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3화
천세정, 너에게 묻는다
시운의 이마로 땀이 흘러내렸다.분명 특성에 이렇게 적혀있다.
<두 차원을 마음대로 오고 갈 수 있다.>
여긴 이계라 헌터시스템을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 번 사용해볼까.
극한의 호기심이 일었다.
‘천륜화의 동기화.’
속으로 외쳤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질 않는다.
역시 아무리 울트라급 아이템의 특성이라도 차원을 오고갈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지.
라고 생각한 그때였다.
위이잉-.
병실 테이블 앞으로 사람만한 포탈이 생성되었다.
‘포탈?’
포탈은 푸른빛을 뿜어내며 파도의 물결처럼 잔잔히 요동치고 있다.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터벅.터벅.
시운은 무심코 일어나 그 포탈 앞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들어간다고 해도 다시 나올 수 있겠지. 설명에 그렇게 표기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어느 차원으로 이어진단 것일까?
슬며시 포탈 안으로 손을 뻗었다. 손이 그대로 투영되더니 쭉- 밀려 들어갔다.
“컥!”
마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듯 전신이 그대로 포탈 속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시운이 포탈 속에 끌려들어가자 포탈은 그 자리에서 없어졌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오면서 병실 문이 열렸다.
“이시운 씨 체온 잴 시간입니다. 어?”
들어온 간호사가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가 보이질 않는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화장실 가셨나?”
‘여긴..?’
그때 시운의 눈이 커졌다.
익숙한 여성의 나체가 보인다. 목을 덮는 긴 머리에 가녀린 허리에 축 쳐진 엉덩이의 나체 여성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옷장을 뒤지고 있었다.
“누, 누나?”
“뭐야? 꺄악! 야!!”
시운의 누나 이시연이었다.
그녀는 갑작스런 시운을 보고 놀라 나체를 옷으로 가리며 주저앉았다.
“뭐, 뭐야? 너 언제 왔어?”
“방금 왔어.”
일단 여기는 집인 듯 하다. 얼떨결에 거짓말을 내뱉어버렸다.
“뭐? 현관문 열리는 소리 못 들었는데….”
“근데 누나 운동 좀 해야겠다. 엉덩이가….”
“아, 됐고! 빨리 내 방에서 나가! 이 자식은 헌터가 되더니 귀신이 된거야 뭐야? 뭘 봐!”
“알았다, 알았어.”
시운은 오랜만에 보는 누나가 반가웠다. 그녀의 방에 나와서 거실을 가로질러 방안에 들어왔다.
침대와 테이블 위에 놓여진 헌터관련 서적들, 그리고 게임기 등등….
방안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침대에 덩그러니 누운 시운은 상념에 잠겼다.
‘두 차원을 오갈 수 있다는 것이 그럼 현계와 이계였단 말인가?’
이거 어쩌면 아주 편리하게 사용될 수 있는 능력이었다.
현게와 이계를 넘나드려면 꽤나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고 진입 허가까지 일일이 받아야 한다.
‘근데 이거 걸리면 문제가 되진 않을까?’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헌터협회에서는 헌터 각기 고유의 특성과 재능을 존중한다.
감사과의 조사도 다 마쳤고, 임무도 다 완수한 셈이다.
안그래도 오랜만에 현계의 공기를 맡고 싶었다.
일어나서 스마트폰을 켜봤다.
부재중 전화가 한통도 없다.
사실 그녀에게 부재중 전화 한통쯤은 와 있을 거라 기대한 것이 그리 큰 욕심이었던가.
‘아..잠깐만 혹시..?’
시운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은행 어플을 들어가봤다.
<이시운님의계좌잔액: 291,903,400원>
“드, 들어왔구나!”
이번 임무를 통한 계약금과 완수비용이 모두 계좌에 그대로 입금이 완료된 상태였다.
순간 머리가 띵한 느낌이 들었다.
전생이나 그 전의 생에서나 이 정도의 돈은 만져보지도, 가져보지도 못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다.
‘진짜 내가 헌터가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나는구나..’
시운은 뇌세포가 기분 좋게 꿈틀거리는 이 기쁨을 잠시 만끽하고서 송금하기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시, 시운아!”
방문이 벌컥 열리고 들어온 것은 이시연이었다.
“천만원. 이게 뭐야?”
그녀는 화색이 돌면서도 어안이 벙벙하단 눈으로 시운을 바라봤다.
“내가 이번에 헌터 일을 하면서 돈을 좀 벌었어. 누나 그거 당분간 생활비로 써.”
“뭐, 뭐라고?”
시연은 입을 떨며 한동안 시운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곧바로 시운에게 뛰어가 그대로 안겼다.
