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2화
후일담- 신을 향한 칼춤
이카루스 대륙의 하늘이 번쩍이며 굉음을 내뿜었을 때의 그 소리는 단순한 벼락이 아니었음을 이계인들은 직감했다.
“방금 그 현상은 분명….”
“제우스 님이 노하신 거야!”
“이제 이 대륙에 화가 닥칠거야….”
평화롭던 이카루스 대륙에 파멸이 드리우고 있음에 이계의 모든 이들이 공포감에 휩쌓였다.
여러 종족들이 갱생하고 있는 이계에는 강자들이 다양하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는 천계의 신 제우스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하늘이 내린 경고에 이계인들은 질겁하며 숨기 시작했다.
바로 그 시각.
미월 마을에 있던 이시운은 이상함을 느꼈다.
마을 광장에 시끌벅적 붐비던 주민들이 섬뜩한 낯빛으로 모두들 집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집들마다 창문의 블라인드를 치고, 문을 걸어 잠구는 것이 의아했다.
“형님….”
헤라클레스가 시운을 불안하게 바라봤다.
“넌 알고 있지? 이게 무슨 일이지?”
헤라클레스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다.
“주군!”
그때 마왕 레이논이 다가왔다.
“방금 그 현상 말입니다..”
“방금? 벼락이 친 거 말이냐?”
“옙. 분명…… 그것은 단순한 기후현상이 아닙니다.”
“그럼 뭔데?”
“제우스의 경고입니다.”
“제우스?”
“이곳에서는 벼락이 치기도 하지만, 그 벼락의 소리와 강도, 색으로 제우스의 신호와 단순 기후현상을 구분합니다.”
“제우스가 무슨 경고를 보냈다는 말이지?”
“방금 그 강도로 보아서……… 곧 강림할 듯 합니다.”
지켜보던 다른 녀석들도 굳은 얼굴을 하고 경청 중이다.
시운은 제우스에 대해 떠올렸다.
직접 만나보지 못했지만, 현계에서 신화들을 듣고 그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제우스는 천사계를 관장하는 신이잖아? 근데 왜 이계에 경고를 보내고 강림한다는 거지?”
“그건 그의 마음입니다.”
“그가 강림하면 문제가 있나?”
“이 세상이 그대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허허. 뭐라고?
레이논은 제우스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주었다.
설명을 다 듣고 나니까 제우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게 바뀌었다.
“완전 악신이네….”
제우스는 이계의 모든 종족들을 쥐락펴락 하고 있단다.
하물며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각 나라에서 공물을 바치기도 하고, 순결을 잃지 않은 처녀를 바치기도 한단다.
그는 화가 나면 벼락을 내리쳐 인간들에게 신호를 준다고 한다.
그 신호의 세기에 따라 이계인들은 그가 얼마나 분노하였음을 측정하고 해법을 찾는다고 하는데 방금 그 벼락의 세기는 역대급이라나 뭐라나.
그때였다.
[시스템이 가동합니다.]
[생체 감각을 수치로 나타냅니다.]
[차크라를 해석합니다.]
[모든 정보들을 불러오는 중입니다.]
오랜만에 들려오는 시스템 음성.
[관찰하는 기운을 감지합니다.]
[그 기운의 경로를 추적합니다.]
[창공의 신이 당신을 관찰합니다.]
[창공의 신이 당신을 보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창공의 신이 당신에게 적대감을 느낍니다.]
[창공의 신이 당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시스템이 신의 기운을 감지하고 있다.
“창공의 신? 제우스의 분노가 나를 향한 것이었다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왜?
잠시 고민을 마친 시운은 소환수들을 훑어보았다.
“너희들은 일단 다른 곳으로 가있어.”
“네? 어디 가시게요?”
“형님?”
“주군!”
그들은 시운의 눈빛을 보며 걱정했다.
항상 생글생글한 눈빛이던 그가 각오를 다졌을 때 나오는 눈빛이 저 눈빛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아무도 따라오지마.”
시운이 레이논이 타고 온 보이쉬를 향해 손을 들자 보이쉬가 대지를 박차며 시운에게 달려와 등을 내민다.
그때 보이쉬의 거대한 등뼈에 타려던 시운의 팔을 메두사가 잡았다.
“잠깐만. 꼭 할 얘기가 있어.”
“나중에 하자.”
