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0화
중국에서 시작
“사, 삼백? 뭐라고요?”
내가 방금 뭘 들은거지. 윤호는 후두부를 얻어맞은 느낌으로 멍때렸다.
“삼백억이라고 했습니까.”
“네, 삼백억이요.”
“……….”
지금 뭐라는 거야?
이시운은 삼백억이란 말을 태연하게도 말했다.
‘삼백억이 어린애 장난인 줄 아나?’
삼백억 정도란 거액으로 헌터를 길드에 데려온 사례는 지금껏 정말 딱 한명 빼고는 없다.
그 한명은 SS급. 우리나라 탑이라 불리는 박태석이라 이례라고 볼 수도 없고.
“저번에는 백억이면 계약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윤호의 끝음이 날카롭게 솟았다.
시운을 포섭하려고 길드원들 인센티브를 가로채고, 3금융 대출에다가 길드 전 인력을 빡세게 굴려서 던전에 넣어서 수익금을 끌어모았다.
그렇게 피같이 모은 백억이란 말이다!
“말씀드렸다시피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이 말입니다.”
“하….”
영업팀의 귀재라 불리는 윤호였지만 이런 어이없는 경우는 난생 첨이라 말문이 막혔다.
숨이 막혀서 입밖으로 말도 안 나오는 기분.
아니다. 좀 더 입을 털어봐야지.
우리 길드가 그 돈을 어떻게 마련했는데?
“시운 씨. 들어봐요. 그러니까 백억이라는 계약금은요……”
“헌터 길드 역사상 그동안의 이례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합리화 시키려는 말씀이죠? 더 안 듣겠습니다.”
시운이 말을 잘랐다.
정말 할 말 없게 만드는 친구다.
새파랗게 어린게 어찌 이렇게도 당돌할 수 있을까 싶다.
“자, 잠깐만요. 백억으로도 부족하단 말입니까? 백억이란 돈은 은행에만 넣어놔도 돈이 얼마나 더 들어오는지는 알죠?”
“부족하다고 하진 않았습니다.”
“부족하지 않은데 왜 삼백억을 달라고 해요?”
“그냥 제 몸값이 그 정도 되니까 그렇게 부른 겁니다만?”
끄응.
이거 난제다.
영업 생활만 십 년차. 이 바닥에서 굴러먹을 만큼 굴러먹었다.
“진심이에요?”
“말이 길어지네요. 어차피 제가 내세운 계약조건도 맞추지 못하실 것 같은데 그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일어나려는 시운의 손목을 낚아챘다.
일단 어떻게든 데리고 가야된다.
아니.. 근데 할 말이 떠오르질 않네.
이딴 경우는 또 처음이다.
그때 이시운이 클러치백에 든 핸드폰을 꺼내 귀에 가져다 댔다.
“네, 협회장님. 지금 길드관계자 한 분과 대화 중입니다. 식사는 하셨어요?”
혀, 협회장?
그 말에 윤호는 입이 얼어붙고 말았다.
헌터가 협회장과 직통으로 저렇게 전화를 한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윤호는 사슴눈으로 시운을 쳐다봤다.
놀랍게도 F급 헌터 이시운은 협회장과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밥은 먹었냐니, 커피를 먹고 있다니 하는 말들을 하고 있다.
설마? 협회장이랑 전화하는 척 하는건가.
윤호가 매의 눈으로 시운을 흘겼다.
-길드관계자? 어디 길드를 말하는 건가.
시운은 윤호의 속셈이라도 알아차린 듯 스피커폰을 했다. 분명 스피커로 나오는 목소리는 협회장의 목소리가 맞았다.
“아…….”
윤호의 입은 얼었다. 본인은 고사하고, 풍운길드의 대표 준호에게도 협회장은 너무나도 어려운 존재다.
한 길드의 대표인 그도 협회장과 사적으로 전화해본 적도 없고 전화를 한다고 하더라도 긴장해서 버벅거릴 것이다.
“저기... 팀장님?”
“…예?”
“협회장님이 바꿔달라고 하시는데요?”
“예, 예?”
바꿔달라고? 윤호는 명치가 멎는 느낌으로 입을 벌렸다.
“받아보세요.”
시운이 태연히 폰을 건넸다.
윤호는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폰을 건네받았다.
“아, 혀, 협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풍운길드의 영업팀장 정윤호라고 합니다.”
-야. 무슨 볼일로 이시운이를 만난거야?
“예, 예? 아, 저 길드 협상권에 관해서 일이 있어서…”
-걔 귀찮게 굴지 말고 꺼져.
“네, 네? 아, 네, 넵! 협회장님.”
뚝.
윤호는 끊겨버린 전화에 멍하니 폰만 바라봤다.
“음…….”
