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화
신예들의 등장 (1)
케르만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시운을 바라봤다.그의 표정은 의연함이 베어있었다.
‘과연.’
그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입 대신 손을 움직였다.
“이거.”
그가 무언가를 건네왔다.
빨간 끈으로 묶인 스크롤이었다.
케르만의 동공이 흔들렸다. 곧바로 스크롤을 낚아챈 뒤에 끈을 풀고 스크롤을 열어보았다.
눈짓으로 스크롤을 들여다본 케르만의 입에서 힘 실린 육성이 흘러나왔다.
“맞네! 확실해.”
이 짧은 시간 안에 모스칼의 검은 상인을 찾아어 도박을 통해 이 스크롤을 정말 가져다 줄 줄이야.
‘임무를 줄 때마다 미친 속도로 해내는 구만.’
시운을 바라보는 케르만의 눈이 빛났다.
‘이 녀석은 재능의 냄새가 나. 내가 봐왔던 수많은 헌터들 중에 딱 세명과 닮았어.’
많은 헌터들을 상대해왔던 케르만의 머릿속으로 헌터의 이름들이 스쳐간다.
세 명의 이름이.
‘박태석.’
‘김유한.’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나머지 한명의 이름이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는 두 눈을 바치고 맹인이란 특수 클래스를 지닌 남자였다. 시각에 의존 없이 짐승같은 전투 감각을 지녔던 그 남자.
홀연히 자취를 감춘지 오래 된 자이지만 말이다.
“자네, 이름이 뭔가?”
“이시운.”
“이시운이라 자네 이름은 꼭 기억하도록 하지.”
청년은 케르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다음 퀘스트를 내려주길 갈구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확실한 검증이 필요해. 아직 그 임무는 이 친구에겐 좀 이르다….’
케르만이 말했다.
“자네 2차 전직을 하지 않은 상태겠지?”
“2차 전직은 아직인데….”
“그럼 2차 전직을 하고 오게. 그때 본격적인 퀘스트를 주겠네.”
청년의 인상이 찡그러졌다.
“2차 전직이고 나발이고 당장 해올 수 있다. 지금 그 퀘스트를 달라고.”
“난 한 번 뱉은 말은 주어담지 않는다네.”
“쩝.”
케르만의 완고함에 청년은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더니 등을 돌려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이 점차 멀어져갔다.
그의 뒷모습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3일 후 다시 온다. 그러니 그 퀘스트 누구한테도 내주지 마.”
케르만은 그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응시했다.
‘오랜만이군, 날 자극시킨 헌터는.’
***
헤르빈 도서관.
정연희는 책속에 빠져 있었다.
단발의 자주빛 머리칼을 둥글게 말아올려 훤히 들여다보이는 가는 목선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꿈틀거렸다.
‘이 부분이였나….’
이계 역사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책장의 어느 페이지에 시선을 파묻었다.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여깄다! 게이트가 생기게 된 이유.’
책장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빅 게이트(Big Gate).
현계와 이계를 오고갈 수 있는 포탈을 말한다.
한국과 일본 미국에 이런 게이트가 몇 군데 생기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계의 역사에 있었다.
‘이 부분이야.’
연희의 눈이 글자를 따라 내려갔다.
이계(異界)는 카인이라는 인물이 역사 속에 남아 아직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카인.
그는 이계 ‘최초 10써클 마법사’라는 수식어가 붙은 마법사였다.
그의 몸속에 흐르는 마나는 바다를 만들 수 있을 만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을 손아귀에 쥐고 싶고, 만물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심에…
흑혈마상(黑血魔上)이라는 고대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전과는 범접할 수 없는 공력을 댓가로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세상을 뒤집을 만큼 강력한 소환마를 소환할 수 있게 되었고,
자연 계열의 최상위급 마법인 메테오 보다 열배는 강력한 마법을 시전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고대 악마의 술법을 부릴 수 있는 흑마도사가 되었다.
카인은 자신의 영혼을 바친 댓가로 본래의 몇 배의 공력을 가지게 되자, 대륙을 제패하며 세상을 손아귀에 넣기 시작했다.
살생, 도륙을 난무하며 점점 악귀로 거듭났고 … 그렇게 세상은 그의 것이 되는 듯 했다.
그에게 두려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한가지 큰 시련이 다가왔다.
그에게 시련이란,
레딘이란 자의 출현이었다.
레딘.
