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화
생존 서바이벌 (4)
시운의 전생.그리고 그전의 생.
그 두 개의 생에서 강혜령은 유명한 여자였다.
‘신궁. 메달리스트.’
그랬다. 그녀는 누가 뭐래도 메달을 쓸어와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의 순위를 올려주는 비장의 카드였다.
그러나.
‘비운의 메달리스트.’
그녀는 시운의 전생과 그 전생에서 똑같은 일을 겪게 된다.
그 일은 강혜령이 30대 후반이 되어서야 기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코치의 암묵적인 성폭행.’
그녀는 20대의 젊은 시절. 코치에게 수차례 성폭행을 당했던 것.
그녀의 성격은 밝았고 누구보다 열정이 가득한 예쁜 여자였지만.
그 사건들 이후로 그녀의 성격은 변했었다.
차갑고. 남을 경계하며. 웃질 않게된.
그런 사연의 여자였다.
‘안타까워.’
어쩌면 이번 생에서 양궁의 길이 아닌 헌터의 길에 접어든 것도.
그 일 때문일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어쨌든.’
쉬지 않고 움직여야할 때였다.
‘다음으로 향해볼 곳은.’
또 다른 던전을 찾아야 한다.
던전의 보스를 통해 포인트를 획득해야만이 장세준을 따라잡을 수 있다.
마침 그때.
알람 하나가 허공에서 쏟아져 울렸다.
………그 알람은 시운의 얼굴을 뒤틀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안내의 말씀 드립니다. 서바이벌의 룰이 잠시 변경될 예정입니다.]
‘뭐? 룰이 바뀐다고?’
알람은 계속 이어진다.
[지금부터 15분간. 모든 헌터들의 상태는 PK 상태로 변합니다. 다른 헌터들을 탈락 시키면 탈락 시킨 헌터가 가지고 있는 포인트만큼 획득할 수 있습니다. 그럼 무사히 마지막까지 서바이벌을 완수 해내길 바랍니다.]
‘뭐, 뭐라고?’
뜬금없었다. 그것도 매우.
15분간 피케이 상태로 변한다. 그리고 타 헌터들을 아웃시키면 아웃된 헌터가 가지고 있던 포인트만큼을 획득한다라.
‘죽이던지 그게 싫으면 죽던지 그 이야기잖아?’
게다가.
알람의 마지막 문구 또한 어이가 없었다.
-그럼 무사히 마지막까지 서바이벌을 완수해내길 바랍니다.
‘무사히는 개뿔.’
룰을 급하게 바꿨다. 그것도 피케이 모드에다가 다른 헌터를 죽이면 포인트를 준단다. 그래놓고 무사히 서바이벌을 완수해내길 바란다니.
‘말같지 않은 소리.’
개같은 소리지만.
상황에 적응해야 했다.
주어진 상황에 불만인 채 움직이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잠시 후.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의 구름들이 움직이더니 그 구름들이 숫자를 만들어 냈다.
00: 14: 59
‘타이머군.’
시작된 것이었다.
‘현재 아웃되고 남아있는 헌터는 약 열네 명쯤 되니까.’
굳이 헌터들을 죽이고 싶지는 않지만.
룰이 바뀌었고. 포인트를 따내야 하니 선비처럼 굴 마음은 없다.
시운은 던전이 아닌 다른 곳으로 곧바로 움직였다.
이시운.
그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룰이 급작스럽게 바뀐 이유가 자신을 지켜보는 누군가의 입김 때문이라는 것을.
***
헌터는 욕지기를 내뱉으며 은연의 스킬을 사용하여 몸을 감추고 풀숲을 거닐고 있었다. 예상했던 계획이 거의 수포로 돌아갔다.
‘그 망할 마법사놈.’
그 마법사에게 기습을 날렸다. 자신과 같은 어쌔신과 한 조를 이루어서.
그런데 그게 먹혀들지 않았고.
놈과의 수싸움에서 밀리게 되면서 헌터는 자신의 친구도 잃고.