시운은 그것을 보고 커피를 빨대로 쪽쪽 빨고 있었다.
윤호는 고개를 들어 시운을 바라봤다.
‘대체 이 자식 정체가 뭐야..’
* *
풍운길드의 회의실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대표 준호는 윤호의 말을 듣고 넋이 나간 상태로 있다가 벌떡 일어나 회의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테이블을 뒤집고 의자를 들어서 내던졌다.
윤호는 시선을 내리깔고 가만히 있었다.
무엇보다 저 심정이 납득이 간다.
“하아... 니미... 이게 말이 돼? 이거 맞아?”
“거기서 협회장이 끼어드는 바람에…….”
윤호는 계약 불성사의 탓을 협회장으로 돌렸다.
사실 계약이 어느정도 진행이 될 듯 하다가 협회장의 개입으로 파기된 것처럼 준호에게 말해놨다.
그래야 자신의 면도 살고, 이 길드의 영업팀장직도 계속 해먹을 수 있으니까.
“그 양반이 거기서 왜 나와!”
“저도 모르죠.”
협회장의 지시를 어길 수는 없다. 그가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 한다. 그의 힘이라면 중대형 정도 되는 풍운 길드는 풍비박살 날 수도 있으니까.
“이제 어쩌죠?”
한나가 물었다.
“어쩌긴 뭘 어째.. 다 물 건너 간거지. 대출 막고 투자자들 납득시키고, 설득하고, 스카웃 할 다른 애 알아봐야지.”
준호의 힘빠지는 말에 한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나는 자신과 같이 던전에 들어가 전투를 펼쳤던 시운을 떠올렸다.
‘정말 순식간이었는데..’
F급이라던 그는 정말 순식간에 보스몹을 초주검으로 만들었었다.
말도 안 되는 능력에 협회장과의 연줄까지 있다니.
대체 그 남자의 정체는 뭘까?
“진짜 F급 헌터 하나에게 우리 길드가 개망신이란 개망신은 다 당했네.”
준호의 말에 윤호는 반박하지 않았다.
“아니라고 말이라도 좀 해봐! 정 팀장.”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아…….”
허공을 바라보며 내일 죽는 사람처럼 한숨을 푸푸 쉬어대는 준호를 바라보던 윤호는 생각했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이시운... 어쩌면 일부러 내 앞에서 협회장과 전화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정보에 대해 발설하지 말라는 것과 더는 귀찮게 굴지 말라는 메시지를 내게 보낸 것 같다.’
삼백억이 푼돈도 아니고 이시운은 너무나 태연했었다.
어쩌면 그는 계약할 마음이 아예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때 윤호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눈이 커졌다.
‘이 친구.... 그저 어린 친구가 아니다. 전력뿐만 아니라 심리전까지 거물이야.’
* *
그렇게 이주일이 흘렀다.
이시운이 주시한 윤동석은 근신이라도 하듯 움직임을 내보이지 않았다.
일명 ‘헌터협회 비리 게이트’ 라고 불리우는 사건은 수면 위로 크게 떠오르고 있었고,
그에 관련된 이들은 줄줄이 검찰조사를 받으며 재판을 받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윤동석 라인의 비리자들이 휘청이면서 윤동석도 힘이 약해진 상태.
그러나 윤동석이란 거물을 보내버릴만한 무기는 없었다.
둠스데이를 막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시운은 협회장의 호출을 받고 강남의 백화점으로 향했다.
백화점 앞에 도착하자 경호원들이 에워싼 롤스로이스가 보였다.
경호원들은 시운을 발견하고서 깍듯히 인사했다.
협회장과 사적인 만남을 하다보니 나 또한 권력자가 된 기분이네.
시운은 롤스로이스의 문을 열고 조수석 자리에 탔다.
뒷좌석에서 시가의 짙은 냄새가 풍겨온다.
“그 건은 해결했나?”
“여깄습니다.”
시운은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곽대익이 시킨 특정 헌터 몇몇의 전력을 분석하고 작성한 서류였다.
그의 지시를 받고 그들의 전력을 제대로 측정하기 위해서 일부러 던전에 같이 진입했었다.
“없네. 괜찮은 놈이.”
대익은 신경질적으로 옆으로 서류를 던져버렸다.
“이시운. 입금했다. 확인해봐.”
시운은 핸드폰을 통해 은행어플에 접속했다.
정확히 30억이 방금 입금된 상태였다.
분할식으로 거금을 이렇게 입금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사냥개 노릇을 하는 중이다.
이젠 계좌 잔액란에 60억이란 숫자가 보인다.
지금 봐도 비현실적인 금액이다.
“윤동석이 활동을 금하고 있습니다.”
협회장 앞이라 감히 부협회장의 이름을 호칭 없이 말했다.
