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4화
외전 #12 석화가 된 옛적 위인
아파트 한 채만한 마물과 인간이 서로를 향해 검을 두고 대치하고 있다.
두 개의 검날의 끝은 정확하게 서로를 노린 채 미동도 없이 멈춰있다. 공기마저 얼려버릴 이 설원의 냉기조차도 그들에게는 상관없었다.
“…그 낡고 오래된 검 한 자루로 나와 대적하는 것에 경의를 표하는 바다. 그러나 시간이 무한한 이런 전장을 선택한 것은 그대의 큰 실수일 것이다.”
아베크로스의 말에 척준경은 답했다.
“무사는 검을 겨눈 이상 검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게 그대의 신념인가?”
척준경은 답하지 않았다. 그의 두 눈동자는 아베크로스의 허점만을 찾기 위해 떠있을 뿐.
그때 잠시 척준경은 지난 날을 생각했다.
혹한의 추위 속 남극.
주군 이시운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던 날 그가 물었었다.
“스승님!”
“주군. 제게 경어를 사용하지 마십시오. 제 앞에 계신 분은 저의 주군이십니다.”
“배우는 사람이 무언가를 배울 때는 배움의 자세가 있는 법이죠! 스승님이 생각하기에 일류 무사와 삼류 무사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해요?”
“음….”
척준경은 입김을 후후- 뿜으며 대답만을 기다리는 시운에게 말을 이었다.
“삼류 무사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검을 다루고. 이류 무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혹독한 검술 수련을 반복하지만 사사로운 감정을 검에 담아냅니다.”
“오호….”
“검과 몸이 일심동체가 되면 일류 무사라고 표합니다. 그러나 초일류 무사는….”
휘잉-!
척준경이 칼자루를 틀어 검을 뽑은 채로 이시운을 똑바로 쳐다봤다.
“초일류 무사는 검에 자신의 굳건한 신념을 담아냅니다.”
짝짝짝짝-!
그 말에 이시운이 박수를 치며 대단하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역시 멋지십니다!”
“주군……. 무사는 멋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이왕이면 멋있는게 좋잖아요? 내게 있어서 척준경 공은 너무나도 멋진 분입니다.”
“…….”
웬만해선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척준경의 볼이 붉그레졌다.
“부끄러워 하시는 겁니까? 의외로 칭찬에 약하시네!”
“…….”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정이라는 것을 보여준 주군과 나눴던 그 대화들이 머릿속에 지나갔다.
‘주군. 제가 말씀드렸던 그 신념을 담을 때가 지금이옵니다.’
척준경은 칼자루를 쥔 손을 폈다가 다시 단단하게 그어쥐었다.
척준경의 도검이 울 듯이 흔들리며 묘한 소리를 내뿜는다.
‘……주군과 주군이 사는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주군이 내리신 명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하기 위해서 제 충성을 이 검에 담겠습니다.’
순간 안광을 뿜어낸 척준경은 폭발하듯 아베크로스에게로 튀어나갔다.
그리고 둘의 검과 검이 만났고, 그로 인해 세상이 울듯한 굉음이 사방에 퍼져나갔다.
*
서로의 공방이 이어진 지 나흘이 지났다.
‘경지를 넘은 검술이구나.’
아베크로스는 들고 있던 광검을 바라봤다.
마족은 물론이고, 악마의 가죽조차 단숨에 해체시키는 공력이 깃든 이 광검을 상대로 저 자는 볼품없는 도검으로 맞서고 있다.
그러면서도 척준경의 몸에 한 번도 검상을 남기지 못했다.
긴 머리칼이 휘날리면서 인간을 넘어선 속도로 자신의 모든 합을 막아내는 척준경을 보면서 적이지만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대단하구나. 나는 검 하나로 마족들을 지배한 마신이거늘. 그런 내게 인간이 그런 낡은 검으로….”
타아앙-!
마지막 합을 나누고 서로는 거리를 벌렸다.
그렇게 서로가 검끝을 겨누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허점을 찾고 있었다.
불필요한 움직임.
조금이라도 미동치는 마음.
잠시의 방심.
그런 것들을 찾기 위해 손끝조차 움직이지 않고 시선을 교환한 채 서 있었다.
