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만 3회차-221화 (221/278)

제 221화

그녀의 위기

이시운은 다시 본부장실로 향했다.

“역시 오래 고민하지 않는 건 여전하네?”

천세정이 씩 웃으며 시운을 다시 반겼다.

“계약서는?”

“이미 준비해뒀지.”

세정은 서랍을 열고 서류를 꺼내 시운에게 내밀었다.

“너 역시 꼼꼼한 건 여전해.”

“내 성격이 어디 가겠어? 천천히 읽어봐.”

“다 읽었어.”

“…벌써?”

시운이 서류 몇 장을 훑는 시간은 고작 2초였다.

단숨이라고 하기도 너무 빠르게 읽어가서 정말 다 체크해본 거 맞냐는 눈빛을 세정이 보낸다.

“네 번 훑어봤어. 독소 조항은 없네.”

“2초만에 저 서류를 네 번이나 반복했다 이 말이지? 그러니까?”

시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독소 조항도 없고 계약서를 훑어보니 나를 배려해준 게 눈에 보이네. 조항 중에 천재지변이나 내게 개인적인 사정이 있을 경우 상호간의 합의로 일을 쉴 수도 있다고 명시되어 있고. 위약금도 없네.”

“…정말 다 읽은게 맞구나.”

“너한테 내가 구라를 치겠어?”

세정은 시운을 놀라운 눈으로 쳐다봤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그때 서점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그 말이 진짜였구나.’

서점에서 책을 쌓아두고 속독으로 읽었던 그 날이 엊그제만 같다.

그때 시운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천세정의 회사에 전속 광고모델로 계약하는 것에 대해서.

‘시간이 없는 나로서는 빡빡한 일정을 잡지도 않고 가끔 날을 잡고 촬영만 좀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KS기업에서 이시운에 대해 전적으로 스폰을 해주겠다는 계약서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전력인 이시운에게는 국가로서 혜택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 혜택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

정부에서 이시운에게만 과한 혜택을 주면 다른 헌터들이 평등성을 주장하며 반발할 것이라 정부도 무한한 지원을 해주지 못하는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헌터 일을 하는 데에 드는 모든 비용을 KS기업이 대준가는 게 매력적이다.’

이시운은 앞으로 움직일 날이 많을 것이다. 그에 따른 경비와 여러 가지 지출은 어마어마 할 것이다.

그 밖에 세금 조절을 위해 KS기업에서 세무사를 붙여줄 것이고,

법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고문변호사로 꾸려진 법무팀을 지원 해준단다.

돈에 걱정이 없는 시운은 혼자서 그 일들을 다 할 수 있었지만,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시간이 소요된다.

그런 일 처리를 모두 기업에서 해준다니.

금 같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내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탄탄한 뒷배경이 존재하면 그만큼 든든할 것이다.

반면 천세정의 대기업에 이시운이 전속으로 광고모델로 채용되면 얻는 이익이 많다.

이미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대기업은 현재 가장 화두에 오른 이시운을 대표 마스크로 세워두면 대기업 가치는 오를 수 밖에 없다.

한 마디로 서로가 윈윈하는 계약.

시운은 계약서에 지장으로 날인을 하는 것을 골똘히 지켜보는 세정이 피식 웃었다.

“왜 웃어?”

“뭔가 우리의 이 상황이 뿌듯해서. 너와 내가 이렇게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그녀의 말에 시운의 감정도 묘해졌다.

1회차와 2회차 인생에서 그녀에게 도움 한 번 주지 못했던 그 찌질했던 이시운은 이제 없다.

“세정아.”

시운이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세정은 가슴 속에서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뭐랄까?

예전에는 죽어도 이 녀석에게 느끼지 못했던 설렌다는 느낌이 이런 느낌일까?

“왜, 왜 그렇게 스윗하게 불러? 설레게.”

“네가 날 일적인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

“아니.”

“근데 왜 묻냐?”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웃음이 터져서 피식 웃었다.

