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8화
외전 #6 대악마의 계약
쏴아아아-.
일대에 요란하게 솟았던 해일이 잔잔한 파도로 바뀌며 소리를 냈다.
아콘은 창을 연달아 휘둘러 클레온의 가죽비닐을 찢어냈다.
[…어째서지?]
“뭐가 어째서냔 말이냐.”
금강 투구 속에서 들끓는 아콘의 두 안광은 아까와는 달랐다.
[아까와는 느껴지는 기개가 다르구나. 어째서 그 단 시간만에 그렇게 강해진단 말인가?]
클레온의 손날이 아콘에게로 빗발쳤다.
콰아아앙-!
마족의 가죽도 찢는다고 알려진 마해(魔海)의 지배자이자 대리자 클레온의 손톱이 아콘의 방패에 꽂혔다.
클레온의 두 눈이 커졌다.
[이렇게 단단한 감각은 처음 느껴보는구나. 네가 그 군왕인가?]
“난 타이탄들의 군주다.”
[타이탄?]
타이탄이라면 역사 속에 사라졌던 위대한 종족이 아닌가.
근데 어째서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난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이지?
[내가 섬기는 군주가 군왕이시다.]
콰아악!
아콘이 클레온의 목덜미를 낚아채 조르며 그대로 바다속으로 쑤셔박았다.
바다 속에 박힌 채로도 숨을 쉬듯 그 위로 기포가 솔솔 올라왔다.
더욱 목을 조였다.
[네가 섬기는 군주는 단순히 죽은 자들을 소환하는 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물 속에서 잘도 지껄이네. 역시 인어같이 생긴 년 답구나.”
아콘은 전완근이 부풀어 오르도록 강력하게 클레온의 목을 조였다.
[네 놈의 영혼이 탐났는데……. 날 놀라게 한 대가로 재미있는 사실을 얘기해주지.]
목을 조른 채 반대팔로 창대를 움켜쥐어 그대로 클레온의 왼팔 어깨에 쑤셔박았다.
일렁이는 물결 사이로 클레온의 피가 떠올랐다.
“질긴 년이네.”
[내가 알고 있는 바람의 군왕은 망령을 소환하는 능력을 가진 것을 알고 있다. 허나 역사 속에 사라진지 오래된 인물들의 영혼까지 불러내는 능력은 애초에 없었다.]
“뭐, 어쩌라고? 내 주군을 욕 보이는 말을 입에 담았다간 그 순간 네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고통을 선사해주며 죽여주지.”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느냐?]
“모른…….”
순간 아콘이 멈칫했다.
그 말과 점철되는 이상 현상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군의 기운이 점점 묘해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시운에게 영혼이 점유된 아콘은 시운의 몸속에 있을 때부터 그에게서 조금씩 진해지는 묘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궁금하단 표정이군. 초대 바람의 군왕은 애초에 인간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었는지 아느냐?]
아콘의 손에서 더는 클레온의 감각이 느껴지질 않았다.
어느새 클레온은 잘려나간 왼팔을 잃은 채로 아콘의 50m 앞에 있을 뿐이었다.
‘놀라운 움직임이군. 평범한 마물이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바다를 가르며 클레온에게 다가갔다.
[초대 바람의 군왕은 악마 바실리스크와 계약을 맺었다.]
그 말에 아콘의 움직임이 멎었다.
바실리스크는 지옥을 형성하고, 마계를 최초로 구현해낸 악마였다.
인간을 지켜낸 바람의 군왕이 그 잔혹한 악마와 계약을 했을 리가 없다.
“요물이 개소리를 하며 상황을 빠져나가려고 하는군.”
[믿든 안 믿든 상관 없다. 그러나 계약이 뭘 뜻하는 것 같은가?]
“최초의 선대 바람의 군왕께서 악마의 계약을 맺고 인간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다는 말을 하려는 건가?”
[하나가 빠졌네. 네 주군은 곧 그 계약의 대가를 치르게 될거야. 1대와 2대 바람의 군왕이 그랬었던 것처럼…….]
“닥쳐라!”
주군을 욕보이는 말에 광분한 아콘이 바다 위로 튀어올라 클레온의 머리에 창날을 찍어내렸다.
파아아아앙!
창날이 내려간 자리의 바닷물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마계의 바다를 지배했던 내게 이 정도의 상처를 남기다니. 그렇다면 네가 섬기는 왕은 얼마나 강한 것이지?]
깊게 긁혀 피가 흐르는 안면을 부여잡은 클레온이 말하다가 뭔가를 느꼈는지 뒤돌아 등을 보였다.
