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3화
외전 #1 회상
한겨울의 차가운 밤공기가 시운의 몸을 주무르고 있다.
발끝으로 둥글게 튀어나온 나이키 운동화가 낯설게 보인다.
매일 신은 구두에 적응이 된 탓일까.
오늘은 시운의 휴진.
입김을 후후 불어가며 주차장으로 가서 차에 탄다.
차를 운전하면서 틀어놓은 디엠비에는 이번에 개최한 올림픽의 치열한 승부의 현장이 흘러나오고 있다.
“벌써 올림픽 시즌이야? 참.”
눈썹이 휘날리게 바쁘게 사느라 올림픽이 개최한지도 몰랐다.
급성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의 수술 날짜를 잡고 그들의 두개골을 열고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만 올해 몇 번을 했더라?
셀 수도 없다.
하여튼 모든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치며 환자들을 살려냈다.
그들이 시운에게 고맙다, 감사하다며 벅찬 눈물을 쏟을 때 그들에게 항상 해주던 말은 이거였다.
-죽을 고비를 넘기시면서 많은 것들을 깨달으셨죠? 남은 한 번뿐인 인생 이번을 계기로 더욱 행복하고 원 없이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세요.
의사밥을 먹은 지도 이제 몇 년 인가.
사복이나 잠옷보다도 더 익숙한 것이 하얀 가운이고 주방용 식칼보다 더 편한 것이 수술용 메쓰가 돼버렸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의사로서의 삶에 충분히 만족하며 산다.
그때 신호 대기가 걸렸고 차를 세운 채로 디엠비로 눈을 돌린다.
콰아앙!
그때 격통과 함께 시야가 흔들리면서 핸들로 쏟아질 뻔 한 몸을 안전벨트가 겨우 지탱했다.
하. 뒤에서 누가 들이박았나?
문을 열고 나가니 차에서 쭈뼛거리며 내리는 여성이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
“괘, 괜찮으세요? ...어?”
그녀의 낯빛에 번졌던 당황함은 곧 놀라움으로 번졌다.
“혹시 이시운 선생님 아니세요?”
“이번에는 헌터가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부르네요. 뭔가 낯서네.”
“...네?”
웃기게도 그녀는 정연희였다.
“..그보다 안 다치셨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럴 수도 있죠. 별로 다치진 않은 것 같네요.”
그런 연희의 눈이 뒷범퍼가 파손된 시운의 차로 향한다.
“백 퍼센트 제 과실이예요. 정말 죄송해요. 지금 보험사 부르고 처리해드릴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가셔도 돼요.”
“네? 아니, 그래도….”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거죠, 뭐. 뒷범퍼만 살짝 긁힌게 다 인데요. 그냥 가세요.”
“아니예요. 선생님. 여기 제 명함 드릴게요.”
“됐습니다. 복지사 일하고 계시죠? 앞으로 어렵고 아픈 사람들 많이 도와주세요.”
“저를 아세요?”
시운은 씩 웃으며 연희가 건넨 명함을 거절하고 차에 탔다.
백미러로 정연희가 사슴처럼 눈을 말아 뜨고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선생님. 저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나요?”
시운은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려 방긋 웃어주고서 차를 출발했다.
룸미러로 멀어지는 연희의 모습이 눈에 박혀 들어온다.
‘이렇게 만날 줄이야.’
세상은 좁고 인연은 많다 했던가.
이렇게 만났음에 참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디엠비로 애국가가 흘러나오며 올림픽의 대한민국의 양궁 선수들이 가슴에 손은 얹는 장면에서 영상이 전환되며 해설위원 세 명의 모습이 보인다.
그 중 강혜령이 해설용 헤드셋을 끼고 해설위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우리 금메달리스트 강혜령 해설위원님은 금메달을 따고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남자 해설위원의 질문에 강혜령이 고개를 살짝 떨구며 생각만 해도 기쁘다는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죠. 말해서 뭐해요.”
강혜령이 저렇게 사람냄새나게 웃은 적이 있었나? 처음 본다.
그 모습에 시운도 덩달아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이번 생은 다들 잘 살고 있나 보구나.’
뿌듯했다.
“혹시 강 해설위원님은 코치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가 있을까요?”
“그냥 자라나는 새싹들을 돕고 싶었어요. 그들도 제가 느껴본 그 짜릿한 행복을 느꼈으면 하고요. 제가 요즘 꿈을 자주 꾸거든요. 근데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꿈이었어요. 그거 아세요? 우리는 누군가에게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았거나, 받고 살아간단 거요.”
“역시 우리 강 해설위원님은 미모도 출중하시고 인성도 훌륭하시네요.”
디엠비 속 30대 중반인 나이의 강혜령은 아직 그 미모가 남아있을 때다.
“자, 자 이제 시작합니다!”
혜령이 열정적으로 해설을 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시운은 이어링을 귀에 착용했다.
-여보세요?
“여보.. 난데..”
이거 난감하다. 차 범퍼가 긁혔다는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다.
