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2화
외전 #10 무신 척준경
태훈은 말을 끝마치고서 신아영을 바라봤다.
그녀의 두 눈빛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듯이 읽혔다.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질 않아.’
시운이가 죽었다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분명 느껴져야 할 녀석의 기운이 조금도 감지되지 않는다.
폐허가 된 도시의 남루한 풍경이 조용히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아영과 태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때 아영이 표정을 풀고 돌아봤다.
“그가 있는 곳이 현계가 아닌 이계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가능성은 있어요.”
희망고문으로 던진 말이 아니라 일리가 있는 말이다.
시운은 이계와 현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다.
“근데….”
태훈은 더 하고 싶은 말을 끊었다.
시운이는 이타심이 강하다.
근데 멸망하고 있는 현계를 두고 이계로 가 있다는 것은 녀석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을 뱉지는 않았다.
신아영의 일말의 희망마저 부숴버리고 싶진 않았으니.
‘무슨 이유가 있겠지. 절대 쉽게 죽을 녀석은 아니야.’
그렇게 결단을 내렸던 그 순간.
번쩍-!
태훈과 아영의 고개가 하늘로 올라갔다.
“방금 번개 친 거 봤죠?”
“번개가 아니었어요. 저 게이트가 일으킨 반응같아요.”
의아했다.
태양을 가린 상공의 거대한 게이트는 근 몇 달간 아무 반응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런데 마치 번개가 치듯이 번쩍이며 지상을 밝혔던 현상이 의아했다.
“높은 곳으로 가서 한 번 봐야겠어요.”
“그런다고 저 먼 게이트 속이 보일까요?”
“어쩌면… 가까울수록 어떤 기운을 느낄지도 몰라요.”
어쩌면 시운이는 저 게이트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태훈과 아영은 주위 건물들 중 가장 높은 빌딩으로 진입해 옥상에 올라갔다.
무려 40층 높이의 빌딩.
근데 옥상에 도착하자마자 난관 위에 서서 상공을 바라보고 있는 마물 두 마리의 뒷모습이 보였다.
태훈은 아영에게 자기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대며 신호를 주고 숨을 죽이고 마물 두 마리에게 창을 든 채 조용히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마물들은 이들을 눈치채지 못하고 석상처럼 굳은 듯 가만히 상공을 바라보고 있다.
점점 마물의 질퍽한 등피부가 가깝게 보인다.
창날을 뻗으려는 순간.
“그분들이 강림하시는 구나.”
“이제 이 세상의 생물들은 모두 파멸되겠지.”
“강한 생물은 재물로 쓰여질 것이고 약한 생물은 그분의 군단이 되겠지.”
푸우욱! 푸욱!
마치 인간처럼 대화를 하던 두 마물의 뒷목을 박히고 떨었다.
마물들이 떨며 뒤를 돌아보려던 순간 태훈이 두 손을 힘껏 뻗어 마물들을 밀었다.
지상으로 추락해 아스팔트 바닥과 맞부딪힌 마물 두 마리의 육신은 중력의 힘을 비참하게 느끼듯 터져 고기조각이 되었다.
“그분들?”
아영은 방금 마물에게서 나온 그 단어를 내뱉었다.
“아마…… 그들은 지배자들을 말하는 듯 합니다.”
콰아아아-!
그때 하늘을 뒤덮은 게이트에서 쏟아진 세 개의 빛이 검은 상공을 뚫고, 어느 지점으로 떨어졌다.
“태훈 씨! 유성 같은 저것들의 떨어진 방향이…….”
“우리나라는 아니네요. 이제 진짜 전쟁의 클라이막스는 시작된 것 같습니다.”
인류의 존망이 종말로 직결되고 있음이 직감되던 순간이었다.
“태훈 씨. 시간이 없어요. 그 창날로 내 목을 찔러요.”
“뭐라고요?”
태훈은 이 상황에서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건지 신아영을 이상하게 바라봤다.
“하아.. 설명할 시간이 없다니까요.”
