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4화
두 종족의 공성전으로 (4)
시운의 뇌리에 그려진 것은 야수족의 성벽 앞 3km 전방의 경치.
야수족의 성지 전방에는 또 다른 성이 존재했다.
바로 아종 오크의 둔지였다.
성과 성의 간격은 고작 3Km.
꺄아악! 레크라스가 허공을 비행하며 짖었던 소리까지 뇌리에 그려진다.
그리고 날개짓 저으며, 더욱 날아가 오크의 둔지의 드높은 성벽 위로 날아가니.
성안에 있던 십만 마리의 오크 떼들의 모든 눈이 레크라스에 꽂히는 광경이 펼쳐진다.
취릭! 취리릭!
병장기를 둘러맨 오크들은 못생긴 턱을 욱씬거리며 까마귀를 향해 혀를 낼름 거린다.
개미떼가 따로 없었다.
우글우글 거리는 머리수.
까아악! 까악!
레크라스는 유연하게 성 주위를 원형으로 한 바퀴 돈 뒤에,
다시 야수족의 성지로 넘어와 시운의 어깨쭉지에 탁!
…………공명된 레크라스의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십만 마리의 오크 떼라고?’
놀란 시운은 주위 야수족의 머리수를 새어보았다.
짐승같은 눈으로.
‘끽해야 5천?’
10만 마리의 오크떼들과 야수족 5천마리의 양방 공성전인 것이었다.
“그대들인가.”
들려온 것은 힘있는 짐승의 육성소리였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가 분명했음에 놀란 시운의 일행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다른 야수보다 확실히 큰 키에 가슴엔 금빛털이 나있는 늑대가 두 다리로 보행을 하며 걸어왔다.
‘저 자가 크리스?’
아마 그런 듯 싶었다.
야수족들의 리더라는 크리스 말이다.
턱.
시운 앞에 선 크리스는 시운보다 머리가 세 개는 큰 높이에서 시운과 일행을 내려다봤다.
“케르만에게 얼추 서신은 전달 받았다. 어서들 와라.”
크리스란 야수의 육성은 힘실린 반면 굉장히 차분했다.
“늑대 주제에 용케 말도 하는군? 신기한데?”
강혜령이 비꼬듯 툭 내뱉자.
카륵!
크아앙!
크르으!
야수 몇 마리가 혜령에게 다가오며 송곳니를 내밀었다.
자신들의 리더를 모욕하지 말라는 듯 말이다.
“그만.”
크리스가 손을 뻗자 다가온 야수들은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삐죽 세운 몸의 잔털을 내린다.
“그대들이 완수 해 주어야 할 일이 있어.”
[퀘스트 ‘아픔이 있는 장비-2’를 완료하였습니다.]
귓가로 들려오는 알림음에 눈을 돌린 시운은 궁금한 게 있어 일단 물었다.
“아종 오크와 대치 중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반대편에 있는 오크들은 대략 십만 마리는 되는 듯 한데, 맞습니까?”
“시, 십만 마리?”
“뭐?”
“……….”
혜령과 연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크리스는 놀란 기색으로 파랗게 빛나는 눈을 시운에게 두며.
“예리한걸? 어떻게 알았는가.”
“스킬을 사용해서 좀 알아봤습니다. 십만 마리의 적이 있는 반면에 당신들의 종족의 수는 고작 5천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이거 싸움이 되겠습니까?”
시운이 물었다.
사실 숫자로만 비하면 말도 안 되는 싸움이었다.
크리스가 주둥이를 열었다.
“우리 야수족들의 머리수도 얼추 때려맞추다니. 예리한 친구군? 확실히 케르만이 선발한 정예 답군. 수적으로는 우리가 확실히 열세지만, 전쟁은 머리수로 하는 게 아니다.”
크리스는 의연하게 지금 상황에 대해 시운 일행에게 설명했다.
현 상황은 이랬다.
이곳은 자생도라는 섬.
오크보다 무식하지만 더 몸집이 크고 드센 ‘아종 오크’와 인간형 늑대인 ‘늑대 야수’들은 서로 이 섬에서 각자의 영토를 반으로 정하고 두 성에 각각 공생했다고 한다.
