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1화
신의 게임 (4)
3라운드가 시작됐다.
열명이였던 헌터들은 네명으로 줄어있었고. 플레이어는 총 다섯이다.
“후우.”
내 입에서 한기가 연기처럼 흘러나온다.
내 손은 빈손이며 옷 전신은 검은색 슈트로 덮여있다.
이번 라운드에 오게 되면서 장비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친절하게도 이런 냉기에 이딴 얇은 슈트는 챙겨줬다.
헌터로 단련된 신체가 아니였다면 진즉에 얼어 죽었을 것이다.
[이번 라운드는 당신들의 고유의 힘을 사용할 수 없어요. 그래도 생존은 해야겠죠?]
관리자가 그렇게 지껄였었다.
엿같게도 이번 라운드는 헌터 시스템이 적용되지 않는 듯 하다.
그리고 이번 라운드의 간단한 룰을 설명해주었다.
점점 이 새끼의 목소리에서도 감정이 깃드는 듯 하다.
약 올리는 느낌은 아닌데 인간인 우리들을 생쥐 실험하는 생쥐처럼 본다는 느낌이랄까.
‘홀로그램.’
관리자가 말한대로 속으로 외치자.
-불의 정령술 200 P
-도검 9 P
-야시경 17 P
-횃불 1 P
-활 8 P
-완드 6 P
-휘발유 10 P
-속성 검술 230 P
-속성 무기술 320 P
-소세지 2 P
-두터운 옷 30 P
이런 것들이 떠올랐다.
“내 포인트는….”
잔여포인트: 1800 P
내게 주어진 포인트가 많은 느낌이다.
내 느낌상 플레이어 전원에게 동일하게 포인트를 배분한 것은 아닌 듯 하다.
설마.
전 라운드까지 획득한 점수가 포인트로 전환된 건가?
주위를 둘러봤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시커먼 칠흑이 도래한 밤에 땅은 살결을 애위는 빙판으로 덮여있다.
‘도검.’
[포인트를 사용하여 도검을 획득합니다.]
타캉!
알람이 울림과 동시에 내 앞으로 검 한자루가 튀어나와 빙판에 박혔다.
아클레우스 소드에 비하면 너무나 형편없는 아주 평범한 도검이다.
그래도 무기 하나 없이는 이곳에서 버티지 못할 테니까.
‘인벤토리.’
속으로 외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맹인의 감각.’
‘신안.’
‘맹인불과.’
‘…흑화광참.’
아무 반응이 없다.
혹시나 해서 확인해봤지만 룰대로 헌터시스템은 발휘되지 않는 듯 하다.
도검을 든 채로 소세지를 구입했다.
비엔나 소세지보다 조금 더 크고 핫도그보다 작은 갈색 소세지를 한입 베어먹었다.
고무가 씹히는 느낌이다. 젠장.
라면같은 거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맛은 기대했던 것보다 형편이 없다.
불의 정령술을 구매했다.
[불의 정령술을 획득하였습니다.]
[스킬 파이어 핸드를 습득하였습니다.]
파이어 핸드 [정령술]
설명: 손에 불의 구체를 생성한다.
‘파이어 핸드.’
속으로 외치자 손아귀에서 따뜻한 기운이 감돌면서 주먹만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게 다야?”
불의 정령술이라고 했는데 고작 불꽃 하나만 피어난다.
홀로그램창을 좀 더 살펴봤다.
-정령술 가중 500 P
가중이라고?
포인트를 사용하여 구매했다.
[정령술을 가중하였습니다.]
알람음과 함께 파이어 핸드의 설명란이 바뀌었다.
파이어 핸드 [정령술] Lv.2
설명: 불의 구체를 생성하고 다룬다.
손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아까보다 좀 더 뜨겁고 크게 피어나고 있었다.
불의 정령술을 택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이곳은 빙결지대.
살결을 찢는듯한 한기를 덮으려면 불을 다뤄야 했다.
홀로그램에서 장작을 구입한 뒤에 그곳에 불꽃을 얹었다.
타닥. 타닥.
마른 장작이 타오르면서 주위를 환하게 비춘다. 홀로그램창으로 포인트를 소모하여 두터운 옷을 구매했다.
무늬가 없고 그저 하얀 양털 파카옷이다.
이 정도로도 감사해야지. 옷을 걸치니 한결 따뜻하다.
나는 주위 반경을 훑고서는 잠시 휴식을 취했다.
쌓인 피로가 풀리려던 찰나.
기척이 느껴졌다.
도검을 쥐고 일어나서 그쪽을 바라봤다.
그림자 열 개가 가까워지고 있다.
내 시력으로 이미 형태는 다 보였다.
무장을 한 고블린들이다.
놈들은 날 사냥하려는 듯 소리도 죽이고 숨 죽이며, 잰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파악!
오른발에 힘을 주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근데 생각보다 도약력이 약했다.
이거 내 헌터 능력치까지 적용되지 않은 듯 하다.
젠장.
그렇다면 고블린은 내게 위험한 존재다.
-키야!
-키야아!
사냥감인 내가 움직이자 고블린들은 적의를 발산하며 내게 달려들었다.