“당신… 대마 빨았어요?”
“대마라니…. 숙녀에게 못하는 말이 없네. 내가 내 몸을 찌르는 것은 나라도, 무서운데. 어쩔 수 없겠네. 당신도 은근 물러터졌어.”
“자, 잠깐!”
태훈이 아영을 향해 뛰어갔으나 아영은 역수로 쥔 검을 자신의 목에 쑤신 후였다.
울컥. 울컥.
그녀의 벌어진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포기하는게 어딨…”
태훈의 말이 이어지다가 멈췄다.
그리고 순간.
풍경이 바뀌고 태훈의 두 눈으로 난관에 서 있는 마물 두 마리가 보였다.
옆에선 신아영이 검을 든 채 마물에게 조용히 다가가고 있었다.
‘뭐지?’
마치 시간이 되돌아간 것처럼 지금은 아까 그 상황이다.
저게 S급 헌터 신아영의 고유능력인가?
그때 아영은 마물 한 마리의 목을 베고 나머지 한 마리의 마물의 두 팔을 베어버리고, 그 마물을 끌고와 옥상 한 가운데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탔다.
아영의 검술이라면 바로 죽이면 그만인데 대체 왜?
설마?
“아영 씨 설마…… 그걸 상대로 고문하려는 건 아니죠?”
“잠깐 말 시키지 말아봐요!”
아영은 마물의 위에 올라타서 역수로 쥔 검끝을 마물의 얼굴에 그대로 갖다댄 채였다. 그 자세로 인해 그녀의 올라간 티로 허리에 박힌 나비 타투가 보였다.
“너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난 한 번만 말한다. 내가 묻는질문에 모조리 대답하지 않으면, 네 남은 다리를 벨 것이고, 차례대로 너의 두 눈을 하나하나 콕 찔러서 네가 느낄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게 해줄게.”
“……미친 인간이구나.”
“이 꽉 깨물고 닥치고 있어. 더럽게 못생긴 벌레같은 마물아. 이제부터 네게 묻겠다. 넌 입만 벙긋해도 다리 한짝이 잘려나가. 닥치고 내 말 듣고 대답해라.”
그 모습을 본 태훈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생각보다 난감한 여자네.”
* *
공허의 탑. 아가스.
그 탑은 이계에 존재한다.
100층으로 이루어진 아가스의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며, 고대 악마들 중 하나인 대악마의 시체가 봉인되어 있다고 알려졌다.
인간의 본능인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던 이계인들은 이 탑을 공략하고 악마의 힘을 얻으려고 했으나 탑 아가스를 공략한 이들은 단 한 명도 없다고 전해진다.
그 탑의 87층에서 데스나이트는 걱정스런 눈으로 시운을 바라봤다.
시운은 87층의 보스의 잘려나간 머리를 발로 짓눌러서 터뜨리고서 다음층으로 안내할 마법진이 생성되길 기다리는 듯 했다.
“걱정이 되네. 내가 알던 주군이 아니야.”
옆에서 언데드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입 한 번 열지 않는 이시운의 얼굴에는 근 몇 주간 탑을 공략해오며 죽인 괴물들의 피가 한가득 묻어있다.
“주군의 모습이 아니야…….”
데스나이트는 말하며 걱정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들의 주인인 이시운은 이상했다.
마물들을 죽이는 것에 쾌락을 느끼는 것인지, 표정의 미동조차 보이지 않고 악귀처럼 마물들을 학살하면서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되려 마물들을 죽일 때마다 그의 입가 한쪽만이 올라갔다.
그것은 희열을 느끼고 웃는듯한 모습이었다.
항상 사람냄새나던 그에게선 그 어떤 감정도 비춰지지 않았다.
공포심. 애절함. 슬픔. 분노. 기쁨.
그러한 감정은 그에게는 없는 듯 했다.
“말 한마디 하지 않으시네. 아마 그 이후이지?”
언데드왕의 물음에 데스나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운이 걱정되어 그에게 말을 건네보았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또한 어떤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던 말은 그거였다.
