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0화
외전 #8 천계의 관찰자
노인이 운을 뗐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듯한 표정이군.”
“당신의 그 말. 단순한 추측이나 찔러보는 것이 아니지.”
“옳지.”
“당신은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고, 아주 그것에 능하고?”
“흐흐흐.”
노인이 비릿하게 웃었다. 마치 자신의 실체를 감싼 껍질을 벗겨내는 태훈이 기특하단 듯이.
“본래 호기심도 아주 왕성해서 우리 인간들을 관찰하려고 이 극한의 상황에 굳이 이곳에 납셔서 관찰을 하고 있는거고?”
“…….”
노인이 태훈을 말없이 신기하게 바라봤다.
“그들 중에서 유독 유별나다고 알려져 있지?”
“뭐. 유별나다는 것에는 다 기준이 다른 거니까. 걔네들이랑 내가 좀 안 맞는 것도 있고. 그래서 걔네가 나보고 물러터졌다고 많이 갈구기도 해. 딱 한 놈 빼고. 그 놈이랑은 나 조차도 말 섞기도 힘들거든.”
확실해.
태훈은 느꼈다.
그렇다면.
바루스의 창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이 녀석은 신의를 중요하게 여기고 그들 중에서는 꽤나 선한 놈이라면 놈이니까.’
이 상황에서 실체를 드러내고 기습을 할 개새끼는 아니지.
“이 정도면 힌트는 많이 내준 셈이군. 과연 내가 관찰한 결과가 맞을까?”
“지배자.”
태훈이 담담하게 답하자 노인은 끌끌거리며 웃었다.
“내 추측이 맞는지 볼까? 더 정확하게 나를 추론해봐.”
저 말은 다섯 지배자들 중 하나인 자신을 추론하란 뜻이다.
분명 그 녀석일테지.
“당신은.”
태훈이 말을 하려던 그 순간.
“아. 잠깐. 지금 대답에 좀 신중하는게 좋아. 난 자네도 알다시피 내 흥미를 유발하고 그 흥미에 대한 보상을 쥐어주면 댓가를 주거든. 기회를 주지. 대신 그 기회는 딱 한 번이야.”
“그 말은 내가 당신이 누군지 맞춰내면 내게 보상을 준다는 뜻인가?”
“그렇지. 그러나 기회는 단 한 번이다. 난 두 번은 뭐든 싫거든. 흥미가 식잖아?”
보상을 준다?
그렇다면 이 시국에 필요한 정보를 보상으로 얻을 수도 있다.
태훈은 신중하게 머리를 굴렸다.
람머스처럼 굴리고 또 굴렸다.
‘지배자는 총 다섯. 강하지만 지배자들 중에선 최약체인 마해의 클레온. 그리고 마신 아베크로스. 창공의 스나이퍼 야이르.’
이 셋은 분명 아니다.
이 노인은 분명 그 녀석일테지만.
하나 걸리는 것이 있다.
‘나머지 한 명의 지배자는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성명도 모른다.’
카인을 대공이라 부르며 따르는 자들 중 하나였던 태훈조차 그의 존재를 몰랐다.
하나 들은 것이 있다면 군단을 새로운 형태로 창조해내는 능력이 있다는 것.
그렇다면 확률은 50%
그 창조자가 아니라면, 그 녀석이겠지.
‘그 창조자 일 수도 있지만, 그놈보다는 그 녀석에 가깝다.’
노인은 태훈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답은?”
“천계의 관찰자.”
“........”
노인은 말이 없었다.
태훈은 노인의 표정을 뜯어봤다.
인간이 아닌 그의 표정으로 감정을 읽을 수가 없다.
‘아니었나? 그렇다면 그 창조자였다는 말인가.’
그때 노인의 입꼬리가 움직이며 올라갔다.
“정답.”
“역시 당신이었군.”
태훈이 알고 있기로 천계의 관찰자는 신의를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자신이 뱉은 말이나 약속은 지킨다고 알고 있다.
“보상이 뭔지 궁금하다는 표정이군.”
“딱히 당신에게 뭔가를 바라고 도와준 것은 아니었어.”
