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9화
루트 B의 시작
“응?”
시운의 말에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답한다.
쪽.
“아….”
입술에 입술을 더해줬더니, 세정이의 발그레한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할 말이 생각이 안 나서 그냥 이거라도.’
가끔은 남자가 말보단 행동 한 번이 여자에게 기억남을 때가 있는 법이니까.
시운은 슬쩍 옆을 돌아봤다.
시운과 시선이 마주치자 세정의 기사가 눈을 피한다.
“뜨, 뜬금없이 뭐냐! 멍청아.”
세정이는 쑥쓰러운지 귀엽게 윽박지른다.
“빨리 가야하지? 오늘도 만나서 즐거웠고, 다음에 너랑 볼 때까지 난 자리 잡고 있을게, 헌터란 직종에서.”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잖아? 아까 네 동료들한테 이야기 다 들었는데, 뭘.”
옆의 따가운 시선이 거슬려서 다시 돌아보니, 수트차림의 기사가 손목 시계를 훑으며 눈치를 주고 있다.
‘세정이도 스케쥴이 있는데 더 붙잡고 있으면 안 되겠지. 세정이의 일을 방해하지 않아야 세정이도 그쪽에서 성과를 낼 수 있을테니.’
세정이는 헤어지기 아쉬운지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면서도 가지 않고 있다.
“기사님이 기다리시네. 이제 가봐, 세정아.”
“..그래.”
세정이가 손을 흔든다.
왼손을 바지춤에 꽂은 채 오른손으로 시운이 손을 맞흔들었다.
탁!
세정이 외제차에 몸을 싣자 엔진 소리가 우렁차게 뿜어진다.
위잉- 뒷좌석에서 내려가는 창문 사이로 세정의 두 눈이 드러난다.
이윽고 코, 입까지.
“운아, 조심해야 해. 뭣보다 안전이 최우선인 거 누나가 강조 안 해도 알지?”
씩 웃으며 손을 재차 흔들어 줬다.
“간다! 연락할게.”
이윽고 출발하며 멀어지는 차 뒷모습이 보이며, 그녀의 목소리 또한 멀어졌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세정아. 난 절대 개죽음 따위 당하지 않을 테니까.’
이미. 시운에겐 많은 무기들이 있다.
근력, 히든 클래스, 오른 어깨와 두 눈, 상위급 템에 포획 스킬의 카드. 위급할 때 호출할 늑대 지원군들과.
‘내 루트 B까지.’
그런 시운도 백퍼센트 안심하고 있진 않았다.
블랙 헌터. 강하다고 알려진 그들이 실제로 얼마나 강할지 모르니까.
‘부딪혀 살을 섞어봐야 놈들의 전력을 알 수 있겠지.’
시운은 상념을 깨고 음식점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은 시운은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엎드려서 술잔만 흔들고 있는 혜령과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연희. 말없이 앉아있는 유석까지.
그들을 보는 시운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다들 블랙 헌터에 어떻게 대비할 생각이지?”
순간. 모두의 눈이 움직여 시운에게 향한다.
엎뜨려 궁시렁대던 혜령도 고개를 들고 시운을 보는 눈은 진지했다.
“대비? 레벨 업하고 템, 스킬 맞추고 강화 좀 박아놔야지.”
혜령이 말했다.
시운의 눈이 연희에게 움직였다.
연희에 닿은 그 눈이 마치 연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단 느낌에 연희의 입술이 열린다.
“강해져야겠지? 뻔한 거지만. 난, 스킬의 타겟팅 실력부터 탄탄히 쌓으려고.”
매지션 계열은 감을 익힌 고수가 아닌 이상 적에게 원거리 스킬을 타겟팅 후, 적중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음….”
턱을 괴던 시운의 눈이 자연스레 유석에게 향한다.
“저는 혜령씨 같은 고렙과의 렙 차이를 좁히면서 격투 감각을 다듬을 생각입니다.”
듣던 시운의 고개가 위에서 아래로 움직였다.
‘신체를 무기로 사용하는 격투사 계열이라 반사 신경과 짧은 동작으로 빠른 속공을 가하는 자세를 연습할 생각이군.’
오늘 파악한 이들의 성향.
