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2화
에필로그 完
지구의 북쪽 끝. 북극.
바람의 군왕의 힘을 사용하여 북극으로 이동한 시운은 망자들을 앞에 두고 상의를 벗은 채였다.
숨결조차 얼려버릴 것 같은 영하 36도의 추위에 모두의 입에서 진한 입김이 흘러나온다.
‘마지막 수련의 과정이다.’
디데이까지 이제 남은 시간은 삼일.
전투 감각을 최고조로 이끌어 올리기 위해서 강추위 속에서 상의를 벗어 던진 것이다.
‘추위 속에서 열정을 식히고 냉정을 유지.’
추위로 두개골이 얼얼했지만 심호흡을 찬찬히 이어가며 평정심을 유지한다.
옷이 헐벗겨진 시운의 근육질로 이루어진 몸은 추위로 인해 금세 벌개져 있었다.
호흡을 할 때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시운은 망자들을 통솔하기 위한 연습을 계속해서 거쳤다.
다수와 다수의 전투에서 무엇보다 빛을 발하는 것은.
‘통솔력이지.’
바람의 신호를 통해 몇십 만 망자들에게 지시를 하고 빠르게 진형을 바꾸는 연습을 반복했다.
처처처척!
바람의 신호를 통해 지시한 대로 망자들은 시운의 지시사항에 따라 진형을 변경하고 이동하고 멈춘다.
북극의 빙하가 시운의 대군이 움직일 때마다 쩌저적 갈라지는 소리를 냈고 저 멀리 먹이를 찾고 있던 북극의 최상위 포식자 북극곰은 시운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본능적으로 큰 몸뚱이를 덩실거리며 자리를 피한다.
‘내가 마력이 다했을 때를 대비하는 연습 또한…….’
시운이 중상을 입었을 때를 가장하는 연습 또한 했다.
“명을 따릅니다!”
힐러계열인 현무가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시운에게 날아와 시운에게 힐을 주고 주위로 타이탄들이 신속히 방패를 치켜들고 시운을 에워싸며 보호한다.
또한 시운이 전투불능 상태로 의식을 잃었을 시.
각 소환수들에게 망자들을 지휘하라고 명했다.
일단.
유민수에게는 지휘권을 넘기지 않았다. 녀석은 너무 단순해서 그저 망자들을 닥돌 시킬 것 같았기에 유민수에게는 게릴라전을 위주로 연습시켰고.
언데드왕은 알아서 언데드들을 리드할 것이다. 타이탄의 군주 아콘도 마찬가지고.
데스나이트와 메두사 그리고 마왕을 죽이고 재림시킨 케이논 등에게 각각 군대를 분할시켜 통솔하게 지휘권을 허용했다.
“물론 내가 전투불능이 될 시에만 해당되는 거야. 알겠지?”
시운의 말에 셋이 고개를 끄덕인다. 드래곤 보이쉬는 시운의 기동수단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들이 만족스럽다.
근데.
‘그렇다면 얘네들은 어쩐다?’
검은매와 카이칸을 바라보며 어찌할지 잠시 고민을 했다.
카이칸은 철갑같은 피부와 육중한 몸으로 최전방 탱커 역할에 유용하지만 기동수단이 되기도 한다.
검은매 또한 마찬가지다.
카이칸은 최전방에 투입시키고.
검은매는 각개전투용으로 다룬다면?
고민하던 그때였다.
“주군! 제가 이 친구를 다루고 싶습니다.”
케이논이 검은매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음….”
케이논은 마군을 지휘했던 경험이 있다. 게다가 전투능력 또한 망자들 중 최상위권에 속하니까 비행이 가능한 검은매는 녀석의 전투력에 기동성까지 더해줄 것이다.
“좋아. 그렇다면…….”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케이논의 얼굴에 화색이 감도려던 그때 가면기사가 처벅처벅 걸어나와 케이논 앞에 서서 케이논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을 케이논 또한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았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가면기사도 비행능력을 지닌 검은매가 탐났던 것이다.
그때 케이논의 검집에서 검이 뽑히는 검명이 들려왔다.