꽤나 오랫동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의 사이는 곧 틀어지고 말았다.
‘바로 가치관 차이.’
‘용맹’과 ‘명예’를 추구하는 오크들과 ‘약속’을 중시하는 늑대 야수는 서로의 신념이 달랐다.
오크들은 늑대 야수와 지킨 거래의 약속을 몇 차례 어겼고,
‘약속’을 중시했던 늑대 야수들은 이에 분개하여 오크들을 하대하며 그들의 ‘명예’를 실추시켰고, 약속도 지키지 않는 겁쟁이라고 모욕하며 그들의 ‘용맹’을 짓밟았다.
이로서 시작된 갈등은 섬 안의 전쟁이 되었고,
서로 마주보는 주둔지 사이로 공성과 공성이 이어지기만 어느덧 4년이 지난 것이었다.
‘징한 세월동안의 전쟁이군.’
발카스의 중간 규모의 도시 하나 만큼인 이 섬에서 그렇게 두 종족간의 혈전이 4년간 벌어진 것이었다.
“십만? 휴. 전쟁은 머리수로 하는 건 아닌 거 나도 아는데. 너무 차이나는 거 아니냐고.”
혜령이 팔짱을 끼며 따지듯 크리스에게 물었다.
“아종 오크들도 무시못할 정도의 내구력은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저들보다 뛰어난 지능과 더욱 강력한 DNA를 가지고 태어났다. 전투 센스와 감각부터가 이미 다르다.”
크리스의 말이 끝나자.
크아앙!
크릉!
카아앙!
크리스의 말이 맞다는 듯 리액션을 붙여주는 야수족들의 함성이 이어졌다.
혜령의 매끈한 이마가 찌푸려졌다.
‘어휴. 말은 그렇게 해도 10만대 5천이면 일당 이십마리는 상대해야한다는 거잖아? 차라리.’
충돌 퀘스트가 발동되었을 때 상대 진영으로 가서 전력이 월등히 높은 아종 오크의 편에 서서 퀘스트를 완료할 걸 그랬다는 생각을 하는 혜령이었다.
“일단 그대들이 해 주어야할 일을 몇 개 알려주겠네. 뭔가 그대들은 내 보기에 믿음직스러워.”
크리스가 흐뭇한 눈으로 시운 일행에게 말했다.
그러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해안 동굴 청소][일반]
야수의 성지의 북동쪽에 위치하는 해안 동굴에서 어류족 몬스터들이 던전 밖으로 나와서 야수족에게 훼방을 놓는다고 한다. 가서 몬스터를 소탕하도록 하자.
성공 조건: 장유석과 동행하여 해안동굴에 도착 후 몬스터 처치
(0/150)
실패 조건: 장유석 또는 이시운의 죽음.
완료 보상: ????
“그대들은 헌터이니 퀘스트창이 떠올랐겠지? 내 의식의 생각을 그대같은 헌터들은 글자가 표기된 창 하나로 볼 수 있다고 알고 있다.”
크리스의 말에 시운이 물었다.
“해안 동굴에 어류족 몬스터를 처치하고 나면 어떤 보상을 주는 겁니까?”
물을 만 했다.
퀘스트 창에는 보상 목록이 ‘????’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었으니.
“아직 정하지 않았네.”
정하지 않았다?
‘그런 것이었군.’
시운은 보상 목록이 왜 그렇게 표기된 것인지 알아차렸다.
임무를 부여한 상대방이 임무에 대한 보상에 대해 확실히 정하지 못한 상태라면 보상 목록은 아마 저렇게 ‘????’로 표시되는 것이었다.
“화염의 검을 든 헌터. 자네는 저기 덩치 큰 친구와 해안 동굴로 가서 어류족의 수를 줄여주게, 그리고 옆에 있는 그대들은.”
크리스의 눈이 연희와 혜령에게로 옮겨갔다.
“저희요?”
연희의 반문과,
“까다로운 임무를 줄 거라면 안하고 말겠어. 사실 불만이거든? 이 쪽은 5천. 저 쪽은 십만이라니.”
