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만 3회차-76화 (76/278)

제 76화

이세계로 (3)

정숙한 분위기에 주변 공기까지 묵직해지는 느낌.안대를 쓴 안내원의 무표정한 얼굴 근육은 입술을 움직이기 위해 최소한만 실룩였다.

“헌터님은 우리 맹인 직업소에 몇 안 되는 맹인 중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기대하고 있는 분입니다.”

안내원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기대라.’

듣는 시운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란 호감도까지 상승했다는 알림은 들은 상태다.

허나.

그런 시스템적인 것을 떠나서.

안내원의 한마디에는 인간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무언가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헌터님. 선택을 해 주세요. 전직을 하러 오신 것일 테니까.”

선택을 하란다.

말없이 안내원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린다.

“제 번거로운 부탁 몇 개를 들어주시면 우리 직업소의 기대주인 헌터님에게 새로운 길의 전직 클래스를 열어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부탁이 언짢으시다면 그대로 전직하셔도 좋아요. 선택을 해 주길 바랍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그녀는 고개를 가만히 멈춘 채 시운을 응시했다. 안대로 덮여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고민 할 거 뭐 있나? 부탁 몇 개만 들어주면 히든 루트의 전직을 얻을 수 있는데.’

곧바로 입을 열었다.

“들어 드리겠습니다.”

안내원의 무표정한 근육이 미세히 움직였다.

일반인이라면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미묘함이었지만 시운의 눈으로는 그것이.

‘반색.’

이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제 부탁은….”

시운의 눈으로 퀘스트창이 떠올랐다.

[미르의 부탁][직업 퀘스트]

정화봉 야산에 거주하는 몬스터를 모두 처치하라.

성공 조건: 몬스터 처치 (0/1000)

실패 조건: 미르와의 관계도 하락. 또는 다른 직업으로의 전직.

보상: 다음 퀘스트 수행 가능.

‘처, 천마리를 처치하라고?’

이거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

뭐, 하긴 히든 직업에서 또 히든 루트를 통해 히든 직업을 얻는 것인데 고생이 없을 리가 있으랴.

그때.

“제 부탁에 대한 내용은 이미 헌터님의 눈에 면밀히 표시되었을 테죠.”

안내원은 알고 있단 듯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다녀오도록 하지요.”

시운은 급한 발걸음으로 나간 뒤 문을 열었다.

문 틈새로 몸을 반 정도 집어넣으려는 그때.

“헌터님.”

안내원의 나직한 육성이 들린다.

고개를 돌려 안내원을 바라봤다.

그녀는 굳은 고개로 입술만 움직인다.

“제 기대를 반드시 져버리지 않길 바라겠습니다.”

“걱정 붙들어 매세요.”

시운은 씨익 웃어보이며 그대로 나갔다. 문의 움직임에 의해 문 틈새의 곰팡이와 먼지가 떨어져 바닥을 어지럽힌 것은 사족이고.

“……….”

안내원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곽원이란 헌터님이 그렇게 되고 참 안타까웠는데…. 당신만은 꼭 헤르네메스님의 가호를 져버리지 않고 이 길을 계속 걸어주시길.’

그녀는 방금 이시운을 보며 한 사내를 떠올렸다.

맹인의 길을 택한 곽원이라는 남자.

시각을 포기한 그는,

짐승같은 오감으로 블랙 헌터들을 떨게 한 인물이었다.

지팡이를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미묘하게 떨렸다.

* * *

레프론의 외곽지대를 거슬러 쭉 올라가면서 들판을 지나 도착한 것은 정화봉이라는 야산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온통 산이고 도시는 하나도 없군.’

고개를 들어보니 산기슭의 비탈길이 펼쳐져 있고.

사람이 다녀간 흔적은 없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계단조차 없는 데다가, 온통 무성하게 돋아난 잡초와 투박하게 펼쳐진 바위와 잎사귀가 수북한 나무들 뿐이었다.

“질주.”

다리가 빠르게 움직인다.

비탈길을 뛰어오르는 시운의 앞머리칼이 휘날렸다.

