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0화
후일담- 재회
메두사의 낯빛에는 수치심과 회의감이 가득했다.
이미 성인인 자신을 소녀라고 부르는 저 제우스라는 신.
‘모두 신들 때문이야. 그놈의 신들.’
본래 심성이 착했던 메두사는 신의 권력을 앞세운 포세이돈의 유혹을 거절할 수가 없었고.
그렇게 그와 염문을 나누다가 악귀의 모습으로 변해버렸고 그녀의 인생은 악으로 가득차버렸다.
신이라는 존재들은 자신들만의 권능으로 이렇게 욕구를 풀며 인간들을 핍박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때 제우스의 외형은 노파의 모습에서 노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있는 메두사에게 선 채 바지를 내리고 상체를 폈다.
“너를 안고 싶구나. 일단은 천천히 해봐.”
메두사는 바로 앞에 있는 제우스의 물건을 노려봤다.
“약속을 지킬 터이니 그 대가로 네 몸을 내어주어라. 처음이라 익숙하진 않겠지? 일단 그 손으로…….”
“…제우스님.”
“말을 더듬는 것을 보니까 부끄러운 모양이군.”
“지금은 그럴 수 없어요.”
“…왜지?”
주름살이 가득한 제우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일단 약속을 이행해주시면 그때 제 순결을 바치겠습니다.”
“네 순결이 먼저다.”
“그럴 수 없어요. 저는 위……대하신 제우스님께서 넓은 아량으로 힘 없는 인간들의 입장을 먼저 들어주시리라고 믿습니다.”
메두사는 나름대로 입을 털면서도 속으로 끓어오르는 화를 눌렀다.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제우스는 강한 신이지만, 여자를 좋아하여 헤라를 두고 온갖 방법으로 여성들의 육체를 유린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 속에는 남편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여성이 자고 있는 순간 그 남편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그 여성을 범했던 일화까지 포함되어 있다.
제우스는 신들의 신이란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지만 그의 내면은 악질 범죄자 수준을 넘어섰다.
“나를 화나게 할 생각인가?”
제우스의 눈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허약한 노인의 육신에서 강기가 피어나오자 메두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암전된 흑백의 시야에서 이시운 그의 얼굴이 흐릿하게 그려진다.
메두사는 결심했다.
“그렇다면 스틱스강을 걸고 맹세해주세요.”
“좋아. 맹세하도록 하지.”
스틱스강을 걸고 맹세한다면 신은 그 약속을 지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메두사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얕게 깨물었다.
그러자 노파의 고사리 같은 손이 메두사의 머리칼을 잡아채 자신의 하체로 이끌었다.
*
“제우스가 허락을 했다니…….”
하데스는 본인이 말하고도 놀랐다.
이들이 제우스에게서 그 허락을 받아내다니.
‘천신 전쟁의 마침표를 찍은 이시운의 군단들 답구나.’
그 순간 명계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그것을 지켜보던 메두사와 헤라클레스 데스나이트의 시야가 깨져갔다.
하데스는 권능의 힘을 발휘해 차원의 소용돌이가 맴도는 원형포탈을 만들어냈다.
“저건 정말…… 주군이 사는 곳과 연결된 문이 맞습니까.”
데스나이트의 물음에 하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을 이제야 뵐 수 있다니…….”
헤라클레스는 감격스러움에 턱을 떨었다.
“메두사. 근데 아까부터 왜 그러지?”
“아무 일도 아니다.”
“별로 기뻐 보이지가 않는군.”
“그냥 그를 다시 볼 수 있게 돼서 떨려. 그래서 그래.”
“그런가?”
환희가 차오른 헤라클레스의 얼굴에 비해 메두사의 얼굴은 무거웠음에 데스나이트는 갸웃했다.
“근데 저긴 형님이 사는 세상의 어느 지점과 연결된 거지?”
“난 그의 기운을 기억하고 있다. 그 기운이 느껴지는 근처로 이동될 것이다.”
“……고맙다.”
헤라클레스는 하데스에게 목례를 하며 답했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가능하다면 그를 만나게 된다면 이곳으로 한 번만 불러와 주겠나?”
“왕이시여 물론입니다.”
“나도 그가 보고 싶어서 말이야. 난 제우스 때문에 여기서 한발짝도 나갈 수가 없다.”
“잘 알겠습니다.”
그때 헤라클레스는 눈앞으로 떠있는 포탈에서 머뭇거렸다.
분명 주군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이상하다.
데스나이트 또한 그랬다.
“쉽사리 발이 떨어지질 않네…….”
그는 불시에 등장한 우리들을 반겨줄까?
그런 생각들이 그들의 몸을 경직되게 했다.
“가자.”
그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현계로 향하는 문에 몸을 내밀었다.
그걸 지켜보던 하데스도 의아했다.
‘그는 사람이든 뭐든 끊어지지 않는 연대감을 만들어 낸다. 참으로 대단한 인간이야.’
이시운. 그는 지옥의 군주인 그조차도 위험을 무릅쓰고 재회하고 싶게 만드는 인간이었으니까.
일렁이는 차원의 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하데스는 한 가지 걱정이 들었다.
“제우스가 내 힘을 허락하다니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터인데…….”
*
시운은 감고 있던 눈을 번뜩 떴다.
‘...이건?’
옆에선 천세정이 이불을 가슴팍까지 덮고 아기처럼 자고 있었다.
시운은 창가로 다가갔다.
이 익숙하지만 오랜만인 기운.
그 기운이 느껴진다.
분명……… 맞다.
창가의 광경을 내다보는 시운의 시선이 뒷산으로 움직여 머물렀다.