고블린의 몽둥이가 내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것이 느릿하게 보인다.
그래도 내 눈으로 비춰지는 고블린들의 움직임은 느리다.
허리를 틀어 몽둥이를 흘려내고 도검을 힘껏 고블린의 배를 향해 밀어넣었다.
-끼에에에엑!
고블린이 괴롭다는 듯 낑낑거린다. 야들한 놈의 뱃살이 갈라지고 내장이 흘러내렸다.
퍼억!
“컥.”
등으로 격통이 밀려온다.
고블린의 숫자가 너무도 많다.
헌터 능력을 사용할 수 없으니 이딴 고블린의 공격으로도 통증이 밀려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검으로 고블린의 목을 그어버리자 놈이 목을 움켜잡고 더운 피를 쏟아내다가 뒤로 넘어간다.
파악! 반대손으로 고블린의 주먹을 막아냈다. 뼈가 뒤틀리며 내 팔이 뒤로 점점 밀려난다.
힘에서 밀린다. 열받는다. 보통 고블린과는 다른 존재들인 듯 하다.
‘파이어 핸드.’
내 손에서 불꽃이 발산되어 맞잡고 있던 고블린의 주먹에 불이 붙었고 그 불은 팔을 타고 놈의 얼굴까지 번져갔다.
-끼아악! 끼악!
얼굴 가죽이 익어가는 소리가 진하게 들렸다.
사방에서 일곱 개의 몽둥이가 쏟아졌다.
* *
중국의 주석 서진핑은 숨통을 조여오는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풀렀다. 그의 숨통을 막아오게 한 것은 넥타이가 아니라 그 괴물이였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러시아도 우릴 외면합니다.”
국무총리가 그렇게 말해왔다.
그 말에 서진핑의 초췌한 낯빛이 더욱 진해졌다.
중국에 엄청난 사상자수를 만들어낸 그 괴물은 광저우에 멈춘 채 거동하지 않고 있다.
허나.
언제 그 괴물이 움직일지 모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미국한테 기는 거였는데….”
군 최강국 미국의 무기라면 저 괴생물체의 몸뚱이를 작살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후회가 막심했다.
우호 관계였던 러시아마저 중국을 외면하고 있는 상황이고.
“그 괴생물체가 변질 방사능을 뿜어내고 있답니다...”
“나도 알아요.”
서진핑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하필이면 그 괴생물체가 다녀간 그 자리에 군폭격 위험물질 외에 일반 방사능보다 더욱 인체에 헤로운 변질 방사능이 퍼져나갔고 그 변질 방사능은 강풍을 타고 중국의 전역으로 퍼지는 중이었다.
-속보 괴생물체 변질 방사능에 노출된 민간인 확진자 13002명으로 추정.
스크린에서 보도하고 있는 기자의 말에 서진핑은 저 기자의 목을 따버리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그 덕에 모든 나라의 항공편은 중국인들의 입국을 강력히 제한하고 있는 상태였다.
국가안보에 최대위기 상황!
“미국과 일본, 한국 그 어느 나라도 우리에게 도움을 줄 생각조차 없어보이네! 육시럴.”
이계로 향하는 게이트는 미국과 일본 한국에만 존재한다.
현대 군대가 괴멸시키지 못한다면 이계 용병단의 힘을 빌리는 것이 최후의 방법이지만 중국인들의 모든 입국이 막혀버린 사태인 지금은 그런 협상조차 불가능 했다.
사면초가의 상황.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실에 피가 거꾸로 솟다 못해 숨까지 콱 막혀서 공황이라도 올 것 같은 느낌이다.
콰아앙!
서진핑은 발로 의자를 걷어차고 허리춤을 차며 한숨만 내쉬었다.
그때 스크린으로 들려온 기자의 목소리는 이 들의 구겨진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리기에 충분했다.
-소, 속보입니다. 광저우에서 거동을 멈추었던 괴생물체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속보입니다.
“…뭐?”
서진핑은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마지막 생각마저 뇌리에 달아나는 고약한 느낌.
입을 다물고 이 처참한 분위기를 그대로 느끼고 있던 비서실장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이제 더는 방법이 없습니다.”
비서실장의 말에 의미를 서진핑은 잘 알고 있었다.
근데 그 방법을 행한다면 중국의 영토 일부를 재건하는 데는 아득한 세월이 걸릴 것이고 경제는 파탄이 날 것이다.
“헌터들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습니까. 허가를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국무총리도 이제는 체념했다는 듯 절망한 얼굴로 말했다.
서진핑은 입을 부르르 떨며 머리를 쥐어뜯고 한참을 창문 밖 먼 도시로 멍하니 눈을 두고 있었다.
이제는 배수진을 처야할 때.
그런 그의 입술이 비참하게 떨리며 열렸다.
“…핵을 발포해야겠소. 이젠 더는 방법이 없겠어.”
* *
시운은 신의 게임 3라운드를 진행한지 이틀이 되었다.
헌터시스템을 사용할 수가 없어서 아득하게 생존해야 했지만, 수많은 전투로 인한 경험과 남들과는 다른 눈과 어깨로 생존해나가고 있다.