그렇게 좀 더 올라가자.

꾸워억! 꾸워억!

허스키한 짐승의 노성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대왕 고슴도치 Lv. 54]

[대왕 고슴도치 Lv. 54]

[변종 고슴도치 Lv. 47]

삐죽- 솟은 가시를 세우며 사람만한 고슴도치 세 마리가 꼬리를 살랑이며 시운에게 기어오듯 돌진해 왔다.

고슴도치 주제에 속도는 또 얼마나 빠른지.

민첩성은 쥐새끼만큼 날렵했다.

차캉!

홍란검을 그대로 빼들었다.

푸슉-

꿰에엑!

쉬익!

꾸아악!

푸슈욱-

꾸억!

검의 세 합.

쑤시고, 베고, 쑤셨다.

탄탄한 가시가 부서지고 몸통의 살점을 뜯어 흘린 고슴도치들의 눈알이 돌아가며 등을 바닥에 눕히고 늘어졌다.

화염의 열기에 의해 천장을 향해 뉘인 놈들의 뱃가죽이 활활 타는 것은 덤이었고.

‘맷집은 약하군. 아니, 내가 렙에 비해 근력 수준이 너무 센 거겠지.’

이제 3마리.

997마리를 처치해야 퀘스트가 완료 된다.

그러기 위해선 속히 움직여야 했다.

빠강!

까아아악!

푹-

께에엑!

푸슉-

꾸에엑!

-변종 사슴을 처치하였습니다.

-변종 사슴을 처치하였습니다.

-변종 사슴을 처치하였습니다.

홍란검의 검신에 사슴의 뜯겨나간 살점이 베여있다.

툭툭, 땅으로 털어낸다.

핏비린내가 검신에서 진하게 흘러나왔다.

‘이제 아홉 마리라.’

산을 오르고 오르며 처치한 몬스터는 이제 고작 아홉 마리.

남은 몬스터 수는 무려 991마리.

‘그냥 화끈하게 가 줘야겠다.’

정석의 루트 말고 다른 루트로 사냥방식을 바꿔야겠단 것을 느꼈다.

그리고.

터덕! 터덕!

산짐승 두 마리가 바위를 찍어내리며 무섭게 솟아 내려왔다.

“홍란의 일참.”

검신에서 피어난 오라는 폭발적인 화염을 만들어낸다.

끄에에엑!

끄엑!

끄에에엑!

몸통이 녹아 일그러지는 살점 소리와 짐승들의 역한 비명소리가 이어졌고.

활활!

퍼져나간 불길은 주위의 나무 잎사귀와 잡초에 옮겨나가 산을 활활 태우기 시작했다.

“좋았어.”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피어난 불길에 의해 연기가 자욱히 하늘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활활활!

불길은 더욱 거세졌고.

화염은 주변을 가득 매우기 시작했다.

“맹인불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운의 전신이 미묘한 오라에 뒤덮였다.

‘화상 상태를 방지하기 위해서.’

그랬다.

제아무리 시운이 시전한 스킬이라 대미지는 받지 않는다고 해도,

화염이 옮겨붙어 산이 타들어가면 그 불길에 의해 화상 상태에 빠질 수 있었다.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상태이상에서 무적이 되는 맹인불괴를 시전한 것이었다.

* * *

“홍란의 일참.”

파르르륵!

또 다시 불길이 번진다.

산속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면서.

산 곳곳에 홍란의 일참을 친절하게 시전해 주었다.

그러자.

정화봉 야산 일대는 그대로 화염에 뒤덮인 채 타들어가고 있었다.

꿰에에엑!

-대왕 사슴을 처치하였습니다.

꾸아아악!

-변종 고슴도치를 처치하였습니다.

꾸억! 꾸어억!

-아종 멧돼지를 처치하였습니다.

번개같이 번진 불길은 정화산 일대의 몬스터의 살점을 무섭게 삼키는 중이었다.

위기를 느낀 산속의 몬스터들은 모두 주거지에서 벗어나와 그대로 산 밖으로 몸뚱이를 뒤흔들며 뛰어갔다.