검을 귀신처럼 다룬다고 하여서,
발카스의 검황(劍皇)이란 칭호를 가진 자였다.
그는 20년이란 세월동안 전장을 호령하며 마족의 침략과 다른 국가의 침략을 단신으로 막아냈다.
그는,
발카스란 나라의 버팀목과 같은 존재였다.
발카스는 작은 영토와 소규모의 병력을 보유한 약소한 국가였지만 레딘이 대장군 자리에 존재하는 한, 타 국가들은 발카스를 건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소국 발카스의 평화가 그렇게 이어지는 듯 했다.
국가를 수호하며 청춘을 바친 레딘은 어느 순간 소리소문없이 잠적한다.
‘세상에 위기가 도래할 때 다시 나타나겠노라’ 한마디를 남긴 채.
그런 그가 나타난 것이었다.
레딘은 자신과 옛 전장을 동고동락한 동료들과 카인 앞에 모습을 보였고.
그들은 피가 난무하는 혈전을 벌였다.
제아무리 카인일지라도 레딘은 강했다.
레딘과 그의 일행들은 합공에 카인은 치명적인 내상을 입고 죽어갔다.
카인은 혈을 머금은 입술로 레딘과 일행들에게 유언하듯 나직이 말을 남겼다.
-날 이렇게 만든 댓가는 영원한 속박이다.
그 말을 끝으로,
카인은 고대악마 흑혈마상(黑血魔上)을 소환하였고 술법을 시전했다.
술법이 시작되자 천지와 대지가 뒤집혔고, 레딘과 일행들은 그 자리에서 육신이 사라진다.
잔뜩 내상을 입은 채, 죽음에 직면하던 카인은 남은 기력으로 또다른 술법을 시전한다.
그 여파로 인하여 이계의 몇몇 공간이 왜곡되더니, 일그러지며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카인은 그 구멍으로 도피한 뒤,
영원히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그 구멍이 훗날 현계와 이계를 이어주는 게이트가 된 것이다.
이것이 게이트가 생긴 원인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기까지가 글 속의 내용이였다.
‘레딘….’
정연희는 신화 같은 인물인 레딘에 관심이 갔다.
그 이유는 얼마 전 탐사시험에서 레딘의 충신 자크라는 인물을 조우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헌터군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차분한 톤이었다. 연희는 책에서 시선을 떼 그에게로 옮겼다.
안경을 낀 잘생긴 남자가 벽에 등을 기댄 채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낯이 익었다.
‘프로게이머 출신 장세준?’
장세준.
전 프로게이머 A sports 출신.
천재적인 컨트롤 감각과 탁월한 두뇌를 가진 그의 유명세는 이미 게임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다 알 정도였다.
특히 A플랜이 먹히지 않으면 누구도 발상하지 못할 B,C,D 플랜을 즉석에서 구사하여 상대를 기발하게 박살내는 플레이가 그의 전매특허였다.
그가 손만 댔다 하면 그 게임의 부동 1위의 랭킹과 우승 상금은 단연 그의 몫이었으니까.
게임을 좋아하는 20대, 30대 남자들에게선 그는 일국의 대통령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냥 닥치고 레전드' 그 자체였다.
연희는 세준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가볍게 목례했다.
“어? 프로게이머 장세준 씨 맞죠?”
“프로게이머라뇨. 이제는 어엿한 헌터인데요. 뭐 비록 F라는 나부랭이 랭크이긴 하지만….”
세준은 멋쩍은 듯 웃었다.
그냥 그건 지나간 한낱 과거에 불가하단 반응이였다. 저 정도 스펙이면 우쭐할 법도 한데.
신기했다.
게다가 최고의 프로게이머였던 사람이 왜 느닷없이 헌터가 되어 여기 있을까.
돈도 무지막지 잘 벌던 사람이.
연희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다.
‘잘 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헌터가 된 그 이유를 물어보긴 쫌 그러네….’
잠시 후,
세준이 물었다.
“힘든 건 없어요?”
“이제 막 헌터 한달 차라 사실 감이 안 잡히네요….”
그랬다.
이제 헌터가 된지 한달이 막 지났을까.
힘든 것 보다도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렇군요. 클래스가 뭔지 물어봐도 될까요?”
세준이 물어왔다.
“매지션이요. 앞으로 2차 전직은 어떻게 해야할지 스킬의 방향은 어떻게 잡아야할지 그게 막막해요.”
