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만 3회차-140화 (140/278)

제 140화

초전생의 비밀 (1)

“난 이만 여기서 빠질게. 그날에 다들 보도록 하자.”

흙빛으로 굳은 낯빛으로 연희가 말했다.

“야! 갑자기 왜 그래? 다음 협력 퀘도 같이 깨야지.”

“…….”

연희는 혜령의 말에도 대답 않고 등을 돌리고 걸어가더니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시운을 바라봤다.

시운을 보는 그녀의 두 눈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가버렸다.

유석과 혜령은 눈을 껌뻑이며 서로의 눈치만 봤다.

“갑자기 가버리네? 쟤 무슨 일 있었어?”

혜령이 시운을 향해 묻자 시운은 고개를 저었다. 갑작스런 연희의 반응의 이유를 시운도 알 리 없었다.

시운은 연희가 신경이 쓰였지만 지금은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해산하자. 지금 나도 가볼 곳이 있거든.”

시운은 그렇게 말하고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멀어져가는 시운의 뒷모습을 유석은 지그시 바라봤다.

“저에게 줄 것이 있죠?”

라파엘의 신전을 찾은 시운이 창백한 얼굴의 여성에게 물었다. 그녀는 가리아였다. 신도들에게 물어 물어서 그녀를 찾을 수 있었다.

[퀘스트 ‘이십년만의 해방’을 완료하였습니다.]

“일단은 저를 포함해서 저희 신도들을 해방시켜 주셔서 정말 너무나도 감사하단 말씀을 이렇게 간곡히 드려요. 그리고 이것은 제 조촐한 답례입니다.”

가리아가 내민 것은 초록빛을 뿜는 돌이었다. 시운은 그것을 건네받았다.

그러자 허공 위로 아이템창이 떠올랐다.

[고대의 현석][소모품]

꿈을 다루는 능력자 크리스티앙이 본인의 마력을 주로 비축해놓는 데 사용했던 오래된 돌이다.

자기 전에 이 돌을 손으로 쪼개고 잠에 들면 사용한 자의 초전생을 꿈을 통해 엿볼 수 있다고 전해진다.

‘초전생이라고?’

시운은 초전생이란 말을 알고 있었다. 초전생이란 영혼이 최초로 삶았던 인생을 뜻한다. 특별한 보상을 준다길래 부푼 마음으로 받았더니 현재 필요한 물품은 아니라 시무룩해졌다.

“헌터님은 저희에게 구속을 풀어주시고 자유의 삶을 선사하셨습니다. 답례로 드리는 겁니다. 부디 유용하게 쓰시기 바랍니다.”

가리아는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운이 영 시원찮다는 반응임을 알아차렸는지 그녀가 바로 덧붙였다.

“인간의 초전생을 알 수 있다는 건 참 값진 일이랍니다. 그 현석은 귀한 물건이랍니다. 한 번 사용해보세요. 헌터님의 초전생은 어떤 존재셨을지 저도 궁금한데요?”

“네…. 주신 건 감사히 받겠습니다.”

가리아의 강조에도 시운은 영 현석에 흥미가 가질 않았다. 그럴만 했다. 한창 강해짐에 치중해야 할 때 굳이 자신의 초전생을 알아서 뭐하겠는가?

“헌터님은 보통 분이 아니십니다. 아마 초전생도 특별하셨을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죠. 초전생이 현생에 능력으로 작용되는 이례도 있답니다.”

“능력으로 작용되는 이례요?”

갑자기 눈을 빛내는 시운을 보자 가리아는 그가 귀엽다는 듯 생긋 웃어보였다.

“이렇게 말씀드리니 흥미가 좀 생기시죠? 꼭 사용해보세요. 게다가 헌터님은 세 개의 차크라를 지닌 분입니다.”

세 개의 차크라라고?

시운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뜻을 담아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리아는 그 반응을 예상한 듯 설명을 덧붙였다.