혼자 남게 되었다.
‘지금 피케이 모드가 진행된다면.’
어쩌면.
아직 모든 게 망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3위권 안으로 탈환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피케이 모드가 되었으니 상위권 놈들이 죽도록 싸우고, 그 밑에 놈들은 치열하게 싸우다 뒈지고 그렇게 딱 두 놈만 남을 때까지 내가 이곳에서 숨어있다가……’
피케이 모드가 끝나면 불쑥 나타난 뒤에.
헌터들과 혈전을 벌여 정신없을 남은 헌터들에게 기습을 놓아서 모두 죽여버리는 것.
‘그렇게 하면 상위권 득점은 내 차지가 되는 군.’
룰이 급작스럽게 변경된 것은 잘 된 일이었다.
몸을 최대한 숙인 채 걸었다.
‘내 은연 상태는 60퍼센트나 되는 내 몸을 투명하게 만들어준다. 거기다가 이렇게 몸을 완전히 숙이고 닌자처럼 걸으면 날 발견할 놈은 없을거고.’
60퍼센트의 투명화.
일반인이 그것을 멀리서 구분하기란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컥!”
숨이…… 숨이 막혀왔다.
“뭐야?”
목이 콱 조여왔고 몸이 저절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우욱. 아,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앞에는 아무 것도 없다.
아니. 방금 무언가가 번쩍 하고 나타났다. 갑작스럽게.
“반가워?”
해맑게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아무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목이 조이는 느낌과 함께 남자가 나타난단 말인가!
“그웨웨웩!”
목이 조인 채 남자의 괴력에 의해 허공에 들려있는 남자는 입에서 거품을 질질 뱉어냈다.
“네가 남들에게 했던 짓거리를 똑같이 당하는 게 어떻지?”
“크헉. 뭐, 뭐야……. 너, 누구야?”
숨이 조여옴과 함께 머리가 핑 돌았다. 뇌압이 상승함에 머리가 아찔해져 왔다.
“난 이시운이라는 헌터.”
“이, 이, 시,우운?”
남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갑작스레 기습을 할 수 있었는지.
분명 텔레포트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시운이라는 남자의 무기를 보아 어쌔신도 아닐 터.
“너보다 한수 위의 은신 계열 스킬을 사용했을 뿐이야.”
“뭐, 뭐?!”
남자는 자신의 궁금함을 말로서 해소시켜 준다. 믿을 수가 없다.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이네. 사실 네가 최소 장세준이란 장애물은 좀 없애주길 바랬는데.”
“크우욱…. 이, 이거 놔! 놓고 이야기 하자!”
허공에 뜨인 채 다리만 대롱거리는 남자의 초점이 흐려지고 있었다.
“너도 다른 사람한테 똑같이 이렇게 했을 거잖아. 당한 사람은 살려달라고 했을 것이고. 너는 싸이코패스처럼 웃으며 그 부탁을 칼로 대답했고.”
이시운이라는 이 남자.
자신과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음에도 모든 걸 알고 있는 듯 하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또 짜증이 났던 건. 좋은 구경을 하고 있는데 네가 훼방을 놓았기 때문이야.”
“흐억.”
“그럼 아카데미로 가라. 그곳에는 이를 갈고 너를 기다릴 사람들이 많을거야.”
시운이 자신감있게 말했다. 그 말뜻을 알 수 있었다.
편법이 섞인 반칙으로 헌터들의 뒤를 야무지게 기습했다. 기습당하고 아웃당한 헌터들이 분명 아카데미에서 자신을 벼루며 기다리고 있을 것.
“씨팔.. 안 돼…….”
남자는 죽어가면서 깨달았다.
지금 이 서바이벌에는 적어도 미친 놈이 두명이나 있다는 것을.
[열일곱 탈락자 발생!]
투욱.
남자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자 시운은 손에 쥔 힘을 풀었다.
그러자.
남자는 그대로 힘없이 바닥에 떨어진다.
[1520 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고작 1520 포인트?’