“뭘 쳐다보는가?”
“난 일생을 말이라는 것만 타왔다. 그래서 이건 내가 가져야겠다.”
서로를 조용히 노려보는 가면기사와 케이논의 기싸움에 시운은 흥미를 느꼈다.
‘오호 이것봐라?’
케이논은 드래곤 코어가 박힌 검날의 끝을 가면기사에게 겨누며 살기를 뿜어내며 물었다.
“보아하니 너도 검을 다루는 자군. 그렇다면 대련을 통해 이기는 자가 가지는 것이 어떻겠느냐?”
“가소롭구나. 난 검으로 흥했던 자고 내 손에 검이 있는 이상 져본 적이 없었다.”
시운은 가면기사가 뱉어낸 말들이 흥미롭게 들려왔다. 가면기사에게서 밀도가 농후한 기운이 느껴진다.
“주군! 이 자와 검으로 대련을 펼치는 것을 허락해주소서!”
케이논이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시운은 가면기사를 슬쩍 바라봤다.
“길게 끌지 않을 생각입니다.”
가면기사는 여유롭게 답했다. 케이논은 그런 가면기사를 노려보며 당장에 목을 후려칠 눈빛이었다.
저 둘은 소환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전력이다. 망자들 중 누가 가장 강한 녀석인지가 궁금해졌다.
“좋다. 이긴 녀석에게 검은매를 허락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 바로 멈춰야 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케이논의 눈빛이 번뜩였다. 케이논은 검을 조준한 채 가면기사 주위를 빙빙돌며 탐색을 하는 듯 했다.
반면 가면기사는 검을 뽑지도 않고 가만히 바라볼 뿐이다.
묘하게 흐르던 정적을 깬 것은 번개같이 거리를 좁히고 파고드는 케이논의 검명이었다.
케이논은 간결하고 깔끔하게 가면기사의 목을 베어냈다.
순간 시운의 고개가 위로 들려졌다. 허공으로 떠오른 것은 케이논의 손이 붙어있는 검이었다.
손이 잘린 채 피를 철철 흘리는 케이논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낯빛이었다.
“그만. 그만해!”
“주군..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시운의 말에 케이논은 아쉽다는 듯 의견을 표출했으나 시운은 거절했다. 뒤이어 현무가 케이논에게 다가와 힐을 해준다.
‘엄청난데?’
시운의 놀란 눈이 가면기사에게 향했다.
분명 케이논의 일격이 가면기사에게 쏟아졌던 그때.
가면기사는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들고 뱀처럼 유연하게 검을 휘둘러 케이논의 손을 깔끔하게 베어냈다.
그 시간은 고작 1초 남짓했을까.
저런 검술을 가지고 있다니.
‘압도적으로 제일 강한 놈이군.’
박태석을 재림시킨 소환수다웠다.
그때 가면기사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자세히 보니 케이논의 검격으로 가면이 잘려 떨어졌고 녀석은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지 않는 듯 했다.
녀석은 가면이 벗겨지면 안 된다고 했었는데.
“괜찮으니까 고개를 들어.”
시운의 말에 머뭇거린다.
“너의 얼굴이 어떠하든 넌 내 소중한 동료란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내게 얼굴을 보여라.”
그 말에 가면기사는 결국 결심했는지 머뭇거림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려 얼굴을 내비췄다.
그의 장발의 머리가 한 번 헐렁인다.
“주군의 명이니 받들겠소.”
가면기사의 진짜 얼굴을 본 순간 시운은 뇌리에 번개가 친 듯한 섬뜩함을 느꼈다.
“당신은…….”
시운의 두 눈동자가 격히 흔들리는 것을 가면기사는 가만히 바라봤다.
“고려의 무사 척준경?”
“소인 척준경. 이제야 주군에게 호를 알리는 바입니다.”
콰앙!
검신을 빙하 속에 꽂은 채 그가 목례를 해왔다.
이럴 수가!
현계에서는 척준경의 얼굴이 알려져 있진 않지만, 이계의 대도서관에서는 현계 제일의 검술을 가진 자라며 그의 얼굴이 오래된 문헌에 들어있었다.
