘스트]
크레이트 성의 감옥에 갇힌 포로 아론을 구출해달라는 케르만의 부탁을 받았다.
아론을 구출해서 드워프 케르만에게 데려오자.
성공 조건: 아론 구출.
실패 조건: 아론의 죽음 또는 구출 실패.
제한 시간: 이틀.
보상: 드워프 케르만과의 친밀도 상승.
열정의 장비 퀘스트 수행 가능.
실패 시 패널티: 드워프 전 종족과의 관계가 로 하락.
*주의: 거절할 수 없는 퀘스트입니다. 자동으로 수락됩니다.
[퀘스트 ‘감옥의 포로’가 수락되었습니다.]
어쨌든 히든 루트로 가는 것은 성공했다!
그런데 난이도가 굉장해 보이는 것이 문제였다.
“자, 잠깐만. 성에서 포로를 구출해 오라고? 나 혼자서?”
“왜? 못 하겠는가.”
솔직히 고민이 되었다. 이건 뭐 알려진 공략법도 없고 단신으로 견고한 성에 들어가서 포로를 구출해 오라는 이야기 아닌가.
만약 성에 들어갔다가 발각되면 그대로 범죄자 신세가 되어 감옥에 갇힐 수도 있었다.
‘리스크가 큰 퀘스트다. 하지만….’
그만큼 보상도 짭짤할 터.
“알았다, 구출해 오지.”
“꼭, 꼬옥 부탁하네. 아론 그를 데려와주게.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사진으로 보여주겠네.”
***
‘다 왔다.’
시운은 먼 걸음을 걸어왔다.
저 먼 발치에 성이 보였다.
아주 견고하고 탄탄한 성이며, 성벽은 족히 10미터는 넘어보인다.
성벽 위, 성 주위로 완전 무장한 경비들이 횃불을 어깨에 맨채, 눈에 핏대를 세우고 성을 지키고 있다.
어느새 하늘은 어둠이 드리워진 저녁이었다. 주위가 캄캄했다.
‘저걸 뚫는 방법이…….’
머리를 감싸쥐고 수를 짜냈다.
시운의 주위로 펼쳐진 풀숲이 눈에 들어왔다. 크레이트성의 정면에는 숲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래, 바로 그거다.’
찰캉!
-화룡의 홍란검을 장착하였습니다.
검을 들고 나무가 무성한 곳으로 다가갔다.
“홍란의 일참.”
***
크레이트 성 경비 초소.
“내일 성주님이 오신다고 했지?”
“응. 그래서 오늘 성 청소는 야무지게 해놨지.”
경비병들이 자기 위치를 지키며 경비를 서고 있다.
콰앙!
갑작스런 굉음 소리에 경비병들이 순간 움찔거렸다.
“뭐야? 이 소리?”
“무슨 소리지?”
“저길 좀 봐!”
경비병 하나가 외치자 모든 경비병들의 눈이 움직였다.
“부, 불?”
“불이 났다! 크레이트 숲에 화재가 났어!!”
경비병들이 허둥지둥 하기 시작했다. 성의 바로 맞은편인 크레이트 숲이 시뻘건 불로 타들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난감했다. 내일 성주님이 오시는 날인데. 하필 이 타이밍에 화재가 발생하다니 말이다.
“불을 진압해야 해!”
“성 안에 있는 호수대를 가지고 와야 합니다.”
경비들이 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기랄! 느닷없이 왜 불이 일어난 거지?”
이를 지켜보던 크레이트성의 경비단장이 얼굴을 양껏 찌푸렸다.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는데…….”
경비병이 답했다.
“칫. 내일 성주 님이 방문하시는 날인데. 이익. 일단 성문 열고! 호수 연결해서 불 진압해!”
“네, 성문을 열어라!!”
***
끼이이이익-.
크레이트 성의 성문이 점차 열리기 시작했다.
벌어진 성문의 틈 사이로 흙이 바닥으로 주르르 떨어졌다.
거대한 성문이 열리자 경비병들이 모조리 산불이 나는 곳으로 뛰어갔다.
“응?”
달려가던 경비병이 멈칫 하더니 성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내 옆으로 무언가 지나간 것 같은데?’
경비병은 고개를 갸웃했다.
