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8화
시작
“……….”
낮은 노크 소리가 울린 후의 정적.
혜령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창피함과 그냥 후회스러움이 뒤섞여 지금 당장 시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
똑?
한 번의 노크가 더 울렸다.
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노크 소리는 더 울리지 않았고 방문 너머로 발걸음을 돌리는 소리만 들렸다.
“휴-”
안도의 한숨이 허망하게 뱉어진다.
괜한 고백을 해서 이게 웬 망신이란 말이야!
다시 얼굴을 이불에 파묻었다.
한동안 녀석을 보기가 꽤나 많이 민망하고 창피할 것 같다.
시운의 검격에 데빌리자드 둘의 머리통이 그대로 박살난다!
카우우!
크아악!
휙! 몸을 틀어 바닥에 몸을 처누운 놈들을 비켜가 앞으로 나아간 뒤.
쐐액!
휘저은 검신에 굳어있던 다른 놈의 목덜미가 벌어지고 피가 솟구쳐 흘러내린다.
쿵!
또 한놈이 탑의 먼지바닥에 코를 처박고 죽는다.
뱀파이어를 요절내고 얻은 흡혈귀의 역린을 요긴하게 써먹는 중이다.
데빌리자드들의 피를 응고시켜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에 입맛대로 요리 중이다.
‘블랙 헌터….’
귀신같이 검을 휘젓는 와중에도 생각했다.
남은 기간은 이제 한달 반 조금 더 남았다.
‘아직 부족해. 더 강해져야 한다.’
그런 마음이 들었다.
전력도 모른다. 놈들이 가진 정확한 사상조차 모른다.
다만 전생에 접한 기사들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은.
‘주저않고 사람을 죽이는 식인귀 같은 놈들.’
처음에는 의문이 들었다.
그들은 어디서나 대우 받을 수 있는 헌터라는 직업을 가진 주제에 왜 범죄의 길로 들어서 블랙 헌터라는 오명을 본인의 손들로 뒤집어 쓰는지를 말이다.
블랙 헌터.
그들은 절대 호락호락한 놈들이 아님을 안다.
전생에서처럼 그들은 추후에 거대한 세력을 구축하게 되겠지.
부웅! 몸통만한 꼬리가 면상으로 날아든다. 허리를 숙여 흘려냈다.
파식! 검신을 아래에서 위로 쳐올려 놈의 턱에 쑤셔박았다.
쿠르르…….
흡혈귀의 역린 효과가 먹히지 않았던 놈은 용케 선공했으나 턱과 목 사이에 비집힌 검신 덕에 몸을 떨었다.
“흑화광참.”
화르륵! 무섭게 치민 검은 불길이 놈의 가죽에 퍼져 무섭게 타오른다.
살코기가 익는 냄새와 함께 검은 불길은 놈의 뇌수까지 녹여 그대로 녹여낸다.
상념에 빠진 와중에도 감각적으로 전투를 펼치고 있다.
이제 이런 것들은 손에 익었다.
숱하다면 숱한 전투 경험들을 통해 능력치 뿐만이 아니라 감각까지 익은 상태.
-자고로 여자를 알려면 여자를 만나봐야 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여자를 만나봐.
살점이 녹아 떨어져 하얀 뼈마저 검게 익어가는 놈의 사체를 보면서 떠오른 강춘식의 육성이었다.
‘아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오늘 강혜령에게 고백 비스무리한 것을 받았었다.
서로 맥주를 먹고 취기가 달아올랐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말은 진심인 듯 했다.
성격은 모났지만, 예쁘고 몸매도 좋은 여성에게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 좋지 않을 남자는 없다.
천세정을 완전히 취하기 위해서는 춘식의 말처럼 연애 경험을 쌓는 것도 필요하다면 필요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다.’
연애 따위의 감정을 지금 느낄 때는 아니다.
F랭크라는 본분으로 그놈들과 맞닥뜨리게 되는 날이 머지 않았다.
그날.
어쩌면.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 전생에 접한 기사에는 F랭크의 헌터들이 전원 사망했다고 나와있었다.
그 기사가 또 속보로 터질 수도 있다.
바로 내 죽음이란 결과를 실은 채로.
