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3화
증명하라, 시간이여! (2)
“고집이 참 드세군. 어떤 일인 지는 알고 그러는가?”
다이온이 물었다.
라파엘 신전의 흑마법사를 처리하는 일인지는 알고 온 것인지 궁금했다.
“살인귀를 처리하는 일 아닙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네. 근데 격이 다른 것이란 말일세.”
“그게 뭐든 죽이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허, 죽이고 오겠다라? 패기는 인정하겠다만. 돌아가주시게.”
다이온은 임무를 줄 생각이 없었다.
이계인 다이온은 이 친구들이 명성이 없는 헌터들임을 알 수 있었다.
다이온은 헌터들을 슥, 훑어봤다.
핏기조차 가시지 않은 젊은 나이들이다.
겁이란 것조차 모를 청춘들.
이미 일을 처리 해주겠다고 했던 헌터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꽤나 명성이 있던 헌터들이었다.
믿고 일을 맡겼고, 그들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열정은 잘 알겠는데, 자네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말일세.”
다이온은 완고했다.
그러나 헌터도 물러섬이 없었다.
“그렇다면 자격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부터 주시죠.”
“자격을 증명하겠다라 하였나?”
“저희를 믿지 못하시니, 믿게 해드리겠습니다.”
“하, 참.”
다이온은 혀를 찼다.
특히 곱상하게 생긴 남자 헌터는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지, 간에 헛바람이 찬 것인지 그의 태도는 과할 정도로 자신감이 질겼다.
“자네들이 이 일로 인해 죽을 수도 있네. 아니, 죽을 것이라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놈 따위에게 죽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이온의 경고에도 헌터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참으로 의기양양한 청년이군.”
다이온이 말했다.
어차피 일을 해내지 못할 거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청년의 눈빛이 묘하게 끌렸다.
아닌 것을 알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도 들었다.
“흐음….”
“뭔가를 보여드릴 기회 정도는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헌터가 말했다.
다이온은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여전히 자신감에 차 빛나고 있었다.
저 단단한 눈빛이 무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막무가내군. 속는 셈 치고 딱 한 번 기회는 줘보도록 하지.”
다이온은 이들에게 일을 하나 맡겼다.
밤마다 출몰하는 뱀파이어를 잡아오라는 일.
이들에겐 불가능한 임무였다.
헌터의 의연한 눈빛은 좋았지만, 의지를 꺾어버리고 돌려보낼 생각으로 내린 임무였다.
‘이 친구들이 뱀파이어에게 치명상을 당한다 해도, 이들은 스크롤을 통해 되살아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흑마법사는 다르다.
그렇기에 내린 임무였다.
이런 꽃도 피우지 못한 청춘들이 죽어버리면 그 죄책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다이온이었다.
“거리에 개미새끼 한 마리 안 보이네?”
촌장 집에서 나와 마을을 둘러본 혜령이 중얼거렸다.
마을의 모든 건물의 불은 꺼져있다.
게다가 거리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밤 10시. 좀 늦은 시간이지만, 사람 하나 없을 정도로 야심한 시각은 아니었다.
“뱀파이어 때문이겠지..”
연희가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다들 수긍하는 눈치였다.
“이 마을에 밤마다 뱀파이어가 나타나는데 집밖을 기어나오는 놈이 미친놈이지.”
혜령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내뱉었다.
“어쩌지? 뱀파이어를 잡아야 협력퀘스트도 진행할 수 있는 거잖아.”
연희가 걱정스레 말했다.
이계 역사학에 흥미가 많은 그녀는 뱀파이어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소설 속에나 등장할 법한 뱀파이어.
밤에만 활동하는 박쥐인간으로 인간의 피를 빨아먹고 기생하는 흡혈귀.
낮에는 평범한 인간으로 변모해,사람들 속에 숨어 지내지만,
밤만 되면 변한다고 알려졌다.
“……우리가 뱀파이어를 잡는 것이 가능할까?”
연희가 걱정했다.
그럴만도 했다.
뱀파이어는 이계에 몇 없는 흡혈종으로 분류되는데,
달이 뜬 밤만큼은 놈과 맞닥뜨리면 무조건 튀고 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놈은 악마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졌다.
“걱정마. 나한테 묘안이 있으니까.”
“묘안이라고?”
“야, 설마 그 괴물자식하고 진짜 밤에 싸울 생각은 아니지?”
시운의 말에 연희와 혜령이 다른 반응을 보였다.
유석은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다.
“요괴화.”
시운 앞에 갑작스레 여우가 소환되자 셋은 흠칫 하며 뒤로 물러났다.
“뭐, 뭐야? 이건?”
“깜짝이야! 아? 귀엽다.”
“환수군요.”
여우는 건방진 눈으로 셋을 슥, 훑고는 시운을 바라봤다.
“여긴 어디냐?”
“일미호,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뭐, 알고 있다, 캉! 네 놈이 목적없이 날 부를 놈이 아니지.”