이시운이 봐왔던 천세정은 자신의 사람을 이용할 사람이 아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시운은 서명을 마친 계약서를 세정에게 내밀었다.

세정은 그 계약서에 시운이 빠트린 부분은 없는지 체크 후 서류를 책상에 탁탁 쳐서 정리한 후 개인금고에 넣었다.

“헌터님! 이것으로 저희 기업과 헌터님의 계약은 성사되었습니다.”

“아, 하지마.”

“왜? 부끄럽냐? 이제 넌 어엿한 헌터님이잖아. 그것도 최고의 헌터.”

“아, 하지 말라니까.”

세정은 쑥스러워 하는 시운의 모습을 턱을 괴고 즐겁게 구경했다.

“오늘은 나 일찍 퇴근 해보려고. 같이 밥이나 먹을까?”

“아쉽지만 다음에 먹자. 급하게 해야할 일이 있어.”

“아쉽네…. 역시 세상이 주목하는 헌터님다우시구만?”

“아, 하지 말라니까.”

세정은 아쉬웠지만 헌터로서 바쁠 시운의 의견을 존중하는 듯 했다.

“그럼 같이 로비까지만 나가자.”

세정은 본부장실 정리를 마치고 시운과 함께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천세정은 굳이 VIP용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않고 일반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너 임원이면서 왜 이걸 타?”

“이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 순간에 직원들을 만날 수 있거든. 그러면 직원들이랑 말 한 번 이라도 더 섞으면서 친해질 수 있어. 난 그게 좋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탑승하는 시운은 그런 세정을 뿌듯하게 바라봤다.

‘역시.. 너 답구나.’

이시운은 흙수저 집안이고 천세정은 다이아 수저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둘이 친구가 되고 같은 중학교에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세정의 고집 덕분이었다.

워낙 잘 살면서도 자신은 강남에 살지 않고 강북에 살겠다고 아버지께 아집을 부려 강북에 살았고 남들에게 있는 티를 내지도 않는 데다가 돈으로 남을 무시하는 걸 본적이 없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여직원들이 세정에게 인사를 하고 이시운을 바라봤다.

“수고가 많아요! 맞아요! 내 남자친구예요.”

“지, 진짜요?”

이시운과는 어떤 사이냐는 여직원들의 눈빛에 그렇게 답한 세정은 시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

세정은 시운을 아직 친구로 생각하는 버릇이 남아있었나.

어깨에서 손을 내려 시운의 팔 사이로 팔을 집어넣어 팔짱을 꼈다.

“괜찮겠어?”

시운은 속으로는 뿌듯했지만 스캔들이 나면 혹시나 천세정이 불편하진 않을까 해서 물었다.

“너야말로 괜찮지? 난 자랑스러운데?”

여직원들은 토끼눈으로 세정과 시운을 번갈아 바라본다.

시운이 아는 천세정은 남들의 시선은 신경쓰지 않는다.

자신의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어느 상황이든 자기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녀였다.

그리고 로비에 도착하자.

세정과 팔짱을 끼고 걸어나오는 경호원이 흠짓 놀라며 세정에게 인사를 건넨다.

“본부장님. 고생하셨습니다.”

천세정은 경호원에게 목례를 꾸벅 하며 답했다. 저 경호원은 아까 여직원들을 저지하면서 힐끔 시운을 쳐다본 그 경호원이었다.

로비로 나란히 걸어 밖으로 나온 세정은 시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난 이제 가봐야 돼. 다음에 꼭 밥 먹자. 그땐 내가 산다.”

“시운아.”

사랑스럽게 자신을 주시하는 세정의 눈빛에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

“…요즘 널 보면 볼수록 느껴. 내가 알던 시운이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

“칭찬이야?”

“그럼. 친구가 아닌 내 남자로 보이고 있단 말이지.”

그 모습에 귀여워서 시운은 세정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세정은 그런 시운의 손길을 가만히 느낀다.

살짝 수줍어 하는 것은 덤으로.

* *

‘분명..목을 베었었는데.’