‘……이번 생은 절대 실패할 수 없다.’
쿠아아!
상념을 털어내고 어둠 저 너머에서 죽일 듯 노려보는 놈에게로 달려갔다.
검자루를 손에 쥐고.
바로 그 무렵.
대지의 반은 용암. 그리고 나머지 반은 빙결로 가득한 지대에 선 장세준은 가만히 주위를 훑었다.
셋. 넷… 다섯.
빨간 눈 하나 달린 사이클롭스 다섯 마리가 흉측하게 달려온다.
이차원의 던전인 이곳의 사이클롭스들은 인간에 의한 물리적인 공격이 먹히지 않는 저력을 갖췄으며,
오크를 안광의 레이저 한방으로 잿더미로 만든다는 놈들이다.
차악! 차아악!
세준의 입술이 움직였다. 땅을 짚은 놈들의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순식간에 솟아든 냉기!
쩌저적-! 쩌적!
“한 번 사용해볼까.”
그대로 얼어붙은 다섯 놈들 중 두놈의 몸통이 깨지고, 검은 연기가 분해된 신체에 흡수된다.
크어!
크어!
제물 둘을 통해 소환된 스켈레톤 두 마리는 할버트를 들고 세준에게 다가와 고개를 떨어뜨리며 목레했다.
“오호….”
자신 앞에서 시선을 내리깔고 명을 기다리는 스켈레톤 둘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철제 갑옷에 긴 할버트를 쥔 스켈레톤 둘의 죽어있는 눈빛이 썩 맘에 들었다.
재단의 스폰서를 통해 어느정도 구축한 자본력을 좀 사용해 획득한 스킬을 처음 구사해볼 때의 이 느낌이란?
……… 언제나 신선하다.
“처리해라.”
크오!
크어오!
콰앙!
스켈레톤 둘은 그대로 할버트로 빙결된 사이클롭스를 쳐내렸다.
쾅! 쾅!
관절을 삐걱 거리면서도 쉬지 않고 할버트의 날을 휘둘러 얼음을 으깨고 사이클롭스의 육신을 토막낸 스켈레톤은 다시 세준 앞에 와서 다음 명이 떨어지길 기다린다.
캬오오!
해골 둘의 얼굴이 소리가 나는 뒤편으로 휙, 돌아간다.
사이클롭스 하나가 쿵! 쿵! 대지를 처밟으며 안광을 번쩍였다.
크오오!
크오!
사이클롭스의 붉은 레이저가 쏟아졌다. 해골 둘은 빠르게 좌우로 퍼져 피했다. 뻗어간 레이저는 뒤편의 얼어붙은 바위를 터뜨렸다.
할버트 두 자루가 허공을 마구 휘가른다!
푹!
사이클롭스의 눈깔에 박힌 할버트의 날. 피식! 그대로 내리긋자 새된 괴성을 뱉은 사이클롭스가 늘어진다.
떨그럭!
일을 마친 스켈레톤 둘은 세준 앞에 서서 시선을 바닥에 내린다.
“주인의 위험을 감지하면 위험 요소를 알아서 제거하는군.”
흡족함에 중얼거렸다.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닌지 해골들은 대답조차 없이 호흡을 고른다.
“이시운.”
고개를 들어 허공을 보며 녀석의 이름을 말했다.
재미나게도 패 한번 없던 내 인생에 흥미를 심어준 이름이다.
“네가 앞으로 어떤 재미를 내게 줄지 기대되는군.”
또 생겨난 스켈레톤 세 마리가 할버트 철창을 흔들며 다가와 머리를 조아린다.
“……멋진걸요?”
뒤편에서 지켜보던 남자가 세준을 둘러싼 해골들을 하나씩 뜯어보며 말했다.
이한석 주무관이었다.
F급 헌터에게는 하대가 일상인 그가 세준에게 존칭을 붙인 것은 모종의 거래 덕분이었다.
“주무관님. 이번 그 숙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죠?”
세준의 말을 단번에 알아들은 한석은 피식, 웃었다.
“숙제라기엔 미친 것이지요.”
“역시….”