“그 말 없는 검사와 레이논에게 그곳으로 가서 지배자들이 보이면 죽이라는 말을 하고 그 이후로는 말이 없으셨지.”
“레이논이 누군지는 알겠는데 말이 없는 검사라면 주군이 유일하게 존칭으로 대한다는 그 가면을 썼던 그를 일컫는가?”
“그렇네.”
“주군은 유독 왜 그에게만은 경어를 사용하는 거지?”
언데드왕은 이시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의아해했다.
“나도 모르겠네. 그보다 걱정이야.”
현계에 있는 인간들을 두고 왜 이런 불길한 탑에 오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데스나이트는 이시운이라면 다 뜻이 있어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말 붙여볼게.”
메두사가 뒤에서 답답하다는 듯 나아갔다.
“그러지 마라. 우리는 주군이 어떤 마음이시던 존중하고 방해되지 않아야 한다.”
“좆까. 궁금하면 물어볼 수도 있는거지. 넌 굳이 그렇게 나이먹은 티를 내야겠냐?”
“머리카락에 뱀이나 두르고 있는게 분위기 파악이란 건 못하는 건가?”
“닥치고 비켜. 이 거대한 자식아.”
메두사는 저지하는 데스나이트의 팔을 뿌리치고 시운에게 다가갔다.
“이봐! 시크한 척 좀 그만하고 대화 좀 하자고!”
메두사의 부름에도 시운은 반응이 없이 그저 마법진이 생성되길 기다릴 뿐이었다.
* *
찬란했던 미국의 도시 워싱턴의 일대는 화염이 집어삼켜 뜨거운 열기만 뿜어내고 있었다.
미국의 최고의 길드 아메리칸탑팀의 수장 유리아는 무력감을 느꼈다.
“마스터. 저 두 놈은 우리가 상대할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 일단 후퇴해요!”
헌터들은 주위에서 몰려오는 마물들을 상대하면서 급격하게 외쳤다.
유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우린 여기서 죽더라도 이곳만큼은 지켜야 한다.”
이곳마저 무너지면 미국의 심장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리아는 갑자기 나타난 두 존재를 바라봤다.
인간의 형태로 하나의 팔을 가지고 있는 인어(人魚)형상의 마물과 중국에서 이시운과 대적했던 거대한 마물.
“크으윽!”
최전방에서 탱커 루이가 든 방패가 찢기며 쓰러졌다.
미국 내에서 수준급 탱커라고 불리던 A급 헌터 루이가 인어마물의 선공 단 한 번에 당한 것이다.
차가운 바닥에 배를 깔고 죽은 루이의 육체는 인어마물의 손에 빨려들어갔다.
“이 놈으로는 만족스럽지가 않아. 여기서 꽤나 강한 냄새가 난다. 빨리 나와라. 어디 숨어있지?”
인어마물은 아메리칸탑팀 헌터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잇따라 헌터들 열 명의 목이 나뭇가지가 부서지듯 몸통을 잃고 떨어졌다.
“마, 마스터!”
유리아는 질끈 눈을 감았다.
어쩌면 남은 전력은 최정예 헌터들이지만 고작 이십 명.
저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으리라.
만약 한국의 헌터 이시운 그가 있었더라면.
그런 애절한 마음이 들었다.
“어차피 도망가려고 해도 못 가. 우린 여기서 다 같이 죽는다.”
“마스터 말이 맞다. 나라를 위해 죽자! 까짓거 그냥 싸워보자고.”
“애초에 죽음이 두려웠으면 헌터는 뭐하러 됐냐? 우리 미국이 이렇게 나약한 나라였냐!”
헌터들은 죽을 것을 알고 마지막 일전을 위한 다짐을 다졌다.
인어마물이 다가오자 헌터들은 다리를 떨면서도 무기를 고쳐쥐고 달려나갔다.
기이이이이이이이-!
그때 상공을 찢는 엄청난 굉음이 들려와 모두가 고개를 들어보니.
날개가 달린 두 괴수가 보였다.