시운을 보는 여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매일 귀찮게 불러대서 싸움질에 가담시키는 이 주인놈이 항상 얄미웠건만, 오늘은 그렇게 미워보이지가 않는다.
“이상하다? 네놈이 오늘따라 좀 괜찮아 보이는 것도 같고? 지금 내가 맨정신이 아닌가 보구나.”
여우의 말에 시운은 속으로 흡족함을 삼켰다.
‘화룡의 반지에 바른 인첸트 친밀도 상승 효과가 생각보다 빨리 나타나는군.’
“아, 귀여워.”
“캉?”
쭈그려 앉아 자신의 머리털을 쓰다듬는 연희를 여우는 쏘아보았다.
“카앙! 네……”
“야, 야! 하지마라.”
시운이 여우의 말을 잘랐다. 녀석이 곧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예상이 되니까.
“캉? 뭘 하지 말란 말이냐.”
“……그 이상한 말 내뱉지 말라고. 말 잘들으면 마나석 줄테니까 잠시만 입 닫고 있자?”
“뭐, 네놈이 그러라면 그래야지.”
여우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자 연희가 꺄르르 웃었다.
“아, 넘 귀엽다. 넌 몇 살이야?”
“……….”
여우는 용케 땅에 숙으려 연희가 털을 쓰다듬는 손길을 가만히 받아주었다.
“말도 할 줄 아네? 신기하다. 시운아. 너 이제 이런 것도 다룰 줄 아는거야?”
“뭐, 그렇게 됐어….”
“으, 저 고양이 새끼 눈빛이 뭔가 변태스러워.”
“고양이 새끼가 아니고 여우이니라.”
“암튼, 내 스탈은 아니다.”
“네 년도 내 스타일 아니다.”
“뭐, 뭐라고?”
혜령이 어이없다는듯 여우를 내려다봤다.
시운은 입술에 검지를 대며 여우에게 눈치를 주자 여우는 입을 다물었다.
“야, 이시운. 방금 이게 나보고 욕한거 맞지?”
“……얘가 좀 별나. 누나가 이해해.”
시운은 곧바로 레크라스를 소환했다.
까악!
까마귀가 시운의 어깨에 툭, 앉았다.
“마을 주위를 모두 돌아보고 와.”
까악!
지시를 받고 날아간 까마귀를 보던 여우는 몸서리를 쳤다.
“캉…. 저 새자식은 보기만 해도 역겹다.”
여우의 말에 연희는 놀라더니 꺄르르 웃었고 혜령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빨리 여관에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서 계속 얼쩡거리다가는 뱀파이어에게 습격을 받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야죠.”
헤령이 시운에게 다가갔다.
“야. 너 저 고양이 새끼하고 까마귀를 지금 소환한 이유가 뭐야? 설마 당장 그 흡혈귀를 찾으려고?”
“응. 생각해놓은 수가 있어. 나는 마을을 좀 둘러보고 올테니 다들 여관 하나 잡고 들어가 있어.”
“……뭐?”
“야, 위험해. 우리 넷이 같이 있어도 모자를 판에 무슨!”
“만나면 바로 스크롤 써버리면 그만이니까 일단 다들 쉬고 있어.”
그들이 여인숙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던 시운의 눈이 번쩍 뜨였다.
“발견했다. 일미호. 따라와라.”
어둠이 내려앉은 밤.
한 남자가 지붕 위에 걸터앉아 날개를 펄럭거리며 뭔가를 씹고 있다.
“퉤! 형편없는 피맛.”
입안에 우겨넣은 까마귀의 피를 모두 맛본 뒤, 살점은 그대로 툭, 뱉어냈다.
순간 남자의 적색의 두 눈이 번뜩이더니 고개가 휙, 꺽여 한곳으로 돌아갔다.
“인간.”
혀를 낼름거리며 살귀처럼 웃었다.
탁!
순식간에 날아가 땅에 안착한 남자는 손을 구부려 흉측한 손톱의 날을 세운 뒤 앞을 바라봤다.
“맛있는 살점을 가진 인간이구나.”
“카앙!”
남자는 자신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작은 짐승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옆에서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는 아주 맛있어 보였다.
“허연 살결이 마음에 들어.”
남자는 기괴히 웃었다.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인간이 나를 보고도 도망치긴 커녕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하게 보고 있으니까.
“일미호. 저 녀석의 냄새를 맡고 잘 기억해라.”
“알겠다.”
날 보고도 태연하게 짐승새끼랑 대화나 하고 있다니.
간이 튀어나와도 한참 튀어나온 인간이로군.
남자는 의아했지만,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손톱이 맛있게 생긴 남자의 목덜미를 향한다.
“은신.”
부웅! 그러나 손톱은 달밤의 빈 허공을 요란히 가른다.
“뭐야?”