“야, 야! 뭘 그리 꾸물거려?”
“죄송합니다!”
경비단장의 호통에 경비병은 다시 산불이 난 곳으로 달려갔다.
***
터벅터벅.
불빛 하나 새어나오지 않는 칠흑같은 감옥에 조그마한 발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감옥에 펼쳐진 통로 옆으로는 구속된 죄인들이 철창 신세를 지고 있었다.
‘어디있냐. 아론….’
시운은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빠르게 걸어갔다. 은신 스킬을 사용했기 때문에 타인의 눈에는 시운이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8분도 안 남았다.’
은신의 사용 제한 시간은 10분. 벌써 2분이 지난 상태였다.
감옥마다 머리가 산발한 채 단두대를 뒤집어 쓴 죄인들이 보였다.
하나하나 얼굴을 확인하다가.
‘저 사람인가.’
시운은 철창 앞에서 멈춰섰다.
철창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드워프 케르만이 보여주었던 몽타주와 똑같은 사람이 갇혀있었다.
수갑에 두 손이 묶인 채 초점없는 눈으로 넋을 놓고 있었다.
찰캉! 찰캉!
‘경비병이 온다.’
철컹거리는 갑옷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장한 경비병 두 명이 횃불 하나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처리 해야겠군. 그냥 놔두면 거슬려.’
은신 상태에서는 전투를 치룰 수 없다. 그렇기에 잠시 은신을 해제해야 했다.
터벅터벅.
경비병들이 감옥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며 죄수가 잘 있는지 확인한다.
빠악!
“컥!”
빠악!
“으억….”
경비병 둘은 그대로 힘없이 쓰러졌다.
주먹을 사용한 탓에 시운은 강제로 은신이 풀려버렸다.
시운은 곧바로 철창에 홍란검의 검신을 갖다대었다.
“맹인참격.”
파지직!
철창에 커다란 금이 갔다.
차앙! 차앙!
검으로 두 번 더! 내리치자 철창이 부서졌다.
“………?”
초췌한 몰골의 죄수가 커진 눈으로 시운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리 나와요, 어서.”
“누, 누구십니까?”
아론은 놀라 경직한 듯 했다.
“빨리 일어나요.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 일단, 당신을 구출해야 합니다.”
빠직!
아론을 억압하고 있던 수갑을 홍란검으로 부서주었다.
“대체, 누구신데….”
“쉿.”
시운은 곧바로 쓰러진 경비병들에게로 뛰어갔다.
찰카당.
경비병 하나의 갑옷과 투구를 모조리 벗긴 후 들고 아론에게 건넸다.
“어서 이거 입어요. 일단 변장부터 합시다.”
***
“…….”
경비병 갑옷과 투구를 눌러쓴 아론은 떨면서 걷고 있었다.
쌩판 모르는 이가 자신을 어디론가 데려가고 있었다.
근데 더 놀라운 사실은 지금 같이 동행하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쉬지 말고 걸어요.”
옆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쉿. 질문은 나중에.”
터벅터벅.
맞은 편에서 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경비병이었다.
아론은 순간 긴장해서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이봐, 경비 잘 서고 있지?”
걸어오는 경비병이 물어왔다.
“네, 네.”
아론이 답하자 경비병은 아론을 힐끗 보더니,
“밖에 불이 나서 난리도 아니야. 경비 잘 서고 있어.”
“넵!”
경비병이 지나갔다.
좌측으로 돌아가는 통로가 보였다.
“이쪽으로 와요.”
자신을 데려가는 사람의 육성이 들려왔다.
아론은 그대로 움직였다.
***
타타타탁!
경비병들이 커다란 호수대를 들고 미친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크레이트 숲의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분주히도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거의 다 진압되어 간다.”
“휴우. 이제 다 됐나? 식겁했네.”
바로 그 시각.
크레이트 성의 성벽 위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경비병은 피곤함에 눈이 감겨왔다.
“후아아암….”
터져나오는 하품에 눈을 비볐다.
그때였다.
자신의 뒤편에서 하늘 위로 무언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순간 경비병의 감긴 눈이 번쩍 뜨였다.
‘뭐야?’
그것은 갈색의 사람만한 멧돼지였다.
멧돼지가 사람을 등에 엎고 성벽을 너머 반대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