그러다가도.

끼에에엑!

꾸에엑!

꺼윽! 꺼으윽!

이어지는 비명 소리.

위기의식을 본능으로 빠르게 느끼는 산짐승들조차.

모든 것을 집어 삼켜 다 녹여버리는 불길을 피해내진 못했다.

타드득! 타득!

잎사귀와 나뭇잎 바위, 잡초, 무성히 돋아난 꽃잎까지………

산속의 모든 만물들이 퍼져나가는 화염에 의해 절로 고개를 숙이고 시커먼 잿더미로 변질되는 순간이다.

시운은 불길이 아직 닿지 않은 높은 언덕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며 비릿하게 미소를 씹고 있다.

‘잘 타들어가고 있구나.’

퀘스트창을 열어보았다.

[미르의 부탁][직업 퀘스트]

정화봉 야산에 거주하는 몬스터를 모두 처치하라.

성공 조건: 몬스터 처치 (364/1000)

실패 조건: 미르와의 관계도 하락. 또는 다른 직업으로의 전직.

보상: 다음 퀘스트 수행 가능.

몬스터의 뱃가죽을 굳이 직접 쑤시지 않아도.

홍란검에서 번져나간 불길에 의해.

어느새 364마리의 몬스터가 죽어나간 것이었다.

이윽고.

죽은 몬스터의 숫자는 숨김없이 그대로 올라갔다.

365…

368…

390…

415…

430…

485…

무식하게 스킬을 사용해 편하게 몬스터의 처치수를 채우는 일종의 편법인 것이었다.

정화봉 야산의 꼭대기.

크오오오!

늑대형 몬스터가 눈알을 뒤집고 거센 포효를 내질렀다.

어디선가 솟아난 불길들.

그리고 동족들이 허무히 죽어나가는 것을 보자 분노한 것이었다.

크르르르…!

인간처럼 두 발을 짚은 채 서서 두 팔에 솟아난 발톱을 삐죽거리는 야수의 눈은 붉은 살기를 피어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 짓거리를 일삼은 놈은 반드시 찢어발겨 죽이리라.

그런 눈빛이었다.

야수는 네 발을 사용하여 능수능란하게 바위와 바위를 뛰어넘어 불길을 피하며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크오오오!

반드시.

이 작태를 일삼은 인간놈을 갈아마셔 주리라.

크륵?

그때.

인간의 살코기 냄새가 흘러나왔다.

곧바로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네가 여기의 보스냐?”

물어온 것은 검을 든 남자였다.

태연히도 물어오는 그 남자의 검에서는 붉은 열기가 공기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크러어어어!

저 놈이다.

저 놈이 이 짓거리를 한 주범이다.

용서치 않는다.

피잉!

네 발로 바위를 짚고 무섭게 뛰어올라 남자에게로 날아갔다.

샥! 샤악! 샥!

크에에엑!

무언가 세 번 번쩍이더니 육신이 찢기는 느낌과 함께 온 몸이 익어가는 느낌이 일었다.

놈은 아무래도 보통 인간이 아닌 듯 하다.

크아아아!

그러나.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동족을 짓밟은 복수를 하기 위해서.

야수는 일어선 채 두 발을 빠르게 움직이며 윗 발을 남자에게 마구 휘둘렀다.

창! 차앙! 창!

크륵!

남자는 현란한 검질로 그 공격들을 모조리 튕겨내었고.

익살스럽게 웃고 있었다.

“보스급 치곤 좀 느린데?”

얄궃게 도발하는 남자.

가슴에서 분노라는 감정이 뜨겁게 올라온다.

반드시 죽이리라! 죽여버리리라!

크아아아!

벌린 아가리를 통해 질러낸 포효와 함께 모든 무게를 실은 발톱을 휘둘렀는데………

발톱은 타겟이 아닌 나무 기둥에 꽂혔다. 애꿏게 긁혀버린 기둥에는 발톱자국이 선하게 드러났다.

그때.

“여기다, 카운터 어택.”

푸슈욱-

크에에에에에!!