“사람은 보통 한 개의 차크라를 가지고 있지요. 근데 헌터님은 세 개의 차크라를 지니고 계셨습니다. 크리스티앙의 꿈을 깨고 나오신 것. 그리고 그 크리스티앙을 물리치고 저희를 구해주신 것. 절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헌터님 바쁘셔도 시간 내서 현석을 사용해보세요. 어쩌면 놀라운 작용이 벌어질 지도 모르잖아요?”

가리아의 의미심장한 말을 듣고 시운은 미월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이시운의 소유가 된 집말이다.

“내가 집을 갖게 되다니. 몇 생을 걸쳐 살면서 내 명의로 된 집 한 번 가져보지 못했는데….”

40평이란 넓은 집 내부를 돌아보며 고양감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이런 감정 따위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다. 한시바삐 준비를 해야 한다. 그날에 대한 준비를.

덜컥!

안방에 들어왔다. 방 내부는 현계 시운의 집 방보다 세 배는 넓었다. 집 한 채를 가졌다는 뿌듯함을 안고 침대에 누웠다.

“초전생? 초전생이라….”

가리아에게 받은 현석을 들고 중얼거렸다. 돌은 긴 세월의 풍파를 나타내듯 여기저기 쓸려있었다.

‘갑자기 궁금하긴 하단 말이지?’

그런 호기심이 들었다. 지금 당장 협력퀘든 던전을 돌던 해서 레벨 업을 해야할 때지만 잠 한숨 못 잘 정도로 긴박한 건 아니다. 잠시 휴식겸 낮잠 잔다 생각하고 자신의 초전생을 알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잖은가.

아까 가리아의 뜻 모를 말이 자꾸 머리에 맴돌았고 이상하게 초전생에 대한 흥미가 돋아났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무언가가 나를 끌어당기는 기분이랄까?

빠직!

[고대의 현석을 사용하였습니다.]

두 손으로 돌을 쪼개자 들려온 알람이다.

이제 이대로 자면 되는건가? 그런 생각에 눈을 감자 전신이 맑아지는 기분과 함께 검은 시야로 영롱한 빛이 보였다.

근데 이상하게 가슴 한켠에서 아련함이 드는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것 같다. 아니 꿈이 맞다.

내 시야로 어둠이 걷히고 흐릿한 풍경이 보인다. 그 풍경이 점점 진해진다.

어라?

화창한 날씨다. 주위로 집들이 보이는데 건축법이 1도 적용되지 않은 낡고 구데기다. 그걸로 봐서 아마 먼 옛날인 듯 하다.

빨간 머리?

긴 장발인데 빨간 머리를 한 사람이 검을 위아래로 반복해서 휘두른다. 검술 연습을 하는건가? 근데 남자야 여자야? 저 촌스런 빨간 머리는 뭔데….

뒷모습만 보이는지라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다. 아? 자세히 보니 남자 같다. 아니 남자다.

저 남자는 얼굴이 땀으로 시뻘개지도록 검만 주구장창 휘둘렀다. 검술연습을 뭐 저리도 열심히 할까? 아마 무사인 듯 하다.

그때.

장면이 전환되며 경치가 바뀌었다.

빨간 머리가 말을 탄다. 동시에 손으로 당겼던 활시위를 놓자 하늘에서 뭔가가 툭 떨어졌다.

떨어진 것은 독수리였다.

와….

가만보니 독수리의 눈에 화살촉이 꽂혀있다. 말을 타며 독수리를 활로 떨어뜨린 것도 놀라운데 설마 눈을 조준하고 쏜 거란 말인가?

아닐 것이다. 그건 신궁 이성계 주몽이 살아 돌아와도 불가능하다.

그때.

빨간 머리 뒤로 누군가가 말을 몰며 다가왔다. 그가 말한다.

“매의 눈을 쏴 맞춘건가? 역시 신안(神眼)을 가진 자네다워. 이젠 놀랍지도 않구만.”

남자가 감탄한다.

잠깐. 신안이라고? 신안은 귀신같은 눈을 말하는 건데. 이계 역사학에서 봤는데 신안을 가진 인간들이 있었다고 했다. 시력이 뭐, 날아가는 새 동공도 본다고 했다. 저 남자가 그런 부류란 말인가?