“정말이야? 시운아? 누나 진짜 이 돈 써도 되는거야? 어이구, 누나가 너한테 이런 돈도 받아보는구나. 동생이 성공하니 누나가 이런 행복도 누려보네!”
시연은 시운을 완전히 물고빨고 할 기색이었다.
시운은 그녀를 밀치면서도 싫지 않다는 기색이었다.
“아이 뭘…. 앞으로 또 벌게 되면 용돈 가끔씩 챙겨줄게.
“저엉말? 진짜야? 정말? 우리 시운이 이제 철 다 들었구나!”
시연은 몸을 부르르 떨며 좋아했다. 그것을 본 시운은 속으로 뿌듯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본주의로 안 되는 것이 없구나 란 생각을 삼켰다.
“나 일단 뭐 해야 할 게 있어서 그런데 잠시만 나가줄래?”
“어, 그래. 그래. 우리 대단하신 동생님께서 하실 일이 있다니 누나는 기분좋게 나갑니다.”
시연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손으로 하트를 만들어 보냈다.
시운은 피식 웃으며 나가라고 손짓했다.
‘전생에서 불효만 저지른 못난 나인데 이때 효도해봐야지.’
곧바로 아버지와 어머니께 천만원을 송금해드렸다.
드르륵!
곧바로 핸드폰이 울렸다.
-시운아?
톤이 높게 올라간 어머니의 육성이었다.
“응. 엄마. 나 집이야.”
-아니 이게 웬 돈이야? 천만원?
“그냥 나도 이제 헌터고 돈도 버는데 엄마 용돈이나 드리고 싶어서 그냥 송금했어.”
-뭐라고?
어머니의 말끝이 흐려졌다.
아마 흐느끼시는 듯 하다.
“엄마 인생도 이제 내가 책임질게. 우리 가족 모두의 인생도….”
-시운아…. 우리 아들 정말 엄마가 이 돈 받아도 되는거니?
“그럼. 엄마 사랑해요.”
그렇게 몇 마디를 더 나눈 시운은 전화를 끊고 행복감에 젖어있었다.
정말 얼마만에 해보는 효도인가.
아니… 효도란 것을 삼생에 걸쳐 해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였다.
‘병원을 오래 비울 수는 없어.’
시운은 현재 이계에 입원 중인 상태라 그 병원을 오래 비울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일단 지금 현계에서 해야할 것들이 있었다.
시운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앞머리가 눈을 가릴 정도에 덥수룩하게 자란 옆머리.
‘머리 좀 정돈해야겠군.’
시운은 그 길로 헤어샵으로 향했다.
사실 백수시절에는 머리 한 번 하는 것도 부담이 됐었다. 그렇다고 부모님 용돈으로 하는 것도 뭐하고.
근데 지금 계좌가 빵빵하니 어깨에 힘이 실리는 기분이다.
여성 미용사가 머리를 만져주면서 자연스레 물었다.
“머리 자른 지 꽤 되셨네요. 혹시 학생이세요?”
“아니요.”
“그럼 직장인?”
커트를 하면서 미용사는 비춰진 거울을 통해 시운의 얼굴을 보며 묻고 있다.
“헌터에요.”
“네? 헌터라고요?”
미용사의 가위질이 멈췄다.
그녀가 시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렇게 앳되고 반반한 청년이 헌터라고? 근데 낯이 익은 얼굴인데..’
보통 그녀는 헌터라고 한다면 우락부락하거나 정말 지적인 엘리트의 얼굴을 한 사람들이 태반일 거라 생각했다.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괜스레 묻지 않아도 될 질문을 미용사가 던졌다.
“스물넷이요.”
시운은 이제 이런 관심이 익숙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저랑 동갑이시네요?”
동갑이란 말에 시운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봤다. 근데 아까부터 낯이 익다는 얼굴이다.
“어? 혹시… 아현 초등학교 나온 김나윤?”
“…어?”
미용사가 화들짝 놀랐다.
“나 이시운이야. 너랑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어?”
미용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제스처였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이시운이라면 성적도 반에서 꼴찌에다가 게임만 좋아하고 조용한 그 아이다.
“진짜 너가 그 이시운이야? 황정순 쌤이 담임이었고 6학년 3반?”
“그래. 이렇게 보니 반갑네.”
“…와. 믿기지가 않아.”
미용사는 시운의 머리를 다듬어 주면서 이질감을 느꼈다.
‘그 찌질이가 이렇게 잘생긴 헌터가 됐다고?’
나윤은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단아한 외모로 반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그녀를 좋아해서 잠시 쫓아다녔던 시운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기억까지도.
‘아… 그때 내가 왜 그랬지.’
어릴 적 이야기지만 후회가 된다.
어쩌면 지금이라도?
나윤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너 나 그때 좋아했던 거 기억해?”