“그 친구도 생각이 있는 놈이니 그 자리까지 온 거야. 당연히 그러고 있겠지.”
바보가 아니라면 그럴 것이다.
윤동석의 주변인들이 모조리 조사를 받는 지금이다.
그런 지금 굳이 설쳐서 주목을 받는 짓을 할 바보는 아니다.
“정말 우리나라에 그딴 일이 일어난다면 난감하겠군. 군대로도 막을 수 없을텐데.”
대익은 시가를 하나 더 뽑아들어 피워댔다.
그딴 일이 어떤 일을 의미하는지 시운도 알고 있다.
“자네 호성그룹의 김수혁이라고 아나.”
“알고 있습니다.”
김수혁? 당연히 안다.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인 호성그룹의 부회장 아닌가? 곧 회장이 될 아주 새파랗게 어린 그 사람을 모를 수는 없다.
회장과는 가족관계는커녕 아무 친분도 없는데 회장의 눈에 들어 입양되었고, 순식간에 그 그룹의 부회장자리까지 오른 인물.
중요한 건 그는 흙수저 집안 출신이다. 의문이 많은 남자로 알려져는 있다.
“근데 그가 자네를 알더군?”
“저를 말입니까?”
그 양반이 날 안다고?
이상하다. 그 사람은 우리나라 최고 기업의 총수가 될 사람이다. 돈 버는 데에만 신경을 쓰고 있을 사람이 나란 존재를 어떻게 안다는 걸까?
“저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던가요?”
“음….”
대익은 답변을 하려다가 입을 닫더니 시운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검은색의 카드였으나 시운은 이 카드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었다.
“한도는 없어. 이 카드로 자네가 사고 싶은 건 다 사도록 해.”
그 카드를 집어든 시운은 카드를 바라봤다.
다른 카드와 똑같은 크기의 신용카드지만 풍기는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괜찮습니다. 명품에 관심이 없어서요.”
“정말 싫단 말인가?”
시운은 대익에게 다시 카드를 건넸다.
내가 하는 일 이상으로 호의를 받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곽대익이 어떤 인간인지 잘 아니까.
“이 카드를 거부한 헌터는 자네가 처음이군.”
대익은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봤다.
그의 비서실장이 쇼핑백을 바리바리 들고 오고 있었다.
저 쇼핑백에는 곽대익의 몸을 치장해줄 온갖 명품들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러던 그때 대익이 말했다.
“김수혁이라는 남자 말이야. 단순히 재력가가 아니야.”
“제가 알아야 될 사람입니까.”
“자네 프리메이슨이라고 들어봤나?”
프리메이슨?
들어본 적은 있다.
세게 음모론에 등장하는 비밀집단으로 뒤에서 나라를 조종하고, 뭐 검은돈이 엄청나고 뭐 그런 집단들.
“들어는 봤습니다. 설마 그 사람이 프리메이슨이라는 말씀을 하시려는 건 아니죠?”
“그런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돼. 어디까지 힘을 쥔 놈인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굳이 관심은 없습니다만.”
“딱 하나 알려줄 수 있는 건 그가 자네에게 적의가 있는 것 같아.”
적의? 나한테 왜.
대익의 말에 시운의 표정은 티 안나게 구겨졌다.
바로 그 시각.
대한민국에서 먼 거리에 있는 중국이라는 나라는 난리가 난 상태다.
“저, 저게 뭐야?”
“게이트! 게이트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
그곳의 중국인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경악하고 있었다.
수많은 시선이 모여있는 하늘에는 거대한 게이트가 생겨난 상태였다.
현재 현계와 이계를 잇는 게이트는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 뿐이다.
그런데 중국에 게이트가 생겨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순식간에 생겨난 게이트.
그 덕분에 군대가 도착하기는커녕 경찰들도 막 도착해 시민들을 통제할 그 무렵이었다.
그 순간 섬뜩한 괴음이 사방으로 비산했고.
그 게이트가 열리고 나온 무언가는 순식간에 베이징의 한복판을 쓸어버렸다.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건물이 터져 뭉개지는 소리도, 그 어떤 소리도 내질러지지 않았다.
그 물체가 뿜어낸 베리어는 소리도 없이 모든 것들을 앗아갔다.
그리고 그 장면은 헬기를 탄 기자의 모습과 함게 전세계에 송출됐다.
바로 그 시각.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확인하던 시운의 턱이 떨려왔다.
핸드폰 액정으로 비춰지는 영상에는 충격적인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둠스데이.
세상의 종말이 시작되는 날.
그 종말의 첫 희생양이 되는 나라는 중화인민공화국. 중국이었다.
“잠깐만..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둠스데이. 그 날이 오늘이라고...?”
그날은 예상을 깨트리고 너무도 빨리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