연희는 클래스만 답하려 했지만 속에 있던 고민이 입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앞에 있는 이 남자는 게임업계에서 최고로 인정받던 남자.
어쩌면 게임 시스템과 닮은 헌터 시스템을 잘 이해하고 있진 않을까. 그렇다면 팁을 알려주진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에 고민이 저절로 튀어나온 것이리라.
“매지션이라….”
세준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말을 뱉었다.
“매지션 계열을 택했다면 딜러형 매지션으로 가느냐, 서브딜러형 매지션으로 가느냐 둘 중 하나죠. 아! 예외가 하나 더 있긴 하지만.”
“예외요?”
반문하는 연희의 눈이 빛났다.
“딜에 특화된 극딜러.”
극딜러 매지션? 생소한 말이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
연희가 주저하지 앉고 물었다.
“극딜러라면 공격력에 특화된 포지션을 말하는 건가요?”
“그렇죠. 마력 스탯을 늘려주는 지혜를 최소화하여 마력은 스킬 두 번 정도만 시전할 수 있을 정도의 양만 분배하고 스탯을 최대한 아낀 뒤 지능 스탯에 탁! 몰빵하는 거죠.”
“……네?”
생소한, 아니 괴상한 답변이었다.
대표적으로 매지션 클래스 계열은 딜러와 서브 딜러 두 가지로 나뉘게 된다. 종이같은 방어력을 가진 매지션은 원거리에서 마법 폭격을 하며 딜을 넣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최선적으로 알려진 포지션이었다.
그런 포지션이라도 지혜와 체력은 충분히 찍어줘야 한다. 마나 수치가 낮으면 스킬 몇 번 쓰고 포션을 복용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딜레이는 길어진다.
매지션에게 있어서 빠른 연계 공격이란 필수.
게다가 체력 또한 적절히 찍어주어야 한다. 죽으면 저세상으로 가는 헌터 세상이기 때문에.
근데 이 남자는 마치 헌터를 게임 속 캐릭터처럼 말하고 있었다.
“지능에 스탯을 집중 분배한다면 그건 망하는 지름길 같은데요?”
차분히 묻는 연희의 말 끝은 따지듯 올라갔다.
“보통 일반 사람의 상식으론 그렇죠.”
세준의 눈빛에는 무언가 자신감이 서려있었다. 무언가 확신한다는 자부가 담긴 눈빛이.
말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연희는 세준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듣고 싶었다.
“매지션은 왜 지능에 집중 분배하면 안 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죠?”
세준이이 물었다.
“당연히… 매지션에게 필수인 마나 수치를 위해 지혜도 올려야 하고, 최하위 내구력을 가진 매지션이니까 체력도 올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왜요?”
세준은 ‘대체 왜 그래야 돼?’라는 표정이었다.
허탈했다.
‘뭐야? 이 사람.’
게임만 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헌터가 게임 속 캐릭터인 줄 아나?
세준은 무색의 안경테를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매지션의 약한 내구력은 옵션이 잘 붙은 아이템으로 커버하면 되는 거고, 마나도 마찬가지로 템 옵션으로 커버하면 그만이에요. 그리고 헌터는 능력치 하나만으로 싸우는 게 아닙니다. 남들보다 더 유연하게 움직이는 감각을 갈고 닦으면 매지션도 탱커를 할 수 있는 거에요.”
“……하.”
이젠 헛웃음이 나온다.
아까 전만 해도 답답한 고민을 단방에 깨어줄 조언이라도 해줄 것 같았는데. 매지션이 탱커를 할 수 있다는 헛소리에 그 기대감이 머릿속에서 아예 사라져버렸다.
그저 게임만 잘 하는 정신나간 괴짜었던 것이리라.
세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매지션이 공력에 폭발적인 비중을 두게 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요?”
그가 물었다. 더 이상 대답해줄 가치가 없다고 느껴졌다.
이미 이 사람은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니까.
자신의 말을 씹거나 말거나 세준은 말을 계속했다.
“그렇게 되면 최고의 매지션이 되는 겁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길을 개척하면 뭐든 중간 이상은 가기 마련.”
“네, 네. 그렇군요.”
연희는 차갑게 답했다. 이제 그만 대화를 섞고 싶다는 눈치를 준 것이다.
“못 믿겠다면 맛보기로 잠깐 보여드리죠.”
연희의 의중을 읽었는지 세준이 말했다.
“……….”
