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4화
보조무기를 위한 스파링 시험 (1)
병명은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또는 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란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극심한 스트레스(정신적 외상)를 경험하고 발생하는 심리적, 신체화 반응.
혜령은 코치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사람을 대하는 것에 어려운 것이다.
특히 남자를 대할 때 트라우마가 머리에 떠올라 방어기제를 펼치며,
감정을 숨기고 차갑게 대하는 것.
“정신과 약물만 먹으면 기억력이 떨어지고 활을 다룰 때 손이 떨려요……! 진짜 존나 그만 먹고 싶다구요! 보기만 해도 위가 역류할 것 같다구요..”
“혜령 씨. 마음은 알겠지만 나을 때까지는 먹어야 하는 거 잘 알잖아요?”
“정신과 약물의 부작용에 이제 질렸어요. 질렸다구요!”
“약물은 끊게 되면 모든 신체화의 부작용 반응은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 돼요.”
“회복이라고요? 정말인가요! 아닌 것 같은데요? 의사 선생님들은 다 그렇게 말하죠. 약 부작용은 끊으면 다 없어지니까 걱정 말고 먹으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정말 매일 이런 독한 약을 먹는 데도 끊으면 모든 게 말끔히 사라진다고 생각하시냐구요.”
흔한 정신과 의사들의 말이었다.
정신과 약물.
누군가는 계속 먹으면 결국 바보가 된다고 주장하고,
의학계 쪽에서는 일정 기간동안만 복용하고 단약하면 부작용 없이 치료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한다.
보통 이런 입장들 속에서 의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약은 끊으면 모든 부작용은 사라진다고.
그 말이 틀리던 맞던 그렇게 말해야 했다.
그래야 환자들이 마음 놓고 약을 먹으며 치료를 받을 테니까.
“지금은 더 방법이 없어요. 혜령 씨. 힘들겠지만, 힘을 내요. 조금만 더 노력해 봐요. 그 상처가 씻길 때까지만.”
“……….”
혜령은 괜스레 원망의 눈으로 인애를 바라봤다.
그리고 혜령은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혜령 씨. 헌터 생활은 어때요? 아직도 사람들이 적으로 느껴지고 그런가요?”
“거의요.”
“거의라고요? 그럼 완전히 다는 아니란 소리네요? 자세히 이야기 해 봐요.”
인애의 눈초리가 빛났다. 항상 묻는 이 질문에 혜령은 “모두가 다 그렇게 느껴진다구요!” 라고 윽박 질렀었다. 근데 오늘은 대답이 좀 달랐기에.
“그게…….”
혜령은 그 이야기를 털어놨다.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 남자가 다독여 주는데 눈물이 나고 뭔가 가슴에서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들었다고요?”
인애가 물었다.
혜령은 인정하기 싫은지 아랫입술을 깨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보다 몇 살은 어린 자식한테 그런 감정을 느꼈어요. 대체 그게 무슨 감정이었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인애는 혜령의 말을 경청하며 차트에 빠르게 뭔가를 입력했다.
“혜령 씨. 항상 모든 이들이 다 싫은 존재라 느껴졌잖아요? 근데 유독 그 사람만 그렇지 않게 느껴졌단 얘기죠?”
“네, 우습게도 나보다 한참은 어린 꼬맹이한테.”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요. 어쩌면 혜령 씨의 증상이 나을 수 있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게 무슨 말씀이죠?”
인애의 말에 되묻는 혜령의 눈이 커졌다.
“그 사람. 혜령 씨의 내면의 무언가를 잠시나마 끄집어줬던 사람 말이에요. 그 사람과 자주 대화를 해 봐요.”
“그럼, 제가 그 꼬맹이한테 뭐, 그렇고 그런 감정이라도 느끼고 있단 소리세요?! 지금?”
혜령이 윽박질렀다. 인정하기도, 납득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그런 핏덩이한테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개 소리!’
인애는 고개를 저으며 두 손을 뻗어 혜령의 두 팔을 꽉, 잡았다.