“그건 나도 알아. 그래서 흥미를 느낀거고 이렇게 기회도 준거지.”
어둠이 내려앉은 터널에 잠시 삭막한 정적이 흘러갔다.
그때 노인의 입이 열렸다.
“세 가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주겠다.”
“정보를 세 개 주겠다는 말이군.”
“단. 내가 아는 한에서. 다만 카인이 어디에 위치해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것 외에는 꽤나 유익한 정보를 줄 수 있지.”
가장 궁금한 것이 그것이었는데.
그것은 이 노인도 모른다고 한다.
마물들이 세상에 내려앉은 이 상황에 궁금한 것도 많고 이해가 가질 않는 것도 많다.
태훈은 눈을 감고 떠올렸다.
‘이 자는 인간의 애틋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자다.’
편린의 돌을 만지며 느꼈던 그 기운들 중에 섞여 있던 이 노인의 기운을 떠올리며.
‘호기심이 강한 자라고 했지. 한 번 해볼까.’
유용한 정보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만약 이 천계의 관찰자를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아무것도 묻지 않겠다.”
“..왜지?”
표정이 없던 노인의 낯빛이 신기하게 뒤틀렸다.
“난 당신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도와준 것이 아니니까.”
“그건 나도 안다니까?”
“그 말을 증명하고 싶다. 그래서 묻지 않겠다는 거다.”
“후회하지 않겠나?”
“이미 결정하고 뱉은 말이다.”
그 순간 노인의 눈빛이 오묘하게 빛났다.
“모든 생물을 통틀어 보상을 마다하는 경우는 없다. 심지어 신조차 마찬가지. 근데 위기에 빠진 인간이라면, 그 보상에 더욱 눈이 멀 법도 한데. 자신의 행동을 증명하려고 이런단 말인가?”
태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노인은 감탄하듯 태훈을 바라봤다.
“인간이란 생물은 참으로 특별하군.”
“그렇다면 내가 제안을 하나 하지. 단 이 제안은 당신이 받아드리지 않아도 된다.”
“말해봐라.”
“당신은 천계의 관찰자다. 그래서 만물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을테지. 그러나 인간에 대해서는 감을 못 잡고 있잖아? 당신도 인간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고.”
“그래서?”
“당신에게 무한한 호기심을 발하게 한 인간들이. 인류가 멸하게 생겼다.”
“그 말은 인간의 편에 서라는 말로 들리는데?”
태훈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우리 인간은 무엇보다 감정에 충실한 자들이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도 하고.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실망하면 번뇌하기도 하고. 뒤틀리기도 하고. 계산적으로 행동하기도 하지만, 연민이나 사랑에 대한 감정이란 것으로 그 계산을 버리고 자기 목숨까지 바치기도 한다. 당신이 알고 있는 종족들 중에서 우리 인간과 같은 종족이 있나?”
그 말에 노인은 단숨에 고개를 저었다.
“이런 바보같은 종족은 없지. 대부분이 감정 따위가 아닌 자신을 위하고부터 보지.”
“당신이 신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값진 것을 배울 수도 있다.”
“더욱 값진 것?”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인 사랑을 뜻한다.”
노인은 태훈을 똑바로 쳐다봤다.
태훈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는 눈빛이군.”
노인은 뒤로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이 낯설게 눈에 들어온다.
“그대 말은 일단 알아들었다.”
“잘 생각해봐라.”
“내가 유일하게 흥미를 느끼는 호기심을 느끼게 해준 댓가로 자네의 의견에 상관없이 몇 가지만 말해주지.”
“.......”
“카인은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 목적 중에 하나 때문에 이런 대피소 시설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의 모든 인간을 죽이지 않고 있다.”
“역시는 역시군.”
카인의 두뇌는 인간을 초월한 수준이다. 그런 자가 인간들이 지하에 숨어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근데 왜 이런 대피소나 벙커는 건드리지 않는 것일까.
그런 의문은 매번 느끼고 있던 태훈이었다.
* *
2주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서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전 지역의 대피소에 설치된 대피소의 안내 방송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통령 박문수입니다.”
박문수의 목소리다.