혜령의 불평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혜령은 이 상황이 탐탁치 않은 모양이다.
크리스가 포악하게 생긴 몰골 답지 않게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이며.
“물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은 시키지 않을 것이야. 그대들은 마법과 원거리 무기를 사용하는 것 같은데 성벽 위로 올라가서 우리 성지로 돌진 해오는 오크놈들의 멱만 좀 따주면 되네.”
“알겠어요, 원거리 마법을 쓸 수 있는 게 많거든요.”
연희가 대답하고서 혜령의 눈치를 살폈다.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고개를 두어번 주억이는 걸 보니, 불만스러워도 하긴 하려는 모양이다.
“저어…. 혜령 씨?”
연희가 혜령에게 조심스레 말문을 텄다. 사실 워낙 인상이 차갑고 말투도 날이 선 혜령이라 쉽사리 다가갈 엄두가 나진 않지만,
어쨌든 친해져야 팀웍도 맞는 법이었다.
“왜?”
“같이 잘 해봐요! 우리.”
연희가 예쁘게 생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뭐. 그러던가, 말던가.”
혜령은 악수를 거절하며 고개를 휙, 돌린다. 악수를 외면당한 연희의 손이 민망했지만, 연희는 싱긋 웃는다.
그때.
콰아아앙!
청천벽력 같은 짧은 굉음.
모두의 눈이 성벽으로 옮겨갔다.
“뭐야? 깜짝이야!”
“어휴, 놀래라.”
크르아아!
카아아!
야수족들 또한 귀가 뾰족 선채, 성벽을 향해 광기의 포효를 내질렀다.
성벽이 뭔가에 크게 부딪히는 소리였고,
성벽은 큰 충동으로 먼지와 돌이 우스스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크리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크놈들이 투석기까지 사용하는군. 자네하고 자네. 날 따라오게!”
크리스가 연희와 혜령에게 말했다.
멀어져가는 크리스와 두 여성의 뒷모습.
그런 크리스가 분주히 걸어다가 고개를 돌려 시운을 바라봤다.
“해안 동굴 잘 좀 부탁하네. 물론 쉽진 않을거야. 그곳엔 그놈이 살고 있으니까.”
야수의 성지에서 남동쪽으로 쭉 걸은 뒤,
바다로 둘러쌓인 작은 산과 산.
그 사이의 골짜기 밑으로 내려가자 보이는 날것의 동굴로 입장했다.
[해안 동굴에 입장하였습니다.]
찰캉!
“여기군.”
발도를 하며 시운은 주위를 훑었다.
미역과 해조류가 천장에서 돋아나 있고, 종유석에서 비린 냄새의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해안 동굴이라 그런지 파도가 넘실 거릴 때마다 벽이 작게 굉음을 내며 흔들린다.
전방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통로가 보였고.
“준비 됐습니까?”
시운은 장유석을 보며 물었다.
“네.”
짧은 단답.
거기다가 무표정한 얼굴.
시운은 잠시동안 유석의 얼굴을 바라봤다.
은색의 에픽급 건틀렛, 우람한 동색 갑옷을 무장한 그는,
짧은 스포츠 머리로 군인을 연상케 했다.
‘말 수가 정말 없군.’
사실 이곳까지 동행하면서도 유석은 시운에게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으며,
필요한 말 이외에는 그저 말 또한 이런 단답식이었다.
‘이 사람이 A조 부문의 1인자.’
사실 시운이 이 남자를 선발대로 선택한 이유는 장유석이 생존 서바이벌 테스트에 A조 부문 1위란 성적을 거둬 시상대에 올라갔던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얼마나 강할지 궁금한 사내야.’
그는 격투사 계열의 헌터.
같이 팀플을 할 남자가 얼마나 셀지 호기심이 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일단 앞으로 가 봅시다.”
시운의 말에,
유석이 자신의 오른팔 건틀렛의 어느 부분을 툭, 터치했다.
그러자 건틀렛의 손등 부분에서 빛이 피어나와 주위의 시야를 밝혔다.
[Lv. 70 고대인어]
[Lv. 70 고대인어]
“누가 우리의 영역에 침범했단 말이냐!”
“각오하여라!”