F랭크 따위가 블랙 헌터들의 영역에 발을 딛는 그 숙제. 초식 동물이 굶주린 육식 맹수들의 영역에 자진해서 먹이가 되는 일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미친 짓을 내가 하게 된 이유가 뭐라 생각합니까.”
“나는 말단 사원이라 그런 정보까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그쪽도 잘 알고 있을텐데? 다만 추론 정도는 할 수 있죠.”
“어디 그 추론을 한 번 들어봅시다.”
“협회장 곽대익이 짠 시나리오겠죠.”
“…시나리오?”
안경 사이로 세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뒤편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리젠된 사이클롭스들이 돌진해오는 것을 스켈레톤들이 마중나가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였다.
그것들은 관심없다는 양 세준은 시선을 주지 않고 한석을 바라봤다.
“곽대익. 그 양반이 토사구팽에 쓸 사냥개를 시험해보려는 시나리오라고 보면 되겠죠.”
“사냥개? 그 사냥개가 우리 중 하나라는 말인가.”
“이시운. 그놈이 곽대익이 찍어둔 사냥개입니다. 그 임무는 과연 사냥개로 생각한 개새끼가 집이나 지키는 개새끼일지 투견으로 거듭날 새끼인지 알아보는 용도에 불과해요. 그뿐입니다.”
“미친놈이군.”
세준의 미간이 격히 찌푸려졌다. 그말에 한석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몇 번 주억였다.
“미친놈이지만 그 양반이 가진 권력은 그 미친 짓을 행할 수 있게 해주지요.”
“…부협회장은 힘이 없나?”
“부협회장 윤동석. 곽대익과는 대립적인 인물이죠. 서로 만나면 웃으면서 악수는 하는데 허리춤 뒤에는 서로에게 꽂을 칼을 숨기고 있습니다.”
“협회장과 부협회장이 서로 대립하는 구조라니….”
“권력은 곽대익이 막강해요. 허나 곽대익도 윤동석은 쉽게 못 건들죠.”
“…부협회장이란 명분 때문에?”
세준의 물음에 한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설명했다.
화이트 게이트에는 두 라인으로 갈려있다. 협회장의 라인과 부협회장의 라인.
부협회장 윤동석 또한 여러 재단과 스폰서를 갖고 있고, 협회의 지분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는 주주이기 때문에.
“……곽대익도 함부로 윤동석을 들쑤시진 못하는 것이죠. 게다가 부협회장 또한 곽대익의 치부를 많이 알고 있으니까.”
“음…….”
턱을 만지작 거리던 세준의 전신에 이팩트가 뿜어졌다.
[레벨 업을 하였습니다.]
그제야 세준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초록색 피가 베인 할버트를 쥔 스켈레톤들.
그 할버트의 둥그런 날에 묻은 피는 주인을 위해 충성을 했음을 암묵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벌써 레벨 업을 했나보군요.”
한석이 세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한석 또한 인지하고 있었다. 앞에 있는 사내는 F랭크의 한계를 이미 넘었단 사실을.
“현재 레벨이 몇이죠?”
“남에게 내 정보를 알려주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인데….”
“후훗. 역시 한 분야의 정점을 찍은 당신답군. 이시운 그 애송이였다면 푼수같이 지 레벨을 말했을텐데.”
이시운이라는 호가 나오자 세준의 표정이 변했다.
“주무관님은 그 녀석을 꽤 싫어하는 듯한데요?”
“아이고, 내 말투에서 그게 느껴졌나?”
한석은 속내를 들켰다는 듯 실없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올린 입꼬리를 내리고 쎄한 눈으로 한석이 말했다.
“……맘 같아선 주무관의 권한으로 그놈을 좆되게 한 번 해주고 싶은데 장애물이 하나 있어서 쉽지가 않단 말이죠.”
“장애물 하나?”
“부협회장의 딸 윤성혜라는 년을 말합니다. 그년이 직급은 나하고 동일한데, 윤동석의 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여자라.”
“윤성혜가 무슨 상관이죠?”
“그년이 이시운을 좋아하고 있거든요.”
빛이 쏟아지는 느낌.
피곤한 눈꺼풀을 들어올려보니 어느새 밝은 대낮의 빛이 창가에 쐬어 시운의 눈에 떨어졌다.