헌터들은 그들을 향해 공격을 하려던 순간!
“공격을 멈춰라!”
유리아가 수신호를 보내며 소리치자 제각기 공격을 멈췄다.
나타난 날개 달린 괴수 하나의 입에서 쏟아진 독거품이 마물들의 육체를 녹였다.
“저건 마물과는 다른 것 같은데요?”
“맞다.”
S급헌터 유리아는 누구보다 좋은 눈을 가지고 있다.
분명 저 드래곤과 날개가 달린 괴수는 헌터들이 아닌 마물들을 향해 으르렁 거리고 있음을 포착하고 멈추란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크아아아아아-!
거대한 드래곤이 포효하자 마물들이 공포심을 느꼈는지 뒤로 흠짓거렸다.
이윽고.
날개를 휘젓던 괴수 두 마리가 땅에 안착하고 그 위에 올라탔던 둘의 존재가 땅에 내려왔다.
그들은 모두 검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이는 검집을 허리춤과 등에 매고 있었다.
유리아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그 말에 마구 헝클어진 장발머리의 남자는.
“내가 섬기는 주군 이외에는 그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는다.”
그의 언어는 분명 영어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떠한 힘에 의해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주군이라면... 그 주군이 혹시 한국의 헌터 이시운을 말하는 겁니까?”
“주군의 호를 다시 한 번만 더 입에 올린다면 자네의 목을 가져가겠다.”
그의 말에 유리아조차 얼어버렸다. 그는 인간으로 보이지만, 평범한 인간이 아닌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자는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자다.’
유리아는 헌터들에게 이시운의 이름을 부르지 말 것을 진중히 지시했다.
“마스터. 그의 군단 중 하나가 맞는 것 같은데 같이 협력해서 싸워보죠.”
“일단 대기. 잠시 지켜본다.”
“저거 봐요! 저 남자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그때 장발의 남자는 인어마물을 향해 처벅처벅 걸어가 검을 뽑고 검을 위로 젖혀들었다.
“너에게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냄새가 난다.”
인어마물은 입맛을 다시며 그를 향해 지느러미를 흔들며 달려갔다.
지느러미를 흔들고 땅을 지나갈 때마다 땅이 갈라졌다.
슈우우우욱-!
장발남자의 검끝이 땅끝으로 내려왔을 때.
인어마물의 목에 붉은선이 그려졌다.
“어……?”
인어마물의 입이 열리는 동시에 인어마물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진 채 힘없이 데구르르 굴러갔다.
그 광경에 헌터들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오 마이 갓...’
‘단 한 번의 검격으로 저 마물을!’
‘검이 보이지조차 않았다...’
유리아와 헌터들이 경악했다.
너무나 경악스러워서 말도 나오질 않았다.
카아아아아-!
장발남자가 또다른 존재에게 다가갔다. 그는 검을 가만히 겨눈 채로 걸어갈 때마다 주위에 있던 마물들이 사지가 찢어진 채 차례대로 바닥에 늘어졌다.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마물들이 죽어간다. 저건 심검(心劍)인가.’
심검이란 인간을 초월한 내공으로 마음으로 상상하여 검을 휘둘러 적을 벤다는 소설 속에나 있을법한 검법이다.
그런데 그 검법과 유사한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하니 유리아는 경의로우면서도 희망이 솟았다.
‘역시... 그 헌터의 군단답다.’
장발남자가 걸음을 멈췄을 때.
그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존재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로 중국에서 이시운과 일전을 펼쳤던 마신 아베크로스였다.
“바람의 군왕도 아닌데 클레온을 일격에 초살 시키다니. 넌 누구냐?”
콰아아앙-!
아베크로스의 물음에 장발남자는 검끝을 땅에 꽂았다. 그 여파로 일대에 거대한 바람이 불었다.
“소인 척준경. 주군의 지시를 엄중히 받들어 마지막 한 놈까지 괴멸하겠소이다.”
그는 다른 곳에 있는 주군에게 말하듯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낮게 독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