분명 저 자는 그 책에 나와있던 그였다.
대체 어째서지?
그때 시운의 뇌리로 놀라운 생각이 스쳐갔다.
설마.
나의 초전생이 검신이였던 것처럼 박태석의 초전생이 저 자였단 말인가?
어떻게해서 이런 상호 작용이 나타난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쩐지 검술이 귀신같더니만.’
시운은 놀라운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부탁하듯이 정중히 말했다.
“그대를 이렇게 뵐 수 있어서 나 또한 영광입니다. 그대의 위대한 힘을 세상을 위해서, 날 위해 써주시길 부탁하는 바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주군.”
존중을 담은 시운의 눈빛이 가면기사의 눈에 멈추자 가면기사는 동공을 들어 그의 눈과 눈을 마주쳤다.
두 시선이 아름답게 만나 닿은 순간은 묘한 정적만 흐를 뿐이었다.
* *
천생길드의 건물 안 회의실에서는 45명의 길드원들의 귀가 시운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시운은 그들에게 지시할 사항을 하나하나 건넸다.
“무엇보다 한명의 인명피해라도 줄여야 돼.”
“…그래서 너희들은 지원이 필요한 곳이 생길 때마다 두 조로 나뉘어서 지원해주길 바라고.”
“시민들이 피신한 대피소에서 항상 대기하며 시민들의 안전부터 위해주길 바란다.”
“……또 우리 부대표 신아영의 지시를 잘 따라주길 바라. 다들 부탁한다.”
“어려운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 배가 고프면 머뭇거리지 말고 배고프다고 말해. 뭐든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줄 테니까. 자! 지루한 내 설명을 길게도 들어줘서 아주 고맙고 이제 질문 받을 시간이다. 질문할 거 있는 사람 질문하도록.”
시운의 말이 끝나자 길드원들의 질문들이 쇄도했다.
시운은 하나하나 그들의 질문에 대답해주며 불안해하는 그들에게 할 수 있다, 믿는다는 응원의 말을 섞어주었다.
아영은 이시운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보통 저런 위치 정도에 길드의 대표라면 사람들은 어려워하는데….’
이상하게 시운은 사람들에게 편안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는 길드원들이 농담을 하면 재치있게 답해주고 길드의 대표로서의 모습보다는 친구, 오빠, 형의 모습에 가까웠다.
시운과 아영은 잠시 건물 밖으로 나왔다.
도로는 차 한 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군인들이 엄격하게 시민들을 통제하며 대피소로 안내하고 있었다.
“에로스와 사신을 포함해 모든 길드들이 우리나라의 각 지역에 전면 배치된 상태래요.”
아영이 말하자 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헌터들의 힘이 절실한 이때 고맙게도 다들 움직여주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 애들 잘 부탁해요.”
시운은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는 아영에게 말했다.
“당연하죠. 우리 길드원들인데.”
“그리고 아영 씨는 보기보다 소심하던데요?”
“네?”
“그때 보낸 톡이 갑자기 생각나서요.”
그 말에 시운은 치아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고 아영은 입술을 삐죽거린다.
“아... 진짜.. 사람 놀리는데 혹시 취미 있어요?”
“가끔은 이런 농담이 긴장을 풀어주곤 하더라고요.”
“지, 진짜 난 대표님한테 사심 같은 거 없어요!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또, 또. 소심하게 군다.”
“안 소심하거든요?”
아영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따지듯이 쏘았다.
시운은 그런 아영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다가 누군가 다가옴에 얼굴에 웃음기를 지운다.
“이시운 헌터님 아니십니까!”
군모를 깊게 눌러쓴 군인이었다.
“시민들 통제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감사합니다! 헌터님. 꼭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경직된 자세의 군인은 군기가 들어간 목소리로 덧붙였다.
“우리나라를 꼭 지켜주십쇼! 군인인 저희들이 큰 힘이 되어드리지 못할 것 같아서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꼭 내 나라만큼은 지켜내겠습니다. 우리나라를 지켜주셔서 저야 말로 감사합니다.”
