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8화
흑막의 인물들 (3)
이시연이 고3이 되던 해.
수능 올 1등급이란 성적을 거두고 일류대학에 입학할 마음에 부푼 그녀는 집에 귀가 후.
어린 나이의 두 눈으로 담기 힘든 광경을 담게 된다.
줄줄이 집을 비집고 들어온 장정들이 집의 가구와 전자기기 가릴 것 없이 딱지를 붙였다.
일명 빨간 딱지.
보증을 잘 못 선 아버지의 실수에 의한 일이었다.
가난한 집안이라 더 기울 것도 없었다.
-내, 내 방에도…….
시연의 불안한 두 눈에는 그녀의 방마저 엉망이 되어 있는 것이 담아졌고.
시연은 대학등록을 포기해야 했고.
돈을 벌어야 했다.
망해가는 집안.
빚더미에 허덕이는 집에 한푼이라도 보태기 위해 알바를 두 탕, 세 탕 뛰어가며 전전긍긍 했다.
-내 동생 시운이만은 절대 나처럼 되게 할 수는 없어, 없다고!
온 가족이 발벗고 빚을 갚기 위해 혹사했고,
빚은 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삶을,
청춘을 빼앗긴 시연.
원래부터 촉망받던 엘리트의 그녀는 의사라는 꿈을 꿨다.
허나.
꿈을 누릴 것도 환경 때문에 누리지 못했다.
그리고.
한 남자와 집을 찾아오게 된다.
무역 사업을 하는 남자라고 자기를 밝힌 중년 남성과 함께.
그 이후.
영영 떠나버린 그녀였다.
끼이익-
‘엄마가 벌써 왔나?’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상념에 깬 시운이 고개를 들자.
숨이 콱, 막혀왔다.
“…누나?”
“그래. 누나야, 시운아.”
“……….”
시운은 말이 나오질 않았다.
방금 떠난 그녀를 막 그리워 했던 참인데. 느닷없이 그녀가 나타나 눈 앞에 서있으니.
1회차 생에도, 2회차 생에서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었다.
“왠…일이야?”
시운의 입에서는 속과 다른 말이 나오고 말았다.
그 말에 시연은 붉게 달아오른 낯빛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누나, 보고 싶었어. 알아? 왜 이제야 온 거야? 응?”
시연의 가는 어깨가 떨리고 있다. 시운은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자신과 똑 닮은 누나. 여리고 상처많지만 정이 많은 사람.
‘원망하고 싶지 않아.’
이미 그녀의 어릴 적 상처는 시운도 해아리기 힘든 상처였다.
그걸 아니까.
가족을 버리고 왜! 떠나갔냐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누나가, 누나가 미안해. 시운아. 네 소식은 멀리서 들었어…. 누나가 밉지? 응?”
“밉긴. 그저 보고 싶었다, 잘 왔어.”
“그냥 누나가 미웠다고 말하라고! 바보야.”
시연은 시운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작고 가녀린 시연의 등을 토닥여준 것은 시운의 몫이었다.
“시, 시연아. 내 딸 시연이 맞아? ……응?”
고된 노동에 축 늘어진 아버지의 어깨는 그 어느때보다 들썩였다.
“아빠. 이제 와서 미안해, 보고 싶었어.”
“시연아!”
왈칵- 솟은 아버지의 눈물과 함께 고사리같은 손을 뻗어 시연을 안은 아버지는 한참을 울었다.
부녀가 서로 안은 품으로, 어머니도 떨리는 손을 뻗어 그 품을 안았고. 지켜보던 시운도 그 세 명의 품을 그대로 안았다.
“시연아! 아버지가 미안하다, 미안해! 내 딸아.”
“끄흑흑…. 아빠. 아니야. 내가 참 불효녀야…….”
“와 줘서 고맙다, 시연아.”
어머니는 코를 훌쩍, 거리며 흐느껴 말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운 가족은 서로의 품에서 한참을 울고 식탁에 앉았다.
오늘의 저녁 식사는 그 어느 때보다 진수성찬이다.
제육볶음, 된장 찌개, 잡채, 두부 조림, 헐큰한 장국까지.
시연은 집밥을 먹으면서 시선을 들지 못했다.
“많이 먹어라, 시연아.”
