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6화
외전 #4 변화의 징조
이시운이 소환해낸 언데드 군단이 검은 로브를 휘날리며 장대히 사방을 뒤덮었다.
그 여파로 주위 일대에 있던 마수들의 시선이 언데드 군단과 맞부딪혔다.
순간의 대치와 함께 흐른 정적!
마수들의 눈이 흔들렸다.
그때 언데드왕의 시선이 천마룡에게로 매섭게 꽂힌다.
“주군! 저 놈부터 처리할까요?”
“아니. 일단 뒤에 있는 두 명은 내 동료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주군의 동료라면 반드시 지켜야겠군요.”
“저 괴물은 내가 상대하겠다. 너는 내 동료들을 보호하고 주변 마수들을 소탕하는 데에만 힘 써.”
“명령을 따릅니다.”
처척!
언데드왕이 손을 들어 올려 수신호를 보내자 언데드 군단들이 사방으로 퍼지며 원형으로 신아영과 김태훈을 둘러쌓았다.
마치 검은 물감들이 예술적으로 원을 그리고 번져가듯이.
“그대들은 준비하라.”
그 순간 언데드왕의 기괴하게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온 검은 냉기가 군단들의 몸을 휘감았다.
[언데드왕이 스킬 ‘군단의 흑기’를 사용합니다.]
[언데드왕의 지정된 반경 안에 속해있는 언데드들의 모든 속성 저항력이 50% 상승합니다.]
[언데드들의 집념이 상승합니다.]
그 광경에 신아영과 김태훈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서로 만났다.
“무력하게도 시운 씨한테 또 도움을 받게 됐네요.”
“빨리 회복하고 우리도 도우면 되죠.”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이렇게 도움만 받진 않았을텐데..”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요.”
아영은 자존심보다도 시운을 돕고 싶은 마음이 컸다.
태훈은 시운을 바라봤다.
데빌 소드를 들고 천마룡을 가만히 눈으로 겨냥하고 있는 시운이 묘하게 느껴졌다.
잠시 감은 눈으로 시운이의 예전 모습이 스쳐간다.
지금 이시운과는 너무나도 다른 철부지 같은 녀석의 모습들이.
감은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이시운의 뒷모습은 거대한 산 같았다.
‘그 철부지였던 네가 이제 세상이란 무게를 두 어깨에 짊어진 녀석이 되었구나.’
그때 천지가 울리며 마수들이 쏟아졌고 언데드들 또한 튕겨 나가 마수들과 뒤엉켰다.
푸우우우욱-!
허공으로 마수와 언데드들의 핏물이 도미노처럼 연달아 튀어오른다.
순간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 이시운이 천마룡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나를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인간이 존재할 줄이야.]
항상 자신을 마주한 인간들의 눈에는 공포와 절망만이 담겨있었는데 자신을 주시하는 이시운의 싸늘히 식어있는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이 그저 올곧았다.
호기심이 피어오른 천마룡도 본능적으로 시운에게 다가간다.
* *
태훈은 똑똑히 지켜보았다.
방금 그 혈투를 말이다.
시운의 검과 천마룡의 발톱이 부닥칠 때마다 대지가 울리 듯 지진이 일었고 귀를 막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파공성이 비산했다.
아파트 한 채만한 천마룡의 공격을 막아내고 받아내면서도 시운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차갑게 굳은 그 낯빛은 친구인 태훈마저 오싹하게 했다.
천마룡의 피부를 감싼 가죽은 우주에서 떨어진 유성을 맞아도 생채기 정도에 그칠만큼 단단하다고 알려져 있다.
근데 이시운의 검신의 끝이 천마룡에 닿을 때마다 천마룡의 표정은 점점 구겨졌고 철옹성 같았던 천마룡이 신음성을 내뱉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의 몸에 미친 듯이 상처를 내어갔고.
시운은 얼굴은 피로 번져갔음에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천마룡을 바라봤고. 천마룡은 그런 시운의 눈빛에 처음으로 공포라는 감정을 느끼는 듯 했다.
시운의 손에 쥐어진 검은 기계적으로 쉬지 않고 천마룡의 피부를 찢고, 베어내고 찔러댔고.
천마룡의 꼬리를 잡아 들어올려 지상에 내다박기까지 했다.
그렇게 지금.
두 다리로 서 있는 이시운 머리 위로 천마룡의 뱃속에서 역류한 뜨거운 내장과 핏물들이 쏟아졌다.
가만히 그것들을 다 뒤집어 쓴 채로 천마룡에게 걸어가는 시운을 보며 천마룡은 공포라는 감정을 넘어 천 년을 살아가며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을 말했었다.
[경의롭구나…….]