“충. 성!”
“충성!”
시운을 향해 경례를 해오는 군인에게 시운 또한 머리에 손을 올리고 경례 자세를 취했다.
군인과 시운은 서로를 존중하는 눈빛으로 응시한다.
그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느낌이 든 신아영의 눈에 이시운의 얼굴이 들어왔다.
‘나 왜 이러는 거야?’
쿵쿵!
그녀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머리털 난 이후로 처음으로 남자를 보고 설레이게 된 순간이었다.
“이제 가셔야 합니다.”
양손에 짐을 들고 있던 기사가 천세정에게 말했다.
그 말이 세정에게 냉랭하게 들려왔다.
그때 유민수가 세정의 집으로 찾아왔다.
“형님이 제게 아가씨와 형님 가족 분들을 끝까지 지키라고 하셨어요.”
“시운이가요?”
항상 장난기가 가득했던 유민수의 얼굴이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
세정은 젖힌 머리를 들어 올리고 일어났다.
시운에게 전화를 걸려고 하던 그때 핸드폰 화면이 전환되면서 이시운의 이름이 떠올랐다.
시운의 전화를 받았다.
“왜 말을 안 해?”
시운은 전화를 걸고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치면 안 돼. 나랑 약속한 거 잊지마.”
-세정아. 네게 할 말이 있다.
긴 침묵 속에 힘겹게 운을 뗀 시운의 육성에 세정은 긴장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걸까?
“뭔데? 무슨 일 있어?”
-아마 오래 걸릴거야.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진 모르겠어. 근데 말이야. 이 전쟁이 끝나게 된다면 그때 나랑…… 결혼해줄래?
말을 다 들은 세정은 한동안 침묵했다.
“야!”
-응?
“…전화로 이렇게 프로포즈 하는 남자가 어딨냐?”
세정은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두 눈에 맺힌 이슬같은 눈물은 조용히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사히 돌아와서 그때 다시 프로포즈 해. 그러면 받아줄 테니까.”
뚝.
전화를 마친 세정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창문 밖으로 들어오던 빛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지금 오후 두 시 밖에 안 되지 않았어요?”
오후 두 시인데 창문 밖으로 비치는 광경은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이상한 것을 느낀 유민수가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봤다.
“이, 이럴 수가…….”
민수의 눈이 향하고 있는 하늘은 크기를 가늠할 수 조차 없는 아주 거대한 게이트에 완전히 뒤덮인 채였다.
* *
드디어 디 데이.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는 낮이 찾아오지 않는 어둑한 밤만이 이어졌다.
전 세계의 파란 하늘을 뒤덮은 초대형 게이트는 무려 지구의 두 배나 되는 크기로 관측되었다는 속보가 이어진 것이다.
지상의 광경이 한 눈에 보이는 이 곳은.
서울의 남산 최정상 위.
불어오는 바람을 잔잔하게 느끼며 시운은 고개를 들었다.
상공을 완전히 뒤덮은 게이트가 보인다.
시운은 오로지 감각을 시각에 집중시키며 그 게이트를 응시했다.
번뜩!
그리고 적과 시야를 교환하는 스킬인 ‘교안’을 사용했다.
닫혀있는 게이트를 보며 집중했다.
시야가 저 허공 위로 빨려 들어가면서 게이트 속 어느 마수와의 시야가 교환되었다.
‘....이럴 수가.’
순간 오금부터 뒷목까지 소름이 끼쳐 올라왔다.
마수의 시야로 본 게이트 속은 마치 지구에 서식하는 수십억 마리의 모든 바퀴벌레떼가 모여있는 듯 했다.
천문학적인 수.
시운은 비장하게 눈을 뜨며 데몬 소드를 꽉 쥐었다.
그 뒤로 메두사가 다가와 시운의 어깨에 손을 슬며시 올렸다.
“넌 내가 네 속에서 오래 봐왔는데 넌 군주의 그 근엄함은 없는 녀석이다.”