덧붙여 방금 이들의 대답에서 시운은 이들이 전력의 어느 부분에 초점을 가하는 지 파악할 수 있었다.
‘강혜령. 기본 베이스에 충실하면서도 활을 다루는 감을 끌어올릴 것이고.’
‘정연희는 베이스란 피지컬 보다는 세심한 부분에 신경을 쏟을 거다. 특히 원거리 스킬에 흥미를 보이고 있으며.’
‘장유석은 분석력이 좋은 인물이다. 본인의 클래스를 잘 이해하고 있어. 격투사의 능률을 최고로 발휘할 수 있을 거야.’
시운의 눈이 유석에 닿아 멈췄다.
‘다만 거슬리는 게 하나 있는데 그 이야기를 꺼낸 후, 따로 알아봐야겠다.’
“이시운. 넌 무슨 생각이지?”
차갑게 묻는 혜령의 말투에선 혀가 꼬부라진 아까의 목소리는 없었다.
“그것을 지금 말하도록 할게. 우리 넷은 앞으로 함께 움직이는 거야. 왜냐? 협력 퀘스트를 공략하기 위해서.”
“뭐? 협력 퀘스트?”
“그거 굉장히 고난이도 퀘잖아.”
“그렇군요.”
협력 퀘스트라는 말에 모두가 보인 반응에 힘이 실려있었다.
지원 퀘스트.
한 명이 아닌, 대다수의 인원에게 내려지는 퀘스트다.
혼자서는 수행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따로 분류된 이 퀘스트는 난이도가 높은 반면, 보상은 타 퀘스트에 비해 대량의 경험치를 선사한다.
‘내 레벨 대에서 사냥 만으로는 빨리 올릴 수가 없다.’
시운의 레벨은 이제 90.
마의 구간에 도달한 시운의 레벨은 단순히 몹만 잡아서는 다음 레벨 업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 된다.
‘그렇기에 경험치량에 포커스가 맞춰진 협력 퀘스트가 제격이지.’
협력 퀘스트는 정예의 파티로 구성된 헌터들도 잦은 실패를 한다.
보상이 탄탄한 만큼, 실패 패널티 또한 선명했다. 그 때문에, 어중이 떠중이 헌터들은 엄두도 내질 않는 형국이다.
‘이계에는 많은 종류의 퀘스트들이 있지.’
.
.
그리고 최초 1회만 가능한 와,
명성을 획득할 수 있는 .
즉흥적으로 발생하는
,
,
협회 측에서 내려져 주로 화이트 게이트원들이 수행하는,
와,
아직 발생하는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
등등이 있다.
특히. 베일에 쌓여있는 는 최초 1회만 수행할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 타 헌터가 다시 수행할 수도 있다.
최초에서 반복으로 변화시키는 전제 조건은,
히든 퀘스트를 부탁하는 이계인들의 시련과 변화에 의해서다.
즉, 정해진 것은 없단 뜻.
‘퀘스트의 형식은 헌터가 소지한 카드에 연동된 헌터의 차크라와 퀘스트를 부여하는 이계인의 의식의 흐름과 사고 방식, 환경에 의해 정해지고, 또 변화하게 되니까.’
시운은 나머지 셋에게 미리 짜놓은 협력 퀘스트의 계획을 설명했다.
“음. 그러니까 우리 넷이서 말이지?”
연희가 물어온다. 시운이 고개를 주억여 답했다.
고민을 마친 강혜령이 시운을 바라봤다.
“나쁘진 않네. 어차피 내 레벨 대에서는 고작 괴수 자식들 몸통에 구멍만 뚫어주는 것으로는 레벨 업이 너무 지체 되니깐.”
유석은 다부진 팔뚝이 움직여 팔짱을 끼곤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다.
“저는 참여하겠습니다.”
다들 긍정적인 반응이다.
시운은 한차례 시름을 놓았다.
‘이 셋을 동행인으로 만들기에 성공 했고.’
이시운이 무겁게 입을 연다.
“앞으로 두세 달 후. 출몰한 블랙 헌터의 전력은 미지수야. 긴장해야 할 거야. 확실한 대비를 해 놓지 않는다면 투입된 우리, 전원은 관짝으로 들어갈 테니까.”