통로를 쭉 걸어가자 나온 몬스터 두 마리가 비장한 다짐을 던져왔다.
삼지창에 인어의 꼬리, 그리고 얼굴은 머리긴 여성이었지만 안면은 몇 백년은 산 듯 좀비처럼 살점이 문드러져 썩어 곪아있었다.
시운이 유석과 눈빛을 교환했다.
순간.
크아아아아!
인어 한 마리가 노성을 뿜으며 삼지창을 들고 다가왔다.
그런데 그 속도가 엄청났다.
꼬리를 탄력적으로 이용해 던전 밑바닥을 기어 달려오는 속도는 총알 같았다!
까앙!
시운의 검신과 인어의 삼지창의 궤적이 맞닿았다.
‘물속성의 몹이라 그런지 화염의 열기도 통하지 않고 홍란검의 대미지가 온전히 미치지 못하네.’
까앙! 까앙!
삼지창이 두 번이나 검신과 또 부딪혔다.
“흐에에에!”
서로의 무기를 맞대고 서로를 노려보던 중.
고대 인어의 눈이 시퍼렇게 변하더니, 그의 입에서 물줄기가 터져나왔다.
파아악!
“끄헉-”
안면이 터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시운이 뒷걸음질 친다.
후웅!
곧바로 날아오는 인어의 꼬리.
탁!
오른 팔목으로 막아냈으나.
“끄흐으.”
꼬리의 일격은 막아낸 팔목의 뼈를 욱신거릴 정도였다.
창! 창! 차캉!
검격을 한 번, 두 번, 세 번.
내리친 검격을 모조리 삼지창으로 막아냈다.
타캉!
곧바로 직선 궤적으로 날아오는 삼지창을 시운은 빠르게 발로 걷어차며 튕겨냈다.
[화룡의 홍란검의 대미지가 속성 관계에 의해 대폭 감소합니다.]
‘역시…!’
온전히 불속성인 홍란검이 제힘을 발휘 못하는 게 확실했다.
곧바로.
-쇼트 단검을 장착하였습니다.
신속히 무기를 바꾸자 인어의 눈이 가늘어진다.
“네 놈이 뭘 하든 소용없노라.”
“과연 그럴까?”
단검을 들자 몸이 가벼웠다.
게다가.
2차 전직을 통해 획득한 ‘살수를 위해 속보’ 라는 패시브 스킬이 이속을 +5 증가 시켜준 상태기 때문에,
예전과는 다른 날랜 움직임으로,
“질주.”
휙!
타캉! 탕! 창! 차앙!
샥! 샥! 샤샥! 샥!
“이 놈이!”
방금 과는 격이 다른 속도로 공격해오는 시운에 놀란 인어는 방어하기만 급급했다.
창!
한 번 더 단검과 삼지창이 맞물렸고.
이제는,
단순한 단검질 보다 좀 더 큰 선물을 줄 차례였다.
“야수 베기.”
시운의 단검에서 동물이 내는 듯한 괴성과 함께 피어난 오라는 호랑이가 포효하는 형상을 만들어 냄과 동시에,
“크에에엑!”
단검 날이 번개같이 인어의 꼬리 가죽을 대각선으로 그대로 베어버렸다.
가죽이 베어진 살점 밑으로 허연 액으로 덮인 내장이 쏟아진다.
[야수베기의 '흡혈'효과로 인해 HP를 흡수합니다.]
타탁!
접근한 시운은 그대로,
차앙!
삼지창을 든 인어의 팔목을 쑤셨고,
푸욱-
늑골 사이의 명치에 단검을 밀어넣었다.
열린 뱃가죽 틈으로 창자가 쏟아진다.
“우우욱….”
고대 인어는 얼굴을 파르르 떨더니 늘어져 잘려나간 꼬리를 얼마간 펄떡이다 조용해졌다.
‘한 마리를 해체 했다. 장유석은?’
전투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던 시운은 고개를 돌렸다.
‘어?’
시운의 눈이 커졌다.
장유석은 건틀렛을 낀 손으로 두 마리의 고대 인어의 머리통을 잡은 채 그대로 들고 있었다.