뒤이어 메두사의 톤이 바뀐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지만 정도 많고 따뜻한 사람이야. 그래서 더 맘에 들어. 우린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
시운이 메두사를 슬쩍 바라봤다.
“메두사. 너도 항상 툴툴거리고 그래도 좋은 녀석이다. 항상 네게 곤란한 일만 시켜서 미안했다.”
“크, 크흠! 괜한 나약한 소리는 집어치워.”
시운의 말에 메두사가 희게 웃더니 헛기침을 하며 부끄러워한다.
그러던 그때.
쿠쿠쿠쿠쿠쿠쿵-!
대지를 뒤흔들들 정도의 굉음의 정체는 문이 열리기 시작하는 게이트였다.
이윽고 밤하늘에서 미친 듯이 눈이 쏟아지듯.
게이트에서 하나둘씩 마수들이 지상을 향해 낙하하고 있었다.
점점 밤하늘을 완전히 뒤덮은 마수들을 보면서 이시운은 목에 핏대를 세워 외쳤다.
“너희들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
시운의 외침에 망자들이 귀를 기울인다.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은 대재앙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너희들에게 말하겠다. 나를 위해. 세상을 위해 힘을 써다오.”
-오오오오오!!!!!
시운의 말에 망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한 함성을 내질렀다.
벽력같은 망자들의 함성이 일대를 뒤덮었을 때.
“언제나 너희들에게 명령만 했던 내가 너희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이다. 가자!!!”
타탓!
시운이 데몬 소드를 쥔 채 절벽 아래 지상으로 쇄도해갔다.
그 뒤로 30만 망자대군들이 일제히 함성을 쏘아 지르며 뒤따랐다.
* *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헌터들은 이 세상에 있어선 안 되는 존재들의 침략에 필사적으로 맞서 싸웠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
우리들이 이루어내고 지켜온 문명을 보존하기 위해.
수십억이라는 수의 존재들이 지상으로 쉴새없이 떨어지며 모든 것을 파괴하려 들었고.
인간들은 저마다 맡은 역할을 해내며 끈끈하게 뭉쳐서 방어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헌터들이 중상을 입으면 힐러들이 치료하고.
수송대원들이 그들을 옮겨서 간호사와 의사들이 치료하고.
멈추지 않고 진군하는 존재들을 상대로 헌터들이 지치면 군인들이 현대식 무기를 들고 몸을 던지며 시간을 벌기도 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연기와 잿더미. 그리고 선혈로 물들어갔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포기하지 않고 싸웠다.
그 선두에 선 이시운은 살아야겠다는 집념보다도 지켜야겠다는 더 큰 집념으로 광적으로 마수들을 학살해갔다.
그리고.
세상에 살고 있던 인간들의 수는 현저히 줄어있었고.
마수들에 의해 점령당한 나라들이 지도에서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그럼에도 생존자들의 투쟁은 계속 됐고.
그렇게 그 전쟁이 1년이라는 시간동안 이어졌을 그 무렵.
이시운은 마지막 남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존재들의 창조주인 카인의 심장을 꺼트렸다.
심장이 꺼져가는 카인의 악에 바친 육성이 들렸다.
[네 놈과 나는 참 질긴 악연이구나.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땐 네 놈을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주마.]
그 말에 시운이 답했다.
“넌 다시 태어나도 내 손에 죽어.”
답변을 끝낸 시운은 폐속에서 역류하는 핏물을 입으로 내뱉으며 아득한 지상으로 고요하게 추락했다.
훗날 이 전쟁은 '2차 천신전쟁'이라고 기록되고 기억되겠지.
그 순간 칠흑같던 하늘에 빛이 희미하게 뻗어나와 지상을 정화 시키듯 비추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스한 느낌과 함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일었다.
그리고 시운의 시야로 강렬한 빛의 섬광이 일면서 모든 것들이 희미해져갔다.
“허억!”
죽은 것인가?
시야가 뒤틀린다. 그러나 흔들리는 시야가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고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익숙한 방안이었다.
“뭐야?”
터벅터벅- 전신 거울로 향했다.
