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6화
후일담- 내 와이프는 여신
"어쩌면 그는 이 세상을 만든 사람이고 우리는 그 세상 속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뭐? 이 새끼 많이 취했네.”
“그는 작가잖아. 그러니까 우리는 뭐 그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 일수도 있는 것이고.”
에이, 설마.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이냐?
이 새끼는 지금 취한게 분명하다.
시운은 얼빠진 농담을 들었을 때의 태도로 실없이 웃었으나 태훈의 얼굴은 진지했다.
“아무튼…… 오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밌었다. 시운아.”
“태훈아.”
“뭘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냐? 오글거리게.”
“평생 보자. 우리.”
“……당연한 이야기를 뭐 그렇게 듣기 민망하게 하냐?”
그렇게 이야기의 꽃을 불태우던 둘은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며 아쉽지만.
대리기사를 불렀다.
그러면서 시운의 뇌리로 생각 하나가 스쳐갔다.
‘시간내서 강춘식 작가 한 번 만나볼까?’
* *
다음날.
숙취로 인해서 속이 뒤집힐 것 같아서 눈을 떴다.
내 침대 옆에는 세정이가 없다.
“아……또 그 방에서 자나보네.”
천세정의 버릇이 있다.
조금 서운하거나 빡이 쳤을 때는 안방에서 자지 않고 다른 방에서 잠을 자곤 한다.
사실 어제 태훈이와 대화를 하느라 늦게 귀가해서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차 뒷범퍼도 좀 해먹었고 말이다.
나는 거실로 나와 세정이가 자고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서울 도시의 뷰가 보이는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세정이의 얼굴에 떨어지고 있었다.
자고 있는 천세정의 모습은 남편인 내가 봐도 이질적이다.
연예인과 사는 기분?
아니. 좀 오글거리지만 천사가 있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세정아.”
“…….”
“나 숙취로 속이 끊어질 것 같다. 네가 북어국 좀 끓여주면 내 속이 진짜 너한테 감사하다고 너한테 더 잘하라고 나한테 시킬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함?”
“……….”
“안 자고 있는거 알아. 너 눈썹 흔들리는 거 보여.”
난 시력이 13.0이다. 다 보인다.
세정이는 빡친 모양이다.
“늦게 들어와서 미안해. 정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랑 이야기 좀 하느라고…….”
“아침은 네가 해서 드세요.”
세정이가 살짝 잠긴 목소리로 눈도 뜨지 않고 말한다.
“주말인데 남편 라면이나 먹일 생각이야? 나 네가 음식 안 해주면 라면 끓여먹을건데.”
“드시던가요.”
“아이... 왜 그래. 삐졌어?”
“잘 거니까 나가.”
음.
저럴 때는 빠져줘야 한다.
세정이는 서운하거나 화난게 있으면 그대로 둬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풀리는 타입이다.
방에서 나왔다.
오늘은 주말이다.
세정이가 해주는 부글부글 끓는 북어국을 먹고 싶었는데.
천세정은 모델학과 교수로 지내고 있다.
신기하게도 대기업의 장녀면서 그 기업에서 일하지 않는 것은 정말 이례적인 일이다.
‘어쩌면 그런 세정이의 면 때문에 친구가 될 수 있었겠지.’
천세정은 자기 팔자대로라면 강남에서 살았어야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세정이는 초등학생 때부터 강북에서 어머님, 아버님과 따로 살았다.
그 이유는 듣고 있어서 안다.
그냥 대기업 회장의 딸로 세상에 알려지는 게 부담스럽고.
소소하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
그런 마인드였다.
그래서 세정이는 강북에 따로 집을 구해서 밥을 해주는 식모님과 지내곤 했었다.
나는 쇼파에 앉아서 티비를 틀었다.
배를 벅벅 긁으면서 채널을 돌린다.
그때.
티비 속에 아주 익숙하고 반가운 얼굴이 흘러나온다.
이제는 아이돌 출신의 저력있는 가수로 활약 중인 신아영이 어느 기자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다.
-신아영 씨는 남자하고 스캔들 한 번 나지 않았는데…… 혹시 이상형 뭐 없으세요?
기자의 물음에.
신아영은 동공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한다.
“저…… 신경외과 이시운 의사선생님이 제 이상형이에요.”
-……에? 그 유명하신 의사분이요? 역시 얼굴을 보는 거네요?
