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화
신예들의 등장 (2)
그녀가 걸어온다.시운 앞으로.
시운은 걸어오는 그녀를 주시했다. 검은 웨이브의 긴 머리칼. 러시아인 여성 같은 창백한 피부. 모델같이 길쭉한 몸매에 발을 한발 디딜 때마다 봉긋하게 솟아 휘어진 골반이 꿈틀거린다.
툭.
그녀가 멈춰섰다.
“……….”
시운과 그녀의 시선이 마주했다.
그녀. 예쁜 얼굴이지만 웃음끼없는 낯빛은 도도하고 차가웠다.
휙.
그녀는 시운에게 한 3초의 눈길을 줬을까. 이내 시선을 거두고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강혜령.’
그녀의 이름이었다.
시운은 그녀를 알고 있었다.
전생과 그 전생에서 강혜령은 유망주, 아니 양궁의 신이라 불릴 정도였다.
국가대표 양궁 출신.
올림픽 출전시마다 금메달을 싹쓸이 해오는 것은 기본이었다.
한 번도 그녀의 손을 거친 화살이 과녁의 정중앙을 적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별명은 신궁.
‘전생과 그 전생에서는 양궁 선수로 한 획을 그었던 여자인데 어째서 헌터가 되었을까.’
사람의 직업이 바뀔 수는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시운의 삶에서는 평행이론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확실한 건.’
확실한 건 평행이론이 성립되지 않는 라이프를 살고 있지만 전생, 그리고 현생에 동일인물들의 천성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즉 사람의 성격은 시운의 전생이든 현생이든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
“긴장되나 봐요?”
가녀린 목소리가 들리자 상념에서 깨어났다.
윤성혜 조무사가 활짝 웃고 있었다.
“긴장 조금 되네요.”
“근데 잘 할거에요. 내가 아는 시운 씨는 수석으로 테스트를 통과할 사람이니까…. 단.”
말을 멈춘 성혜의 낯빛이 변했다.
“이번 서바이벌 테스트에서 시운 씨에게 충분히 경쟁할만한 사람이 둘이나 있어요.”
“둘이요?”
의외의 말이었다.
성혜 또한 시운이 타레벨의 헌터에 비해 넘사벽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나 말고 괴물이 둘이나 더 있다는 이야기군.’
“시운 씨. 잠깐 손 좀 내밀어봐요.”
그녀의 말대로 시운은 손을 내밀었다. 성혜는 하얀 유니폼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 뒤에 시운의 팔목에 갖다대었다.
성혜는 허리를 숙이고 시운의 팔목에 테스트에 필요한 장치를 채워준다.
숙인 그녀의 쇄골 밑. 진하게 파인 유니폼 사이로 잘 익은 가슴 두 덩어리가 만나 이룬 골짜기가 보였다.
본능적으로 가슴골에 시선이 강하게 빨리듯 꽂혔다.
“이 장치는 서바이벌에서 시운 씨의 점수를 저장하고 기록하기 위한 장치에요.”
성혜가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골짜기가 움직인다.
침이 꿀꺽. 넘어간다.
볼이 발그레해진 시운은 시선을 돌렸다.
‘조무사 오늘 노출이 좀 심한데.’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우고 있는 시운. 그 반면 성혜의 입꼬리는 옅게 올라가 있었다.
‘이 팔뚝에 잔근육 좀 봐. 어린 녀석이 탄탄하네.’
은근스레 시운의 팔목을 더듬고서는 배시시 웃었다.
탁!
“다, 됐어요! 시운 씨.”
성혜가 굽힌 허리를 세우며 말했다.
“오늘 시운 씨 활약 기대할게요. 오늘 서바이벌 테스트 하는 거 헌터Tv 채널에 방영되는 거 알죠?”
그랬다.
F랭크 서바이벌 테스트는 이계의 티비 채널 헌터Tv에 생중계로 방영된다.
비록 말단의 랭크들의 서바이벌이지만 꽤나 많은 사람들이 채널을 시청할 것이었다.
혜성같은 신입을 찾아 스카웃하려는 길드장부터 헌터들, 헌터들과 경쟁을 벌이고 있는 용병 연합 등등 말이다.