피투성이가 된 반쪽 얼굴을 손으로 감싸쥔 태석은 방금 상황을 떠올렸다.

죽은 줄 알았던 이환에게 뇌격이 터져나와 그 녀석의 검이 움직여 태석의 얼굴에서 쏟아졌으나 가까스로 피해냈지만 자상은 남았다.

역시 번뇌의 검 이환 다웠다.

그때 날아든 신아영의 검을 흘려내고 곧바로 그녀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냈다.

근데.

다시 이환의 뇌격이 쏟아졌고.

신아영은 사라진 뒤였다.

‘희한한 능력을 지닌 모양이군.’

던전의 입구 쪽으로 걸어가면서 그의 뒤로 거대한 존재의 숨결이 흘러나왔다.

[네가 목표물을 놓치는 것은 처음 보는군. 이제 어쩔테냐?]

“이미 대처는 다 해놓은 상태다. 그것보다 아쉽게 됐는데.”

전생에서 그녀를 간살하고 손에 넣었던 간극의 거울은 미래가 바뀐 이 시점에서 꼭 필요했다.

“아쉽게 됐지만 어쩔 수는 없지.”

던전 밖으로 나오자 부평의 시내 광경이 육안으로 들어왔다.

[…그 미래가 바뀌었다는 내용이 뭐냐?]

태석의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질문에 태석이 속으로 되뇌였다.

‘내 전생에서는 없던 엄청난 놈이 곧 나타난다.’

그때 에로스 마스터가 태석에게 다가와 급하게 휴지를 건네왔다.

“헌터님 괜찮으세요?”

“아, 아. 별 거 아니예요. 그보다 신아영 씨는 못 봤나요?”

“못 봤는데요? 다른 헌터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쉽게도….”

태석이 슬프다는 듯한 낯색을 보이자 에로스 마스터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이런…….”

그때 태석에게 또 한 번 음성이 들려왔다.

[방금 그 쥐새끼 년을 찾으러 가야하지 않나?]

‘신기한 능력이 있는 모양이던데? 흥미가 생겨서 일단 놔두려고.’

* *

신아영은 하루에 한 번씩 시간을 휘감는 능력에 감사하며 헌터 감사실로 뛰었다.

그녀가 선사해준 그 능력이 아니였더라면 억울하게 그 던전에서 눈을 감았을 것이다.

그녀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다급한 마음으로 감사실에 도착하자 감사관 두 명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냐는 듯한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급해요! 부평에 들어갔던 모든 헌터들이 살인을 당했어요.”

“예? 살인이요?”

감사관 두 명이 신아영에게 진정하라고 하며 어깨를 두드려주고 앉았다.

“살인이라니요? 게이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분하게 얘기해보세요.”

신아영은 던전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설명했다.

설명을 듣던 그들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믿지 못하겠다는 내색을 비추었다.

아영은 욱하면서 악센트를 높였다.

“박태석이가 모든 헌터들을 죽였다구요! 이건 명백한 계획살인이라고요! 빨리 경찰에 신고를 하고 헌터처리반을 투입시켜야 해요!”

혹여나 박태석이 도주할까 우려가 됐다. 그러나 감사관 둘은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했다.

“박태석 헌터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예요.”

“혹시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 아닌가요?”

감사관 둘이 아주 속 뒤집어지는 말을 했다. 그 둘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 마냥 박태석을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그 악질 범죄자놈을 놓치고 말 거라고!!”

“흠….”

감사관 한 명이 박태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와 전화를 마친 감사관은 오히려 아영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박태석님에게 설명 다 들었어요.”

“무슨 설명을 들어요? 지금 나랑 장난해요?”

“……던전의 보스에게 동료 헌터분들이 죽은 것은 안타깝게 생각해요. 박태석 헌터님도 헌터님을 걱정하고 계시더라고요.”

“내, 내가 지금 동료들을 잃어서 충격에 의해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걸로 보여요? 나 멀쩡하다고!”

