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4화
템빨 (2)
“뭐요? ..3시간? 방금 3시간이라 했습니까?”
로하의 부길마 광수가 믿지 못해 되물었다.
“그 쯤 됐겠는데요.”
남잔 태연히 대답했다.
“들었어? 온 지 3시간 됐대.”
“저렇게 진지하게 헛소리를 하는 사람도 참 오랜만이네.”
광수 뿐만 아니라 둘의 담화를 지켜보던 길드원들 모두 믿지 않는다는 반응들.
광수의 눈이 가늘어져 실눈이 되었다. 그의 눈이 남자의 장비를 예리하게 훑었다.
‘유니크급 맞춤 방어구 둘, 그리고 이름 모를 검….’
남자가 내놓은 답은 머리를 후려치는 충격을 주기 충분한 말이었지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방금 보스 몹을 솔플로 5초 만에 끊은 데다가.’
일찍히 서바이벌 테스트를 실시간으로 시청한 광수는 저 남자에게 놀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맹인이란 비정상적인 클래스. 근데 멀쩡히 눈은 뜨고 다닌다.
‘게다가.’
서바이벌에서 보여줬던 저 남자의 힘은 F랭크의 헌터의 몸에서 나올 수 없는 힘이였다.
‘이번년도 최고의 기대주란 헌터라고 들었는데.’
비록 소규모 길드의 부길마인 광수였지만, 한 길드의 이인자 자리에 있는만큼 들은 것도 많고, 알아본 것도 많았다.
‘우리 길드에 이런 사람이 하나만 있다면!’
정체된 길드의 규모는 커질 것이고, 게이트를 더욱 독점하여 더 큰 수익을 만들어 낼 것이리라.
광수의 눈이 빛났다.
“혹시 소속된 길드가 있습니까?”
“가입한 길드는 아직 없어요.”
“그렇습니까?”
광수는 흡족함에 재빨리 품 안에 손을 찔러넣어 무언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소개부터 드리겠습니다, 저는 로하 길드의 부길마 양광수라고 합니다, 이건 제 명함이구요.”
“아….”
남잔 갑작스럽단 반응이었지만 광수의 손을 민망하게 하진 않았다.
남자는 받아든 명함을 푸른 갑옷 춤으로 꼬깃, 집어 넣었다.
“갑작스런 말씀이지만 지체않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쪽을 저희 길드에 스카웃 하고 싶습니다.”
“네?”
남자의 눈이 커졌고, 지켜보던 길드원들의 어깨도 놀라 들썩였다.
‘느닷없이?’
‘지금 가입 권유 하는거야?’
‘부길마님이 저렇게 즉흥적으로 행동할 사람이 아닌데….’
‘저 깐깐한 광수 형이 보자마자 명함을 내밀었다고? 상대 기량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길드원들의 기억엔 부길마 양광수는 까탈스러운 인물이었다.
뭐든 계획에 의해 실행을 해야 하며,
즉흥적 따위란 머리에서 아예 배제된 그런.
“전 겨우 F급의 랭크일 뿐입니다.”
광수가 급히 덧붙인다.
“상관 없습니다, F랭크에게 길드를 권유하는 일은 이례적이지만, 당신이라면 꼭 계약을 진행 하고 싶습니다. 이미 서바이벌 때부터 지켜봤습니다, 아, 그리고……”
광수의 말이 빨라졌다.
“계약 조건은 최대한, 시운 씨가 원하는 조건에 저희 쪽에서 맞춰 드릴 수 있습니다, 레이드 수익 정산 비율도 C급 헌터 이상으로 맞춰 드릴 거고, 선계약금 또한 섭섭지 않게 드릴 수 있고요, 가입하시면 곧바로 길드의 1군으로 활동하실 수 있게 제가 힘을………”
지켜보던 여성 힐러가 옆 동료의 어깨를 톡, 치고 귀에 입을 댔다.
-부길마가 지금 말하는 거 들었어? F짜리한테 1군으로 활동하게 해준대. 계약금까지 주고……. 저 사람 또라이 인 줄 알았는데 꽤, 유명한 사람인가봐.