[…범도 제 말하면 나타난다더니. 너와 나는 이쯤에서 해두지. 반드시 널 기억하고 갚아주겠다.]
아콘은 클레온을 쫓으려고 했으나 물속에 잠수해서 엄청난 속도로 사라져가는 클레온을 보며 포기했다.
“주, 주군!”
그때 뒤를 돌아보니 이시운이 있었다.
‘주군의 기운이 느껴지질 않았는데.’
누구보다 주군의 기운을 잘 알고 있고 느낄 수 있는 아콘은 의아했다.
이시운은 차원의 포탈을 이용하여 나타나 모래사장에 있는 마물들을 상대하고 있다.
아니.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학살이었다.
검으로 미친 듯이 마물들을 베어가는 이시운의 두 눈빛은 평소에 알던 주군의 눈빛과는 달랐다.
‘뭔가 이상하다.’
그때 아콘은 클레온이 넌지시 건넸던 말이 떠올라 표정이 굳어졌다.
* *
해운대 일대의 마물들을 모조리 소탕한 시운은 에로스 길드원들을 챙겼다.
“감사합니다. 헌터님 덕분에 저희가 살 수 있었습니다.”
부마스터 임지호가 에로스를 대표해 허리를 90도로 꺽어 인사했다.
시운은 사체더미와 차갑게 식어버린 핏물냄새가 진동하는 해운대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대피소로 이동해서 일단 휴식부터 취하세요.”
그때 영호가 눈물 콧물을 흘리며 이시운에게 무릎을 꿇고 이시운의 발목을 붙잡았다.
“제, 제발 우리 마스터 좀 살려주세요. 헌터님은 죽은 사람도 살려내실 수 있잖아요. 제발!”
“그만해. 이미 돌아가셨다.”
지호가 시운의 품에서 영호를 떼어내고 시운을 쳐다봤다.
시운과 두 눈이 마주친 순간 뭔가 모를 공포감에 지호는 절로 시선을 피하고 영호를 달랬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어.”
“이시운 헌터님이라면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다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제발 우리 마스터 좀 살려달라고요!”
“그만 징징대 이 새끼야.”
지호는 영호에게 악을 썼다.
이시운은 죽은 자를 살려내서 자신의 환수로 만드는 능력을 가진 것은 임지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존경하던 박영훈이 시운의 환수로 부활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에로스 길드원들이 차갑게 식어있는 박영훈의 사체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영호야 제발... 우리 마스터의 마지막 명예까지 더럽히지는 말자.”
지호가 영호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때 뒤에서 시운이 다가왔다.
“한 번 시도는 해보죠.”
“아니, 잠깐만요.”
그 말에 지호가 벌떡 일어났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영훈이 형님은 이미 돌아가셨어요. 장례식은 우리가 도맡아서 진행할 생각이니까.”
“살려준다잖아요! 부마스터님은 왜 자꾸 말려요? 지금 이 상황에서 설마 에로스 마스터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그러는 거예요?”
“아니라고 이 새끼야! 좀 모르면 제발 닥치고 있어!”
지호가 영호의 뺨을 때리자 에로스 길드원들이 지호를 노려봤다.
“부마스터님! 왜 마스터님을 살려주신다는데 말리는 거죠? 이상하네요.”
“애 뺨은 왜 때려요?”
“하아.. 씨발... 속 터지게 만드네, 이것들이.”
지호는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영훈이 형은 이미 심장이 멎은 상태라고. 우리 마스터의 마지막 명예까지 더럽히진 말자, 제발.”
화를 억누르고 지호는 그들을 달랬다.
그때 지호의 뒤통수로 뜨거운 살기가 느껴져 뒤를 돌아봤다. 시운과 두 눈이 마주치자 하체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자, 잠깐만요. 우리 마스터를 당신의 하수로 만들 생각이라면 난 당신과 싸울 겁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는데 그럴 뜻은 없으니 비키시죠.”
“안 된다니까!”
지호가 영훈의 사체를 가로막으려 했으나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시운의 몸에 손도 대지 못했다.
“현무. 소생시켜라.”
그때 시운의 뒤로 모습을 드러낸 현무가 시운에게 목례를 하고 영훈의 사체로 다가갔다.
“아, 안 돼.”
지호는 영훈의 사체에 현무가 손을 대는 것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미 박영훈은 이시운의 소환수에게 그 모든 힘을 다 주었고, 출혈도 너무 심한 상태였고 심장도 이미 멎은 상태다.
그 어떤 S급 힐러가 와도 살릴 수 없는 상황이다.