내 눈과 비슷하다.

스르르- 풍경이 일그러지고 다시 장면이 바뀐다.

빨간 머리의 얼굴에 앳된 면이 사라졌다. 아마 나이를 좀 먹은 후 같다.

“그대는 언제까지 그 검에 미쳐 살텐가? 대체 왜 그리 검에 미쳐 연연하고 사는가 이 말일세! 제발 인생을 즐기며 살게. 그 잘생긴 얼굴로 여자도 좀 만나고 여흥도 즐기며 살란 말이네….”

백발의 노인이 빨간 머리에게 말했다. 빨간 머리는 발도를 연습하며 씩 웃었다.

“스승님. 소인은 검을 잡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내가 답답해서 그렇네! 언제까지 폐관수련에 미쳐 살 것인가? 청춘을 즐기지 않는다면 추후에 후회할 걸세. 나중엔 돌아오지 않는다네.”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요.”

빨간 머리는 대답하면서도 연습을 멈추지 않는다. 백발노인이 자신의 가슴을 쿵쿵 치며 답답하단 한숨을 흘린다.

남자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몇 백번….

몇 천 번의 발도를 쏟아내며 검을 놓지 않는다.

근성 참 대단하다. 내가 봐도 저 남자는 검에 미친 것 같다. 누구에게 원한이라도 져서 복수하려고 저러나?

또다시 장면이 일그러지고 모든 배경이 바뀐다.

빨간 머리가 마차를 몰며 빗길 속을 뛰어간다. 그러다 그가 멈춰서자 마차 문이 열리고 그 틈으로 오똑한 콧날이 엿보인다.

“답답하옵니다. 언제까지 제게 마음을 보이지 않으실 겁니까?”

“…….”

와! 이쁘다.

마차에 있던 여성이 얼굴을 내밀자 옆모습이 보였다. 죽여주는 콧날에 백옥같이 하얀 피부 위로 도드라진 이마. 생기 가득 묻은 입술까지. 비단결 옷을 있는데 고급스러움이 잔뜩 묻어나는 게 귀족같다.

엥?

근데 저 미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옆모습이다. 낯이 익다. 일단 좀 더 지켜보자.

빨간 머리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소인은 그저 천한 검잡이일뿐입니다.”

“아오! 답답해. 답답해서 죽을 것 같단 말입니다, 제가. 당신이 천민이고 저는 귀족이라서요? 천민은 사람이 아니고 귀족은 사람이 아닌가요? 다 똑같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이렇게 말씀을 전하게까지 만들어야 하옵니까?”

“…….”

여자가 자신의 입술을 비집어 깨물며 남자의 등을 노려본다. 딱 상황이 그려진다. 여자는 귀족 남자는 천한 집안이라 신분 차이가 있나보다. 근데 내가 봐도 존나 고구마다. 저런 여자가 좋다는데 왜 남자가 저렇게 소심할까.

나 같으면 웬떡이냐 하며 만나겠다. 아니…. 근데 뭔가 내 이야기 같은데? 반대지만 내가 ‘천세정 속앓이’ 했을 때. 딱 그 짝이잖아?

자, 잠깐! 저 여자?

여자의 얼굴 정면이 보였을 때 내 등의 털이 다 서는 듯 오싹했다. 천세정과 닮아도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아예 판박이다.

장면이 다시 전환된다.

하늘에서 불화살이 쏟아지고 있다. 그 화살비를 피하며 빨간 머리가 마차를 몰고 산길을 달린다.

뭐, 전시 상황인가?

그때 산기슭에서 장정들이 튀어나왔다.

“검성이 지는 날이 오늘이렸다!”

“토막내주마.”

역수로 검을 쥐며 쏟아지는 장정들이 씨부렸는데… 어라?

빨간 머리가 사방으로 검을 번쩍이자 장정들의 신체가 공중에서 분해된다. 자객들의 팔, 다리, 얼굴…… 모두 절단되어 주위로 흩어졌다.