남자는 놀란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방금 그 맛있게 생긴 놈이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잇따라 짐승 한 마리도 사라졌다.
크르르!
남자는 송곳니를 벅벅, 갈아대며 으르렁거렸다.
크아아아아!
간만에 발견한 특별한 피를 가진 놈을 놓쳤음에 부아가 차올라 허공을 보며 괴성을 쏟아냈다.
다음날 아침.
시운은 다이온에게 찾아갔다.
“촌장님.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포기하겠단 생각이면 환영이네.”
“내일 낮 2시에 이 마을에 있는 주민들을 모두 소집하여 주십시오.”
“……뭐? 주민들을 소집해 달라고? 그 이유가 뭔가?”
시운은 다이온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란 말인가?”
다이온은 시운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시운은 그 자리에서 입술을 움직였다.
“……이게 그 여우란 말인가?”
다이온은 번쩍 나타난 여우를 보며 놀라 물었다.
“반드시 들어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놈을 잡을 수 있습니다. 촌장님의 권한을 한 번만 사용해 주시면 됩니다, 단. 주민들에게 강제 소집을 명하지 마시고, 모든 주민들에게 포상을 내리겠다 엄포해 주십시오. 그래야 이런 심란한 상황 속에서도 주민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일 테니까요.”
“……허.”
다이온은 그저 놀란 눈으로 여우를 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뭘 쳐다보는 게냐! 늙은 영감쟁이……”
“죄송합니다. 얘가 좀 성격이 이렇습니다. 너그러히 이해해 주십시오.”
시운은 여우를 곧바로 소환해제 시킨 뒤 머리를 긁적였다.
“……방금 여우가 우리 인간의 말을 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다이온은 또다시 헛웃음을 흘렸다.
70년간 인생을 살면서 환수를 많이 봐왔다.
그 중엔 정말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환수도 적지만 있긴 했다.
근데 방금 그 여우는 생전처음 보는 환수일뿐더러, 보통 여우가 아니었다.
“자네, F랭크의 헌터라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헌데, 그런 자네가 어떻게 환수를 부릴 수 있단 말인가?”
납득이 가지 않은 다이온이 물었다. 그 또한 알고 있었다.
헌터가 환수를 귀속 시키려면 C등급 이상의 랭크여야 가능하단 것을.
“남들보다 특별한 클래스를 지닌 덕뿐입니다.”
“특별한 클래스라 하였나.”
“네.”
“……그러고보니, 자네…….”
다이온은 그제야 시운이 등뒤로 장착한 검과 묘하게 빛을 뿜고 있는 그의 갑옷이 예사롭지 않은 장비란 걸 깨달았다.
노쇄하여 눈이 좋지 않고, 어제는 정신이 없었기에 시운의 장비를 훑지도 못했었다.
‘이 친구 범상치가 않아.’
“제 부탁을 꼭 들어주셔야 합니다. 흡혈귀를 잡을 유일한 기회입니다.”
“……아, 알겠네.”
“반드시 낮 2시여야 합니다. 밤은 절대 안 됩니다.”
“위험하진 않겠는가? 우리 마을에 거주하는 용병들을 모두 무장시키겠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 용병들까지 모두 불러주십시오.”
“자네, 정말 그게 가능하겠는가?”
“주신 기회를 실망으로 보답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아, 알겠네.”
다이온은 목례를 하고 문밖을 나서는 시운의 뒷모습을 가늘어진 눈으로 응시했다.
‘저 친구의 눈빛을 믿길 잘한건가. 어쩌면 흑마법사놈까진 아니더라도…….’
“촌장님. 갑자기 뭘 주신단 건데요?”
“쌀이 부족해요! 쌀 주시면 안 되려나….”
미월 마을을 상징하는 달의 여신 석상 앞에 모인 주민들은 기대찬 눈으로 다이온을 보고 있다.
“잠시만 기다려들 주시오.”
주민들이 웅성였다.
뜬금없는 소집이지만, 뭘 준다기에 나오긴 했다.
근데 평소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다이온의 모습이 낯설게 보였다.
‘주실거면 빨리 주지! 촌장님답지 않게 뭘 저리 우물쭈물 하시나.’
‘음식일까? 아니면 돈? 없는 말을 할 사람은 아닌데?’
‘어차피 떠날 마을인데 하나라도 받고 가야지.’
‘근데 저 사람들은 누구지? 처음보는데….’
“왔는가?”
초조함이 역력하던 다이온의 낯빛은 시운의 등장으로 인해 누그러졌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말인가?”
다이온은 떨리는 육성으로 물었다. 그가 침을 목덜미로 꿀꺽 삼켰다.
그때였다.
찰캉!
시운이 곧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낯선 남자가 쳐올린 검신을 보자 주민들이 모두 당황해서 웅성거렸다.
검을 든 남자의 입술이 열렸다.
“지금부터 모두 그 자리에 그대로 계십시오. 자리를 이탈하는 분은 즉각 사살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