-뒤에 말이 길어지는 거 보니까 뭔가 하기 힘든 말이 있는거네? 그 말이 외박한단 소리면 지금 전화를 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세정은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딱 잘라 말한다.
하여간 눈치는 귀신같이 빠르다니까.
“운전하다가 그... 범퍼를 좀 해먹었어.”
-.......
침묵.
시운의 관자놀이에서 식은땀이 맺힌다.
-그래……. 뭐. 수리하면 되지.
“미안.”
-너무 늦지 않게 들어와.
“저녁만 먹고 들어갈게.”
전화를 끊은 시운은 한숨을 푹 내쉰다.
이거 집에 가면 바가지 좀 긁히게 생겼다.
차는 비싼 차는 아니고 흔한 국산차다.
솔직히 시운의 형편으로는 1억이 넘는 외제차도 굴릴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왜냐면 굳이 비싼 차를 탈 이유는 없으니까.
행복은 비싼 차를 굴린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뿐이었다.
다만 알뜰한 천세정에게 바가지 좀 긁힐 생각에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 *
그 국밥집에 도착한 시운과 태훈은 서로를 보며 인사보다도 어색함에 웃었다.
“벌써 우리가 서른이 넘었네.”
“그러게 말이다. 시간 참 빨라.”
서른네 살이 되어서 만난 둘의 대화의 분위기는 20대 초반 때 만나 맥주를 기울였을 때와는 달랐다.
“소주나 한 병 시킬까?”
태훈의 유혹에 시운은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을 짓는다.
“소주...?”
“왜? 술 먹고 들어가면 와이프한테 바가지라도 긁힐까봐 고민 중이냐?”
이 새끼 날 딱 아네.
“티 났냐?”
“제수씨한테 꽉 잡혀 사는구나?”
“잡혀 살아도 행복하다.”
그 말에 태훈은 시운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제수씨가 참 다른 여자들과는 다른 것 같아.”
그 말의 뜻을 시운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보통 다른 대기업 임원들이라면 정원이 딸린, 으리으리한 저택에 기사부터 청소와 음식을 해주는 식모 정도는 쓰는 경우가 많은데 세정은 그 모든 것을 혼자 하며 아파트 한 채에 만족하는 여자다.
“너도 결혼해야지?”
“할 때 되면 하고 싶긴 한데….”
“너도 곧 할 거잖아. 열애설 난 거 다 봤다.”
김태훈은 이번 생에 유명한 작곡가 겸 엔터테이먼트 대표의 삶을 살고 있다.
타 연예인과 같이 연예계에서 일을 하다 보니 잘 나가는 여배우와 눈이 맞아버린 것이다.
이 녀석은 이번 생에도 역시나 능력 좋게 산다.
“결혼은 좀 신중하고 싶다. 아직 내 나이는 젊으니까 시간은 있다고 생각해.”
“결혼은 현실이야. 근데 정말 날 사랑해주는 사람과 함께 한다면 그 현실이 진짜 환상까진 아니더라도 행복하다. 이건 먼저 간 선배로서의 충고다.”
태훈이 자연스럽게 소주를 시킨다.
시운과 소주를 기울이며 진솔한 대화 좀 하고 싶단 눈치다.
그때 소주를 가져다주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훤칠한 체형의 남자가 시운을 보고 갸웃한다.
“손님 제 가게에 오셨던 적 있죠?”
“이번이 처음이에요. 뭔가 낯이 익죠?”
“아, 네.. 그래서 여쭤본 거예요.”
그는 고개를 갸웃한다. 시운은 그를 보며 씩 웃었다.
그는 장유석이었다.
이번 생에서 그는 서울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국밥집을 하나 하고 있다.
국밥하면 부산이 딱 떠오르는데.
장유석이 하는 이 국밥집은 부산 맛집에 맛이 뒤떨어지진 않는다.
그 반증으로 주위 테이블을 한가득 메운 손님들이 시끌시끌하게 떠들고 있다.
‘그때 내가 유석이 형에게 국밥 먹였었는데 그게 이렇게 작용했나?’
그때는 장유석이 국밥에 다데기 넣는 것조차 몰랐는데.
홀로 진실을 아는 시운은 속으로 웃었다.
그때 저 멀리서 유석과 똑 닮은 남자가 유석에게 빨리 손짓을 했다.
“형, 형! 2번 테이블에 사이다 왜 안 갖다 드렸어?”
“아.. 내 정신 좀 봐.”
“형 요즘 치매 걸린 거 아니야?”
“말이 씨가 된다. 그런 말은 하지마.”
“맨날 까먹잖아? 남는 시간에 웨이트만 하지 말고 뇌 운동도 하는 게 어때?”
그 말에 유석은 피식 웃으며 2번 테이블에 사이다를 가져다주다가 시운의 뒷통수를 빤히 바라보더니 다시 왔다.
“죄송한데, 정말 제 가게에 오신 적 없으신 거죠?”
“이번이 처음입니다.”
“정말 낯이 익는 것 같아서...”
“저도 뭔가 모르게 반갑네요, 사장님.”
시운은 유석을 보면서 웃었다. 그는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는 듯 했다.
