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만 3회차-255화 (255/278)

제 255화

후일담- 키스

“아…….”

메두사는 말해놓고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듯 길게 탄식을 내뱉었다.

시운은 기분이 오묘했다.

그러나.

“마음은 고마운데 네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다. 난 사랑하는 여자가 있고 그 여자와 평생을 함께 하기로 했거든.”

시운은 자신의 상반신을 껴안은 메두사의 팔을 거둬내고 메두사를 똑바로 바라봤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빨려 들어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다음에 다시 오게 된다면 그때 꼭 보자. 우리.”

“내 마음을 남자에게 고백한 건 처음이야. 근데 보기 좋게 까여버렸네.”

그 순간 시운의 코끝으로 메두사의 머리칼의 감촉이 느껴졌다.

메두사는 시운의 뒷목을 움켜쥐고 키스를 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혀를 넣으려고 한다. 촉촉한 메두사의 그 감촉들이 입안 가득 느껴졌다.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예술 그 자체다.

이계에서 봤던 여자들 중 가장 아름답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부디 자신을 품어달라는 여심이 녹아있다.

하지만.

시운은 그녀를 밀어냈다.

메두사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난 제우스에게도 키스만큼은 허락하지 않았어. 당신이 내 첫키스를 가져간 사람이야.”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난 널 잊지 않아.”

“한 번만 더 부탁해도 들어주지 않을거지?”

울먹이는 그녀의 두 눈동자가 마음을 약해지게 했다.

시운은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소매로 그녀의 눈가를 적신 눈물을 닦아준다.

“이시운.”

그녀는 아주 나지막하게 이름을 불러주고 잠시 닫았던 입술을 조심스레 뗀다.

“당신 이름은 처음 불러보네. 사랑해, 이시운.”

“……….”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아도 난 당신을 사랑하며 기억하고 기다릴거야.”

메두사는 몇 초간 이시운의 얼굴을 두 눈에 가만히 담고서 뒤돌아 가버렸다.

마음이 복잡하다.

그때 소란스런 인기척이 느껴졌다.

데스나이트와 헤라클레스 아콘이 모래사장을 밟으며 걸어왔다.

“안녕의 순간이군요.”

“형님…….”

“주군... 이제야 저희 타이탄들이 완연한 힘을 얻게 되었는데 벌써 가시다니요..”

그들은 알고 있었다.

오늘을 끝으로 시운을 보기 힘들 거라는 것을.

“오랜만에 너희들과 만나게 돼서 너무나 기뻤다. 내 인생에서 지워지지 않을 소중한 기억이었어.”

그 말에 헤라클레스는 짐승같이 생긴 얼굴을 찡그리며 눈물을 흘렸고 데스나이트는 입을 꽉 다물고 경의에 찬 얼굴로 시운을 바라봤다.

곧이어 베른과 검은매가 시운 앞에 멈춰서서 가만히 그를 바라본다.

그 바라보는 눈빛에는 존경심과 사랑이 담겨있었다.

시운은 말 없이 둘의 살결을 만져주었다.

우우우우우-!

멀리서 카이칸의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녀석도 시운이 떠나가는 것을 아는 것인지 그 어느 때보다 슬프게 울부짖는다.

“주군.”

허리춤에 검집을 멘 채로 척준경이 다가와 시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 일어나세요.”

“스승님이라니요. 이미 주군께서는 저를 넘어섰습니다.”

고려제일검이었던 척준경은 검으로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삼한제일검? 훗날 대륙을 제패한 한신? 항우?

그들과 일기토를 벌여도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다. 허나 척준경은 제우스와 시운이 혈전을 벌이는 것을 보고 느꼈다.

주군 이시운과 검 대 검으로 대결한다면 자신이 없을 것이란 걸.

신과 맞서는 이시운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주군이 신과 대적하셨을 때 소인이 처음으로 누군가의 검술에 감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기록된 현계 역사상 최강의 무력을 지닌 척준경이 칭찬해주니 시운은 고양감이 들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당신은 제 조상이십니다. 말 편하게 해도 됩니다.”