특히나 이번 헌터 신입생 중에 신적인 재능을 가진 헌터들이 등장했다는 소문은 길드 연합들뿐만 아니라 헌터 커뮤니티에 은근히 퍼져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관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그럼 파이팅! 나도 지켜볼 거니까 허무하게 죽어서 탈락 되진 말고요!”
성혜는 시운에게 윙크를 한 번 날려주고는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
찰캉! 휙! 카앙!
비장한 소리들이 울렸다.
바로, 서바이벌 던전으로 향하는 헌터들의 검집, 활집, 인벤토리에서 무기들이 뽑히는 소리였다.
비장하게 들리는 소리만큼 헌터들의 얼굴도 비장했다.
‘나말고 괴물이 둘이라…. 그게 누굴까?’
시운은 예리한 시선으로 헌터들을 장비들을 둘러보았다.
‘죄다 레어급이군. 잠깐.’
시운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그 시선이 닿은 곳에는 에픽급 이상의 장비로 무장한 남자가 게이트를 바라보며 무심히 서있다.
‘자, 장세준?’
역시, 시운은 그를 알고 있었다.
전생과 그 전생 그리고 현생 모두 게임 업계를 평정한 신의 손을 가진 레전드 프로게이머.
어째서 게임계의 레전드가 헌터가 되어 이곳에 있는 거지?
이해가 안 갔다.
‘강혜령에 장세준까지….’
이번 생은 전생, 그리고 그 전생과 무언가 다르게 펼쳐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혹시 두명의 괴물 중 하나가 저 프로게이머 장세준이란 말인가.’
상념에 잠겨있을 동안 헌터들은 서서히 게이트 안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운은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걸음을 옮겨 게이트로 향했다.
이시운.
그는 아직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강혜령. 장세준. 뿐만 아니라 또 한 명의 사람이 이계로 오게될 것이란 것을….
그것도 자신과 아주 가까운 누군가가.
***
광활한 숲.
넓은 들판 주위로 숲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찰캉!
시운은 홍란검을 꺼내들었다.
‘숲이라.’
이미 서바이벌 테스트의 룰은 마스터했다.
룰은 이랬다.
48시간 동안 이어지는 서바이벌 테스트에서 획득한 포인트에 따라 순위가 집계 된다.
포인트는 몬스터에게 가한 대미지만큼 축적되는 방식.
또한 이곳에서 한 번 죽으면 손목에 착용한 시스템에 ‘사망’으로 간주되어 그대로 아웃되어 아카데미로 강제 이동 된다.
‘반드시 내가 1등을 하고 말 것이다. 스탯 업 보상은 단연 내가 차지할 테니까.
’
잠시 후,
“몬스터들이 어디있는 거죠?”
“숲을 뒤져보면 나오지 않을까요?”
“저기 전사 클래스 분! 저랑 파티 플레이 하시죠.”
“그럴까요? 아마 혼자보단 둘이 낫겠죠?”
숲을 누비는 헌터들의 대화소리가 이어졌다.
서바이벌 초반부인 지금 헌터들 대부분은 힘을 합쳐서 파티 플레이 방식으로 몬스터를 잡고 포인트를 획득하려는 눈치였다.
‘파티 플레이를 하는 것은 손해다. 파티를 맺고 몬스터를 하나 잡으면 획득 포인트는 파티 인원수 만큼 차감 되지.’
“저기요?”
말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남자 헌터 하나가 시운의 무기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와, 이거 화룡의 홍란검 아니에요?”
“맞아요.”
시선을 내려 헌터의 손에 머물었다. 철갑의 건틀렛. 그리고 레어급이지만 높은 방어력의 체인메일과 쇠각의 투구.
격투사 계열의 헌터였다.
“세 보이시는데 저랑 파티 맺고 포인트 팍팍! 따시죠?”
“괜찮아요. 혼자서 할 거라서.”
파티를 맺는 것은 의미가 없다. 유니크 장비에 월등한 스탯의 시운에게는 이 헌터는 걸림돌이 될뿐이었다.