그러거나 말거나.
연희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시선은 들고 있는 책의 페이지에 고정했다.
세준에게 눈길을 더 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가 모든 말은 헛소리에 불과하고,
앞으로 그가 하는 소리도 모두 헛소리일 테니까.
그런데 세준의 입에서 뜻밖의 음성이 이어졌다.
“블리자드.”
그리고.
연희의 발끝부터 다리가 미치듯이 시리는 차가운 전율이 느껴졌다. 뒤이어 연희가 보고 있던 책장에 서리가 끼면서 얼어붙기 시작한다.
“…이, 이건?”
연희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연희의 눈 속에 들어온 세준의 손. 손에서는 냉랭한 오라가 감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오라는 굉장히 진하고 컸다.
드드드드드-
순간. 도서관 안의 책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차아아아!
전신에 소름이 피어날 정도로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서,설마?”
설마 그 마법일 리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속임수야.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절대.’
의심의 눈초리로 세준을 응시하던 연희.
그녀의 눈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도서관 내부의 책들은 어느새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고,
홀로 놓여진 도서관의 의자들이 진동의 여파로 멋대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투툭. 투툭.
연희의 이마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살점에 닿는 그 감촉은 아주 차가웠다.
“후-”
어느새 연희의 입에서 입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실내의 온도는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정말 블리자드를 구현 하고 있는거란 말이야?’
믿을 수가 없었다.
블리자드.
상위급 얼음속성 광역 스킬로 2차 전직이 이루어져야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그때였다.
“도서관이 갑자기 왜 이렇게 춥지? 난방 껐나?”
“아! 누가 문 열어놨나봐. 아우, 시베리아 벌판같잖아….”
“관리인 아저씨 불러야겠어. 어디서 바람이 새나봐….”
사람들의 볼멘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들은 연희는 세준의 팔목을 탁! 잡았다.
“여기 도서관이에요. 충분히 봤으니까 그만해요.”
세준은 슬며시 웃었다. 그런 세준의 손에 피어난 얼음의 오라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연희는 세준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물었다.
“방금 그 마법 블리자드가 정말 맞았어요?”
알면서도 아직 믿기지가 않았는지 연희가 물었다.
세준이 끄덕였다.
놀라웠다.
블리자는 2차 전직 후에 획득하는 스킬이다.
2차 전직시 필요한 최소 레벨은 50이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그 레벨을 달성했다는 말이 아닌가.
일반인의 범주에서 레벨1에서 50까지 달성하는 시간은 빨라도 최소 몇 개월은 소요된다.
세준은 연희와 같은 시점에 헌터가 되어 이계로 넘어온지 한달이 막 지났다.
연희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 달만에 2차 전직을 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 믿기 힘들었다.
이 남자를 보니 순간, 그가 생각났다.
유난히 하얀 피부를 가진 그 녀석.
‘이시운.’
이시운. 그 또한 남들과는 다른 능력으로 빠른 레벨 업을 달성했다. F랭크가 보여줄 수 없는 놀라운 모습들을 보여준 이시운.
그리고 앞에 있는 이 남자.
‘세상엔 재능있는 사람들이 많구나.’
걷는 놈 위에 나는 놈.
나는 놈 위에 그 나는 놈을 새총으로 쏴 떨어뜨리는 놈이 있다했다.
‘새총으로 쏴 나는 놈을 떨어뜨리는 놈’같은 존재를 근 한 달만에 무려 두 명이나 만났다.
순간 연희는 자신이 초라해짐을 느꼈다.
‘난 이제 고작 레벨이 25인데….’
연희의 어깨를 움츠러들었다. 세준은 그런 연희를 보며 말했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같아요. 그 시간 안에 열정을 쏟아야지. 단순히 열심히 해서 통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잘한다고 통하는 세상도 아니고.”
연희는 진지하게 말하는 세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나사빠진 사람이라 생각해서 그의 말이 아까까진 들리지도 않았는데.
이젠 그의 말이 와닿는다.
그리고 그가 달라보인다.
세준은 벽에서 등을 떼며 말을 이었다.
“우린 최악의 헌터자격시험을 뚫고 들어온 상위 0.1%의 엘리트잖아요. 그 엘리트들 속에서 빛나려면 ‘열심히’와 ‘잘’이 통하질 않아요. 무조건 특별해야 하죠.”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앞에서 이런말을 하고 있으니 벽이 느껴졌다. 넘기 힘든 벽.
