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0화
재능충인데 뭐 어쩌라고? (2)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세준의 말을 시운이 뒤이었다.
“친절히 알려줄게. 내가 은신을 사용했거든. 그래서 네가 못 느꼈던 거야.”
푸욱!
“끄어억….”
검신이 움직여 빠지자 뱃가죽이 뒤틀리는 통증과 등뒤로 칼 소리가 몇 번 더 들리고.
쿵!
쿵!
쿵!
“당했다….”
“허어억.”
“....제길.”
세준이 쓰러진 채 힘겹게 시선을 돌리자 바닥에 고꾸라진 동료 셋의 얼굴이 들어왔다.
억울하단 표정….
아파 죽겠는데, 갑자기 뭐지?란 표정….
다된 밥에 재 뿌렸단 표정….
동료 셋은 곧 조용해졌다.
세준의 체력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장세준, 네가 이렇게 만든거냐.”
떼죽음 당한 오크와 술법에 걸려 눈만 뜬채 서있는 야수들을 보며 시운이 물었다.
자기는 오크 성 한 채를 완전히 초상집으로 만들어버린 주제에 용케 저런 질문을 한다.
“...이시운. 너였구나.”
세준은 궁금증 하난 풀렸단 듯 말했다.
[출혈 상태에 빠졌습니다.]
세준의 구멍난 상체에서 피가 멈추지 않고 쏟아진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준은 몸조차 움직일 여력은 없었지만 그의 입꼬리는 희게 올라갔다.
‘인벤토리.’
흐릿해지는 시야로 인벤토리가 보인다.
[부활의 반지][유니크]
체력이 1% 이하 빈사 상태 일 때, 또는 사망 시 그 자리에서 상태이상과 HP, MP를 모두 회복하고 즉시 부활한다.
남은 횟수: 1번.
‘이시운. 재밌는 놈이야….’
점점 체력이 줄어가는 세준은 빨리 체력이 1% 이하가 되길 기다렸다.
곧바로 부활 하여 이시운을 재밌게 다뤄줄 심산이 가득했으니.
톡톡-
“강혜령 누나? 정연희! 유석 씨? 다 얼어서 꼼짝을 못하고 있네.”
시운은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내 그들 앞으로 툭 던진다.
화룡의 홍란검이었다.
홍란검의 검신에서 피어난 불길은 서서히 그 셋의 몸을 녹인다.
[체력이 1% 이하입니다. 빈사 상태에 빠집니다.]
‘좋아, 지금이다.’
세준의 피로 번진 입꼬리가 킥, 올라간다.
방금 내 숨을 마무리 하지 않고 쓰러져 뒈지게 놔둔 게 네 패착이라고.
‘부활의 반지 사용.’
……그런데.
[부활의 반지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뭐야? 어째서?”
“저기, 당신 혹시 아이템 사용하려 했나.”
뒤편에서 시운이 용케 물어온다.
세준의 시야가 완전히 비틀린다. 이제 곧 숨이 멎을 시간이다.
“또 한 번 친절하게 알려줄게. 내 검에 장착된 스킬의 효과로 아이템은 사용 못 할거다.”
“뭐?”
“그러나, 걱정은 마. 안전귀가 스크롤은 발동 될 테니까. 그러니까 너무 쫄진 말라고.”
적에게 기습 성공시 적이 장착 중인 장비의 스킬 무효화란 아클레우스 소드의 부속 스킬 효과였다.
“안전귀가 스크롤은 장비가 아닌 스크롤에 해당하는 아이템이니까, 뭐…. 발동 될거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
세준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 밑의 입꼬린 다시 올라갔다.
‘..재밌군.’
장세준. 그의 생애서 패배란 결코 한차례도 없었다.
상대했던 경쟁자 모두가,
세준의 재능 앞에서 혼란스러워 했고, 자책 했으며, 벽을 느끼고 포기만 거듭할 뿐이었다.
그래서 재미가 없었다.
라이벌이 없었다.