“그랬었나.”
시운의 말에 나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러나 애써 표정을 폈다.
“그래, 그랬잖아. 근데 이렇게 다시 보니까 반갑다. 여자친구 있어?”
“여자친구는….”
나윤의 이채가 빛났다. 아직 여자친구는 없다는 뜻이다. 초등학교 동창이었다가 다시 눈이 맞아서 잘 되는 경우를 지인들에게서 많이 들었다.
어쩌면 이런 성공한 동창을 이 자리에서 만난 것은 인연이 아닐까?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데 끝나고 같이 저녁이나 먹을래?”
나윤이 물었다. 물으면서도 심장이 콩닥거렸다.
인터넷에서 헌터가 된 여자친구의 사례들을 많이 접했다.
명품 가방에, 좋은 차, 호화로운 레스토랑에 데려가서 누구 부럽지 않은 대접을 받는 그녀들의 SNS을 보며 매번 부러움을 느꼈었다.
“아니. 나 갈 데가 있어서.”
“어디 가는데?”
“좋아하는 사람 만나러.”
“…….”
나윤의 얼굴이 그대로 구겨졌다.
옷가게에서 산 깔끔한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은 시운은 전신거울을 통해 자신을 내려다봤다.
방금 미용실에서 한 깔끔한 포마드 머리에 셔츠가 유난히 외모를 돋보이게 했다.
이제 그녀에게 전화를 할 시간이다.
이계에서 고군분투를 하는 동안에도 한시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었다.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누른다.
“회의 끝났습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임원 회의를 마친 세정은 머리를 위로 쓸어올리며 회의실에서 나와 복도를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네.”
남자 직원 하나가 인사를 건네왔다. 동시에 그 직원들 틈에 있던 사내들은 그녀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
“와.. 우리 회사 본부장 진짜 이쁘지 않냐?”
“완전 연예인도 씹어먹을 외모지.”
“부럽다.. 내가 남친이었다면 매일 밤마다 즐거웠을텐데.”
세정은그들의 담화를 듣지 못한 채 그대로 본부장실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은 세정은 양볼을 부풀어 올렸다.
휴. 오늘도 할 일은 끝냈구나.
하얀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중지 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긴장이 풀리면 그녀가 하는 버릇이었다.
의자에 편히 기대어 잠시 눈을 감았을 그때.
드르륵!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화면에는 이시운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여보세요?”
-세정아. 어디야?“
“오랜만이다. 나 회사지. 넌?”
-나 넘어왔어. 시간되면 오늘 좀 보지 않을래? 할 말도 있고 해서.
세정은 턱을 괸 손을 거두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그래, 오늘 보자. 어디로 갈까?”
* **
“여기가 네가 예약한 곳이야?”
세정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외관에 테라스도 있고, 내관은 호화롭고 굉장히 넓었으며 디자인은 품격이 가득한 게 썩 괜찮았다.
“내가 예약했지. 이번에 계약금으로 좀 벌었거든.”
“정말? 기특하네.”
세정이 시운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시운은 검은 원피스를 입은 세정을 보며 넋이 나갈 듯 했다.
언제봐도 눈부시고 빠져들 것 같은 외모는 항상 날 작아지게 만든다.
그때 바에서 만났던 춘식의 명언이 생각났다.
-남자는 무조건 자존감이야! 여자에게 휘둘려서는 안돼. 그리고 뭐 먹고 싶은지 물어볼 시간에 네가 추천하고 리드를 해!
시운은 메뉴판을 보더니 세정에게 스페셜 살치살 스테이크와 버섯 베이컨 샐러드 어떻냐고 물었다.
세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문을 하고 얼마 후 테이블에 요리가 올려졌다.
“그동안 잘 지냈어?”
시운이 물었다. 세정은 애써 잘 지냈다는 듯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몇 개월만에 만났는데 그녀의 얼굴은 수심이 베인 듯 했다. 회사일이 고돼서 일까?
“보고 싶었다. 세정아.”
스테이크를 먹으며 시운이 단호히 말했다.
그러자 세정은 씩 웃으며 나이프로 시운의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썰어주었다.
“걱정 많이 했어.”
세정이 말했다. 그런데 뭔가 오늘따라 원래 세정이의 말투와 다른 사무적인 느낌이다. 원래라면 애교가 뒤섞인 귀여운 말투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이거늘.
‘찌질하지 않게 간다.’
시운은 그녀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하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너도 나 보고 싶었어?”
세정은 입안을 오물거리며 스테이크를 씹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때, 시운의 눈빛이 진해졌다.
“세정아. 딱 말해라. 네 생각에는 우리 사이는 지금 뭐야? 연인이야? 아니면 잠시 눈맞았던 친구 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