얼굴에 탄력있는 피부와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
그리고 제대하고 얼마 지나지 않음을 알리는 스포츠 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시운아! 밥 먹어야지!”
거실 밖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회귀한 것인가?
시운은 곧바로 포털사이트에 접속해 헌터를 검색했다.
웹소설 몇 개와 애니 하나가 떠오르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는다.
‘헌터 협회를 검색해도 아무것도 나오질 않는다.’
헌터라는 직업은 이제 세상에서 없어진 듯 하다.
뿐만 아니라 이계와 게이트란 것도 사라진 것 같다.
오늘 날짜를 확인해 보니.
시간은 몇 년 전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이틀 후.
시운에게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얀마! 이시운 머하냐? 너 제대하고 누나한테 연락 한 통 없더라?
천세정이다. 역시나.
전생에서와 똑같은 상황이다.
그렇다면 회귀한 게 맞는 건가?
시운은 전생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 서점으로 향했다.
역시나 그곳에서 세정이를 만날 수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나 아름다운 여자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의 얼굴에서 빛이 난다.
“네가 서점엔 어인 일이냐.”
“나? 책 좀 읽으려고 왔지.”
“어이쿠. 우리 시운이가 군대 다녀오더니 유머코드가 좀 남달라졌나 보다?”
시운은 천천히 서점에 있는 책들을 펼쳐보았다.
그리고 빠르게 눈으로 책들을 읽어갔다.
속독이 된다.
또한.
오른 어깨를 통해 팔을 움직이는 그 감각도 여실히 남아있다.
“야. 세정아.”
“왜? 계속 책 읽기 지루하지?”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그 말에 세정이 피식 웃는다.
“그럴까? 뭐 먹지? 갈비가 땡기는데.”
“아니, 갈비 말고 막창 먹으러 가자. 내가 막창이 먹고 싶거든. 막창 잘 하는 곳 아니까 책 내려놓고 나와.”
“어, 어? 그래.”
전생에서처럼 세정에게 끌려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곧 전화가 걸려오겠지.
친척들이 모인 집에서.
역시나 핸드폰이 춤추듯 진동이 울렸으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시운은 서른네 살이 되었다.
-신경외과 교수 이시운.
시운은 의사가 되어있었다.
특히나 어렵다고 알려진 뇌, 척수 ,말초신경의 수술을 다루는 신경외과의 명의로 말이다.
시운은 남들과는 다른 눈과 오른쪽 팔의 감각으로.
뇌질환으로 죽어가던 사람들도 수술로 살려냈다.
“서, 선생님!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께 꼭 수술 받고 싶습니다!”
“이시운 교수님 계세요? 꼭 찾아뵈어야 합니다!”
이시운은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신경외과 교수가 되었다.
그는 환자들을 가족처럼 대해주었고.
한 명의 환자라도 살리기 위해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수술을 감행했다.
[대한민국 최고 신경외과의 이시운. 잠도 자지 않고 매번 수술 감행하는 그의 강철 체력의 비결은?]
저런 오글거리는 기사도 떠오른다.
시운이 의사가 된 이유가 있었다.
남들과는 다른 눈으로 문제가 되는 신경이나 부위를 발견하고 오른팔의 감각으로 메스를 움직여 죽어가는 환자들을 살려내는데 특화된 신체였지만.
몇 회차에 걸쳐 살고 있는 그는 생명의 소중함과 삶의 간절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의사를 택한 것이었다.
이번 생은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가치있는 것을 하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교수님! 오늘은 좀 쉬세요……. 그러다 큰 일 나요.”
간호사의 걱정어린 말에 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긴 해야 돼. 결혼기념일이거든.”
“어후! 그래도 결혼기념일은 챙기시네요. 전 교수님이 기계인 줄 알았어요.”
시운은 가운을 벗고 집으로 향했다.
현관을 열고 들어가자 키우고 있던 푸들 ‘몽몽’이가 반기듯이 꼬리를 흔드며 짖어댄다.
“왔어? 여보. 오늘 저녁 메뉴는 당신이 좋아하는 된장찌개야.”