-너도 부길마 성격 알잖아. 이유없인 돈 한푼 안 쓰는 인간인 거….
일개 F급 헌터에게 길드의 부길마가 자세를 낮추는 것은 헌터 세계에서는 전무한 광경이었다.
“음….”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음에도 남자의 반응이 시원찮자 광수가 급히 입을 연다.
“저희 로하 길드는 대규모의 길드는 아니지만, 헌터의 자금줄인 게이트를 물색하고 위치를 전달하는 브로커들을 다수 확보하고 있습니다! 눈 좋고 부지런한 브로커들만 선발했기 때문에 저희 길드에 오시면……”
“아직 생각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주신 명함은 성의니까 가지고 있을게요.”
“………예?”
광수가 당황했다.
이런 대답이 날아올 리가 없는데.
‘어째서?’
F랭크에게 스카웃을 권하는 일 또한 없는 판국에 부길마가 직접 나서서 굽신거렸다.
또한, 제시한 계약 조건도 최하위 랭크 따위가 절대 뿌리칠 수 없는 조건을 걸었건만.
“대체 왜죠?”
광수는 납득이 안 간다는 듯 물었다. 대체 왜? 라고 따지듯 그의 눈도 힘이 실렸다.
“길드에는 아직 생각이 없습니다. 다음에 인연이 된다면 다시 생각해보던지 하겠습니다.”
딱 잘라 거절했다.
아직 포기할 수는 없음에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일어도 꾹, 찍어 누른 광수의 입이 열렸다.
“흠, 혹시 계약 조건이 마음에 안 들어서 입니까? 얼마든지 조건은 조정해서 실망스럽지 않게 잘 맞춰 주겠습니다.”
부길마의 목소리는 간절함이 꽉 베어있었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씩, 웃을 뿐.
“말씀드린 대로 생각이 없습니다, 저는 하던 사냥을 마저 해야 해서.”
“……….”
광수가 얼었고,
뒤에서는 헌터 하나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혹시 던전 전세낼 거 아니면 좀 비켜주시던지 하시죠? 여기까지 오는동안 그쪽 때문에 몹 한 마리도 못 잡았다구요.”
“안 됩니다, 중요한 퀘스트 중입니다. 미안한데, 일주일 간 이 구역의 보스는 제가 독점합니다.”
“뭐요?”
헌터가 따지려고 시운과의 거리를 좁히려는 것을 광수가 막아섰다.
“부길마 님?”
“다음에. 일단 물러나.”
“아니, 부길마 님, 지금 뭐하시는 건데요!”
광수는 그 헌터의 어깨를 툭, 두드리고 길원들을 하나하나 보더니 출구를 향해 턱짓했다.
“오늘은 이만 모두 철수한다. 토 다는 놈은 이번 각성 게이트 선발 인원에서 강제로 제외시킨다!”
“네…….”
“네, 넵.”
“크흠! 뭐, 알겠습니다.”
‘각성 게이트’ 란 단어가 뱉어지자 마자 길원들은 눈알을 굴리더니 열린 입을 다물었다.
망토를 펄럭이며 출구를 향해 걸어가던 광수가 돌아봤다.
“시운 씨. 당신을 위해서 우리가 한 번 빠져드리겠습니다, 이 또한 제 성의의 표시라 생각 해주시고, 나중에라도 꼭 연락 주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그들의 등을 가린 망토가 일제히 펄럭이며 사라졌다.
뻐걱! 검신이 골렘의 두 다리를 가르자,
쿵! 토막난 정강이와 함께 바닥에 몸을 처박는 골렘의 등으로 불이 피어나, 냉기가 흐르는 가죽을 찢기 시작한다.
쿠어어!-.
골렘이 지른 신음은 이만 편하게 숨을 끊어달란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턱.
늘어진 골렘 앞으로 선 시운의 입술이 열린다.
“요괴화.”
꼭 한 번 사용해 볼 참이었다.
사실. 이 스킬을 쓸 타이밍이 좀처럼 없었으니까.