아버지가 시연의 수저에 반찬을 올려다 준다.
어머니는 몸을 일으켜 물을 떠다 시연의 식탁 앞에 놓아주었고.
시연은 말없이 밥을 먹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참을 눈물 고인 눈으로 시연의 식사를 지켜봤다.
“누나, 이제 한국에 완전히 온 거야?”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이 시운의 머리 위에 올려져 동생의 머리칼을 쓰담는다.
밥을 먹다가 시연이 콜록, 거리자 잽싸게 엄마가 물이 든 컵을 내민다.
“시연아, 천천히 먹어. 채하겠다.”
“으응.”
앙상한 시연의 볼가에 음식이 가득 차차 어머니는 더욱 반찬을 끌어다 시연 앞으로 내밀었다.
“김치도 먹고, 여기 파전도 먹어봐. 어이구, 우리 딸 야윈 것 봐.”
“아빠하고 엄마도 식사 좀 해. 날 그렇게 빤히 보고 있으면 내가 민망해서 밥을 못 먹겠잖아.”
오늘 하루 힘들었을 엄마, 아빠가 식사를 하길 바랬음에 던진 시연의 말이었다.
“우리 딸 먹는 것만 봐도 배 부른데.”
“나도.”
엄마와 아빠는 환하게 웃었다.
수저에 뜬 국을 삼키는 시연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진다.
“우리 시연이, 시운이 얼굴에서 머리만 딱 긴 얼굴이네.”
“아빠도! 참. 나 시운이, 얘랑 안 닮았거든?”
셀쭉, 거리는 시연을 보던 시운이 말을 얹었다.
“나도 누나랑 얼굴만은 안 닮고 싶거든?”
“뭐어?”
남매의 장난여린 투닥거림에 지켜보던 아버지, 어머니가 웃었다.
이내 그 웃음은 시운과 시연의 입가에도 번졌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여 먹는 저녁은 곧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어 흘렀다.
“내 동생, 헌터가 됐다는 소식 들었어. 아직 믿기지가 않아.”
시운 옆에 가지런히 누운 시연이 말했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누나의 살가운 소리. 아직도 실감 나질 않는 시운이다.
“누나가 집 나갔을 때 원망 많이 했지?”
“그땐 했고, 지금은 이렇게 와줘서 그저 고마워.”
그저 미소로 답한 시운. 시연은 그런 시운을 낯설게 바라봤다.
투정만 부리고, 짜증에 신경질만 가득하던 동생이었다.
근데 헌터가 되더니 이런 어른스러운 모습은 처음 보기에.
“울 동생, 한 번 안아보자.”
“그러시던가요.”
남매는 서로를 보며 꼬옥, 안았다.
누나의 품에 안긴 시운은 눈을 질끈 감고 다짐했다.
‘이번 생은 확실히 뭔가 다르게 돌아가고 있어.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난 빨리 커야해. 돈을 벌어야 해. 가족이 고생하는 것을 그만 보고 싶다.’
십일 후면 승급 심사를 치루는 날.
D랭크가 되면 곧바로 도약하여 C랭크가 되어주겠다.
이계의 균형을 망가뜨리는 게이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돈을 벌겠다. 벌어 주겠다.
‘좀만 기다려라, 누나. 내가 고생 끝나게 해 줄테니까.’
이제 그날은 그리 멀지 않았으니까.
이 세상은.
돈이 있어야 가족도 지킬 수 있는 그런 세상이니까.
바로 그 시각.
헌터 협회 현계 본사.
라는 팻말이 달려있는 사무실 안은 두드려지는 키보드 소리로 가득했다.
손가락에 의한 키보드 소리 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질 않았다.
싸늘한 정적이 감도는 사무실 안 사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굳어있었다.
덜컥- 문이 열리자 모니터에 눈을 박던 사원들의 눈이 힐끗, 문으로 모이다 다시 모니터로 돌아간다.
또각 또각- 구두굽 소리를 내며 들어온 여성의 명찰에는,
사원복을 입은 성혜가 서류 몇 장을 장우현 대리에게 내밀었다.
“윤 주임님. 이게 주임님이 뽑은 명단표죠?”
“네!”
“음….”
펄럭-
서류를 훑는 우현의 눈은 무거웠다.
