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3화
다시 토킹바의 그 작가에게 (2)
다음 그의 말이 어떻게 이어질까.내 심장은 처음 소개팅을 나가는 새색시처럼 살갑게 요동친다.
난.
내 두 눈은 오롯이 춘식의 입술에 향해 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열리는 입술과 함께 그 답 또한 열릴 테니까.
“독자님. 독자님은 지금 어드바이스를 받는 것도 좋지만 중요한 건 연애를 해 봐야 해. 즉, 여자를 만나봐야 한다는 소리지.”
“여자를 만나보란 말씀인가요? 그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전 그 아이만 좋아하고 있는 상황이고 또…….”
“아니.”
춘식이 내 말을 딱 잘라버렸다.
그리고 이었다.
“어차피 천천히 다가간다고 했다면서? 뱉은 말은 지킬 수 밖에 없지. 왜냐? 여자는 남자가 중요하게 뱉은 말은 항상 기억하거든. 그리고 그 말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분명하게 따지고 지켜본단 말이야.”
탁-
빠르게 그와 양주가 든 잔을 건배했다.
춘식은 입에 침이 마르는지 벌컥- 벌컥- 양주를 들이키고 말을 잇고 그랬다.
“즉. 그 여자에게 텀을 두면서 다른 여자도 만나보란 말이지, 내 말은.”
다른 여자도 만나보라?
그럴 수는 없다.
한 여자를 좋아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다른 여자를 만난단 말인지?
이 말은 좀 납득이 안 가는데.
“왜? 양심에 찔리는 짓이라 생각해? 독자님?”
그가 내 의중을 정확히 꿰뚫었다. 이 정도면 내 바디시그널 캐치 능력과 맘먹을 정도의 캐치 내공인데?
놀란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휴, 독자님, 내가 봤을 때 자네는 진짜 미치도록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아. 바보처럼 말이야. 그 여자와의 완벽한 연애, 즉 그 여자에게 부족하지 않은 남자가 되기 위해서 그 동안에 여자도 좀 만나보고 하란 말이야, 내 말은. 양심의 가책? 그런 걸 왜 느껴? 어차피 여자는 많이 만나봐야 알고, 대하는 것도 느는 거야.”
“그렇지만,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상황에서 ……여자를 만난다면 만나는 여자의 마음을 제가 갖고 노는 격 아닙니까.”
이번만큼은 이해가 가질 않았기에 내가 좀 진지하게 물었다.
따진 건 아니고.
“어차피, 어차피 말이야. 다른 여자를 만나는 상황에서 그 다른 여자란 여자를 즐겁게 해주고, 뭐 그러면 돼. 마음을 갖고 노는 격이라고? 참…. 자네, 그 여자를 놓치고 싶은 거야?”
“놓치고 싶지 않죠.”
“놓치지 않기 위해서 다른 여자를 좀 만나란 말일세. 양심? 가책? 그런 쓸데없는 건 좀 주머니든 어디든 좀 쑤셔 박아놓고. 세상에 양심 다 지키며 사는 사람이 있을 것 같나? 사람이란 다 똑같아. 그런 거 하나하나 지키면 세상 못 살아. 불이익만 받게 되는 거라고…….”
말을 끝마친 그의 눈빛은 서늘해져 있다.
완벽하고, 호탕하고 여자에 대해 마스터적인 그 또한 내면에 상처가 있는 듯 했다.
“캬아-.”
양주를 들이킨 그는 쓴 탄성을 흘린다.
난 생각했다.
다른 여자들을 만나보면서 여자를 즐겁게 해줄 감각을 익히고……
익힌 감각을 통해서 그녀를 쟁취한다라.
어쩌면 연애를 할 줄 아는 남자가 되어주는 것이 그녀를 위한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악도 든다.
‘음…….’
근데 철 없는 행동이 아닐까.
아무리 명분이 있다지만. 좋아하는 여자를 두고 다른 여자를 줄줄이 만나고 다닌다는 것이?
“작가님. 그건 철 없는 행동 아닐까요? 그래도,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어장을 치는 그런 행동은….”
“철 없는 행동 맞지. 맞는데, 철 없는 행동 몇 번 하고 탄탄해져서 그 여자를 가질래? 아니면 철이 있든, 없든 따지고 씹선비처럼 지내다가 그 여자를 놓치고 후회막심하며 목구멍에 술이나 들어부울래? 어떤 걸 선택하겠는가.”