그의 악력에 인어들은 꼼짝없이 꼬리만 피죽 피죽 힘없이 흔들고 있었다.
순간!
썩어늘어진 인어의 머리칼을 움켜쥔 건틀렛에 스파크가 일었다.
‘설마?’
그리고.
유석의 안광이 빛났다.
‘설마 뇌속성?’
시운의 시선이 향한 곳은.
장유석의 건틀렛이었다.
파지직! 파직!
유석의 턱근육이 씰룩이자.
끄아아아!
으아아악!
고대 인어 두 마리의 두피 가죽에 번개 스파크가 번쩍이더니 머리통이 수박 쪼개지듯 쪼개진다.
유석은 안면이 터져버린 두 인어를 움켜쥔 손에 힘을 푼다.
.
.
.
-고대인어가 ‘감전’ 상태에 빠졌습니다.
-고대인어가 ‘감전’ 상태에 빠졌습니다.
또한,
물속성의 녀석들이라 그런지,
뇌속성의 상태이상 효과가 더욱 잘 먹어들었다.
“이……이이!”
“끄으으. 우리에게 뭘 한거냐? 인간 놈!”
서걱!
감전되어 움직이지 못하고 떠는 인어 한 마리의 목을 호쾌하게 베어낸 시운은.
서거억!
나머지 한 마리의 목살도 단검의 검신으로 세차게 찢어냈다.
주르르-
목의 살점에서 피를 뿜으며 머리통을 바닥에 쿵! 쿵! 떨어뜨리는 인어 둘.
‘생각보다 수월하게 돌아가는데.’
시운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혼자 왔다면, 불속성의 홍란검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테고, 대미지가 낮은 쇼트 단검으로 꽤나 고생했을 텐데 말이다.
“……….”
유석은 말없이 죽은 인어를 내려다보고 있다.
정말 말이 없긴 없었다.
시운이 말을 걸지 않으면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다.
“유석씨.”
시운의 부름에 유석은 표정없이 고개를 돌린다.
“원래 그렇게 말이 없습니까?”
“없는 편이죠.”
“그렇군요. 어쨌든 자생도에서 함께 머물게 됐으니 친하게 지냅시다. 딱딱하게 굴지 말고.”
“……넵.”
말수는 적어도,
전투 감각도 좋고 할당량은 충분히 하는 남자니까.
‘나쁘진 않네.’
말만 많고 약해빠져서 몬스터 한 마리에 요란을 떠는 빈수레보단 어쨌든 나은 것 같다.
긴 통로를 쭉 지나가고 또 지나갔다.
거대한 파도 소리가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는다,
벽 너머로 거대한 어류들의 유영 소리도 들려왔다.
이쯤이면 아마 동굴 밖은 꽤나 수심이 깊은 바다인 듯 하다.
차창! 차창! 차창!
“인간놈들이 왜 여기에 와! 물속에서는 숨도 못 쉬는 것들이.”
“삼지창으로 심판을 내 줄 터이니.”
인어 셋이 꼬리를 뒤뚱거리며 삼지창의 날을 내밀고 빠르게 다가왔다.
빠악! 빡! 빠아악!
종석의 번개같은 펀치 콤보는 인어의 안면, 가슴, 꼬리에 정확히 적중했고,
쿵!
“삼륜 격파.”
시운의 입에서 터져나온 시동어와 함께 시운의 팔이 저절로 움직여 단검의 날이 허공을 가르자.
샤각!
샤각!
으아아아!
끄으어어억.
삼륜격파에 의해 쏟아진 두 검기를 얻어맞고 휘청거리는 두 인어를 향해.
“질주.”
볼살이 흔들릴 정도로 빠르게 두 인어 사이로 파고든 시운은.
탁!
단검을 역수로 쥐고,
푸욱!
푸욱!
인어 둘의 목덜미를 차례차례 내리찍어 준다.
쿵!
쿵!
인어 사체에 더 눈길을 주지 않고
계속 걸었다.
“저기 입구가 보이는데요?”
시운이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의 앞에는,
하층부로 내려가는 동굴 속의 동굴 입구가 보였다.