방금 전 그 검격보다 더욱 찌릿한 검신이 육신에 파고들자.

온 몸이 짖이겨지는 통증과 함께-

시야가 흐릿해졌다.

크우우우….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

앞에 흐리게 보이는 광경에선.

맹렬히 타들어가는 연기가 보였고 그 속으로 유유히 걸어오는 남자의 형태가 보였다.

“생긴 것 보다는 좀 허약하네. 미안한데 좀 죽어 줘야겠어.”

이 남자,

지금껏 상대했던 싱거운 사람놈들과는 달랐다.

그런 그 남자의 검신이 남자의 눈높이까지 향하였고………

푸슉-

머릿가죽이 터지는 느낌과 함께.

의식은 스위치가 꺼지듯 없어졌다.

동족과 내 땅을 도륙낸 남자에게 제대로 상처조차 입히지 못하고 이렇게 눈을 감는 것이 허망할 뿐이었다.

“부, 불이 났어?”

“산불이야!”

타가닥- 타가닥-

기병 둘이서 들판을 달렸다.

들판 앞으로는 불길에 뒤삼킨 야산이 맹렬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연기는 산의 하늘을 완전히 덮어 처참한 광경을 일구어낸 상태.

말발굽 소리를 더욱 요란하게 내며.

산으로 향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란 말인가! 어떻게 저 산이 불에 탄단 말이야?”

“흐음…. 저 산에는 그 괴물이 살고있지 않냐?”

기병 둘은 말을 몰면서도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도시 인근에 위치한 산이라면 당장에 민병대를 동원하여 불을 끄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이 정화봉이란 야산 주위에는 사람이 살지를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야산은 레프론 도시민들에겐 골칫거리 그 자체였다.

툭하면 굶주린 들짐승들이 도시까지 떠내려와서 사람에게 공격을 가했고.

민병대들은 그 들짐승들을 잡느라 혈안이었다.

사람이 죽는 일 또한 빈번해지는 탓에,

정화봉 야산에 민병대 몇 부대를 투입하여 몬스터의 씨를 말리라는 명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저 정화봉의 산속 동굴에 서식하는 야수라 불리우는 몬스터 하나에 민병대 몇 부대가 모조리 사살되고 말았었다.

“아마 그 야수가 늑대처럼 생겼고, 인간처럼 걸어다니는 놈이랬지? 얼마나 흉측한지 그놈에게 죽은 민병대의 시체를 내 친구가 봤는데, 어휴 말도 마. 내장부터 무슨…….”

달리던 기마병 하나가 말한다.

그 말이 맞았다.

저 야산에서 수호자 행세를 하는 야수 한놈 때문에.

민병대들은 더 투입되지 못했다.

정예병 축에 속하지도 못한 민병대들에게 그 야수는 괴물 그 자체였다.

그래서.

화이트 게이트 지부에 민원을 통해 도움을 요청한 상태였고,

곧 그들에 의해 이 야산은 정리될 터였는데.

느닷없이 이렇게 산불이 번진 것이었다.

타가닥- 타가닥-

차악!

휘이이잉!

기마병 둘은 채찍을 휘둘러 그대로 달리던 말을 세웠다.

말이 요란하게 앞발을 들며 일어서다가 지상에 안착했다.

툭-

병사 둘이 내려 고개를 들었다.

“헐. 진짜 산불이 심하게도 났네. 이 산을 다 태워먹겠는데?”

“차라리 잘 된 일이지, 이 산에는 그냥 사람 죽이는 짐승들로 가득하니까, 놈들 또한 다 불타 죽으니 우리가 할 일 하나가 줄어든 셈 아니겠어?”

그때.

병사 하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잠깐만. 저기! 저기 좀 봐.”

병사 하나가 가리킨 쪽으로 시선을 옮겨 그곳을 바라보니.

한 남자가 검을 든채 걸어오고 있었다.

“사람? 사람이야. 설마 저 사람이?”

찰캉!

병사 둘은 창과 스피어를 비장하게 꺼내들고 남자에게 겨누며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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