천마룡은 시운의 검신이 자신의 허물을 뚫고 뱃속 깊숙이 파고들어 오장을 헤집는 감각을 그대로 느끼면서 유언을 남겼다.
[인간이 내 심(心) 기(氣) 체(體)를 한 번에 잠식 시키다니. 바람의 군왕이여.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다….]
핏물을 뒤집어 쓴 상태로 몸이 넘어가, 십자가 형태로 날개를 뻗은 채 쓰러진 천마룡을 감정없이 바라보는 시운의 모습은 악귀처럼 비춰졌다.
시운은 천마룡의 사체를 훑던 그 순간에 천마룡의 사체가 시운에게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고.
시운이 착용한 검은 슈트에 천마룡의 가죽이 생생히 돋아났다.
‘저 천마룡을 흔들림 없이 죽인 것도 모자라 그 기운까지 흡수해버린 거야.’
태훈은 친구에게 처음으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공포를 느꼈던 그 순간.
마수들은 그런 이시운의 모습을 보고 마치 맹수를 만난 사슴이 내는 나약한 소리를 내뱉으며 자취를 감췄다.
처벅. 처벅.
시운이 태훈에게 걸어가자 언데드 군단들은 일제히 길을 터준다.
“다친 곳들은 없나?”
시운이 아영과 태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 너야말로 괜찮은 거 맞아?”
시운은 얼굴에 묻은 피와 내장찌꺼기들을 손으로 벅벅 닦아내면서 슬며시 웃었다.
“그런 얼굴로 웃지 마라. 무서우니까.”
태훈은 시운의 태연함에 허탈함을 느끼며 다가가 시운을 부축했다.
그때 아영이 다가가 시운의 얼굴을 티슈로 닦아주었다.
“..괜찮아요? 안 괜찮죠?”
“멀쩡한데요.”
“안 괜찮으면 안 괜찮다고 말을 해요. 내가 당신 엎고 대피소 수술실이라도 뛰어갈 테니까.”
시운은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아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간 놀란 아영은 눈이 커졌지만 이내 그의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였고 그녀의 두 볼은 빨개졌다.
시운은 이계로 태훈과 아영을 데리고 와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태훈이 너도 이곳에 진입이 가능하네? 원래 내가 힘을 사용해서 이계로 가는 차원을 열면 헌터들만 진입이 가능했는데.”
희한했다. 그 이유가 있는걸까?
태훈과 아영이 주위를 둘러본다.
이곳은 2층 정도로 보이는 조금 큰 집.
인테리어는 뭐 이계의 건축기술로 지어진 집 치고는 깔끔한 편이었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너에게 해줄 말이 있어.”
“뭔데?”
“시운아. 창피한 말이지만…….”
태훈은 아영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시운은 눈치를 채고 아영을 잠시 거실로 내보냈다.
그러자 태훈이 어렵게 말문을 뗐다.
“카인의 사람으로 몇 년을 지내면서 알게 된 사실을 네게 다 말해줬잖아. 근데 정작 중요한 걸 얘기해주지 못했었어.”
“혹시 그 카인이라는 놈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고?”
“그건 알 수 없어. 그곳은 이계도 아니고 현계도 아닌 곳이야. 그 자는 철두철미한 자야. 사람을 신뢰하지 않고 그저 소모하는 용도로 생각해.”
“어디에 있는지만 안다면 당장 쳐들어가서 목을 따버리고 이 전쟁을 끝낼텐데…….”
그게 아쉬웠다.
마수들의 중심인 카인을 죽인다면 현계에 침략한 마수들도 모조리 사라질 것이다.
“한 가지 방법은 있어.”
“방법? 그 놈이 어디에 있는지 추적하는 방법?”
“들어봐. 카인의 곁에는 다섯 기의 지배자가 있다. 카인은 창세기 그 전부터 존재하던 신이었고 지배자들은 그의 주력 추종자들이야.”
듣던 시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다섯 명의 지배자라. 그것들도 신인가?”
“곧 신이 될 존재들이지. 그들은 카인과 계약을 했어. 카인의 진짜 육체를 재림시킬 계약 말이야.”
“계속 얘기해봐.”
“카인은 김유빈이라는 소년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 상태야. 그는 세상 하나를 창조할 만큼의 공력을 가졌지만, 자신의 육체를 재림시키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
“그게 뭔데?”
“바로 천신전쟁 때 바람의 군왕에 의해 육체에 지울 수 없는 표식이들이 새겨졌다고 해.”
“그렇다면 그 표식이 본래의 육체를 부활시키는 것을 금기시키는 거고, 그 표식을 지우는 것과 다섯의 지배자가 관계가 있는건가?”
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배자들은 카인의 목적을 이루게 해주면 그들을 성좌로 만들어주겠다는 것이 계약의 내용이야.”