목표가 없었고, 그런 일상은 허상처럼 무미건조 했다.
두 번의 패배를 안긴 앳된 헌터.
이제는 목적이 생겼다.
‘이시운. 죽어버렸던 내 본능을 깨워줘서 고맙다. 다음에 만나면…’
결국 길고 길었던 전쟁의 역사는 이걸로 마침표를 찍는 듯 했다.
“맛있게 후딱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요!”
시운과 혜령, 연희와 유석은 손을 움직였다.
각자 손에 들린 포크와 나이프는 그들 앞에 놓인 진수성찬으로 향한다.
오리 튀김, 닭고기 바비큐, 멧돼지의 목살로 구워진 스테이크, 가재 스프, 인어 매운탕까지………
야수족들이 시운 일행에게 보답으로 차려준 성의 가득한 음식들이었다.
와구! 와구!
나이프에 뜯겨진 잘 익은 살점이 포크에 툭, 찍혀 시운의 입으로 들어가고 또 들어간다.
“배고팠는데 진짜 맛있네! 완전 녹는다, 녹아.”
시운이 탄성을 지르며 또 귀신같이 포크질을 한다.
그런 시운을 바라보는 혜령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저 녀석, 어떻게 저렇게 강할 수가 있는거지?’
세준에 의해 빙결된 상태에서 눈으로 모두 지켜 보았다.
은신한 몸을 드러내자마자 세준을 쓰러뜨리고 셋이나 되는 인원을…
‘정확히 검질 세 번이였어.’
검질 첫 번째에 헌터의 얼굴과 신체가 좌우로 찢어 갈라졌고, 두 번째에 다른 헌터의 허리가 두동강! 세 번째에는 사제의 가슴께가 대각선으로 찢겨져 모두 전멸했다.
‘어떻게 나하고 전력 차이가 그렇게 날 수 있는거지?’
분했다. 서바이벌 테스트 때는 인정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방해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에 혜령의 눈으로 본 시운은 자신과는 격이 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인정할 수 없다고...썅.’
강혜령.
그녀는 항상 최고였다.
항상 타인의 기대를 받아왔고, 그 기대를 결과로 충족시켜 주었다.
정점이 아니라면 치가 떨리니까.
“너…. 지금 레벨이 몇이지.”
혜령의 물음에 입에 넣던 음식을 빨리 씹은 시운이 힘겹게 입 연다.
“90.”
“뭐! 구십이라고?”
놀란 것은 혜령만이 아니었다.
“에? 이시운? 너 레벨이 90이란 말이야?”
연희도 나이프질을 멈췄고,
조용히 먹던 유석의 눈길도 시운으로 가있었다.
“이번에 오크떼들을 한번에 좀 잡았거든. 한 5만 마리 잡았나?”
5만 마리를 태연하게 말하는 시운을 혜령은 이상한 눈빛으로 보았다.
“…너, 혹시 어디 아프냐?”
시기가 섞인 시비스런 혜령의 물음.
이곳 성지에서 혜령과 말도 섞고 친해졌다 싶었는지 시운은 씩, 웃으며 그녀에게 반말로 답했다.
“내가 모자라서 서바이벌 테스트 총 1등. 헌터시험 만점, 세 달도 안 돼서 레벨 90인가 보지.”
“..!”
혜령이 아랫입술을 깨문다.
“시운아. 넌 내가 봤을 때는 재능이…… 아니, 천재인 것 같아.”
“천재란 말은 내게 안 어울리고.”
연희는 이제 이런 시운이 더 놀라울 것도 없다는 눈치다.
항상 남보다 앞서고, 기발하고, 남다른 모습만 보여줬던 이시운.
연희에게 그는이젠 질투보단 호감, 동경의 대상일 뿐이었다.
“누나.”
가라앉은 시운의 육성에 혜령은 날선 눈으로 그의 시선을 받는다.
“최고 좋지, 좋아. 근데…… 너무 피곤하게 최고가 아니면 안 된다고 자책하지 마.”