세준은 허리를 굽혀 연희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며 말했다.
“이틀 후에 서바이벌 테스트 날 봐요. 그때는 내가 몸소 보여줄게요. 그쪽이 믿지 않았던 극딜러 매지션의 위력을….”
그 말을 들은 연희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아…. 내 정신 좀 봐. 이틀 후에 서바이벌 테스트 하는 날이였지.’
서바이벌 테스트.
탐사시험을 거친 F랭크 헌터들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테스트였다.
가상 테스트에서 특정 순위권에 진입하면 스탯 업과 명성이 보상으로 주어진다.
스탯 업이란.
F랭크의 헌터가 E랭크로 거칠 필요없이 한 번에 D랭크 승급 시험을 치룰 수 있게 해주는 자격을 뜻했다.
‘절대로 나약한 헌터로 도태되진 않겠어.’
연희의 눈이 빛났다.
도서관에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장 레벨 업을 해서 최적의 능력치로 가상 테스트를 통과 해야지.
연희는 들고 있던 책을 정리하고 출구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녀의 걸음걸이엔 힘이 실려있었다.
세준은 자신의 안경 테를 만지작거리며 총총 걸어가는 연희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본다.
‘귀엽네, 쟤.’
***
헌터 아카데미 화장실 안.
볼륨있는 몸매의 여성이 화장실 거울을 내다보고 있다.
빨간 안경 테 사이로 빛나는 큰 눈.
그 밑으로,
탱탱한 가슴이 훤히 드러나도록 파인 하얀 유니폼 상의에 짧은 스커트 밑으로 쭉 찢어진 매끈한 다리 라인.
다소 짙은 화장을 한 여성은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물컹-
크고 탄력적인 촉감이 손으로 생생히 전해진다. 뿌듯한지 여성이 웃었다.
‘비록 내가 30대라도 C컵 가슴 하나는 쭉빵하게 살아있단 말이지?’
그녀가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다리를 감싼 살색 스타킹의 결이 돋보였다.
‘요즘 다이어트 하느라 다리도 잘 빠졌고~?’
그녀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응시하다가.
“으흠! 시운 씨. 며칠 만에 보네요?”
거울을 보고 혼자 인사한다. 그러다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게 아냐, 아냐. 더 살갑고 섹시하게.”
요염하게 눈을 뜬 여성의 입술이 다시 움직인다.
“으음. 시운 씨. 하이?”
“……….”
여성은 부끄러운지 뻘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혼자 웃음을 토해낸다.
아무래도 누군가와 만날 것을 대비해 인사연습을 하는 듯 하다.
오늘은 F랭크 헌터들이 서바이벌 테스트를 하는 날.
그를 만난다.
‘이시운.’
어리지만 남자 냄새가 나는….
175 정도로 적당히 큰 키에 자꾸 눈이 가게 하는 잘빠진 얼굴.
그리고, 잘생긴 얼굴.
잘.생.긴 얼굴….
“푸흐흐흐….”
또다시 그녀의 입에서 웃음이 비집고 튀어나왔다. 입을 틀어막고 어깨를 들석일 정도로 웃느라 그녀의 큰 가슴이 육감적으로 흔들렸다. 그리고 그 가슴께에 박힌 명찰 또한 흔들림에 맞춰 움직였다.
명찰로 눈이 움직였다.
유니폼과 명찰을 꿰뚫은 핀셋을 만지작 거리며 예쁘게 고정한다.
‘빨리 그 짜식이 왔음 좋겠다. 지금쯤 도착했으려나?’
성혜는 잘 묶은 머리칼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화장실에서 나와 회의실로 갔다.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두 명의 조무사가 성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성혜 언니 이제 오는 거야?”
“오, 오늘 화장 좀 잘 먹었다?”
그들의 인사에 미소로 화답한다.
“오늘 내가 화장이 좀 잘 먹긴 했나.”
“언니, 오늘 데이트 하러 가는 사람 같아.”
“푸하하, 데이트는 무슨.”
성혜는 실소를 터뜨리다가 조무사들 옆에서 말없이 서있는 30대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은 누구지?’
남자의 명찰을 훑었다.
‘화이트 게이트 지부 쪽 사람이구나.’
남성은 회의실 앞쪽의 빈 스크린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무언가 기다리는 눈치였다.
“틀어주시죠.”
남성이 말하자 조무사가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빈 스크린에서 영상이 흘러나왔다.