“지금 이 일에 대해서야.”
“이 일? 너… 뭔가를 알고 있단 표정이군.”
메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녀의 얼굴이 난처해보인다.
“난 너와 오래 함께해서 잘 알아. 넌 날 만났을 때부터 표정에 그늘이 있었어. 그게 혹시 이번 일과 관련이 있는거야?”
“응.”
“다 말해봐.”
“일단 여기서는 말 못 해. 단 둘이 얘기 좀 해.”
*
메두사와 시운은 보이쉬를 타고 서쪽 방향으로 날아갔다.
머리칼이 완전히 뒤로 넘어갈만큼 빠른 속도다.
일단 이동하는 이유는 추적해오는 제우스를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비행하면서 그녀에게서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날 보고 싶었어?”
“……….”
메두사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시운의 등뒤에서 가만히 시운을 안고 있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해서 차원의 문을 연거야?”
“몰라. 나도 모르겠다고. 그냥 우리들은 당신이 보고 싶었어.”
시운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제우스를 따돌리던지 아니면 현계로 이동해서 제우스에게서의 분노를 지우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메두사의 사연을 들어보니 가슴에서 피가 뜨겁게 끓는 느낌이다.
“제우스는 얼마나 강하지?”
“…현재의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신이라고 알려져 있어.”
“그렇다면 죽이겠다.”
“뭐?”
황망히 커진 메두사의 두 눈은 이내 불길하게 떨렸다.
“안 돼. 당신도 강한 인간이란 건 알지만 제우스를 상대하려면 모든 발키리 군단을 상대해야돼.”
발키리 군단.
천사계에서 가장 용맹하다고 알려진 천족들이다.
그들은 날개 두 장이 달린 일반 천사들과는 다른 힘을 가지고 있다.
날개가 네 장부터 여섯 장까지.
그 날개의 개수는 강함을 뜻한다.
“그 중에서는 미카엘도 있다고.”
미카엘.
고대부터 지금까지 발키리 군단을 이끄는 천계에서 가장 용맹하다고 알려진, 제우스를 수호하는 대천사다.
“나에게도 군단이 있다. 그리고 내가 안 나서면 넌 어떻게 할건데?”
“어떻게 하긴….”
“제우스에게 찍혔다며. 그럼…… 넌 앞으로도 계속 시달릴 거 아니냐?”
“그거야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니까 네가 알아서 어떻게 할거냐고?”
“난 신경쓰지마.”
“신경을 어떻게 안 쓰냐? 넌 나한테 소중한 존재다. 그리고 내 목숨을 구해줬던 고마운 은인이기도 하고.”
“그 일은 됐어. 뭘 바라고 한 일이 아니야.”
“알아. 그래서 더 고마운 거라고, 내가. 넌 내가 지킨다.”
시운의 뒤에 있던 메두사는 가만히 시운의 등에 머리를 기댄 채 오묘한 감정을 느꼈다.
헤라클레스는 금발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젠장. 아버지가 저렇게까지 화가 나시다니….”
데스나이트가 물었다.
“사자머리. 네가 좀 말려볼 수는 없나?”
“난 아버지한테 쪽도 못 써.”
“네가 아들이라며?”
“우리 아버지한테 아들이 몇 명이나 있는지 셀 수도 없다.”
레이논이 마검을 당장 뽑아들 기세로 눈을 붉혔다.
“이계가 이대로 개박살 나게 놔둘 수는 없지. 정 안 되면 내가 마족들을 이끌고 천계를 쓸어버리겠다.”
“그건 안 돼.”
“뭘 안 돼. 이 가분수 자식아. 나 마왕이야. 설마 내가 네 아버지한테 안 될 것 같다는 말이냐?”
“널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아버지는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힘을 지니셨다.”
“좆까라 그래.”
제우스는 분명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공의 하늘은 폭풍이 일어나기 전처럼 고요했다.
불길한 기분.
그때 저 멀리서 검을 땅에 질질 끌며 다가오는 남자가 보인다.
그는 장대하게 길러 헝클어진 머리를 흔들며 무표정으로 걸어왔다.
“가면기사?”
헤라클레스가 그를 알아보자 레이논의 안광이 번쩍였다.
“뭐? 가면 기사라고?”
가면 기사란 말에 걸어오는 남자를 살기가 띤 시선으로 노려봤다.
가면 기사.