“둘 중에 선택하라면 전 당연히 전자를 택하겠습니다만……….”
“그럼! 그렇게 하게. 왜 이리 복잡하게 생각하는가? 철 좀 없으면 어때? 남자가 철 든다고 누가 알아줘? 중요한 건,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가지고 행복하게 잘 사는 거야. 철 따위? 개나 줘버리게. 남자는 원래 철이 없는 동물이라고!”
춘식은 또다시 양주잔을 든다. 그리고 맞은 편에서 가만히 듣던 바텐더에게 건배를 요구하며, 바텐더를 챙기는 일 또한 빼먹지 않았다.
그의 말. 그의 말이 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뭔가 가슴에 닿는 것 같고 묵직하게 들렸다.
“독자님. 그리고 그 여자 앞에서 주눅 들거나 뭐, 그러지 마. 딱 얘기 들어보니 그녀는 졸라리 예쁘고, 몸매 완벽하고, 집안 빵빵하고, 완전 커리어 능력녀에 뭐……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여주 급이라며? 그래도 남자는 여자 앞에서 작아지면 안 돼! 왜냐?”
또다시 양주를 목구멍에 들이붓는 춘식.
진짜 술 잘 먹는다. 주량이 대체 얼마일까?
그의 입이 열린다.
“왜긴 왜야! 자존감 없고, 자신감 없는 남자를 어떤 여자가 좋아하겠어? 남자는 말일세. 우울증이 걸려도 여자 앞에서는 조증처럼 행동해야 해. 허세 말고. 자, 자… 자! 집중. 한 태권도를 배운 남자가 있다 쳐 보자고? 근데 그 남자가 우울증에 걸렸어. 모든 게 하기 싫고, 무기력 해. 그래도 맘에드는 여자 앞에서는 어떻게 해야 되냐면?”
곧바로 말을 잇는다.
“여자 앞에서 딱 이렇게 멘트 던져줘야 해. ‘xx야. 오빠가 우울증 좀걸려서 요즘 좀 초췌하다? 그래 오빤, 태권도 4단. 우울증 5단. 괴로움 6단이지만 고추 단단이다. 그니까 그 단단 고추로 오빠가 오늘 밤 죽여줄게, 오빠가!’ 이렇게 말할 줄 알아야 한다고!”
“푸하하하!”
듣고 있던 바텐더가 그의 말솜씨에 빵- 터진 웃음을 뱉었다.
나 또한 그의 언변에 웃음이 나왔다. 정말 말솜씨 뿐만 아니라 사람을 즐겁게 하는 매력이 있는 사람 같다.
강춘식. 그가 왜 여자를 줄줄이 꿰고 다니는 지 알 것 같다. 나이 좀 많아도 이런 남자 싫어할 여잔 없을 것 같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야. 아우, 토론하듯이 말을 콱콱 내뱉었더니만 침이 마르고, 목이 타네.”
“오빠, 저 한잔 줘요.”
“……오빠! 저도 여기서 한잔 먹어도 될까요?”
어느새 또다른 바텐더 하나가 춘식의 말빨에 빠졌는지 다가와 물었다.
“당연하지, 마셔. 마셔!”
춘식은 호쾌하게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며 윙크 한번 능글맞게 날려주니 바텐더 둘이 배를 잡고 뒤로 넘어갈 듯 웃었다.
“작가님, 고맙습니다. 오늘도 값진 조언 많이 들은 것 같습니다.”
“오? 그렇다면 다행이고….”
춘식은 날 향해 힘내란 듯 입꼬리를 쫙 찢어 쾌활한 미소를 보내주었다.
“그래, 여자 좀 만나봐요. 솔직히 그쪽 헌터라면서요? 얼굴도 호감형이겠다, 능력도 좋겠다, 비율도 딱 여자들이 좋아하게 잘 빠졌는데.”
바텐더가 거들 듯 나에게 말했다.
‘진심이군.’
잠시 읽어본 바디시그널. 바텐더의 말은 본심과 일치해서 뱉은 말.
탁!
“아! 독자님.”
춘식이 내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쌔렸다.
“네?”