실망스러웠다.
하기야. 헌터들 뒤만 기습하며 몬스터는 거의 잡지도 않았을 놈들인 건 알았다.
“은신.”
시운의 입술이 움직이자 전신이 투명해진다.
투명해진 몸 사이로 풀숲의 광경이 그대로 투영된다.
“맹인의 소리.”
시운의 귀가 떨려오면서.
주변 만물의 소리들이 더욱 생생하게 들려온다.
“………….”
눈을 감고 청각에 집중하던 시운이 눈을 비집어떴다.
‘찾았다. 한명.’
***
‘제기랄! 무슨 밑도 끝도 없이 피케이 모드냐고!’
현식은 나무 위에 올라가 원숭이처럼 매달려있다.
우스운 꼴이었다.
상황이 상황인만큼.
마음 놓고 돌아다니다간 헌터들에게 그대로 당해서 아웃될 게 분명했다.
‘X팔……. 그 유니크 무기를 든 놈 옆에 붙어다녔으면 이런 걱정할 일도 없었을 텐데.’
템빨로 고블린을 휩쓸던 그 이시운이라는 헌터가 생각났다.
그가 강제로 파티를 해제하는 바람에 현식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고.
부아가 치민 마음에 그 속으로 욕지기를 뱉으며 그 헌터를 노려보고 땅에 침을 탁! 뱉어주었다.
‘됐어. 여기서 존버만 하면….’
여기서 딱.
10분만 버티면.
피케이 모드는 끝이 난다.
이곳이라면 아무도 발견할 수 없을 터.
그런데.
“아, 아니?!”
현식이 놀라 혼잣말을 내뱉었다.
방금까지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자신이 매달린 나무 밑 누군가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으니까.
‘뭔데, 저놈? 어떻게 날 발견한 거야?’
천천히 고개를 내밀어 그 밑을 보려는데.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그러니까 내려 와.”
친숙한 목소리였다.
바로. 얼마 전 자신과 동행했던 그 템빨 놈이었다.
“휴…. 놀랬잖아요.”
현식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나무에서 점프했다.
툭.
시운이란 녀석은 여전히 불이 피어나는 검을 들고서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김현식은 딱히 경계를 하지 않았다.
피케이 모드라 하더라도 얼마 전까지 나름 동고동락한 사이였기에.
현식은 미안한 얼굴을 하는 척 하면서 입을 연다.
“그…. 파티 취소했다고 발끈 했던 건 미안했어요.”
“뭐, 그럴 수도 있죠.”
“그리고 눈빛을 쏘고 침을 뱉었던 것도 미안했습니다.”
현식은 정중하게 사과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 웃고 있었다.
‘이 템빨 놈만 있으면 누가 공격해와도 걱정이 없다. 잘된 일이야. 이놈은 그리고 마냥 착해보여. 잘 구슬려서 내 보디가드 호구로 쓰면 그만이지.’
“나를 만나서 반가운가요?”
시운이 물었다. 다소 말끝이 휙 올라간 투가 좀 이상했다.
“반갑죠. 당연히! 안 그래도 헌터님 걱정을 많이 했다구요.”
“걱정?”
시운은 그 말에 반문하며 웃었다. 웃음 뒤로 시운의 입에서 두 마디의 말이 흘러나온다.
“나도 꽤 반가운데.”
시운의 말에 현식은 ‘먹혔다!’라 생각하며 안심을 하려는데.
푸슉.
그 안심 대신 뱃속이 터지는 기분이 들면서 입밖으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우우욱.”
“난 예의없는 놈들은 딱 질색이라서.”
현식의 뱃속에 홍란검을 쑤신 채 시운은 웃으며 말했다. 현식이 입밖으로 피를 내지르는 모습을 천천히 감상하면서.
“크헉, 크악….”
날선 검날이 살점을 찢는 통증만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몸속이 타들어가는 참기 힘든 통증도 같이 느껴졌다.
슈욱.
검신을 빼내었다.
“으윽……!”