그토록 사랑하던 친동생 종우도 저렇게 유석과 함께 살아 숨쉬고 있지 않은가.
“사장님?”
“네.”
“제가 의사거든요. 가족분들이나 사장님 뇌 쪽에 문제가 있다면 언제든지 절 찾아오세요.”
“아쉽게도 너무 건강합니다.”
유석의 말투는 여전히 군인처럼 딱딱하다.
뒤이어 유석은 사이다를 서비스로 주었다.
딱딱해도 저렇게 잔정이 많은 사람이다.
시운은 그런 유석을 바라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때는 참 마음이 아팠는데.’
그때를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하고 아팠다.
천신전생에서 유석의 그 결말은 시운의 마음을 찢기게 했다.
‘이번 생에서는 동생하고 행복하게 살아. 종종 올 테니깐.’
유석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태훈과 술잔을 부딪히며 맛있는 국밥 안주에 소주를 연신 들이켰다.
* *
소주 한 병 정도를 들이킨 시운의 얼굴은 사과처럼 벌게져 있었다.
“국밥에는 역시 소주가 최고지. 안 그래? 해장도 되고 동시에 술도 빨고.”
국밥 속 고기를 맛있게 우적거리며 말하는 이시운은 태훈에게는 특별한 존재다.
태훈은 이시운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이 녀석은 세상을 구하고 죽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다니.’
이시운은 그 누구보다 필사적으로 마수들과 싸웠고 그로 인해 세상은 원래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문명을 지켜낸 유일한 인간이다.
그런 녀석의 위대한 업적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세상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뭔가 그 사실이 아쉽다.
“태훈아. 나 지금도 젊지만 우리 존나 어릴 때 말이야. 널 좀 질투했었다. 친구가 돼가지고 쪽팔리고 병신같이 그런 감정을 느꼈었어. 지금 고백하는 건데. 난 참 네가 부러웠다. 그땐 내가 왜 그랬나 싶고.”
태훈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나보다 더 사람냄새 나고 대단한 사람이야.”
“친구 사이에 그런 게 어딨냐?”
“실은 할 말이 있다. 시운아.”
“왜 또 무게 잡냐? 무섭게. 뭔데?”
“난 기억한다. 시간이 돌아가기 전까지의 그 모든 것을….”
“뭐?”
시운의 입가에 미소를 지우고 정색했다.
여간 놀랐단 눈치다.
“그동안 모른 척 했던 건 미안하지만 다 이유가 있었어.”
태훈은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떨궜다.
엇나갔던 과거에 대한 수치스러움이 그 사실을 여태 숨기게 한 것이었다.
“네 말투를 보니 넌 내가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단 걸 알고 있었구나.”
시운의 말에 태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국밥집 사장님도 원래 네 동료였잖아. 네가 굳이 국밥을 먹으러 여기까지 오자고 한 것도, 방금 저 사장님과 대화할 때 보였던 그 눈빛만 봐도 알지.”
“믿기가 힘드네. 그렇다면 우리는, 아니… 난 네 번째 인생이 아니라 3회차 인생 그대로를 살고 있는건가?”
“그거야 모르지. 근데 아쉬운 건 네 희생을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야. 그게 좀 씁쓸해.”
그 말에 이시운은 쓰게 웃었다.
그러나 그 쓴 미소는 그것때문이 아닌 다른 것 때문이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보다 그 녀석들이 참 보고 싶네.”
시운이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 눈꺼풀을 닫았다.
태훈 또한 눈을 잠시 감았다.
“그때는 정말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지.”
“네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됐을거야.”
“정말 그때는…….”
그 둘은 지금으로부터 약 십 년 전,
세상에서 가장 잔혹하고 치열했던, 지워진 역사 속 그 전장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 *
마수들이 허공을 뒤덮었던 그 순간.
하늘을 쳐다보기조차 섬뜩했던 바로 그 날이다.
태훈은 시운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카인의 전력과 그의 성격, 정보 등을 정리한 파일을 보낸 후다.
정작 중요한 몇 가지는 알려주지 못했다.
“후..”
담배를 끊었던 태훈은 이 순간만큼은 니코틴이 생각났기에 입에 머금은 담배를 깊게 빨았다.
마음이 복잡하다.
사람에 대한 환멸감과 세상에 대한 분노를 머릿속에서 지워주었던 고마운 친구 이시운을 돕기로 결정을 내린 그때였다.
집 안에 있던 컴퓨터와 책상, 가전제품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섬뜩한 느낌이 들었을 때.
순식간에 창문이 깨져버렸고 그 사이로 무언가가 들려오는 듯 했다.
‘뭐지?’
그가 슬리퍼를 신고 유리조각을 조심히 피해가며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
저 먼 허공을 가득 메운 게이트에서 육성이 기괴하게 들려왔다.
-바람의 군왕이여. 부디 도망치지 말고 나와 아버지의 군단을 두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거라.
그와 함께 하늘을 지워버린 초대형 게이트가 세상을 흔들며 열려갔다.
그렇게 역사 속에 사라져버린 제 2차 천신전쟁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