“잘 생각해봐. 그녀를 가졌다 치자? 근데 독자님은 연애 경험이 없잖아? 맞지? 그 이후엔 어떻게 할 건데? 여자 답답하게 해서 어렵게 얻은 사랑 발로 걷어차 버릴거야? 그러니까 여자 좀 만나보면서 여잘 기쁘게 하는 방법, 다루는 방법 그런 걸 몸으로 익히란 말이야. 그게 나쁜 게 아니야. 스킬로 여자를 다루는 게. 진심으로 좋아하면서 또, 스킬로 여자를 다뤄주면 그게 진짜 여자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한 능숙한 사랑인거라고.”
그의 말을 들은 내 뇌가 번쩍였다.
마치, 콱 막혀있던 뇌혈관 하나하나가 시원하게 터지면서 혈액순환이 휙휙, 돌아 정신을 번쩍 들게 해주는 느낌이랄까.
‘그렇지, 세정이와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오늘만 봐도 봐라.
내가 리드를 한다고 했지만 데이트 코스는, 카페 가고, 밥 먹고, 공원에서 캔맥 하나 먹고 마무리 했다. 소소하다곤 하지만 여자에겐 좀 루즈할 수도 있는 데이트였다.
“아, 아! 그리고 픽업아티스트? 인가 그런 학원 있지? 거긴 얼씬도 하지마. 참나…. 걔네 이야기하는 거 들어보면 참 가관이야. 들소, 곰처럼 생긴 것들이 유튜브에 떡하니 나와서 씨부리는 게 뭐, 지는 말만 하면 다 여자 꼬신다는 뉘앙스야. 막, 하나하나 끝까지 들어보면 있지? 지가 말하는 대로만 하면 S급 연예인부터 지나가는 암컷 개까지 꼬실 수 있다고 뻔한 말에 포장에, 포장을 야무지게 해서 그럴싸 하게 한다니까? 풉, 꼭 그런 놈들이 옆에 여자가 없어. 지가 그렇게 여자를 잘 꼬시면 픽업 아티스트인지 뭔지로 돈 벌 시간에 돈 많은 여자 하나 꼬셔서 인생 대박 치면 될 것을…….”
춘식의 말에 바텐더들이 고개를 일제히 끄덕였다.
“아, 맞아. 걔네 재수없더라.”
“그 바람둥이들 으으…. 소름 돋아. 말하는 거 들어보면 여자를 진짜 단순한 동물로 보는 것 같다니까.”
바텐더 둘의 눈은 춘식의 입에만 꽂혀있었다.
‘대단해.’
나이는 청춘을 훨씬 넘긴 춘식이지만. 그보다 한참 젊은 바텐더 둘의 이목은 강춘식에 집중 되고 있다. 춘식보다 잘생기고 젊은 나에게 살짝 추파섞인 호감을 던졌던 바텐더 또한 춘식에게 반은 넘어간 듯 보였고.
‘여자한테 남자는 외모가 다가 아니구나. 매력. 이런 매력이.’
춘식은 양주를 들이키며 바텐더와 낄낄, 거리며 열렬한 대화를 하고 있다.
오늘 춘식을 좀 귀찮게 한 것 같다. 이쯤에서 빠줘주는 것이 예의인 것 같다.
‘그의 시간을 더는 뺏으면 안 되니까. 내가 아무리 그의 독자라도.’
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가님. 오늘 감사했습니다. 좋은 말씀들….”
감사함에 절로 내가 폴더 인사를 보내자 춘식이 손사래를 친다.
“아니, 아니. 언제든 내 말이 도움 된다면 또 와요. 내가 뭐라고, 독자님한테 이런 조언 하나 못 해주겠어? 그보다… 그때처럼 또 내 술값 내주고 갈 생각이라면 접어줘.”
“아니, 오늘도 제가 내고 가겠습니다. 작가님 시간 뺏은 답례로…”
“노, 노!! 독자님. 나도 돈은 있어요. 오늘은 내가 특별히 독자님 술값까지 계산하도록 하지. 이건 내 성의니까 두 번 거절은 하지 말아줘! 하나 부탁이 있다면, 내 소설 재밌게 읽어줘요. 그게 작가로서 독자님께 드리는 부탁이니까.”
“아…….”
이 사람. 참 매력있다.
사람의 정이란게 느껴진다.
고마움에 내가 지갑을 열어 계산을 하려 했지만 그가 선수 쳐서 카드로 계산을 했다.