그리고 천세정이 앞치마를 두른 채 그를 반긴다.
시운은 걸어가서 그녀부터 꼬옥 껴안아주고 손을 씻은 뒤 방안으로 들어갔다.
품에 숨긴 결혼기념일의 선물을 언제 줄까 타이밍을 엿본다.
그리고 거실로 나온다.
거실의 벽에는 세정과 시운이 수트와 드레스를 입고 찍은 결혼사진이 걸려있다.
“당신... 요즘 너무 바쁘게 사는 거 아니야?”
“사람 한 명 더 살리는 보람으로 살아.”
“치. 그게 다냐?”
“아니.. 사실은 우리 세정이와 하루하루 같이 보내는 재미로 살지.”
“칫. 됐네요.”
식사를 마치고 시운은 선물을 건넨다.
“아, 잊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녀는 결혼기념일을 챙기는 시운의 모습을 보며 누구보다 아름답게 웃는다.
그때 세정이는 살짝 불러온 배를 어루만진다.
임신한 지 6개월 째된 그녀의 배는 불러있었지만 그 볼록한 배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보인다.
“나 갑자기 귤이 먹고 싶어... 우리 애기가 먹고 싶나봐.”
“그래? 당장 사올게.”
“...이 밤에 어디서 사오게?”
“기다려.”
시운은 당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걱정은 할 필요 없다.
친구 승훈이가 이번 생에서는 과일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녀석에게 가서 귤 좀 달라고 하면 그만이다.
참.
이번 생에서는 시운이 알고 있던 사람들의 행보가 좀 다르다.
알게 모르게 편법을 써서 그들을 알아본 결과.
박태석은 타고난 신체능력을 앞세워 격투기 선수로 활약하고 있었고.
신아영은 아이돌로 데뷔하여 여배우로 사극에 나오고 있다.
요즘 시간이 나면 그 사극을 재미나게 보는 중이다.
정연희는 사회복지사 생활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강혜령은 이미 양궁 올림픽 메달리스트 3관왕에 달성했고. 이제 후배들을 양성하려고 코치로서 생활하고 있다.
그 밖에 또 누가 있었지?
아! 김태훈.
태훈이는 이번 생에서도 작곡가로 활약하고 있다.
웃기게도 녀석이 몇 달 전에 시운에게 한 말이 있다.
“야. 시운아. 우리 같이 노래나 하나 내보자.”
그 녀석의 물음에 그냥 콜 해버렸다. 나중에 녀석이 작곡한 노래를 불러서 앨범 하나 낼 생각이다.
별 이유는 없고 그냥 살면서 그런 경험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현재 사는 삶이 4회차인지 3회차인지.
그리고 또 죽으면 다시 살아날지는 모른다.
서른네 살이 된 지금.
2회차 인생에서 서른네 살인데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고 죽은 것이 좀 후회가 된다.
서른네 살은 아직 무언가를 시작해도 될 정도로 충분히 젊은 나이란 생각이 이제야 든다.
전생처럼 돈이 엄청나게 많은 건 아니지만 배고프지 않게 기부도 하고 먹고 싶은 것도 먹으며 주머니 걱정 없이 살고 있다.
이걸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승훈이에게 가던 도중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설마.. 그 소설이 있을라나?’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그 제목이 똑똑히 기억이 난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포털사이트에 ‘나 혼자만 3회차’라고 입력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소설이 나온다.
대충 1화부터 10화까지를 속독으로 읽었다.
놀랍게도 그건 이시운의 이야기였다.
‘강춘식... 당신은 대체 정체가 뭐지?’
일미호도 그랬고 아콘도 그랬다.
그의 기운이 느껴지질 않는다고.
그는 어쩌면 무언가의 투영체가 아니었을까?
전생에는 밤공기만 차도 우울해지고 집으로 가고 싶었는데.
여유도 생기고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지금.
코로 느껴지는 차가운 밤공기의 내음조차 달콤하게 느껴지고 있다. 은은하게 길을 비추는 가로수등의 불빛이 아름다워 보이는 건 덤이고 말이다.
시운은 현 인생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