신아영은 씩씩거리며 감사과장을 찾았다.

감사과장 이영철은 그래도 말이 통하는 사람과 동시에 아영과 친분이 있는 자다.

호출을 받고 이영철이 들어와 상황을 보고 감사관 두 명에게 잠시 빠져있으라고 한 뒤 아영에게 모든 설명을 들었다.

“과장님! 과장님도 제가 거짓말을 하는 걸로 보여요?”

“헌터님. 지금 충격이 클 거 알아요.”

“헌터처리반을 박태석에게 보내서 도주하지 못하게 막고. 게이트가 사라지기 전에 시체들을 들고 나와서 부검을 해서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구요!”

“……이미 게이트는 닫혔답니다.”

“박태석의 얼굴에 있는 검상! 그게 이환이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이예요! 빨리 조사하시라구요!”

“음….”

이상했다.

헌터 간살사건이라면 감사실은 뒤집히고 만다.

본래라면 당장 감사관들이 그 놈을 재판장의 심판대에 올리려고 부단히 움직여야 하는데 그들은 의지가 없어보였고. 오히려 아영의 말을 듣지도 않는 것 같았다.

뭔가 너무도 이상했다.

“일단 진정제 좀 드릴까요? 병원이라도 좀 가보세요.”

“병원은 무슨! 당신들 지금 이 따위로 하는 거 공무집행 안하고 방관하는 거야. 나중에 문제 되면 그때도 후회하지마.”

아영은 씩씩거리며 나와서 협회 에 아는 지인들에게 이 일을 설명했으나 모두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곧바로 아영은 경찰서로 향했다.

“박태석님이 그럴 리가 없는데.”

“뭐라고요?”

“헌터님. 지금 많이 혼란스러워 보이시는데 괜찮으세요?”

“아니, 지금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구요! 당신 미쳤어? 당장 수사 안 할거야? 형사들 출동 안 시켜?”

경관들은 아영을 멀끔멀끔 바라보며 오히려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다.

신아영은 안 되겠다 싶어서 곧바로 경찰서를 빠져나와 사신 길드원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아영 씨. 그게 말이 돼? 박태석이 그런 사람일 리가 없잖아?”

“누나가 하는 말은 믿을 수가 없어. 그리고... 우리 길드의 머리가 없어졌단 건 진짜야?”

모두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마치 박태석이라는 종교에 빠져 맹신하는 사이비 신도들처럼.

“끊어, 씨발!”

당장에 핸드폰을 아스팔트 바닥에 내던지고 싶었다.

그때 걸려온 전화 한통.

감사과장 이영철이었다.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이제야 제 말의 심각성을 파악하셨나요?”

-헌터님. 직원들을 시켜 헌터님을 좀 알아봤는데 얼마 전부터 정신과에 다니시면서 약을 복용 중인 기록이 있더라고요?

“뭐, 뭐라고요? 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정신과에 가본 적이 없다고!”

-공문을 보내 진료기록서를 떼 보니 정신분열 증상이 있을 때 먹는 약을 복용중인 걸로 나왔어요. 헌터님……. 정신과에 다니는 게 창피한 게 아니예요. 마음은 잘 알겠는데.

더 듣지도 않고 끊어버렸다.

아영은 일이 크게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말을 모두가 믿지 않고 모두가 뭔가에 홀린 바보들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손 발이 떨려 왔고, 공포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넌 제주도에 갈 예정이였는데 상황이 꼬여버렸군.

그때 박태석의 차가운 목소리가 역겹게 들려왔다.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그 모든 것을..’

지금 이 상황에서 신아영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이시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사람 냄새도 나고, 좋은 사람인 데다가 제주도에 갈 것을 예지하고 가지 말라고 해주었던 사람.

박태석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가 그다.

신아영은 폰 연락처를 뒤져 저장된 이시운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제발 받기를 바라면서.

-네, 이시운입니다.

다행히도 그가 전화를 받았다.

“이시운 씨. 지금 당장 할 말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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