“아, 오늘 너무 감사했는데 술까지 얻어먹고…….”
“감사하긴. 이제 가시는 건가, 독자님?”
“네. 전 이만 가보려구요.”
“내 소설을 읽어주는 고마운 독자님들 모두가 진짜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이야. 잘생긴 독자님 또한 마찬가지고?”
춘식이 발걸음을 옮기는 내게 윙크를 보낸다.
풉, 난 그의 능글스러움에 절로 웃음을 흘렸다.
난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바를 나왔다.
어느새 밤은 깊어간 시각이다.
거리에는 사람 한명 잘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렇단 말이지.’
춘식의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였다.
그가 던져준 조언. 고민과 최종 선택은 나의 몫이다.
핸드폰을 터치 했다.
-12일 AM 03:05
벌써 새벽 세 시나 되었다.
남은 2주 좀 안 되는 시간. 현계에서 편하게 쉬고 갈 생각이다.
그렇게 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힘을 실었다.
“후우우-”
늘어진 한숨소리는 혜령의 입에서 난 소리였다.
가는 눈으로 달력을 봤다.
14일. 수요일.
‘오늘이네.’
그녀가 달마다 한 번씩 가는 그곳에 가는 날.
모자를 푹, 눌러쓰고 늘씬히 쭉 빠진 몸매에 가디건 하나를 걸쳐 가린 뒤, 모자 쓴 머리에 가디건 후드를 뒤집어 쓴 혜령은 밖으로 나왔다.
거리를 걸어 도착한 곳의 간판이 보였다.
남들의 시선을 막기 위해 마스크에 모자, 후드 가디건까지 완벽한 분장으로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카운터 앞 간호사가 물었다.
“저, 성함이?”
-강혜령이요.
“네?”
“강혜령이라고요오….”
속삭이는 소리를 못 들어 재차 묻는 간호사에게 입술을 비집으며,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네, 잠시 앉아계세요.”
혜령은 시선을 내리깔고 대기실 소파에 앉았다.
다리를 비틀어 꼬고, 얼굴을 밑으로 내린다.
‘휴. 이곳에 올 때마다 신경 쓰인다니깐?’
정신과는 단지 마음을 다쳐 오는 사람들이 많은 곳.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은 그렇지 않은 걸 알기에 이곳에 오는 시간만큼은 정말 시선이 괴롭고 의식된다.
잠시 후.
“강혜령 님! 들어가세요.”
간호사의 호명에 혜령이 차가운 눈으로 간호사를 째렸다.
“이름 좀 작게 불러줄래요?”
“아, 네.”
까칠한 혜령의 태도에 간호사는 멋쩍게 답했다.
덜컥-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자 흰 가운을 입은 30대의 예쁜 여성이 씩, 웃었다.
“아, 혜령 씨? 어서와요.”
“네.”
혜령은 입을 가린 마스크를 벗고, 모자를 벗는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앞에 있는 이 김인애란 의사 앞에서는 좀 편하다.
“오늘 날씨 좋죠? 잘 지냈어요?”
사람 좋은 미소로 뭇는 인애.
“네, 전 잘 지낸 것 같네요.”
항상 남들 앞에선 차갑고 경계스런 표정을 짓던 혜령.
그런데 김인애 의사 앞에서 혜령은 표정은 누그러져 그 어느때보다 편해 보였다.
몇 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는.
“선생님. 약 언제까지 먹어야 해요?”
혜령이 애절한 조로 물었다.
그녀의 사연을 잘 아는 인애는 안타까운 눈으로 혜령을 본다.
“괜찮아질 때까진 먹어야죠. 혜령 씨. 아직도 많이 힘들죠?”
“힘, 힘…. 뭐, 큼! 아, 짜증나게 왜 또….”
눈에서 툭, 떨어지는 것이 창피한 것이라 여긴 혜령은 고개를 푹, 숙인다.
“울고 싶으면, 울어요. 그게 나쁜 게 아닌 거 혜령 씨도 잘 알잖아.”
“정신과 약만 먹으면 몽롱해지고 졸려요…. 언제까지 이걸 먹으며 살아야 하나요? 네?”
“혜령 씨….”
덩달아 인애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인애의 눈이 자신의 책상 앞 차트로 향했다.
강혜령 그의 병명이 적힌 차트.
그녀의 병명은 이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