성공 조건: 장유석과 동행하여 해안동굴에 도착 후 몬스터 처치
(87/150)
‘63마리 남았군. 금방이네.’
둘이서 팀으로 플레이를 하니,
벌써 목표치에 반에 도달한 상태였다.
곧장 발걸음을 옮겨 깊숙한 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수거억-
크억!
고대 전갈의 딱딱한 등가죽을 단검으로 과격하게 벗겨내었다.
벌어진 등가죽 사이로 오장육부가 솟으며 고대 전갈 한 마리의 초점이 흐려진다.
빠악!
빠악!
크어억!
-고대 전갈을 처치하였습니다.
더 넓어진 통로.
인간의 살점 냄새를 맡은 전갈들이 집게를 내밀며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연격의 탄.”
움직인 유석의 입술과 함께 유석의 어깨가 뒤로 젖혀졌다가 이내 앞으로 고꾸라지며, 주먹을 쥔 건틀렛이 호를 그리며 바닥을 내리친다.
쿠웅!
내리친 바닥 주위로 퍼지는 충격파에,
크어억!
커억!
그우우욱.
그어어어억!
전갈 네 마리의 몸통이 터졌다.
그 사이로 뛰어오른 시운은,
“사합보.”
뛰어오른 시운의 앞으로 사신의 손바닥이 생겨났다.
툭.
그 손바닥을 밟고,
더 뛰어오르니,
눈높이 부분에 또 생겨난 검은 손바닥을 밟고 더 높이 도약하여,
“삼륜 격파.”
허공에서 쏘아낸 검기는 전갈 세 마리의 갈색 등껍질을 쑤시고 찢겨낸다.
쿵! 쿵!
두 마리가 스러졌고.
한 마리만이 거품을 물고 시운을 노려본다.
그 녀석에게로 하강하며 단검을 역수로 쥐고,
푸우욱!
크억.
-고대 전갈을 처치하였습니다.
[레벨 업을 하였습니다.]
[레벨 업을 하였습니다.]
시운과 유석의 몸에 각각 파란 이팩트가 쏟아져 떠올랐다.
‘좋아, 이제 거의 목표수에 달……’
그 순간.
콰아앙!
과격한 충격소리와 함께,
드드드드-
그 충격으로 인해 던전의 천장이 흔들렸다.
시운은 그 소리가 난 곳으로 눈을 크게 뜨고 응시했다.
콰아앙!
벽이 뚫리는 소리와 함께 오른쪽 벽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조심해요.”
시운의 외침에 종석과 시운이 그대로 반대편으로 물러났다.
그르르르….
벽을 부수고 뜯겨진 공간 사이로 내밀어진 거대한 머리통 하나.
그아아아아!
사람만한 머리통의 정체는 수룡 괴수의 얼굴이었다.
괴성을 질러대는 놈의 아가리에서 쏟아진 역한 냄새의 바람은,
시운의 몸을 휘청거리게 하고도 남았다.
‘저건 또 뭐야?’
콰앙! 콰앙! 쾅!
벽이 또 힘없이 부서졌고,
분쇄된 벽의 공간 사이로 두 발까지 뚫고 내미는 괴수.
콰아아앙!
방금 전과는 격이 다른 충격음.
단번에 벽 일대가 무너져 내렸고,
무너진 공간 사이로 괴수의 육중한 꼬리가 튀어나와 시운을 향해 날아왔다.
“화룡의 도약.”
가까스로 피해낸 시운의 발꿈치를 쓸은 괴수의 꼬리는 이내 유석에게 향했다.
‘위험해.’
괴수의 난동으로 인해 동굴의 벽 뿐만 아니라 천장까지 허물어지고 있었고, 그 허문 틈으로 물이 쏟아져 흘러내렸다.
푸슈슈슈슉-
콰아앙!
“끄흑.”
꼬리의 일격에 흙먼지가 유석을 덮었다.
먼지가 걷히자, 유석은 두 건틀렛을 엑스자로 한 채 얼굴을 방어하고 있었다.
꼬리를 받아낸 건틀렛은 심하게 떨려 요동치고 있었다.
“유석씨. 위험해요! 천장에서 심해의 물이 새고 있어요, 여기 오래 있을 수는 없어요.”