이번에 주무관으로 승진한 성혜에게 곧 일어날 사태를 대비할 신입 헌터 9명을 뽑게 했다.
탁-.
서류를 모두 훑은 우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한 F랭크 애들로 명단 뽑아 출력한 거 맞죠? 믿습니다.”
“믿어주세요.”
우현이 옆 자리에 앉은 사원에게 명단표를 건넸다.
“여기, 명단표에 적혀있는 애들 다 연락 넣어서 내일 모이라고 전해. 4급 발령이라고.”
“알겠습니다.”
명단표를 받은 사원은 가늘어진 눈으로 명단을 확인한 후, 모니터 옆 유선 전화기를 귀에 댔다.
“이시운은 현계에 있다면서요?”
우현의 물음에 성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계 퇴입 시간이 어제로 기록 돼 있었습니다.”
“이번 명단에 기입된 헌터들이 그 친구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잘 아시죠?”
우현의 질문의 의중을 성혜는 알고 있었다.
이번 F랭크의 최대 유망주인 그가 마침 현계로 나가있는 타이밍이라,
명단의 타 헌터들도 그 친구 스케줄에 맞춰 현계로 집합시킬 의도였다.
이번 명단의 가장 상단에 적힌 이시운. 그 밑으로는 성혜가 눈으로 보고 뽑은 재능있는 헌터들이 8명이었다.
곧 일어날 그 사태를 위해 모든 헌터들이 대비해야 할 터였다.
F급 헌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장 대리, 신입 애들 명단 추린 것 잘 돼가나.”
자리에서 삐죽, 솟은 몇 없는 머리칼이 보였다.
박 팀장이 눈만 뻐끔, 위로 드러낸 채 물었다.
“네, 팀장님. 지금 연락 돌리고 있습니다.”
“애들한테 확실하게 당부해 놔야 하네. 지금 비상 걸린 거 걔네들도 알아야지.”
“그럼 전, 가보도록 할게요.”
성혜가 빨간 테 속 눈꼬리를 생긋, 올리자 우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휴-”
사무실 밖으로 나와 복도를 걷는 성혜는 한숨부터 뱉었다.
‘걔네들이 놀라면 어쩌지.’
협회에 비상이 걸렸다.
그 소식을 그들이 접한다면 아마 놀랄 것이다.
주무관 윤성혜에게는 F랭크의 그 헌터들은 친동생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중 성혜보다 나이가 많은 헌터도 있었지만.
‘이시운. 내일 보게 되는 건가? 오랜만에 보게 되네.’
설렘도 일었지만, 그런 감정은 잠시 접어둬야 할 때였다.
턱- 턱-
성혜의 구두 굽 소리에 섞인 것은 남자의 둔탁한 구두 소리였다.
“윤 주무관님.”
이한석 주무관이었다.
“아, 주무관님. 퇴근하는 길이세요?”
“네, 혹시 명단표 제출하고 오는 길입니까.”
묻는 한석의 눈은 싸했다.
“방금 제출했습니다.”
“그 명단에 이시운도 있겠네요?”
“…네. 있죠, 왜 물으세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습니다. 수고하세요.”
“…네.”
한석은 그대로 걸어갔다. 복도 저 너머로 걸어가는 그의 등을 보던 성혜가 갸웃했다.
‘저 사람은 이시운. 이름 석자만 나오면 눈을 기분 나쁘게 뜬단 말야, 재수 없게.’
어쨌든 곧 소란이 좀 일 것 같은 기분이다.
다음 날.
협회 본사의 강당 안.
“어서들 와요. 오느라 고생 많았죠? 배고프겠다, 자리에 앉아요.”
성혜가 얼굴을 보이는 헌터에게 하나하나 인사 했다.
헌터들은 강당에 배치된 테이블에 하나둘씩 엉덩이를 깔고 앉는다.
테이블 위로,
빈 불판과 고기. 각종 반찬들이 올려진 것을 본 헌터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4급 발령이라면서?’
‘그냥 식사 자린가?’
‘바쁜데 왜 오라가라야.’
‘뭐하러 부른 거지?’
성혜는 헌터들을 훑고 아직 그가 오지 않았음에 발을 동동 구른다.