살벌한 시운의 말에도 누구 하나 따지듯 답하진 않았다.
얼추 모두가 그 일이 쉬운 일이 아니란 건 인지한 상태니까.
“이시운. 이계에서 나에게 블랙 헌터가 나타날 거라고 했었잖아. 넌, 어떻게 그 일을 예측한거지? 분명. 협회측에서 우리에게 통보하기 전에 넌, 말했었어.”
혜령이 의문심이 담긴 눈으로 물었다.
“나도 협회 측에서 들었어, 단지 다른 헌터보다 먼저 들은 것일 뿐.”
거짓말이었다. 에둘러 말했다.
“이상한데? 왜 너에게 먼저 그 사실을 말했단 말이지? 누가? 그리고, 넌. 4급 발령 때에서 주무관인지 조무사인지 하는 여자한테 따졌었잖아. ‘어떻게 협회가 블랙 헌터의 일을 예견한 거냐고?’ 숨기지 말고 말해봐.”
혜령은 그대로 시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시운. 넌 분명 나쁜 놈은 아니야, 하지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단 말이지.’
시운은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뭐라 둘러대야 할까. 비밀이라고 하면 동료로 점찍은 이들에게 신뢰를 잃을 것이고.’
머리를 굴린 시운이 입을 열었다.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하도록 할게. 사실 화이트 게이트의 하청 쪽에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알려준 사실이야.”
“하청?”
연희가 놀랐다.
“아니, 내 질문에 하나가 빠졌잖아! 넌 분명 모임에서 주무관에게 어떻게 알았냐는 식으로 따졌었다고. 네 말은 앞뒤가 안 맞아, 대답 해.”
시운의 입이 곧바로 열린다.
“그 친분이 있는 사람이 나에게 당부했었어. 협회 측에서 곧 그 일을 나에게 말할 것이고, 일부러 놀란 척 하라고. 그렇게 하지 않고 태연한 반응을 보이면 협회는 날 의심할 테고, 내게 정보를 흘린 사람을 물색할 거니까.”
“그게 정말이냐.”
아직 의구심이 가시지 않은 혜령의 물음에 시운은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런 시운을 보는 유석은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회귀를 통해 알아낸 비밀을 숨기는 실력도 능수능란 하군.’
쏴아아-
유석의 하체가 화장실 소변기에 닿자 물이 내려간다.
볼일을 보는 그의 뒷태는 소나무 같이 거대했다.
188cm의 키에 꽉, 벌어진 어깨. 울긋불긋하게 솟은 근육은 전신을 덮어 옷을 입어도 태가 드러날 정도였다.
“유석 씨.”
뒤에서 시운의 육성이 들리자 고개를 돌렸다.
탁.
자신 코 앞까지 다가온 시운은 유석을 올려다 보고 있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물어보십시오.”
시운의 육성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순간. 유석은 긴장했다.
‘설마.’
“나한테 숨기고 있는 것이 있죠?”
“없습니다.”
표정을 숨기고, 감정을 숨기는 데는 도가 튼 유석은 떨지도 않고 답했다.
하지만 시운의 눈은 유석의 두 동공이 순간. 미세히 떨림을 보았다.
“정말 없습니까?”
“없습니다만.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건지.”
경직된 몸으로 시운을 내려다보는 유석은 의아하단 표정.
“알겠습니다.”
시운의 말에 유석은 놀란 속을 겨우 달랬다.
그런데.
“사람이 뭔가를 숨기는 것은 본인 마음이지요. 이미 당신이 필요 이상으로 나를 관찰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유석의 포커페이스가 무너지려 했다.
‘어, 어떻게 그걸.’
유석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운에게서 살기가 느껴졌다.
“당신이 나쁜 사람이 아닌 것은 알 듯 해요, 그러나 당신이 숨기고 있는 것이 나와 내 동료들에게 악 영향을 미치는 그것이라면 난 당신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겁니다.”
“……….”
시운은 차갑게 돌아서서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유석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 움직일 수 없었다.
‘설마. 저 회귀자의 눈이……’
유석의 예상보다도 그 일이 힘들어질 것은 자명한 듯 했다.