“예.”
크르아아앙!
괴수는 완전히 몸통을 들이밀고 벽을 그대로 부순 채 돌격해오기 시작했다.
‘으으! 징그러워, 진짜아.’
‘지옥이 따로 없군.’
연희와 혜령의 눈은 아득한 성벽 밑 지상을 향하고 있었다.
성벽 위에 발을 딛고,
내려다 본 지상의 저너머 광경은 이랬다.
갈비뼈를 틀어막아도 그 틈으로 삐죽 내민 내장이 팔을 덮은 오크의 사체.
까마귀와 파리떼에게 뜯어먹히는 죽은 오크의 사체.
야수족의 발톱에 눈이 뽑힌 채 엎드린 오크의 사체.
나란히 서로를 껴안고 서로의 피에 썩은 살을 적시며 눈감은 야수족과 오크 한쌍의 시체.
투석기에서 뻗어나간 돌덩이에 깔려 가죽조차 못 쓰게 짓이겨진 야수 다섯 마리의 사체등.
지상은 마치 고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져 있다.
혜령이 고개를 든다.
고개를 든 시선 안으로 전방 맨 끝의 거대한 성이 보였고, 그 성 위에서 눈알을 부라리며 이곳을 응시해오는 오크떼들.
“오, 온다아!”
연희의 하이톤 육성에,
활은 혜령의 볼에 빠르게 걸쳐졌다.
걸쳐진 금빛 날개가 돋혀난 활에서 화살이 쏟아져,
사다리를 걸고 성벽을 올라오던 오크들의 머리통, 쇄골, 허리살에 하나씩.
팟! 팟! 팟!
끄아악!
츄륵! 아, 아프다!
으헉. 화, 화살이….
“뭘 그렇게 멍 때리고 있어! 마무리 하라고.”
혜령이 연희를 째려보자,
“네, 네.”
연희는 완드를 들어서 파이어 블래스트의 구체를 쏟아 날렸다.
화르륵!
그러나.
화살을 맞고도 악착같이 올라오는 오크가 아닌 엉뚱한 성벽 밑에 떨어져 그 주위를 태우는 성화들.
“하아. 좀 잘 좀 할 수 없니?”
파파팟!
신경질을 부리면서도 동시에 화살을 날리는 혜령에 의해,
끄억!
끄에엑!
가아악!
사다리를 잡은 손에 힘이 풀린 오크들이 아득한 지상 밑으로 추락하며,
퍼어억!
퍼억!
살점이 토막내는 광경을 그린다.
“으앗!”
연희는 그 광경을 못 보겠는지, 손으로 눈을 가렸다.
“뭐하는 거냐고! 전투 중에 눈을 가리는 건 어디서 배워 처먹었어?”
“아아, 징그러워서, 저도 모르게….”
“그럼, 나는 저게 아름다워서 보고 있냐? 야, 손 안 떼?”
연희는 억지로 손을 떼며 울상을 짓는다.
‘타겟팅이 힘들어.’
연희는 매지션이다.
매지션들은 원거리 마법을 시전할 때, 머릿속에 적의 거리와 좌표를 입력하면 추적 미사일처럼 구체가 적에게 그대로 따라가 맞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야구공을 던지는 투수처럼 직접 거리를 눈으로 재고, 마력과 완드를 휘두르는 힘을 배분하여 타겟팅하는 것이 매지션의 원거리 타겟 적중 방식이었다.
그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매지션은 강한 직업이지만….’
어려운 직업이기도 했다.
그때였다.
투투투투-
거대한 돌을 실은 투석기를 오크 열 마리가 밀고 달려왔다.
“다시 해 봐! 답답하게 쫄아있지 말고, 저 투석기를 몰고 오는 벌레들을 타겟해. 좀 침착하게 해 보라고, 이 답답아.”
“네, 네!”
혜령의 쏘음에 연희가 다시 완드를 휘둘렀다.
투툭! 툭!
취륵?
츄르륵? 얼음?
투석기를 몰던 오크들이 잠시 멈춰 갸웃했다.