그리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 사람이 나이가 많고, 적고는 상관이 없다니까요. 다 같은 사람이에요. 혜령 씨가 그런 감정을 정말 오랜만에 느꼈다는 게 중요한 거에요. 혜령 씨. 내가 하는 말 잘 들어요. 그 사람. 그 사람과 친해져 봐요.”
“친해지라고요?”
엄두가 나질 않았다.
모든 사람이 벌레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남자라면 더, 더욱…!
그런 자신에게 남자한테 다가가라니.
머리가 갑자기 콱, 막힌 듯 어지럽다.
혜령의 표정에 많은 감정들이 스쳐감을 캐치한 인애는 더욱 강조하며 말한다.
“이제 혜령 씨가 먼저 마음을 열어보는 거에요. 그게 꼭 이성으로서의 마음이란 게 아니에요. 사람. 사람 대 사람의 감정. 그거에요.”
“……….”
인애의 말을 들은 혜령의 낯빛은 심란해졌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만 할 것 같다는 운명의 그녀에게 어쩌면 그 녀석이 운명을 바꿀 키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이시운.’
“흡.”
짧은 호흡과 함께!
활 시위줄이 혜령의 입술에 걸려 입술을 늘어뜨린다.
휙- 손을 놓자 궤도를 그리며 쭉, 날아간 화살은 과녁에 그대로 꽂힌다.
파르르르- 과녁 정중앙에 꽂힌 화살의 꼬리, 갓간이 부르르 떨린다.
“와…. 다 꽂혔다.”
“캬, 역시 금메달리스트 강혜령 답네!”
옆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감탄을 터뜨린다. 그들의 눈은 과녁에 그대로 집중 돼 있다.
과녁의 정중앙에 모두 내다 꽂힌 15발의 화살.
혜령의 활에서 이탈된 화살들이었다.
“대단하시네, 강혜령 씨.”
“저기, 각궁 다루는 법 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사람들의 탄성을 무시한 혜령은 각궁을 내려놓으며 미간을 찌푸린다.
‘약 때문에 집중이 안 되잖아, 제기랄.’
15발 15적중을 했음에도 마딱찮은 눈치였다. 현계에서 2주일이란 시간을 보내게 됐다.
‘단 하루도 활 연습을 게을리 할 수는 없다고.’
이곳은 양궁장.
레인저 헌터의 그녀는, 활을 다루는 그 초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 활을 쏜다.
민첩적으로 행동하며 적의 공격을 피하고 그 짧은 틈에 초집중하여 활을 쏘는 레인저 클래스란 고도의 집중력과 이런 감각이 매우 중요했다.
‘조금이라도 감각을 잃었다간.’
내구력 패시브도 없고 방어력도 낮은 레인저는 적의 일격에 그대로 균형이 흐트러질 수도 있다.
옷을 갈아입고 사복 차림으로 양궁장을 나온 그녀는 자꾸만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그의 전화번호였다.
이미 협회측에서 부른 그 모임 때. 조무사인지 주무관인지 하는 여자의 명령에 의해, 그곳에 있었던 헌터들의 번호는 폰에 저장된 상태.
켜진 폰 액정에 적힌 그의 이름. 이시운.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계속 검지 손가락은 버튼을 두드릴 듯 하다 떼어진다.
‘어려워. 어렵다고.’
먼저 연락을 하는 일이 낯설다.
특히 남자란 동물에게.
-사람은 다 아픔 있고, 그 상처 가슴에 묻고 사는거야.
나이도 나보다 한참 어린 놈이 했던 말이 나긋한 목소리로 생생하게 떠올랐다.
“앗!”
모르고 검지에 닿아버린 통화 버튼.
곧 액정에 그의 이름이 띄워지며 수화기로 연결음을 쏟아냈다.
‘아, 눌러버렸잖아, 뭐하는 거야! 아오! 진짜.’
떨리는 손.
그러나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진 못했다. 내심 그가 받길 바랬으니까.
이시운.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바로 그 시각.
이시운은 반대편의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갔다.
건너야 할 횡단보도의 녹색 보행자 신호가 깜빡였다.
‘건너자.’
시운은 급히 횡단보도를 향해 뛰었다.