“저랑 파티를 맺으면 도움이 될 텐데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죠? 격투가라면 끽해야 딜러 아니면 탱커 노릇이나 할 텐데…. 나 혼자서도 딜은 아, 잠깐.”
시운이 말을 멈췄다. 헌터는 그걸 보고서 씩 웃었다.
왜 말을 멈추었는지 안다는 얼굴이었다.
“서치 라는 스킬을 익혔겠군요?”
시운의 물음에 헌터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시운이 말했다.
“파티 신청 할게요.”
“역시! 바보는 아니신가보군? 네비게이션도 없는 이 숲에서 격투가의 서치 스킬은 반드시 필요하죠.”
헌터가 어깨에 힘을 주고 말했다. 그럴만 했다.
격투가 1차 전직 액티브 스킬 서치.
서치는 자신의 위치에서 반경 900m 안에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의 위치를 캐치하는 스킬이다.
단, 자신보다 레벨이 동등하거나 낮은 몬스터에 한해서만 말이다.
‘이 숲은 굉장히 넓어.’
그랬다. 숲은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고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떠올라 있었다. 이 숲의 대략적인 크기도 모르는 상황에서 몬스터를 찾아 헤매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는 스킬이 서치 스킬이었다.
[김현석 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레벨이 몇인지 봐야겠군.’
파티창을 열어보았다.
-파티 멤버
김현석 Lv 28. 격투가
HP : 100% MP: 100%
‘30도 안 되는 녀석이군.’
서치 스킬만 아니었으면 데리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자, 잠깐만요. 헌터님 클래스가…….”
헌터 김현식이 토끼눈을 뜨고 시운을 응시하고 있다.
아마 현식은 파티창을 열어 시운의 레벨을 훔쳐보다가 놀란 것이리라.
<이시운>
[클래스] 맹인
[분류] 헌터 [등급] F
[종족] 현계인 [성별] 남성
[레벨] 45
[생명력] 750/750 [마나] 232/232
[근력] <230> [민첩] <100>
[체력] <60>
[지능] 9 [지혜] 44
[열정] 3
[상태] 정상
[공복도] 0 [갈증도] 5 [피로감] 7
[여유 능력치] 21
“우, 우와……. 레벨이 45이네요?”
현식이 놀라워 한다.
한 번 더 놀랄 것이다.
방금보다 더.
“허, 억…. 클래스가 맹인?!”
아연실색한 현식은 입을 쩍 벌리고 시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어떻게 맹인이 눈을 뜨고 있을 수 있는 거죠?”
“그냥 전 좀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이제 그만 출발하죠?”
“마, 말도 안 돼……. 이런 경우는 첨 보는데.”
이런 반응도 이제 익숙하다.
시운은 미간을 찡그리며 현식에게 말했다.
“서치나 사용하세요.”
“아, 네, 네……. 서치.”
현식이라는 이 헌터 살짝 어리버리 해보인다.
현식이 시동어를 걸자 그의 몸에서 파란 빛 몇 개가 솟아나 그의 몸을 일렁였다.
“이 빛이 안내해 줄 거에요.”
현식이 말했다.
파란 빛은 현식의 몸을 빙빙 돌다가 공중에 휙 솟아오른 뒤에 앞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 빛을 따라 움직였다.
***
화르륵!
키엑!
화르르륵!
키에에엑! 키엑!
“와아……. 대박이다.”
현식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현식의 눈으로 신기한 광경이 들어오고 있다.
레벨 20대의 고블린들이 시운에게로 달려들다가 불에 몸뚱이가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것을 보고.
시운은 그저 검질 한 번 하지 않는다. 그런데. 고블린들이 시운의 발치에 서면 곧바로 머리에 불이 피어올랐고 두개골이 쩌적! 갈라지면서 뇌수를 뿜고 그 자리에 늘어지고 있다.
“고블린이 그냥 죽어버리네. 이거 무슨 효과에요?”
현식의 물음에 시운은 홍란검을 내밀면서 말했다.
“홍란검에 부여된 화염의 열기 효과에요. 홍란검의 특정 반경으로 몹이 접근하면 녹아버리죠.”