그들 바로 앞으로 엉뚱히 떨어진 얼음 구체들을 본 오크들은 발길질로 얼음들을 모조리 깨버렸다.
“으휴, 병신아. 너 2차 전직한 매지션 맞냐?”
“이, 이렇게 먼 거리에서 타겟팅 해 보는 것은 처음이라서….”
그 찰나.
끼이이익-
투석기가 가동하는 소리와 함께 암석이 무섭게 날아왔다.
쿠우웅!
야수족 성지의 성벽 윗부분에 떨어진 암석에 의해 성벽 일부가 찌그러졌다.
“휴!”
가까스로 피한 연희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야! 뭘 ‘휴’야? 방금 너 때문에 나하고 너하고 뒤질 뻔 한 거 알아? 네가 맞추지 못했으니까 저 투석기의 돌무더기가 우릴 향해 날아온 거 아니야? 실수 해놓고 어딜 안도의 한숨따위나 쉬어?”
허리춤을 차고 쏘아대는 혜령에 연희는 고개를 꾸벅 꾸벅 숙였다.
“죄, 죄송해요. 다시 해볼게요.”
연희 또한 오기가 생겼다.
남에게 폐가 되는 존재가 되기란 싫다.
헌터가 되기 전부터 연희는 어디서나 촉망받는 재능있는 엘리트였으니까.
‘그런 내가 재능있는 신인 헌터 앞이라고 기죽을 순 없지!’
조목한 입술을 악 깨문 연희의 완드에서 뻗어나간 뇌격은 뒤따라 달려오던 오크 두 마리의 몸을 터뜨렸다.
“드디어 맞췄다!”
“신나하지 마라. 맞추는 게 정상이지, 못 맞추는게 정상이냐. 어서 집중 안 해?”
“아이, 차암, 진짜. 알겠다구요. 칭찬 한마디 해주면 덧나나.”
우아아아!
그아아아!
오크 몇 마리가 내공담은 괴성을 쏟으며 무자비하게 달려왔다.
아종 오크 그들은 ‘용맹’과 ‘의리’ 중 특히 용맹을 중시하는 종족이었기에 죽는 한이 있어도 내빼지 않고 들이받는 신념을 가진 괴물들이었다.
팟!
팟!
부우우우웅!
화살과 마력을 담은 마법이 동시에 성벽 위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오크들에게 떨어진다.
으가가각!
주, 죽을 수 없다, 츄륵!
으어어어억.
그 모습을 뒤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크리스는 만족스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뛰어난 헌터군. 한명은 타고난 헌터. 그리고 나머지 한명은 잠재력이 가득한 헌터.’
뼈가 곯도록 전쟁과 생을 함께한 크리스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전신에 가득히 베인 온갖 흉터는 그것을 여실히 반증하고 있었다.
그악! 그아아아아아!
유석의 뇌격이 담긴 건틀렛에 피부가 닿은 수룡 괴수는 몸을 벌벌 떨었다.
부웅!
도약 후, 하강의 힘을 실은 시운의 역수 방향 단검날은 그대로……
쑤욱-
괴수의 두개골 사이를 비집었다.
그엑! 그르으으! 그아!
감전된 괴수는 몸을 벌벌 떨며 신음만 내질렀다.
머리 위에 올라탄 시운은 다시 단검을,
쑤욱-
괴수의 흰 머리 살점에 쑤시고,
푸욱-
다시 빼내어,
쑤욱-
쑤시고,
푸욱-
빼낸 뒤.
다시.
쑤우욱.
온 힘을 다해 쑤시자.
괴수의 머리통이 떨어지며 동시에 시운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해수룡을 처치하였습니다.
[던전을 클리어하였습니다.]
해수룡의 으깨진 머리통에서 무언가가 빛내며 솟아올라 괴수의 몸통에 떨어져 데구르르- 굴렀다.
시운은 본능적으로 낚아챘다.
-‘해수룡의 정수’를 획득하였습니다.
[해수룡의 정수 효과로 ‘해수룡의 기억 전이’ 가 발동됩니다.]
‘..갑자기 기억 전이라고?’
그때.
시운의 뇌리가 으깨져 짓누르듯 울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