“그렇다면 그 지배자들을 찾으면 되겠군.”
실시간으로 수많은 지구인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일 분 일 초가 급한 상황.
그때 태훈의 어깨 위로 일그러진 공간이 생겨났다. 태훈은 그 공간 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빼내어 시운에게 건넸다.
“이걸로 그 지배자들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다, 시운아.”
태훈의 손에서 형형색색의 빛을 발산하고 있는 돌을 시운이 건네받았다.
“정확하게는 박태석과 나. 그리고 네가 마지막 이터널 라이프 관문에서 최종적으로 선택된 바람의 군왕은 너야. 너라면 이 돌의 힘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몰라.”
시운은 조용히 그 돌을 건네받았다.
“그 돌은 편린의 돌이야. 지배자들이 카인과 계약할 때 보증으로 자신의 기운들을 담은 돌이지.”
“인감같은 개념인건가? 그럼 이걸 네가 빼내왔다는 거군.”
“그런 셈이지.”
“근데.. 카인은 철두철미한 놈이라면서 그 녀석의 인감과 같은 이 돌을 넌 어떻게 빼내온 거지?”
“....그것까지 설명하자면 길다.”
“난 널 의심하지 않겠다. 태훈아.”
“고맙다.”
태훈의 눈빛은 진심인 듯 했다.
모든 것이 백 퍼센트 이해가 되진 않는다.
허나 당장 해야할 일들을 알고 있다. 그대로 움직이면 될 뿐이다.
시운은 거실로 나와 아영을 불렀다.
“난 당장 현계로 이동할 생각입니다.”
“좀 쉬어야죠. 그러다 쓰러져요.”
아영의 물음에 시운이 고개를 저었다.
“도무지 지치질 않아요. 어쩌면 내 몸은 이미 인간의 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랄까.”
* *
이계 또한 괴수들의 침략으로 안전한 상황이 아니었다.
시운은 현계로 넘어와 태훈과 아영에게 말했다.
“얘네들과 함께 대피소로 가서 헌터들을 도와줘.”
시운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언데드 군단들이 태훈과 아영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람들과요?”
아영은 언데드들의 음침한 눈빛이 영 싫었지만 이내 수긍했다.
“넌 어디로 갈 생각이지?”
태훈이 묻자 시운은 편린의 돌을 꺼내들고 눈을 잠시 감았다.
“희미하지만 하나의 기운이 느껴진다. 이걸 따라서 그 지배자를 족쳐야지. 근데 느껴지는 이 기운, 이거 좀 익숙한 기운이군.”
익숙한 이 기운은 분명 접해본 기운이다. 혹시 아는 인물일지도?
“알겠어. 일단 지금 급한 상황이니까 우린 가볼게.”
마포역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헌터에게 지원이 시급한 상황이다.
“너희들은 내가 말한 지청 위치까지 안전하게 내 동료들을 경호하고. 그곳에 도착하면 내 동료들의 지시에 따라라.”
그 말에 항상 무표정이던 언데드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 언데드왕이 걸어나왔다.
“저희는 주군의 명령 말고는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새끼. 고깝지만 기특하네. 그러면 내가 바람의 신호로 수시로 명령을 내리겠다.”
“그렇다면 따르겠습니다. 주군.”
그제야 언데드 군단들의 얼굴은 평소 그 딱딱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때 신아영이 말했다.
“바보같이 아파도 참지 말고 아플 땐 쉬고 그래요. 죽지 말고 꼭 나랑 다시 만나야 해요. 알겠죠?”
“아영 씨도 꼭 살아남아요. 그럴거라 믿어요. 당신은 강한 여자니까.”
언데드왕이 태훈과 아영으로 스르르 다가왔다.
“이제 그만 가시죠.”
“시운아. 꼭 무사해라. 네게 받은 은혜를 갚을 기회는 줘.”
태훈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그들은 언데드 군단들의 경호를 받으며 마포역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시운은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서 눈을 질끈 감았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다.’
이젠 아무리 움직여도 지치지 않고.
공포라는 감정도 느껴지질 않는다.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갈증조차 느껴지질 않는다.
또한 감지력까지 예민해진 느낌이다.
단순히 강해진 탓일까?
아니면 점점 내 몸이 인간에게서 멀어져가는 것일까?
그때 희미하게 느껴지던 그 기운이 오감으로 느껴지며 시운이 눈을 번쩍 떴다.
“내가 주시하는 곳에서 약 350키로 정도의 거리다. 아까 그 익숙한 기운과는 다른 기운이군.”
그때 바람의 신호로 아콘의 다급한 육성이 맴돌았다.
-주군! 지금 당장 허락해주실 것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