“저 친구가 그 친구죠?”
영상에 시선을 묻은 남성이 말했다.
“네, 양궁 국가대표 출신. 강혜령이요.”
“음….”
성혜 또한 스크린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스크린에는 한 여성이 활을 들고 현란하게 움직이며 화살을 미친 듯이 연발로 쏘고 있다. 그 화살에 꽂힌 몬스터들은 맥없이 픽픽 쓰러졌고.
놀라운 것은 생각없이 화살을 쏘아대는 것 같아도 화살은 백이면 백 족족 몬스터의 이마에 정확히 꽂혔다.
“와….”
조무사 한명이 탄성을 흘렸다.
성혜가 그 조무사에게 물었다.
“저 영상은 뭐야? 누군데?”
“아, 저 영상은 이번에 선발된 F급 헌터들 중에 유독 특출난 세 명의 모습을 하이라이트로 담은 영상이야. 일명 혜성급 신입생들.”
“혜성급 신입생들이라고?”
성혜의 눈이 스크린으로 옮겨갔다.
확실히 스크린 속 여성은 귀신같이 화살을 다루고 있었다. 특히나 여성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면서도 표정은 일절 흔들리지 않았다.
“저 친구가 바로 그 신궁(神弓) 강혜령이군요.”
장 대리가 스크린에 눈을 떼지 않고 말하자 조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영상이 넘어갔다.
“나왔다. 프로게이머 장세준!”
조무사 하나가 반색하며 말했다.
스크린 속에 비춰진 남성. 그리고 그 주위로 몬스터 떼들이 몰려들고 있다. 순간- 남성의 손에서 빛이 일면서 사방의 몬스터들의 몸뚱이가 얼어붙더니 그대로 찢겨진다. 그리고 몬스터 머리에서 튀어나오는 뇌수는 보고 있는 이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건 덤이고.
“저게 F랭크 헌터의 마력이란 말이야?”
지켜보던 윤성혜의 눈이 커졌다.
“응. 이번에 유망주 중 한명이야. 탑 프로게이머 출신이잖아.”
성혜는 커진 눈으로 스크린을 바라봤다. 스크린 속 남성이 완드를 허공에 올릴 때 마다 대형 몬스터들이 걸레짝이 되는 광경이 이어진다.
“놀랍다, F랭크가 우리보다 훨씬 강해보여.”
레벨 40대의 성혜가 놀라워했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남성의 마력이었다. 남성이 펼치는 마법은 남들이 사용하는 마법과 같았지만 뭔가 달랐다. 파괴력도, 그 범위도.
‘이번년도에는 재능있는 헌터들이 많이 나왔나 보구나.’
뒤이어 스크린은 다음 영상을 내보냈다. 영상을 보자 성혜의 심장이 뛰었다.
“이시운!”
성혜의 외침에 나머지 시선이 그녀에게로 옮겨갔다.
“저 친구. 아는 사람입니까?”
장 대리가 물었다.
“네. 우리 탐사시험에 속했었던 친구였고, 얼마 전에는….”
얼마 전에는 히든 던전도 같이 다녀왔다고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굳이 그것까진 말하긴 그랬다.
“저 친구 확실히 어떻던가요?”
장 대리가 물어왔다.
“네? 어떻다는 게 무슨 말씀이신지….”
“남들하고 확실히 다르냔 말씀입니다.”
“아, 그건.”
성혜는 설레는 눈으로 스크린을 고정했다. 스크린 속에서는 멧돼지 가죽을 덮어쓴 시운이 대검으로 몬스터들을 휘황찬란하게 요절내고 있었다.
“달라요, 확실히.”
성혜가 장 대리에게 눈짓하며 말했다.
“어떻게 다릅니까?”
계속 질문해오는 장 대리. 아마 이시운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다른 헌터보다 확실히 전투적인 면의 센스가 살아있고,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는 능력이 있어요. 또….”
성혜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어려서 그런지 꽤나 과감해요.”
“과감하다라….”
장 대리가 턱을 괸채 스크린을 뚫어지게 관찰한다.
“협회장님께서 유독 저 친구를 흥미로워 하신다는데.”
“협회장님께서요?”
장 대리의 말에 성혜의 뒷골이 싸해졌다. 동시에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협회장. 그에 대한 소문은 일찍히 접했던 성혜였기 때문이다.
***
아카데미 소강당.