그렇게 세 달이 지났다.
‘도무지 허점이 보이질 않는다.’
저 인간 같지도 않은 귀신에게서 허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척준경은 흔들림 없는 두 눈동자로 표정 없이 아베크로스를 가만히 노려볼 뿐이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3년 동안 둘은 내리는 눈을 맞아가며 움직이지 않았다.
인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인내심에 또 한 번 놀랐다.
‘이 곳은 밤이 없군.’
척준경이 선택한 이 전장에서는 밤이 오질 않았다.
척준경의 등 뒤에 떠있는 태양은 쉬질 않고 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그 빛이 아베크로스의 눈을 간지럽혔다.
아베크로스는 발을 슬쩍 움직이자 그에 바로 반응하듯 척준경의 칼끝이 살짝 움직였다.
“놀랍군. 당신은 인간이면서도 잠조차 없는 모양이군.”
그렇게 또 5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이런 긴 시간동안 서로는 서로의 빈틈을 찾기 위해 미동도 않았다.
그때 척준경의 발끝이 미세하게 움직인 것을 포착한 아베크로스는 순식간에 도약하여 척준경의 머리에 칼을 내리쳤다.
콰아아앙!
연속적으로 검을 맞부딪혔다.
아베크로스는 미칠듯한 집념으로 검을 마구 휘둘렀다.
그렇게 아베크로스는 다양한 패턴으로 광검을 휘두르면서 척준경의 틈을 찾으려 했다.
그렇게 시간이 십 년이 지났다.
‘시간이 지나도 흔들림이 없다. 나의 능력인 [불로]에 의해 난 노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유리할 줄 알았는데….’
십 년 동안 척준경은 단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고 아베크로스의 모든 공격들을 막아냈다.
뿐만이 아니었다.
척준경은 특유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인간의 뇌에서 나올 수 없는 광활한 검술 패턴을 선보였다.
“하지만….”
아베크로스는 자신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검으로 대화하길 십 년동안 척준경은 공격은 하지 않고 검으로 방어만 했다.
‘내 공격이 슬슬 버거울테지. 난 마신이고 넌 인간이니까.’
방어만 해서는 답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아베크로스는 미묘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 순간.
척준경의 등 뒤로 태양빛이 아베크로스의 시야를 순간 막았다.
그때 귀신같이 자신에게 파고든 척준경의 검.
그러나.
‘방어만 하고 있다가 처음으로 선공을 가하는 구나. 허나 빈틈이 보인다.’
아베크로스의 눈에 처음으로 척준경에게서 틈이 보였다.
그 순간!
척준경이 유연하게 왼쪽으로 몸을 비틀었고 척준경이 몸으로 막아내고 있던 태양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아베크로스의 눈에 쏟아졌다.
그 눈부심에 순간 눈을 감은 아베크로스에게로 척준경의 검이 쏟아졌다.
‘대단한 인간이다. 움직이지 않고 태양을 자신의 등 뒤로 있게 하면서, 몇십 년 동안 자신의 몸으로 그 햇빛을 가려냈다가 이런 단 한 번의 선공을 위해 해를 가리던 자신의 몸을 움직여 내 눈의 시야를 막아냈군.’
허나.
아베크로스는 마신이다.
단순히 시야에만 의존하여 싸우는 종족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초월적인 감각이 존재했다.
아베크로스를 향해 채찍처럼 휘어져 내려오는 척준경의 검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동작은 커서 틈이 느껴졌고, 아베크로스는 그 틈을 향해 검을 뻗었다.
타아앙!
철옹성 같던 척준경의 움직임에 처음으로 빈틈이 보였다.
그 틈을 공략하자 척준경의 왼팔에 광검을 박아낼 수 있었고.
척준경의 검은 반토막이 났다.
“……내 승리다!”
그 순간.
척준경의 왼팔에 검을 쑤셔넣은 아베크로스는 당황했다.
“뭐, 뭐지? 이건….”
척준경의 왼팔에 박힌 검날을 뽑을 수가 없었다. 힘을 최대치로 가하여도 뽑히지가 않았다.
당황한 아베크로스에게 척준경의 반토막이 나가버린 검이 쏟아졌다.