아버지의 차 핸들을 잡은 시연의 옆 조수석에는 시운이 앉아있다.
어느새 11일이 지난 오늘.
시운이 이계로 출두해야 할 날짜였다.
“몸 조심 하고…. 시운아.”
차를 세운 시연이 말했다.
“걱정 안 해도 돼. 누나 생각처럼 위험한 곳 아니야.”
시운의 말이 위안시키려는 말임을 시연은 알고 있다.
‘위험한 괴물들이 득실 거린다던데.’
시연은 시운의 손을 꼭 포개어 잡았다.
걱정이 놓이지 않는다. 시운이 항상 떼만 쓰고, 투정만 부렸던 모습만 기억 속에 가득한데.
“잘 하고 올게. 나 믿지?”
“시운아. 그래도 누나는 네가 너무 대견해. 헌터가 됐단 것도 그렇고, 너의 얼굴이 그렇게 열정적인 것도 처음 봐. 뿌듯해.”
“뿌듯하긴.”
시연의 앞 유리창 너머로 삼엄한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는 SF에서나 나올 법한 커다란 문이 빛을 뿜으며, 고요히 파동치고 있다.
‘저런 곳으로 내 동생이 들어간다니.’
차에서 내린 둘은 게이트의 허용된 바리게이트 앞까지 걸어갔다.
“저곳이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는 문이란 거지?”
시연이 게이트를 가리키며 물었다.
“응. 전혀 위험하지 않아. 누나가 생각하는 것보다 뭐랄까? 시스템이 체계적이고 딱 잡혀있어서 걱정 안 해도 돼.”
“어떻게 걱정이 안 되겠니!”
시연이 시운을 꼬옥, 안았다. 마치 군 입소 전, 동생을 보내는 누나의 모습과 흡사했다.
“누나. 나 없는 동안 아버지, 어머니 즐겁게 해 드려. 그리고 누나도 이제 돈 걱정 없이 편하게 살게 해줄게.”
“뭐?”
시연은 방금 그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이미 지금 앞에 있는 시운은, 예전의 그 철부지 없는 동생과는 너무도 달랐으니까.
소총을 무장한 군인 한명이 시운에게 수신호를 보낸다.
“나 가봐야 돼.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누나. 다시 돌아올 때는 선물 하나 들고 올 테니까.”
“밥 잘 챙겨먹고, 항상 조심하고!”
“당연하지. 나 정말 간다.”
“내 동생…. 사랑해. 꼭 멀쩡히 돌아와야 해.”
“좋은 말도 두 번하면 잔소리 인 거 알아? 누나도 밥 잘 챙겨먹고.”
손을 흔드는 시운의 모습이 점점 멀어진다. 멀어진 거리에 보이는 그는 아주 희미한 모습으로 군인 둘과 얘기를 나누고,
괴기스런 저 문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본 시연은 눈물을 흘렸다.
‘이제 가족까지 챙길 줄 알고 다 컸네, 우리 동생. 누나가 매일 기도 할게.’
게이트에 의해 몸이 사라지는 모습까지 눈에 담고서야 시연은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모스칼의 잡화점에서 나오는 길.
화창한 날씨 밑으로, 장병 부대가 창을 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그 인파 속에 섞인 시운.
‘이로써, 인벤토리에 쌓여있던 잡템들은 모조리 되팔았다.’
[보유 금액: 340,051,340 G]
‘3억 4천 골드라.’
해빙의 던전에서 몸을 불살랐던 노동의 결실이었다.
많은 골드를 쥐고 있음에 걱정 거리들이 사라지는 기분.
‘다음은 거래소다.’
곧장 연동 시스템을 통하여 헌터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분명 사야할 것이 있다. 특성 또한 고려 해놓은 상태.
스크롤을 내리던, 시운의 손짓이 멈췄다.
‘이거다.’
직거래는 운좋게 모스칼에서 이루어졌다.
직거래를 마친 시운은.
곧바로 인벤토리창을 열었다.
‘이제 루트 B의 시작.’
사놓은 물건이 인벤토리창 목록에 표시 됐다.
그 물건은 다른 물건에 비해 한 부분에 특이한 강점이 존재했다.
탁.
곧이어 그 물건의 상세정보창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