고블린들은 모두 도살했다.
그리고 악착같이 모은 포인트를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여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이 던전의 지형이 얼마나 넓은지도 모른다.
아득히 펼쳐져 있는 빙판과 태양이 떠오르지 않는 밤만이 계속 되는 이곳에서 시운은 살기 위해 움직였고 2라운드 때 그 소녀를 만났다.
“제 이름은 실리아라고 해요.”
가녀린 그 소녀는 수줍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것과 상반되게 그너가 들고 있는 철퇴에는 고블린들의 핏자국이 흥건했다.
구멍난 빙판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고블린 두 마리가 스프링처럼 튀어나와 둘을 습격했다.
-끼에엑!
이 소리는 시운의 도검에 왼팔이 잘려나가 고블린이 울부짖는 소리다.
피를 철철 흘리며 장애가 됐음을 인지한 고블린은 울상을 내지르며 시운을 향해 불쌍한 눈을 했다.
-끼에에! 끼엑.
마치 죽이지 말고 아량을 베풀어 달란 듯한 톤을 담아 말을 건네온다.
“살려달라고? 저곳에 숨어서 우릴 뜯어먹으려고 했던 널?”
시운은 왼손으로 고블린의 뺨을 후려쳤다.
고개가 돌아간 고블린의 초록색 목덜미에 그대로 검신을 밀어넣었다.
울대가 터지는 소리와 동시에 목을 꿰뚫은 검신은 조용히 떨리고 있었다.
고블린은 피를 울컥울컥 토해내듯 쏟다가 흉성을 한 번 뿜고는 고개를 떨궜다.
“아차!”
너무 객기를 부린걸까? 실리아가 위험하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뒤에서 들려오는 담담한 그녀의 목소리.
뒤를 돌아보니 고블린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함몰되어 있었다.
그녀의 손 밑으로 이어진 철퇴줄이 미세히 흔들렸다. 방금 그 고블린을 그렇게 만들었음을 말하고 있는 듯 했다.
“너 보통 소녀가 아니구나.”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공포를 즐겨야 하는 법이죠.”
시운은 실리아를 가만히 쳐다봤다.
귀여운 소녀의 얼굴에 감정없는 눈. 근데 이상하게 저 눈에 여러 가지 감정이 담긴 느낌이었다.
“넌 이 게임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다고 했다. 비밀이 뭐지?”
“조금은 말해드릴 수 있어요.”
“우리가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누군가가 게임을 하고 있는 거지? 우린 체스의 말 정도인 여흥거리고.”
시운은 그 말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별은커녕 인공위성조차 없어 검은 도화지와 같은 하늘이었지만, 하얀색 달과 검은 달. 두 개가 떠올라 있었다.
근데 어제와 다르게 검은 달이 하얀 달을 집어 삼킬 듯 커져있었다.
‘분명 이건….’
라운드에 돌입하기 전 그 체스말에 관한 메시지.
2라운드 때의 두 개의 태양.
그리고 백색 천사와 흑색 천사의 날개색까지.
그것들은 모두 연관이 있었다.
시운의 말을 들은 소녀는 처음으로 감정이 담긴 표정을 지었다.
“제법 똑똑하시네요? 잘 관찰했어요.”
“두 명. 그러니까 빌어먹을 두 놈이 게임판을 벌이고 있고 우린 그 게임 속 체스말이란 거잖아?”
시운의 이어진 말에 소녀가 작게 감탄하듯 탄성을 뱉었다.
“거기까지 파악하셨다니 대단하시네요.”
“칭찬을 들으려고 한 말이 아니야. 됐고. 네가 알고 있는 비밀을 말해주렴.”
“지금 우리는 두 신이 벌이는 게임 속 인형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 두 놈이 신이란 말이냐.”
“네.”
시운은 헌터시스템이 작동되지 않는 이곳에서 상태창을 속으로 되뇌이면.
B: 9010 W: 1030
이라는 홀로그램 글자가 떠올랐다는 것을 기억하고 물었다.
“B와 W의 뜻이 뭐지?”
분명 표기된 B와 W는 시간이 갈수록 숫자가 오르고 있었다.
“무언가의 약자 아닐까요?”
“역시 다 알고 있군.”
시운은 실리아를 가만히 바라다보았다.
실리아는 라운드 시작 때와 동일하게 검은슈트 하나만 걸친 채였다.
근데 그녀의 입에서는 입김이 흐르지도 않았고, 추위를 타지 않는다는 듯 얼굴조차 붉어지지 않은 상태다. 심장도 뛰고 있지 않다. 가녀린 몸으로 고블린들을 상대했을 것이면서도 슈트가 찢어진 흔적조차 별로 없다.
시운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시운이 잠시 뜸을 들이자 소녀의 얼굴에 살짝 화색이 돌았다.
“설마 거기까지?”
그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물음을 해왔다.
그 말에 확신이 선 시운은 곧바로 도검을 실리아의 하얀 목에 겨누었다.
그리고 말했다.
“네가 바로 그 두 신 중에 한 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