강당 안으로 삼십여 명의 헌터들이 서있었다. 굳은 표정을 보니 꽤나 긴장을 삼킨 듯 했다.
‘스탯 업과 명성은 무조건 내가 얻어야 해…!’
‘괴물급 신입생이 많다고 들었는데 내가 1등할 수 있을까?’
‘아…. 처음이라 그런지 미치도록 긴장되네.’
‘할 수 있다! 내가 몬스터 다 쓸어버리고 1등 찍는 거야.’
모든 이들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들 틈에는 이시운도 있었다.
‘내가 속한 조가 B조이지.’
시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30명의 사복차림 헌터들이 눈에 들어온다. 시운과 같은 B조에서 경쟁을 벌일 30명의 헌터들이었다.
탁!
누군가 어깨를 쳤다.
“아이구, 오랜만이여?”
시운에게 인사를 건넨 헌터는 탐사시험을 함께했던 태식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의 입가로 나이를 대변하는 주름살이 자글했다.
“아저씨도 B조세요?”
“응~ 자네하고 또 함께하게 됐네. 이거 큰일인데? 자네같은 퍼팩트한 친구랑 경쟁을 해야 하다니.”
“퍼팩트라뇨…. 하하, 당치도 않습니다.”
멋쩍었다.
태식은 시운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 손길이 따뜻했다.
“지난번에는 너무 고마웠던 거 알지? 내 가슴 속에 묻고 있어. 덕분에 황천길을 내 명대로 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아닙니다.”
“고마우이. 저번엔 제대로 인사도 못 했는데…. 아무튼 이따 봄세! 난 내 줄로 돌아가야 해서.”
시운은 목례하며 답했다.
“……이시운 씨 맞죠?”
누군가 또 말을 걸어온다. 역시 탐사시험을 함께 했던 헌터다.
“저번엔 진짜, 진짜 고마웠어요.”
다른 사람이 또 말을 건다.
“탐사시험에서 벽을 깨서 우리를 살려줬었던 그 분이네…. 덕분에 우리 자식들한테 상주 맡길 걱정 덜었소.”
또 다른 사람도.
“아이고오! 접때 우리와 같은 조였던 그 사람 맞죠? 반가워라, 그때 그쪽 아니었으면 나 이렇게 숨쉬고 있지 않았을 거에요.”
또 다른 사람도.
“와우! 그때 그 던전의 일등공신 이시운 씨죠?”
이어서 다른 사람도.
“이시운 씨? 그때 완전 멋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고마움을 표현해온다. 동시에 시운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동경이 서려있다.
“………….”
쑥쓰러움에 말없이 미소로만 답했다.
‘처음이군, 이런 기분.’
뿌듯함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전생이나 그 전의 인생에서나 이런 적은 없었다.
항상 뭘 해도 제대로 이루어낸 게 없었고, 꼴찌란 것에만 익숙했다.
자신을 한심하단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이 익숙했었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아본 적도 없다.
가족과 지인 속만 타게 했었던 과거 시운은
‘사고만 안 치면 다행인 아이’ 였었다.
한 마디로 쓰레기였다.
개찌질하고 병신스러웠던 인생.
그런 주제에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DNA 탓이나 하고 자빠졌던 하등한 새끼였었다.
그런 자신이 이계에 오고서부터 이목을 받고, 인정을 받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기대라는 낯선 감정도 타인에게서 받아보고.
‘나도 누군가에게 인정이란 것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였다.’
가슴에 쌓여왔던 한이 터질 듯한 기분이다.
‘이제 더 이상 찌질하게는 살지 않는다.’
시궁창 같았던 인생은 두 번으로 족한다.
산전수전에 인생 3회차까지 온갖 일을 다 겪은 찌질이가 독 품고,
능력을 얻으면 어떻게 크는건지 정확히 보여줄 것이다.
‘이번 서바이벌 테스트는 내가 반드시 1위로 뚫겠다.’
또다시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그런데.
시운의 시야로 한 여자가 들어왔다.
‘저 여자, 설마?’
아는 여자다.
전생 뿐만 아니라,
그 전의 생에서도 알던 여자.
‘어떻게 저 여자가 이곳에 있지? 절대 헌터가 될 여자가 아닌데….’
그런데.
시야 속에 있던 여자가 고개를 돌렸고 시운과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의 시선이 한 5초 맞물렸을까.
여자가 걸어왔다.
시운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