그때.
시운의 눈 앞으로 나타난 것은 쭉 뻗은 귀를 쫑긋, 거리며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하체가 박살나 숨이 멎어가는 골렘 앞을 서성인다.
“킁킁!”
육중한 골렘다리의 잘린 표면에 뾰족한 콧날을 묻고, 냄새를 맡는다.
“나왔구나, 여우. 아니 요괴.”
시운이 말하자 여우가 고갤 픽, 꺽어 시운을 바라봤다.
“카랑! 카라아앙!”
소형견만한 여우의 둥그런 두 눈을 검은 동공이 덮고 있어 얼핏 귀여워 보일 수도 있었지만, 살기가 흐르는 살쾡이의 눈빛 같았다.
쿠어! 쿠어어!
“카가가각!”
빠식-
골렘의 포효를 듣기 싫다는 듯 쬐그만 발을 골렘의 머릿통에 눌러 짓이기자,
박살난 골렘의 머리통 위로 노란 뇌수가 쏫아지며, 골렘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아이스 골렘을 처치하였습니다.
“와, 쎈데?”
여우가 부린 성난 발길질 한 번에 그보다 몇십 배는 큰 골렘이 잠들어버린 걸 보고 감탄 뱉지 않을 수 없었다.
턱-턱-턱-
여우가 시운 앞으로 다가와 송곳니를 벌리며 가르릉! 거렸다.
쬐그만 주제에 자기는 한 성깔 한다는 듯 전신을 두른 하얀 잔털을 세운다.
당장 달려들 것처럼.
“여우야, 난 너를 소환한 소환주다. 버릇없이 굴지 마라.”
“카릉! 카르릉! 가아악…. 아! 아, 뭐, 뭐냐. …말이 나와? 언어?”
짖던 여우는 입에서 말이 나오자 당황해 한다.
“넌 인간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어. 그리고 말했다시피 난 네 소환주이고, 넌 내 소환수다. 처음 보니까 반갑긴 한데, 생각보다 작네?”
“닥쳐라! 캉! 이 몸에게 감히 작다는 말을 씨부리다니! 날 능욕하는 게냐!”
전개는 대충 예상대로였다.
친밀도란 것이 ‘요괴화’ 스킬창에 표시되어 있고 그 친밀도는 ‘0’인 상태.
“소환수? 주인? 캉! 네 따위가! 이 몸은 각성한 맹인에게만 머리를 숙인다!”
놈의 뒤에 달려 흔들거리던 꼬리가 빠직! 굳어져 날을 세웠다.
저 꼬리에 베이거나 닿으면 손가락 하나쯤은 그냥 날아갈 듯한 예감이다.
“캉! 이리오너라, 카앙! 네 놈은 맹인이 아니다. 두 눈을 뜨고 있으니까.”
본인을 대하는 시운을 요망하다는 듯 네 발로 다가오며 긴 꼬리의 날을 시운에게 겨눈다.
“캉? 그 문신은?”
멈칫한 여우의 눈은 갑옷 끈을 내려 푼 틈으로 보이는 쇄골의 문신을 향했다.
“보이지? 이게 내가 맹인이란 증표다.”
“캉! 정말… 맹인들만이 새길 수 있는 문신이로군.”
살기를 누그린 여우에게 시운이 말했다.
“그래, 알긴 아는구나. 이 문신은 맹인직업소에서 맹인의 길을 걷겠단 계약과 함께 새긴 증표다.”
그에게 새겨진 문신은 분명 맹인들만의 증표임을 확인한 여우는 내밀던 꼬리를 바닥에 쾅! 내렸고. 꼬리에 닿은 땅엔 스파크가 튀며! 깊이 파인다.
“네 놈은 정녕 각성한 맹인이 맞더냐.”
“쉐도우 머더러를 말하는 거군. 맞다, 네가 말하는 각성한 맹인 말이다. 이제 너는 내가 필요로 할 때마다, 소환되어 날 도와야 한다.”
“카카캉!”
돌변한 여우가 꼬릴 겨누고 번개같이 뛰어들었다.