내 눈으로조차 캐치하지 못한 귀신같은 몸놀림.

쉬쉬쉬쉬식!

그때 화살이 마차를 향해 쏟아지자 빨간 머리가 마차를 향해 도약하며 회전했다.

회전하며 쏟아낸 검격에 화살들이 조각나 땅에 쏟아졌다.

저 남자 그렇게 검술 수련에 매진하더니 검술 하나는 신명날 정도다.

그때 빨간 머리의 전방에서 수천의 기마병이 달려들었다.

이젠 위험할 듯싶다. 저 남자 이제 여기서 끝인가?

안타깝다. 저 남자가 아마 내 초전생의 나인 듯한데…. 이대로 죽나보다. 맘이 그리 아프진 않다. 초전생의 나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나’는 아니니까.

“발카스도 네 놈도 이제 끝이다.”

기마병을 몬 선봉장이 말했다.

빨간 머리. 그에게로 쇄도하는 기마병들은 매정할 정도로 많았다.

대박인데?

하늘과 땅 동서남북에서 쏟아지는 칼들을 다 쳐내고 피하고, 하나… 둘… 열… 삼십의 기마군 목을 썰어내는 빨간 머리다.

심지어 자신에게 쏟아진 화살까지 손으로 움켜잡고 던져버리더니 검을 미친 듯이 휘젓자…

그 많던 기마병들의 수가 점점 바닥을 보인다.

“프레아는 나와 혼을 맺은 사이다. 그만 미련을 버리고 투항하지?”

기마군의 선봉에 있던 남자가 말에서 내리며 말하자 빨간 머리는 검을 비틀어 잡고 그에게 겨눴다.

아, 아니….

그런데 빨간 머리 앞에 있는 저 남자의 얼굴이 그 녀석이다.

이럴 수가? 이거 초전생을 보는 꿈 맞냐? 아니 그냥 개꿈 아닌가.

말도 안 된다.

갑옷을 걸친 남자가 검을 뽑았다.

“…천한 신분인 네 놈 따위가 넘볼 여자가 아니라니까.”

그리고 그 둘은 검 하나를 쥐고 서로를 향해 번개같이 간격을 좁혔다.

잠깐.

저 그 선봉장의 얼굴은 내가 아는 그 녀석과 너무나도 닮았다. 방금 그 여자가 천세정을 닮은 것처럼 똑같았다.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뭐지? 이 모든 게 우연일까? 아니 초전생을 알아보는 꿈 치고 너무 이상한데.

그때 장면은 또 전환되었다.

이번에는 세월이 많이 흐른 후 같다.

“네 놈과 네 동료라는 피라미들에게 영원한 속박을 주겠노라.”

마갑을 걸친 남자가 혈을 머금으며 말한 뒤 사라졌다. 동시에 하늘에 구멍이 생성된다. 마치 게이트처럼?

“쿨럭!”

빨간 머리는 쓰러진 채 기침을 하자 피가 공중 위로 쏟아나왔다.

저게 저 남자의 최후인가?

근데 빨간 머리 주위로 시체들이 다섯 구가 있다. 다 방금 그 남자에게 죽은 모양이다.

“스승님의 말씀을 들을걸. 난 사랑하는 여인도 안아보지 못하고 청춘을 즐기지도 못했으며 오로지 여생을 나라에 바쳤다. 내 인생이란 없었다.”

빨간 머리의 눈빛이 점점 꺼져간다. 최후의 유언인 듯하다.

……?

순간 내 뒷목의 털이 서는 듯 했다. 저 남자의 눈이 나를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날 보는 게 맞나? 아니겠지, 이건 꿈속인데.

그 순간이었다.

“지금 네게 해줄 말이 있다.”

뭐? 나에게 하는 말인가? 분명 저 남자의 눈은 나를 향해있다. 가만 보자. 주변을 훑었다.

…주위는 아무도 없다. 모두 시체더미였고 숨을 쉬는 사람이란 없다.

저 빨간 머리 지금 내게 하는 말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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