그를 어찌 잊을 수 있겠나.
마왕 레이논에게 처음으로 무력감과 수치스러움이라는 감정을 선사했던 그놈인데.
“너….”
레이논은 마검을 뽑아서 당장 가면 기사와 대련을 하고 불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으나 칼자루에 손만 쥔 채 이를 씹었다.
지금은 주군을 위해서라도 그럴 때가 아니다.
“주군은 어디 있나?”
턱.
볼살이 쑥 들어갈만큼 야위고 창백한 그가 물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데스나이트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주군께서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셨다.”
“다른 곳 어디.”
“그건 알 수 없어. 그리고 우린 주군에게 지금 갈 수 없다. 그게 주군의 명이다.”
레이논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그를 똑바로 주시했다.
“어디 숨어있다가 갑자기 나타난건지는 모르겠는데 말이야. 난 너와 할 얘기가 좀 많은데 일단은 좀 미뤄두자고.”
피우우웅!
창공을 찢는 굉음이 들린 그 순간.
그들 모두가 동시에 소리가 나는 창공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창공에서는 마치 유성이 떨어지듯이 서쪽으로 금색 형태가 낙하하고 있었다.
“아, 아버지!”
헤라클레스의 부름에 데스나이트는 금빛 유성이 쇄도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우스가 주군이 날아간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그게 누구냐.”
“가면 기사. 넌 제우스도 모른단 말인가?”
“모른다. 그러나 그 자가 주군을 좇고 있는거라면.”
순간 척준경이 검을 매섭게 뽑아들고 서쪽을 바라봤다.
"난 주군을 지키고 그를 벤다. 주군의 명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 *
시운은 델피아 섬까지 제우스를 유인하는 데 성공했다.
이곳 델피아는 사각으로 바다가 둘러쌓고 있고 동물도,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이곳에서 죽도록 싸워도 누가 다치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시운은 제우스를 향해 걸어가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아니. 올려다봤다.
몇십 층 빌딩 높이만한 거대한 제우스가 이시운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
하얀 장발의 머리에 그 어떤 검으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근육 그 자체로 이루어진 제우스의 상반신은 그가 신 중에 가장 강력한 신임을 반증하듯 했다.
제우스의 눈동자가 메두사를 향해 굴러갔다.
“소녀여. 이 인간과는 무슨 관계지?”
“제우스 님! 제게 소중한 남자입니다. 제발 저의 얼굴을 봐서라도 돌아가주세요.”
무릎을 꿇고 있는 메두사를 보며 시운이 인상을 구겼다.
"메두사. 굽신거리지 말고 일어나라. 저 놈은 위대한 신이 아니고 그저 발정난 개새끼일뿐이다."
그 말에 제우스의 두 눈에서 금색의 연기가 타올랐다.
“인간이여. 방금 한 말에 대해 후회는 없겠지?”
"제우스야. 이 꽉 깨물어라."
그 순간 시운은 핏줄이 튀어나오도록 눈을 힘주어 뜨고 오른발로 대지를 박차고 제우스를 향해 쇄도했다.
빠아아악!
총알처럼 날아든 시운의 주먹에 턱을 얻어맞은 제우스의 고개가 옆으로 쏠린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시운의 주먹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주먹으로 있는 힘껏 때렸는데 쇳덩이를 두드린 느낌이네. 강간범 새끼가 뭐 이렇게 단단해?”
고개가 돌아간 그대로 멈춘 제우스. 그의 한쪽 볼이 붉게 멍들어 있었다.
그 순간 제우스의 백발 머리칼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그의 신체에서 서늘한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는 금안으로 변한 눈동자로 시운을 노려봤다.
그 기운은 주위 델피아의 모든 숲을 시들게 했고, 주변 바다가 솟아서 갈라지게 했다.
메두사는 제우스를 쳐다도 볼 수가 없었다.
압도적인 기운뿐만 아니라, 제우스는 육안으로는 너무 눈부셔서 볼 수가 없었다.
‘눈이 타들어갈 것 같아.’
차악!
그때 시운은 아공간에서 데몬 소드를 소환하여 손에 쥐었다.
칼자루가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 낯설지만 익숙하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든 메스가 아닌,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검을 들어본 지가 벌써 십년 만이던가.
시운은 여유롭게 웃었다.
“인간이 신을 어떻게 이기는지 몸소 보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