“네가 뭘 안다고 짓껄여?”
혜령은 얼굴이 빨개져 소릴 쳤다. 그러면서도 내심 놀란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더욱 목에 힘을 줬고.
“성적에 너무 연연하지 마. 누난 성적 없이도 그저 그대로 가치있고 존중받기 충분한 사람이야. 그리고, 맨날 1등이면 언제 떨어질지, 누가 치고 올라올지 항상 불안하잖아. 한 번쯤은 그냥 내려놓는다 생각하고 뒤처져도 봐, 최고가 아니면 어때? 누난 모든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던 메달리스트인데.”
툭.
혜령이 젓가락을 놓고 그대로 나갔다.
“..언니? 밥먹다 말고 어디 가요?”
박차고 나가는 혜령의 뒷모습을 본 시운의 눈빛이 진해졌다.
‘강혜령. 네 내면은 상처가 가득한 걸 안다. 억압된 환경에서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배우며 자랐으니까.’
“휴- 저 언니는 너무 다혈질이야. 좋은 사람인 것 같은데….”
“좋은 사람 맞아.”
시운이 연희의 말을 딱 잘랐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그냥, 난 알아. 저 사람을.”
의미심장한 말에 연희의 눈이 커졌다.
잠시 후.
연희는 유석을 바라봤다.
입에서 냄새가 날 정도로 입조차 벙끗않고 말도 없다.
저 사람과 같이 지내면서 목소리는 들어봤나? 목소리도 기억이 안 난다.
연희가 물었다.
“저어기, 유석 씨는 되게 조용하신 분인가봐요?”
“네.”
연희와 시선을 3초 맞댄 후, 유석은 바로 시선을 거둔다.
“그래도~ 이것두 인연인데 제가 싫으신 게 아니면 같이 떠들고 웃고 그래봐요.”
연희가 생긋 웃으며 말하자 유석은 발그레진 얼굴로 고개만 끄덕이며,
“..네.”
그 모습에 연희의 웃음이 터졌다.
남자를 좋아하다기 보단 사람을 좋아하고 정이 많은 연희다.
물론 그녀 또한 이계에 발딛기 전에는 엘리트였고,
그 어느 틈에서도 최상위권이 아니면 잠을 못 잤다.
그러나.
이계에 오게 되면서, 뛰어난 사람이 많다는 걸 느끼고 배웠고, 이제 최고란 욕망보단 남들이 없는 나만의 장점을 사랑하고 노력하자는 마인드로 변한 그녀였다.
연희의 눈은 다시 시운에게 향한다.
턱을 슬며시 괸채, 상념에 빠진 그의 옆모습이 오늘따라 너무 잘생겼다.
‘나란 여자는 너한테는 한없이 부족한 여자일 테지?’
완벽한 외모, 누구보다 남다른 재능, 신인 최고 기대주란 시운을 보면 연희는 항상 자신이 작아짐을 느낀다.
‘그래도 좋아하는 건 온전히 내 맘이니까…. 좀 많이.. 한없이 좋아하면 언젠간 날 봐주겠지?’
따가운 시선을 느낀건지 시운의 눈이 연희에게 움직였다.
‘……!’
연희는 곧바로 눈을 돌리며 볼을 부풀리고 딴청을 피운다.
청바지 꽉 끼어 먹은 볼룩한 힙 매끈하지만 탄력있는 긴 두 다리.
골반 위로 오목히 휜 골반의 하얀 살을 아찔하게 드러낸 배꼽 티를 걸친 혜령의 뒤태는 그림 같았다.
얇은 팔을 들어올려 머리를 묶어 올리고,
난간에 팔을 내민 채 지상을 내려다 봤다.
“휴우-”
한숨이 오묘히 뱉어진다.
“항상 최고가 돼라.”
“넌 무조건 금!메달감이야.”
“1등이 아니면 알아주지 않는 더러운 세상이잖아?”