현식이 다리를 휘청이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가 쓰러진 바닥 주위로 내장이 섞인 핏물이 늘어나온다.
힘겹게 고개를 든 현식은 마지막 힘을 다해 시운을 노려보았다
.
“개, 개새끼……. 치사한 새끼이….”
마지막 현식의 발악이였다.
그러나 그걸 맞받아치는 소리는 아웃되기 전 현식의 멘탈을 그대로 뭉개버리기에 충분했다.
“예의없고 남에게 기댈 줄만 알며, 가식 그 자체인 주제에 레벨은 또 30도 안 되는 녀석. 내가 죽이지 않아도 넌 다른 놈에게 죽었을 거야.”
“이, 이이……….”
털썩.
[열여덞 번째 탈락자 발생!]
[38000 Point를 획득하였습니다.]
“휴.”
시운은 검신에 묻은 묽은 피를 툭툭 털어냈다.
‘앞으로 열두 명 남은 건가.’
그때 이어진 알람소리.
[열아홉 번째 탈락자 발생!]
‘나 말고도 헌터들이 또 싸우다 죽었군.’
다른 사냥감을 찾을 차례였다.
근데. 한명의 뇌리에 얼굴이 떠올랐다.
‘정연희는 아직 살아있을까?’
빚진 것도 있는데.
만약 그녀가 살아있다면 빚도 갚을 겸 서바이벌이 끝날 때까지 지켜줄 심산이었다.
***
어느새 서바이벌은 막바지에 이르러 가고 있었다.
이 조에 참가한 총 인원은 30명.
그중 아웃된 인원은 19명.
이제 남은 인원은 11명 밖에 되질 않았다.
서바이벌이 이어지고 있는 맵은 아름다운 경치를 뽐내고 있지만 그 경치속에 흐르는 공기는 묵직했다.
서로 언제 죽이고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그 숲을 남녀가 걷고 있다.
마법사들이었다.
“갑자기 피케이 모드라니. 참 황당하지 않아요?”
연희는 옆에서 같이 걷고 있는 세준에게 물었다.
세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차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서바이벌의 룰이 이렇게 갑자기 바뀌는 게 어딨대. 힘들게 포인트 올렸다가 다른 헌터한테 당하면 그거 온전히 빼앗기는 거잖아.”
연희의 입술이 삐죽 뛰어나왔다. 그녀가 걸으면서 동시에 그녀의 보란 머리칼이 찰랑인다.
세준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연희는 뜬금없이 머리 위에 손을 올린 세준의 행동이 썩 좋진 않아서.
똑바로 세준을 쳐다봤다.
호감있는 남자가 해줘야 설레는 이 행동을 관심없는 남자가 갑작스런 타이밍에 해 오니 좀 그랬다.
그치만.
자신을 서바이벌에서 몇 차례 구해주었던 사람이기에 손길을 뿌리치며 화를 내고픈 마음을 눌렀다.
“갑자기 바뀐 룰이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냐고요?”
대답 없는 연희에게 세준이 되물었다.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죠!”
따지듯이 소리쳤다. 그 반응에 세준은 피식 웃었다.
‘뭐야?’
연희는 기분이 나빠져 얼굴이 일그러진다.
방금 그가 지은 미소와 표정이 단순한 미소같아 보이진 않았다. 마치 코웃음을 치는 느낌이랄까.
“장세준 씨는 지금 이 룰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애초에 그럼 서바이벌에 투입되기 전에 헌터들에게 룰이 바뀔 수도 있다고 안내라도 했어야죠.”
따박따박 뱉어내는 연희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세준에게서 시선을 떼 고개를 돌렸다.
“훗.”
세준이 웃고 있었다.
싸늘하게.
그리고 곧.
세준의 얼굴이 악귀처럼 변해갔다.
연희는 그것도 모르고 앞만 보고 툴툴대며 걸어간다.
‘일회용이 용도를 다했으면 버려져야지.’
세준의 손이 점점 자신의 등에 장착된 완드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