“아뇨. 그런게 아니라 이상하게 그분만 보면 묘한 기분이 들어요. 물론 그분의 얼굴을 미디어에서만 접했지만 ………참 뭔가 마음이 따뜻하실 것 같은 선생님이세요. 물론 뭐, 아쉽게도 장가는 가셨지만.. 이상형은 이상형일 뿐이니까요?”
내가 이상형이라고?
난 아직 서른네 살 밖에 안 된 젊고 어리지만 신경외과 쪽에서는 권위도 있고, 특히나 미디어에서 유명세를 좀 탄 인물이긴 하다.
근데 날 이상형으로 꼽다니.
“……기분 묘하네.”
혼잣말을 했는데 뭔가 뒷통수가 뜨거운 느낌이 들어서 뒤를 돌아봤다.
“…좋냐?”
“아, 아. 아니…. 뭐야? 언제 나왔어?”
세정이가 팔짱을 끼고 씩 웃으며 티비 속의 신아영과 나를 번갈아 보고 있다.
세정이의 입은 웃고 있지만 웃고 있는게 아니었다.
여자들이 질투할 때 그걸 숨기는 그 특유의 웃음. 그게 세정이의 입에 걸려있다.
“아저씨. 아이돌이 취향이셨어요?”
“아니. 오해하지마. 채널 돌리다가 우연히 나온거야.”
“그러셨어? 그래도 당신 속 안 좋다고 하길래 북어국이라도 끓여주려고 이렇게 무거운 몸 일으키고 나왔는데 갑자기 부엌으로 가기가 싫어지네?”
세정이는 하얀 나시에 허벅다리 살이 그대로 보이는 짧은 면팬츠를 입고 날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예술이다. 예술.
근데…… 내 와이프라지만 봐도 봐도 몸매부터 얼굴까지 너무나도 예쁘다.
“자기야. 자기는 진짜 남편인 내가 봐도 여신인 것 같아.”
“놀고 있네~ 저 년이 떠드는 거나 마저 봐.”
세정이는 그러면서도 부엌으로 가서 북어국을 끓이기 위해 냉장고를 열고 앞치마를 두른다.
귀엽게 질투하고 삐져도 저렇게 해줄 건 해준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리모컨으로 티비를 껐다.
티비가 꺼짐에 신아영의 얼굴도 순간 사라졌다.
어느새 북어국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온다.
천세정은 앞치마를 두른 채로 퉁명스럽게 날 쳐다본다.
“차 범퍼 해먹은 거……. 심지어는 보험사도 안 부르고 명함도 안 받아온 거.”
“아니…. 난처하게 아침부터 그런 걸 따져...”
“왜 그런거야?”
갑자기 할 말이 없다.
내 차량을 뒤에서 느닷없이 박은 사람이 오랜만에 만난 정연희였는데.
그래서 명함도 받지 않고 보험사도 부르지 않았다는 걸 말하기가 불가능했다.
“한 달간 용돈 금지다.”
“아. 잠깐만. 그건 좀 심하잖아!”
“심한 건 당신이고….”
세정이는 앞치마를 벗고서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들로 눈빛을 슬쩍 던지며 밥이나 먹으란 눈치나 주고 방에 들어갔다.
“하아…….”
내가 의사생활을 하면서 벌어오는 돈은 모두 세정이가 관리하고 있다.
돈 관리는 와이프한테 맡기는 게 현명한 거라지만.
세정이는 돈 관리는 정말 기가 막히게 잘한다.
근데 지금은 좀 후회가 된다.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맡기는게 아니었는데.”
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북어국을 한술 뜨고 숙취로 고생한 간을 달랜다.
그때 방문이 스르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천세정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오늘은 나랑 데이트 해줘야 돼.”
“당연하지.”
“당신이 맨날 바빠서 우리 데이트 다운 데이트 해본 지가 언제인지 생각도 안 나거든!”
“그래서 속상했구나? 오늘 나가서 맛있는 거 먹고 오자.”
“흠! 뭐.. 메뉴는 당신이 생각하고 데이트 코스도 준비해놔. 당신이 잘못한게 꽤나 많으니 그 정도는 뭐 양심껏... 언더스텐?”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설거지도 당신이 하고.”
“...예. 예.”
오늘 해야할 일이 좀 많을 것 같다.
그래도.
이런 게 진짜 행복 아닐까?
내게는 감사하고 행복한 주말이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와 이렇게 알콩달콩 함께 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나의 이 3회차 인생은 지나왔던, 나의 그 어떤 인생보다도 행복하다.
난 그렇게 3회차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