‘저기다...’
너무나 오랜만이지만 착각이 아니다.
확실하다.
해가 슬며시 뜨기 시작한 새벽.
저 먼 산에서 분명히 그 기운이 느껴진다.
심장이 뛴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지금 저 곳으로 가야 한다고.
시운은 급하게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
야심한 새벽.
산길을 뛰어오르는 남자의 몸은 건장하고 탄탄했다.
“하아. 하아.”
그는 부지런하게도 매일 이 코스를 쉬지 않고 뛴다.
그는 빨랐다.
태릉을 나온 레슬링 국가대표 출신인 그는 거친 입김을 뿜으면서도 쉬지 않고 탄력적으로 산을 올랐다.
신선한 새벽공기가 코를 간지럽힌다.
그때.
“…응?”
그런 그가 뒤에서 들려오는 기차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뭐, 뭐야?”
돌아본 그는 놀라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다.
저 밑에서 엄청난 속도로 올라오는 검은 물체를 보고 말이다.
“시, 시발 뭐야! 귀신이야?”
사람이 뛰는 속도가 아니었다.
그는 기겁을 하며 앞으로 뛰었다.
그러나 뒤에서 산길을 밟으며 뛰어대는 무시무시한 소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으헉!”
소스라치며 뒤를 돌아봤을 때. 그의 등 뒤까지 다가온 한 남자가 자신을 추월하고 위로 뛰어갔다.
미친 듯이.
“……사, 사람이었어?”
방금 그 귀신인지 뭔지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산을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가 요새 무리했나?’
달리기라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그였다.
근데 그런 그가 봐도 앞서가는 남자의 속도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아.. 요즘 무리했더니 꼭두새벽부터 헛것도 보이나 보네..”
*
하염없이 눈만 내리는 공허한 설원에서는 해가 뜬채 조용히 눈 내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눈은 땅을 완전히 덮어버렸지만.
눈들은 설원의 한 가운데 굳건히 굳어있는 석상에는 떨어지지 않고 빗겨가며 내렸다.
‘주군이시여…….’
천 년이라는 영겁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 시간동안 석화로 굳어버린 남자 석상은 생각하고 생각했다.
그 긴 시간동안에도 그 남자의 신념은 그대로였다.
‘주군을 보필해야 한다. 그리고 꼭 전할 말씀이 있다.’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만 몸으로 그대로 느끼던 석상.
그 순간 석상은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바로 그 시각이 하데스가 차원의 문을 개방한 순간이었다.
‘주군!’
석상은 천년이 흘러도 그대로 기억하고 있는 그 그리웠던 기운을 느꼈다.
쩌저적.
그리고 석상의 눈가에 조용히 맺혀 말라있던 눈물이 축축해지면서 석상이 균열되기 시작했다.
“주………군.”
그리고 석상의 입에서 언어가 뱉어졌다.
무려 천년이라는 시간만에 말이다.
바로 그때 그 시각 라카스.
눈을 감고 대지에 턱을 기댄 채 잠들어있던 거대한 드래곤의 머리 위에 앉아있던 마왕이 칼등으로 드래곤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크르르으….
작게 포효하며 잠을 깨우지 말라고 반응하는 드래곤. 마왕은 드래곤의 등뒤로 걸어가 앉았다.
“보이쉬. 때가 되었다. 지금 주군을 만나러 가야한다.”
그 순간 드래곤이 눈을 번뜩 뜨고 원대한 목을 일으켰다.
“가자. 주군을 뵈러.”
드래곤은 아까와는 다른 톤으로 포효하며 순식간에 날아올라 라카스 밑 아득한 대지로 비행했다.
*
메두사 일행은 발길로 느껴지는 감촉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봤다.
콧가로 느껴지는 이 그리웠던 공기.
느슨하게 불어오는 쌀쌀한 바람의 감촉을 느끼며 현계에 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얼마만인가…….”
데스나이트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헤라클레스도 가슴 안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기분을 느꼈다.
“형님이 살고 계시는 세상이야!”
헤라클레스는 마치 놀이동산에 온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다시 이곳에 우리가 오게 될 줄이야.”
“꿈만 같아...그 양반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온 지금 이 순간이.”
“……이제 우리가 주군을 찾으러 가야겠지?”
얼마나 바랬는지 모른다.
그 둘 사이에서 메두사는 가슴이 간들머리는 벅찬 기분을 느꼈다.
이곳은 그가 사는 세상.
이제 드디어 그와 재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망막으로 산 밑 도시의 풍경이 비춰졌다.
“저 빽빽한 건물들 중 한곳에 주군이 계시겠지…….”
셋은 하산하기로 하고 산을 내려왔다.
내려가는 길에 검은 후드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뛰어 올라오는 남자의 인영이 보였다.
남자는 거친 숨을 입김으로 뱉어내며 속도를 줄이고 걸어 올라왔다.
메두사 일행은 그 남자를 보며 순간 굳어버렸다.
어두운 시야에서 그들은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시커먼 후드 속 분명 그 남자의 얼굴은 기억 속 이시운의 얼굴이었다.
세월의 풍파가 조금 묻어있는.
감정이 복받쳐 올라 말조차 나오지 않는 그들은 남자를 바라봤다.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 오자 쏟아져내릴 줄 알았던 눈물은 의외로 천천히 안구에 맺히는 기분이다.
그들은 경직된 그 상태로 웃으며 천천히 다가오는 그 남자를 여섯 개의 눈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너희들이었구나.”
미치도록 그리웠던 단 한사람의 육성은 셋을 그에게 뛰쳐가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