“……으으. 벌써 낮인가?”
어제 맥주를 마시고 심란한 마음을 달랠 겸 음주 사냥으로 마성의 탑을 쏘다니다 새벽에 잠들었다.
그리고 깨니 피곤함이 쏟아졌고.
공룡같은 놈들을 죽이느라 힘쓴 두 팔이 욱씬거렸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냉장고를 열고 냉수를 들이마신 뒤 속을 차렸다.
“후아…!”
정신이 좀 든다.
오늘 해야할 일이 있다.
라파엘 신전의 흑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좀 알아봐야 할 듯 싶다.
‘놈의 내공이 엄청나단 건 알고 있다. 정보를 좀 캐야겠어.’
촌장 다이온이 그토록 그 일을 맡기길 꺼릴 정도면 놈이 여간내기가 아니란 것이었다.
“음?”
작은 기척을 느낀 시운은 고개를 돌렸다.
혜령이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으며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시운과 눈이 마주친다.
“일어났어?”
“아아…. 응, 일어났다.”
혜령은 시운의 눈을 피하며 어색해 했다.
“어제 그 일은…”
“누나 어제 그…”
둘이 동시에 말을 하다가 멈췄다.
“…너 먼저 말해.”
“어제 일은 마음에 담아두지 말았으면 해. 우리 같은 동료고 그런 걸로 서먹해지면 곤란하단 거 알잖아?”
“어제 내가 취해서 헛소리를 했던 것 뿐이다.”
혜령은 말하고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손으로 부채질을 하면서도 속으로 민망해하는 것이 얼굴에 보일 정도였다.
“아무튼 난 누나가 동료로서 좋아. 그뿐이야.”
“…그래. 누가 뭐래냐.”
“누나 그거 약이야?”
“아! ……이거?”
혜령의 손에 쥐어진 약봉지를 보고 묻자, 그녀가 당황했다.
“가, 감기약이야. 신경쓰지마.”
“감기 걸렸어?”
“몰라, 신경쓰지 말라니까.”
혜령은 쪼르르 물컵을 들고 방에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시운은 측은함을 느꼈다.
감기약이 아니다. 이미 시운의 눈으로 약봉투에 ‘정신의학과’ 라는 활자가 보였으니까.
‘많이 힘들어 하는구나.’
시운이 어제 혜령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좋은 말을 해준 것도.
그녀의 안타까운 과거를 알고 그것에 힘들어하고 있음에 한 행동이었다.
이시운.
두 번의 회귀를 통해 3회차의 인생을 사는 그는 남들보다 겪은 상처가 많다.
그렇기에 상처가 있는 사람들을 보면 정이 가고 안아주고 싶은 오지랖이 있었다.
남들보다 정이 많은 것이 그였다.
미월 마을 광장.
-몰라요! 저한테 묻지 마요.
-……그 악마놈은 입에 담지도 마시길.
-바빠요!
주민들에게 라파엘 신전에 은신한다는 마법사에 대해 물었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답을 피했다.
겁에 가득 질린 눈으로.
‘그놈에 대한 정보는 알아놔야 하는데.’
촌장 다이온에게 물으려고 했으나 그는 외출을 했는지 거처에 없었다.
이러면 난감해진다.
놈의 정보 하나 없이 신전으로 간다는 건 위험한 일이다.
“안녕하세요.”
나긋한 육성으로 한 여성이 웃으며 인사를 해왔다.
금발 머리에 인형같은 얼굴. 미소를 지을 때의 눈웃음은 많은 남정네들을 홀렸을 것이란 추측이 설만큼 매력적이었다.
“아, 촌장의 따님이시죠?”
“네! 헌터님 덕분에 저희 마을이 한결 평화로워졌어요. 정말 감사해요.”
두 손을 모아 공손히 말하는 그녀에게 시운은 급히 물었다.
“…급하게 알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라파엘의 신전에 있다는 그 마법사에 대해 아십니까?”
“아…. 그게 궁금하신 모양이군요.”
그녀의 밝은 낯빛은 순식간에 굳은 체였다.
다시 물었다.
“그 마법사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 알겠습니다.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이야기 하실까요?”
그녀의 두 동공은 불안히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