빠아앙!
귓가를 찢는 크락션 소리.
아우디 차량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자신을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시운의 눈에 그 차량이 다가오는 모습이 느릿하게 보였다.
피하려고 맞은편을 보는 순간.
거리가 너무 멀었다.
‘안 돼!’
충돌을 면치 못하겠구나 하는 찰나.
시운의 오른쪽 어깨가 흔들렸다.
돌진해 오는 아우디 차량과 거의 20센티 간격으로 좁혀졌을 때였다.
흔들리던 어깨의 삼각근이 기이하게 움직이더니 오른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달려오는 아우디의 보닛을 짚었다.
휘-이잉.
보닛을 짚고 그 반동을 이용해 시운이 아우디 차채 위로 뛰어올랐다.
시운의 시야가 완전히 한 바퀴 돌았다.
착-
기인처럼 뛰어올라 차량을 피한 시운은 다시 보도 한복판에 착지했다.
“어?”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에게 돌진했던 아우디는 자신의 앞에 있었다.
끼이이익!
아우디의 브레이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차문이 열리고 차주가 뛰어왔다.
“괘, 괜찮아요……?”
차주의 목소리는 한없이 떨렸다.
눈 깜짝할 새에 시운이 차 뒤로 이동해 있으니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가 하는 표정.
“아, 괜찮습니다.”
“아니 빨간불로 신호가 바뀌었는데 무턱대고 횡단보도로 뛰어들면 어떡합니까.”
운전자가 사색이 된 얼굴로 신경질을 냈다.
“죄송합니다.”
시운이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정말 다친 데 없어요?”
시운은 태연히 자신의 몸을 훑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조심하며 다닙시다. 근데 어떻게 된 거예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는데 떠보니 그쪽께서 차 뒤로…….”
“가까스로 피한 것 같네요. 아무튼 죄송하게 됐습니다.”
“일단 제 명함 드릴 테니까 나중에 문제 있으면 연락하세요.”
남성이 건넨 명함을 받은 시운은 그와 인사를 마치고 돌아섰다.
“어휴, 심장이야. 사람 차에 치이는 줄 알았네.”
“바, 방금 봤어요?”
“차를 뛰어 넘은 것 같은데?”
“에이, 설마, 잘 못 본 거겠지.”
주위에는 어느새 사람들이 몰려 구경하고 있다.
민망함에 빠른 걸음으로 인근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하마터면 다시 한 번 회귀할 뻔했다.
어쨌든 방금 일로 놀란 멘탈은 곧 잡았다.
‘현계에서도 쉬고 있을 수만은 없지. 그래서 내가 향하는 곳도 거기고. 또 하나 테스트 해볼 것이 있으니.’
시운의 바지 춤에 있던 폰의 진동이 울린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그곳으로 향했다.
***
시운 앞에 어느 간판 하나가 보였다.
- 더 맥스 종합격투기
‘여긴가?’
고딕풍의 외관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건물.
더 맥스 종합격투기.
현역으로 활동하는 종합격투기 선수들을 다수 배출해낸 명문 체육관.
‘들어가 볼까.’
안으로 들어갔다.
깨끗이 청소된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는데 남성들의 육중한 고함소리와 띵띵 거리는 종소리, 무언가를 강하게 두들기는 소리가 귓가에 먼저 들려왔다.
체육관 안에 들어서자 남성들의 비릿한 특유의 땀 냄새가 후각을 찔러댔다.
건장한 체격에 탄탄한 근육으로 가득한 몸으로 매의 눈을 하고 트레이닝에 집중하고 있는 많은 관원들 속에서 누군가가 시운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잠시 친구 좀 만나러 왔습니다. 제 친구가 여기서 운동하고 있거든요. 이현찬이라고….”
“아, 현찬이? 락커룸으로 가봐요. 저쪽.”
남성이 손짓으로 어느 곳을 가리켰다.
시운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남성 몇 명이 옷을 갈아입고 있다.
그 중에 광대뼈가 툭 불거지고 키가 유독 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친구 현찬이었다.
“현찬아.”