“강혜령 니가? 2등? 1등 욕심 없어? 분발해!”
항상 귀가 뚫릴 정도로 듣고 살던 소리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낯선 소릴 들었다.
그것도 한참 어린 연하남에게.
그 녀석이 했던 말이 아른거린다.
‘……칫. 핏덩이 녀석이 뭘 안다구.’
그런데 기분이 묘했다. 한 번쯤은 다독임을 받고 싶었고, 성과의 인정이 아닌, 사람으로서 다독임과 정있는 말이 듣고 싶었다.
-누난 성적 없어도 있는 그대로 가치있고 존중받기 충분한……
녀석의 목소리가 또 떠올라 애써 고개를 저으며 떨쳐낸다.
‘대체 걔가 뭘 안다고! 나한테 그런 말을!’
사실 서바이벌 때도 위기에 처했을 때 경쟁자인 자신을 위해 갑자기 나타나 보스몹을 해치워 준 녀석,
그리고 필요한 걸 주겠다는 녀석의 손길을 혜령은 차갑게 쳐냈다. 그런데도 녀석은 경쟁자 주제에 스태미너 포션을 두고 갔고,
‘그때 기분이 이상했어.’
견제 받는 것이 익숙한 혜령에게 견제해도 모자를 경쟁자 녀석이 바라는 것 없이 도와주고 손을 내미니까.
‘왜… 내가 이런 생각을!’
가끔 녀석과 마주칠 때 은근 고개가 돌려진다. 그럼 미간을 팍! 찡그리고 애써 고갤 돌린단 말이다.
‘남자 주제에 왜 그리 이쁘장하게 생겨갖고.’
그때.
-강혜령, 잠시 이리로 와봐.
-코, 코치님 왜, 왜 이러세요? 바지는 왜 벗으셨어요! 다가오지 마세……읍!
-씨발년. 네년이 가끔씩 내 탄탄한 몸을 훑는다는 걸 알고 있걸랑? 보지가 아주 불끈 거렸지? 벌려봐. 오늘 내 자지로 아주 남자의 맛이 뭔지 보여줄 테니까.
-코, 코치……니임! 하으윽.
-요, 꼭지 발딱 선거 보소? 느끼냐? 운동만 하느라 남자랑 떡도 못 쳐봐서 보지가 참 외로웠지? 이 년아, 질질 쌀 것 같아? 응? 봐, 하아, 하아! 엉덩이 위로 올려, 썅년아! 뒤치기가 어떤 맛인지 맛 봐 봐.
“악!!”
더러운 그 새끼와의 일이 생각나자 귀를 틀어막았고 몸부림 쳤다.
자꾸 들리는 벌레같은 그놈 목소리를 떨치려 눈을 감고 몸을 막 흔들었는데.
“………어?”
시야가 뒤틀리며 몸이 난간 아래로……
덥썩!
“………?”
딱딱하고 넓은 가슴이 느껴진다. 감았던 눈을 떠보니, 이시운이 내 팔목을 잡은 채 안고 있다.
얼굴이 달아오르며 단 한 번도 뛰지 않던 가슴이 툭툭, 움직였다.
“이, 이거 놔!”
두 팔로 힘껏 밀었다.
“아, 아, 오해하지 마, 내가 안 잡아줬으면 누나 난간 아래로 추락할 뻔 했어.”
“떠, 떨어지던 말던! 네가 무슨 상관인데? 네 할 일이나 해.”
혜령은 휘날리는 앞머리를 정리하며 난간 밑 지상에만 눈을 둔다.
그런데.
녀석이 옆으로 다가왔다.
‘뭔데…!’
코치 그 개자식의 버거운 손길 이후로는,
남자들은 다 벌레처럼 느껴진다고!
근데.
‘방금 내가 왜 그런…?’
혜령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상에 눈을 둔 녀석의 잘 뻗은 콧날. 맑고 깊은 눈이 보였고, 그 밑으로 남자치고 예쁜 입술이 스르르, 열린다.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