퍼억-
“크아앙!”
시운의 발에 복부를 걷어차인 여우는 자세를 고쳐잡고 다시 날아올라 그의 얼굴을 향해 발톱을 휙휙! 휘두른다.
창! 차앙!
검신과 발톱이 마구 맞부딪힌다!
“후우- 후우-”
이 소리는 땀범벅이 된 시운의 헐떡임 소리였고,
“카앙…. 카아앙….”
위 소리는 여우의 입가로 나오는 숨가쁜 소리였다.
“더 싸울 거냐? 쬐그만 게 진짜 세네.”
상대하면서도 놀란 점은 넘사벽 근력을 담은 시운의 검격을 용케도 저 작은 발톱으로 막아내고, 피하고, 이 악물고 달려든 여우의 독기였다.
“캉! 피맛을 좀 보니 끓어오르는 구나. 더 싸워보…… 끼에엥!”
빠악!
아클레우스의 검등이 여우의 허리에 꽂히자, 비틀거리다 푹, 늘어진 여우의 눈은 분함이 실렸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은 마라. 널 조련하는 과정 중 하나니까. 네 녀석은 워낙 자기중심적이고, 강한 놈만 골라 따른단 것을 직업소 안내원께 들었거든.”
“카앙! 부, 분하다…. 이 노옴. 내가 단순한 여우인 줄 아느냐.”
[‘요괴화’의 지속시간이 초과하였습니다.]
-지속시간이 초과한 관계로 요괴 여우의 소환체가 사라집니다.
“카앙?”
여우는 목을 삐쭉 세워 사라져 가는 자신의 꼬리를 응시한다.
“소환 시간이 초과 됐다네. 일단 우리의 첫 만남은 여기까지 하자.”
“카아앙! 다음에 날 소환하면 그 때는 이 빚을 ………”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사라진 여우.
“휴-”
맹인직업소 ‘미르’에게 듣던대로 였다.
요괴화의 스킬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기까지는 많은 땀을 흘려야 가능하다고.
‘첫 대면부터 녀석의 기를 확 꺽는 것은 일단 성공했고.’
이 또한 미르에게서 얻은 팁이었다.
요괴 여우는 여린 인간은 저열한 대상으로 인식한다 했다.
‘반대로 강하게 짓누르는 놈에게 충성기질을 보이는 게 녀석이지, 스파르타식 조련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삭!
서걱!
서걱!
크오오오….
허공을 세 번 가른 검신의 움직임이 멎자,
골렘의 목이 ‘ㅡ’ 자로 분리되어 떨어진 머리가 땅에 굴렀고,
상체는,
‘/ ’ 형태로 빠개져 좌우로 이등분 됐으며,
왼 다리는,
‘ㅣ’ 자로 갈라져 두 토막 나 늘어진다.
쿵! 쿠웅! 쿵-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라지 마라.’
떠올린 한 문장을 따라 시운은 쉬지 않고 아이스 골렘을 토막내고 있다.
과거.
나름 노력했다고 자부했던 시운이지만, 그 노력은 남들이 어쩔 수 없이 하는 그런 형태의 노력일 뿐이었다.
‘남들 다 하는 그깟 노력 좀 한 주제에, 실패만 반복하는 날 자책하고, 신을 원망했었지, 병신같이도.’
과거 1회차, 2회차 인생 때는 그랬다.
허나.
지금은 다르다.
‘누구나 하는 노력은 노력이라 할 수 없고, 누구나 할 수 없는 노력을 노력이라 할 수 있는 것. 그런 진짜 ’노력‘의 그릇에 꾸준함이 담기면 ’혼신‘이 되고, 그 ’혼신‘은 내 가도를 바꾼다.’
현재의 마음가짐이었다.
상념에 젖었다 깬 시운의 눈은,
퀭한 눈을 벌떡! 뜬 채, 불에 녹고있는 골렘에게 향했다.
‘내가 탱크라고 불리는 아이스 골렘을 쉽게 도살할 수 있는 이유가 있지, 그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