시운이 말하는 와중에도 고블린이 돌진해오다가 몸이 녹아버린다.
키엑!
키엑!
“대, 대박이다……. 역시 유니크 답네요. 근데 어떻게 헌터생활 두 달도 되지 않았는데 유니크 템에 그 정도 레벨을 찍은 거죠?”
“타고남이죠.”
“타고남……?”
동경이 서린 눈으로 시운을 바라보는 현식에게서 시선을 거둔 시운은 앞으로 걸어간다.
앞에는 한 쌍의 커다란 나무가 있다. 서치로 구현한 파란 빛이 나무 주위에서 빙돈다.
‘나무 안에 숨어있군.’
시운이 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키엑! 키엑!
나무의 거대한 숲줄기 안에서 괴성소리가 들려온다. 화염의 열기에 의해 고블린의 육체가 녹는 소리일 것이다.
투툭! 툭! 툭!
나무 안에 숨어있던 고블린들이 땅에 추락하는 소리다.
놈들의 몸뚱이는 괴랄하게 타서 형체가 없었다.
키에엑!
고블린 한 놈이 달려온다.
부웅!
키에에엑!
홍란검의 일격에 그대로 녹아버린다.
키엑!
또 한 마리가 달려온다.
화르륵!
다시 익어버린다.
“템빨이 진짜 사기긴 사기구나.”
지켜보던 현식의 눈은 커져있었다.
‘현재까지 획득한 포인트를 확인해야겠어.’
손목에 감은 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띠딕!
창이 떠올랐다.
[이시운: 450 Point]
‘450 포인트라?’
고블린을 대량 학살하고도 포인트는 기대보다 낮았다.
고블린은 저레벨의 몬스터라 처치해도 획득하는 포인트는 낮은 것 같다.
‘고블린 한 마리에 포인트가 몇인지 확인해볼까.’
시운은 십 미터 앞에서 창을 들고 뛰어오는 고블린을 바라봤다.
“투척.”
키엑!
수리검이 고블린의 목을 꿰뚫었다. 뚫린 목 사이로 살점이 삐져나온 고블린은 자기 목을 틀어막으며 사라진다.
[이시운: 455 Point]
‘고블린 한 마리당 5 포인트군.’
서바이벌 테스트를 시작한지 이제 30분 정도가 지났다.
고블린을 잡고 얻은 포인트로는 영 기대에 차지 않았다.
‘김현식의 레벨은 28.’
현식은 28이라는 레벨이다. 그렇다면 동급 또는 그 이하의 몬스터만 찾아낼 수 있는 서치 기능이 의미가 없어진다.
끽해야 서치를 통해서 고블린만 발견할 테니까.
[파티를 해제하였습니다.]
“뭐야! 갑자기 왜 파티를 취소한 거죠?”
현식이 핏대를 세우며 물었다.
“이제 그만 서로 찢어지죠.”
“아, 왜요? 내 서치 기능만 있으면 숨어있는 고블린들은 다 찾아낼 수 있는데!”
“그래도 나 덕분에 그쪽도 455 포인트 쌓았잖아요. 그리고 고블린만 잡아서는 이 서바이벌 테스트에서 순위 못 찍어요.”
“아, 진짜……. 그래도 혼자보단 둘이 낫잖아요!”
현식은 짜증이 났는지 건틀렛을 착용한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냥, 그만 찢어지죠.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봅시다.”
“하…….”
현식은 시운을 흘기고서는 바닥에 침을 한번 퉤, 뱉었다. 그리고 가버렸다. 걸어가다가 한 번 뒤돌아서서 시운을 한 번 쏘아봐주는 건 덤이었다.
굳이 더 데리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뿐이었다.
시운은 왼손에 휘감은 장치를 살폈다.
‘현재 순위가 몇위인지 한 번 볼까? 그래도 내가 1등이겠지?’
띠딕!
장치에 탑재된 순위 서칭 기능을 사용했다.
그러자.
현재 시운의 순위가 눈앞에 떠올랐다.
“뭐, 뭐야?”
순위를 본 시운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이 서바이벌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