‘설마 늦진 않겠지? 뭐, 애들 안심부터 시켜주고 그 이야기를 해야 되니까. 좀 분위기 풀어주고 그때….’
성혜의 뒤편에서는 정장을 입은 사내 몇 명 사이로 서있는 한 남자는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끼익- 강당 문이 열리자.
헌터들의 눈이 모인다.
‘탑 프로게이머 장세준이다.’
‘F급 초 유망주…. 저 사람도 왔구나.’
‘나 뿐만 아니라 F급 모두가 모이는 건가본데?’
강당을 훑는 안경 속 세준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성혜가 눈짓으로 인사한다.
“세준 씨. 식사 안 했죠?”
“4급 발령이라서 왔습니다만, 겨우 저녁 식사 자립니까?”
“일단 식사부터 할 거에요. 그 후에 이야기 할 거랍니다.”
“…네.”
세준은 빈 테이블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다가 한 남자와 눈이 마주침에 미간을 찡그린다.
‘장유석.’
얼마 전 퀘스트란 명분으로 서로 죽이네! 마네! 하며 싸웠던 남자를 밥자리에서 마주치니 껄끄러웠다.
유석 또한 놀란 눈으로 세준을 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장세준도 왔군. 그렇다면….’
나머지 유망주들도 올 터.
“혜령 씨! 저기, 저기로.”
성혜가 손짓으로 자리를 안내함에 혜령은 퉁명스런 얼굴로 자리에 가 앉았다.
‘……뭐야?’
혜령의 눈이 몇 미터 떨어진 세준에게로 향했다.
‘강혜령 저 여자도? 이거 재밌네.’
세준과 혜령이 허공에서 만난 시선은 소리없이 불꽃을 만들었다.
‘치잇. 왜 꼴보기 싫은 애들하고 같이 붙여놨냐고.’
팔짱을 툭, 낀채 성혜를 원망스레 바라봤다.
옆으로 굵은 팔뚝이 느껴짐에 혜령은 슬쩍, 눈을 옆으로 돌렸다.
장유석이 무표정으로 혜령을 보다가 고개를 꾸벅, 숙인다.
“안녕하세요.”
“당신도 왔어요?”
“네, 4급 발령이라고 듣고 왔어요.”
혜령의 눈살이 일그러졌다.
‘별일도 아닌데 불렀기만 해봐.’
뒤이어, 강당 안으로 등장한 여성은 총총거리며 혜령 옆에 다가와 앉았다.
“언니!”
연희가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
혜령은 대충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준다.
“유석 씨도 있었네요?”
“네, 아마 이시운 씨도 올 것 같네요.”
“오오, 이게 누구야? 연희 양도 왔어?”
저 멀리서 태식이 손을 흔든다.
연희가 고개를 꾸벅, 숙인다.
‘시운이도 온다 이거지?’
유석의 말에 연희의 눈가가 휙, 올라가 눈웃음을 피어낸다.
그러다가.
저 구석탱이에서 다리를 꼰채 자신을 흘기는 세준을 보자 똥씹은 썩은 표정을 짓는다.
‘뭐야? 저 자식도 있네.. 정말 꼬라지 보기도 싫은데!’
혜령은 꽉, 끼는 청바지를 입은 채 도도히 다리를 휙, 꼬고 주위를 살폈다.
‘대체 뭐하는 자리인데? 뭐냐고.’
어느새 여덞 명의 헌터가 모였다.
끼익- 강당 문이 열리자,
마지막 아홉 번째 헌터의 등장에,
성혜 뿐만 아니라, 모든 헌터들의 눈이 모였다.
‘왔다, 이시운!’
‘드디어 저 놈인가.’
‘뭐야? 쟤도 왔어?’
‘엘리트 세 명 다 모였네.’
남자는 강당 문을 열고 들어와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위를 훑는다.
“시운 씨! 어서 와요, 여기!”
성혜가 여느 때보다 반갑게 손을 흔들었고.
사내들 틈에 섞여있던 한 남자의 가는 눈이 시운. 그에게로 움직여 꽂혔다.
그가 터덜터덜 걸어와 성혜 앞에 멈춰섰다.
“4급 발령이라 듣고 왔습니다. 저 음식들은 뭡니까? 단순히 식사 하라고 부른 것은 아닐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