분명 이시운이 소생시킨다는 그 말은 박영훈을 자신의 군단으로 만든다는 말일 것이다.
지호가 한없이 존경하고 따랐던 형이 헌터의 꼭두각시 인형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만 본다는 게 수치스러웠다.
“이시운... 당신이 우리 마스터에게 한 짓을 평생 기억하겠다.”
“됐고 저기나 봐요.”
시운의 말에 영훈에게 고개를 돌린 지호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떠졌다.
“마, 마스터!”
영훈의 눈꺼풀이 분명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이 죽을 때 가장 뒤늦게 죽는 곳이 청각이래요. 그 말 때문에 장례식에서도 죽은 자가 들으라고 더욱 울부짖고 하고 싶은 말을 한다고 합니다. 영훈 씨는 분명 심장이 멎었었지만, 당신들이 하는 말에 귀를 미세히 떨어가며 반응하고 있었어요.”
“아…….”
시운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호가 영훈에게 달려갔다.
“괘, 괜찮아요?”
“……여기 지옥이냐? 천국이냐?”
“마스터!!!”
영호가 뒤따라가 영훈을 끌어안았다.
뒤이어 에로스 길드원들이 영훈이 힘겹게 뱉은 말에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영호야.. 우는 건 좋은데 네 눈물이 내 얼굴에 떨어지잖아. 좀 저리 떨어져서 울어라.”
“씨발. 마스터님이 죽는 줄 알았다고요.”
“새끼.”
지호가 이시운을 바라봤다.
분명 박영훈은 그 어떤 힐러가 와도 살릴 수 없는 소생불가의 상태였다.
A급 헌터로서 수없이 던전을 굴러본 경험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대체 당신의 힘은 어디까지인 거지?’
지호의 동공으로 시운이 무감정한 표정으로 죽은 마물들의 사체를 되살려내는 충격적인 광경이 비춰졌다.
* *
이시운의 군대는 이제 삼십만에서 오십만의 수로 늘어있었다.
시운은 소환수들을 전국에 배치해 게릴라전을 펼치게 하며 마물들을 막아갔다.
그러나 마물의 수는 너무나 많았다. 마물들의 수를 줄여가도 허공에서 떠오른 게이트에서는 마물들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많은 시민들이 죽어갔고 그 순간에 실시간으로 많은 세계인들이 죽어갔다.
대한민국은 국방력을 동원해 전투기와 전차, 잠수함등의 고화력 무기를 동원했지만, 마물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시운은 상공에 떠있는 게이트에 진입하려고 했지만, 결계에 의해 진입에 실패했다.
그렇게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이 흘렀다.
멕시코와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 몇몇 국가는 마물들에 잠식되어 지도에서 사라졌고 이제는 흘러간 역사의 기록에서나 들을 법한 유령의 나라가 되었다.
시운은 쉴새없이 움직였다.
신기하게도, 잠을 자지 않고도 피곤하지 않았고.
먹지 않아도 배고픔과 갈증이 나지 않았으며 세계가 멸망해 가는데도 우울감이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 묘한 감정 외에는 모든 감정이 무감각해졌다.
우연찮게 친구 승훈이가 배고픔에 못 이겨 대피소에서 이탈했다가 마물들에게 처참히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무감각했다.
그러나 마물들을 죽일 때마다 감정이 깨어나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의아했다.
육체와 내면이 예전과는 변화된 느낌이었다.
시운은 편린의 돌로 대리자들의 위치를 파악하려 했지만, 그들의 기운은 느껴졌다가도 없어지고를 반복해서 추적이 쉽지 않았다.
‘이렇게 막아내기만 해서는 답이 없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인류는 종말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때 아콘이 다가왔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이 전쟁보다도 주군입니다.”
“무슨 뜻이지?”
“주군..”
아콘은 한달 전 해운대에서 대리자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지금에서야 털어놨다.
“악마라고?”
“입에 담기도 역할 정도로 잔혹한 악마입니다.”
“내 선대의 바람의 군왕이 그 악마와 계약을 맺었단 말인가?”
“그렇게 들었습니다.”
“바실리스크라...”
바실리스크라는 이름을 이시운의 입으로 내뱉었던 그 순간.
시야가 차갑게 암전되면서, 무감각하게 죽어있던 감정의 세포들이 깨어나는 기분이 들면서 머리털이 솟는 기분이 들었다.
아콘이 시운의 모습을 보고 오싹함에 뒤로 물러났다.
“주, 주군!”
그리고 그때였다.
[대악마의 성명(姓名)을 말함으로서 계약의 조건이 성립됩니다.]
[유예되었던 계약이 강제 이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