시운의 부름에도 현찬은 돌아보지도 않고 어느 남성과 대화를 나눠갔다.
시운은 스리슬쩍 현찬 옆으로 다가갔다.
“야…. 여기서는 나이가 위가 아니야. 실력이 곧 형이고 위인 거야. 알겠냐?”
앳된 남성 하나가 비웃음을 흘리며 현찬에게 말했다.
“반말하지 말지? 내가 너보다 두 살은 많은데. 어디서 야라고 부르냐?”
“꼬우면 링 위에서 스파링 한 번 뜨던가.”
“……….”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
곧바로 현찬의 바디시그널은 분노로 가득했다.
시운은 현찬에게 물었다.
“왜 그래?”
“하아. 아니 이 새끼가 나보고 반말하잖아. 나이도 스무 살 밖에 안 된 녀석이 여기선 실력이 곧 형이라면서.”
시운은 현찬과 다투던 남성으로 눈길을 돌렸다.
건방짐이 가득한 표정. 몸을 보니, 운동을 꽤나 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니까 여기선 실력이 곧 형이라고…. 빼빼 마른 멸치 같은 자식아.”
“뭐,뭐? 멸치? 다시 말해 봐.”
둘이 격해진 다툼에 시운이 둘을 말렸다.
“자, 그만들 하고…. 저기요.”
시운이 남성을 말렸다.
“뭔데? 당신은?”
“현찬이 친구입니다. 일단 싸우지 마시고….”
“이 체육관 다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처음 보는데 반말부터 찍찍 날리는 남성의 태도에 시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이도 끽해야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처음 보는데 반말은 하지 마시고요. 제 친구랑 트러블이 있는 것 같은데 이쯤 하시고….”
“하하…. 그니까 당신은 뭔데 갑자기 끼어들어서 지랄이냐고.”
시운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참는다는 생각으로 현찬을 그 락커룸에서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화장실로 데려갔다.
“현찬아. 아까 걔랑 싸운 거야?”
“응. 아 어린 새끼가 처음 보자마자 반말부터 찍찍해대잖아. 열 받아서 내가 뭐라 했더니 난데없이 스파링을 뜨자는 거야. 개 같은 새끼가!”
“철없는 애인가 보네…. 그냥 네가 참아라. 그런데 그런 일은 여기 관장한테 말해서 중재를 시켰어야지.”
“뭣 같은 게 뭔 줄 알아? 아까 그 자식 여기 체육관에서 관리하고 있는 놈이거든? 곧 현역으로 격투기에 데뷔할 녀석이라 관장이 편애한다고.”
“뭐 그런….”
“하아! 스파링 떠서 확 패주고 싶은데 솔직히 내가 실력도 안 되고.”
현찬이 수치심을 느끼며 괜시리 화장실 벽을 주먹으로 쳤다.
시운은 문득 생각했다.
‘한번 해볼까? 아까 그 녀석이랑.’
현찬이 씩씩거리며 심호흡을 하더니 시운을 보며 묻는다.
“근데 헌터인 놈이 안 바쁘냐? 갑자기 왜 우리 체육관에 온다고 한 거야?”
“헌터도 감각을 꾸준히 키워야 해. 운동도 할 겸 왔지.”
현계에서 운동한 것이 이계의 데이터베이스에 작용하진 않는다.
허나.
현계에서도 운동을 하면 스테이터스와는 별개로 반사신경과 전투 감각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
그 감각을 잃지 않으려 찾은 것이었다.
시운이 말했다.
“그보다 스파링 한 번 하고 싶은데.”
“스파링은 무슨 스파링이야. 너 격투기 배워본 적도 없잖아. 스파링이 쉬운 건 줄 아냐? 헤드기어 쓰고 맞아도 아프다고. 네가 아무리 헌터라도 스파링은 달라, 인마.”
운동하는 사람들은 겸손이 몸에 배어있어야 하건만.
나이도 어린 녀석이 현찬에게 너무도 개념없이 구니 혼을 내주고 싶다는 생각이었지만,
분명 시험해 볼 것이 있었다.
시운이 말했다.
“아까 그 녀석이랑 스파링 한 번 붙여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