푸우욱!
아베크로스의 어깨에 척준경의 칼날이 박혔다.
“내 살을 주고 자네의 뼈를 취한다.”
척준경의 육성이 멎은 그 순간.
어깨에 박혀있던 척준경의 검신이 내려와 아베크로스의 팔을 완전히 그어냈다.
“그어어어…….”
아베크로스의 어깨와 팔에서 핏물과 힘줄이 튀어나온다. 아베크로스는 뽑히지 않는 검자루를 놓아 뒤로 이동하려 하자 척준경의 오른팔이 그의 팔을 잡고 이끌었다.
그로서 검을 뽑지도 못한 채 거동하지 못한 상태가 된 아베크로스의 심장에 척준경의 칼이 박혔다. 그리고 그 칼날은 회전하여 마신의 심장을 헤집었다.
주르륵.
순간 몸을 떨던 아베크로스의 입에서 검묽은 핏물이 눈 덮힌 바닥에 떨어졌다.
“……미끼였던 것인가?”
“이 한 번의 공격을 위해 나는 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네 검을 막아내기만 했다. 자네가 졌다.”
무릎을 꿇은 아베크로스는 척준경을 경의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패배를 인정한다. 정말 인간이라는게 믿기지가 않는구나.”
척준경도 왼팔에 박힌 검을 빼어내며 휘청였다.
피를 흘리던 척준경의 낯빛에 당황이 번졌다.
“그러나…….”
아베크로스는 무릎을 꿇고 힘겹게 척준경을 바라보면서도 희미하게 웃었다.
“내 심장은 내 아버지의 마력이 깃든 것이다. 내 심장을 취한 자는 그대로 몸이 굳어버린다. 같이 가자꾸나.”
마신이라 불리던 마족 아베크로스는 그렇게 눈을 감은 채 들고 있던 고개를 눈이 쌓인 바닥에 떨어뜨렸고 척준경은 검을 그대로 든 채로 몸이 굳어갔다.
마치 석상처럼 다리부터 머리까지 석화가 이뤄진 척준경은 숨을 쉴 수조차 없이 멈춰버렸다.
‘주군…….’
검을 떨어뜨리지 않는 그 상태 그대로 석상이 돼버린 척준경의 눈에서 눈물 한줄기가 고여 툭 떨어졌다.
석화가 된 상태에서 척준경은 다시 한 번 이시운과의 그 날을 떠올렸다.
“스승님! 스승님의 검술 실력으로도 우리나라에서 스승님이 생각보다 유명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어요. 왜인지 알아요?”
“그 까닭이 무엇이옵니까?”
이시운은 말하기 좀 그렇다는 듯 머뭇거리더니 입을 다시 연다.
“아니……. 이 세상에는 드라마라는 게 있는데 그걸로 유명한 위인들이 세상에 알려지는 거거든요? 근데 하필이면 사부님이랑 아주 깊은 절친의 이름이…….”
“말씀하십시오.”
“하필 사부님이랑 진짜 친하고 오랜 세월을 함께했던 절친 이름이 ‘왕자지’잖아요.”
“…그것이 이유가 됩니까?”
“아니……. 생각을 해보세요! 그런 이름이 있는 사람이 사부님이랑 땔래야 땔 수 없는 아주 중요한 비중의 사람이자, 절친인데. 그걸 드라마에 방송국이 방영시킬 수 있겠어요? 그게 이유예요! 이유!”
척준경은 입꼬리를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를 떠올리며 속으로 웃었다.
무신 척준경.
그가 살았던 세상에서 그가 섬겼던 냉혈한 왕은 자신을 나라를 지켜주기 위한 기계 정도로 생각하고 대했다.
그러나 이번에 척준경이 섬겼던 주군 이시운이라는 사람은 자신의 주군답지 않은 이상하지만 묘한 따뜻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주군. 잠시나마 주군을 모실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소인은 이제 이곳에서 영원히 주군의 안녕을 빌겠습니다. 무사히 돌아가 주군을 찾아뵙질 못한 점을 용서해주시길…….’
설원에 끝없이 내리는 눈은 어느새 척준경의 무릎까지 쌓여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