태훈 뿐만 아니라 대피소에 있던 사람들은 눈이 커져서 고개를 들어 천장에 달린 스피커로 시선을 던졌다.
“저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저는 국민들을 대표하는 대통령입니다. 더 살기 좋은 세상. 편안한 세상을 만들라고 저를 이 자리까지 올려주셨는데 전 경제적으로 안정된 대한민국을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대피소 사람들은 말 없이 그의 연설을 듣고 있다.
“그래서 어디로도 도망가지 않고 저를 지지해주신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해 대피소에 남게 되었습니다. 국민들의 힘으로 배불리 먹고 살고 있던 많은 공직자들이 그들만의 벙커로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대피소에서 여러분들과 항상 함께 하겠습니다. 어려우신 것이 있다면 저를 찾아오십시오. 죽을 때까지 국민들과 함께 할 것이고, 살아도 대한민국 국민과 함께 살 것입니다.”
“대, 대통령님….”
“아 눈물 나오려고 하네.”
모여서 듣던 사람들에게서 코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연설을 듣던 태훈도 살며시 웃었다.
‘대통령다운 대통령이군.’
그리고 박문수의 육성은 이어졌다.
“……한 헌터님과 약속했습니다. 제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대한민국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헌터님은 자신의 본분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계십니다. 저 또한 그 본분을 절대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국민 여러분들 대통령인 저도 지금 무섭고, 떨리고 앞으로가 막막합니다. 그러나 잃지 않았습니다. 희망을요. 우리 모두 희망을 잃지 맙시다. 끝까지 말입니다.”
감정이 복받쳤는지 떨리는 박문수의 육성이 잠시 멎었고 대피소에서는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어느 우크라이나의 대통령도 그랬듯이 저 또한 대한민국 국민 중 하나로서 제가 맡은 역할에 끝까지 책임을 다할 것을 선서합니다. 국민 여러분들 모두 다 같이 힘을 냅시다!”
그 연설은 그렇게 끝났고, 의욕을 잃어가던 대피소 사람들의 눈빛에 빛이 실리기 시작했다.
태훈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옆에 있던 신아영에게 물었다.
“핵전쟁에 대해 아인슈타인이 남겼던 말. 그거 알아요?”
“알죠. 자기는 세계 3차대전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끝날지는 모르지만. 인류의 제 4차 세계대전은 나뭇가지와 돌을 들고 싸울 것이라고.”
“그 말이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네요.”
아영과 태훈은 대피소 플랫폼의 통로를 지나 천생길드원들이 숙식하는 지하공간에 도착했다.
“부대표님!”
“태훈 씨도 왔네요?”
천생길드원들이 그들을 반긴다.
태훈과 아영은 인사를 하고 그들과 회의를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있던 태훈의 머릿속으로 천계의 관찰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아직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어.’
여기서 한 가지 바랄 것이 있다면 그가 인간의 편을 위한 선택을 하길.
그때 길드원들을 둘러보던 신아영이 무거운 표정으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시운 씨가 두 달이 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어요. 심지어 그가 거느리던 그 군단들도요.”
그 말에 장유석은 침울하게 고개를 떨궜고, 강혜령은 고개를 저었다.
“그 녀석은 절대로 죽을 녀석이 아니에요. 뭔가 사정이 있거나 다른 나라에 지원을 갔겠죠!”
목의 핏줄을 세우며 말하던 혜령의 말에 정연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아무 일도 없을거야. 단지 이유가 있겠지...”
신아영은 그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반박하지 않으면서도 끝내 고개를 저었다.
“대한민국보다 다른 나라를 더 생각할 사람이 아니란 거 알잖아요? 나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신아영의 표정이 슬퍼보였다.
“그런 재수 없는 말을 하려고 길드원들 다 모은 거예요? 하!”
강혜령이 씩씩거렸다.
그 밖의 길드원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슬픈 표정을 지었다.
“마물들의 수는 줄지 않고 있고, 생존자들의 대피소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에요.”
신아영이 말을 끝맺고서 한동안 입을 닫았다.
정말 상황이 좋지 않다.
실시간으로 헌터를 포함한 생존자들이 하나둘씩 죽어가고 있다.
그때 지켜보던 태훈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운이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