“꼭 주군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계속 가슴에 묻어두고 그 날만을 기다렸는데 그 날이 오늘이군요.”

척준경은 허리춤에서 검집을 뽑아 검을 반만 뽑으며 고개를 푹 숙여 검사로 갖출 수 있는 최대의 예의를 보인다.

그의 기억 속에는 왕이란 존재는 항상 권력에 눈이 멀어있거나, 이익을 추구하기만 했다.

그들은 자신을 항상 살인병기로 취급했다.

그러나 주군 이시운은 달랐다.

이익도 뭣도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자신을 인정해주고 존중해주었으며, 갑질 따위는 하지도 않는 사람.

군주에 걸맞지 않게 때론 바보같고 푼수 같기도 하면서도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내거는 사람.

그게 척준경이 본 이시운이었다.

“주군께서는 제게 최고의 주군이셨습니다. 그동안 주군을 보필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나도 덕분에 행복했어요. 스승님.”

시운은 그들과 인사를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아직 남은 망령의 군단들이 있다. 모두 성불시킨 것은 아니니까.’

언제 또 이계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의 권속책임권을 넘기려고 한다.

리더를 정해야 할 시간.

그때 시운의 눈으로 묵묵히 서있는 헤라클레스가 보인다.

‘헤라클레스는 너무 단순하고….’

‘메두사는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

‘베른이나 검은매는 언어를 구사하지 못해서 패스.’

‘데스나이트는 강하고 묵직하지만 리더십이 부족해.’

‘반면 레이논은 군단을 거느린 마왕이고, 리더십도 있고, 결단력도 충분하다.’

그렇다면.

‘아니. 레이논은 너무 괴팍하다.’

레이논은 다혈질이라서 수틀리면 명분도 없이 군단들을 이끌고 전쟁을 일으킬 경향이 가득하다.

‘남은 건….’

척준경.

그는 병력들도 통솔해본 적이 있고, 과묵하며 리더십 또한 있다.

거기다가 감정보다 이성적이고, 차분하며 무력은 말할 것도 없이 강하다.

‘척준경 스승님은 무엇보다 기개가 좋지.’

리더로서 기개는 군단들을 이끄는 데 꼭 필요한 부분이다.

시운은 망자의 군단들을 소환했다.

줄지어 서있는 망자들이 무표정으로 시운을 바라본다.

아니. 무표정이었지만 그 표정 안에 슬픔이 담겨있었다.

고민은 끝냈다.

“스승님. 전 이제 이계로 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젠 스승님이 이들을 이끌어 주세요.”

“가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저는….”

“아니요. 스승님이 해주셔야 합니다.”

시운이 나머지를 훑어보았다.

“내 의견에 의의가 있는 사람 없지?”

모두가 굳이 거부하지 않는 듯한 기색이었다.

시운은 아공간에서 데몬 소드를 꺼내어 척준경에게 내밀었다.

“이건 스승님께 맡기겠습니다. 일종의 증표같은 겁니다. 이 검을 선하고 약한 자들을 위해 써주세요.”

척준경은 최대한 공손히 그 검을 받았다.

“주군의 명이시라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때 성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저는 의의 있는데요!”

레이논이었다.

“주군이 오실 때까지 제가 그 통솔권을 가지고 있겠습니다!”

“안 된다.”

“그렇다면 보여드리겠습니다. 제가 가면 기사보다 강하다는 것을요.”

시운이 슬쩍 척준경의 눈치를 봤다.

척준경은 고개를 저었다.

“주군의 명대로 난 선한 자들을 지키기 위해서만 검을 쓰겠다. 자네와의 대결은 하지 않을 생각이네.”

“웃기네!”

쉬이잉!

검집에서 검이 뽑히는 검명이 들렸다. 그 검명은 서늘한 내공을 뿜어냈다.

한 눈에 보아도 일반적이지 않은 기묘한 검을 든 레이논이 칼끝을 척준경에게 겨눴다.

“주군. 허락해주십쇼! 주군 앞에서 보여드렸던 그때의 그 치욕을 씻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흐음….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해라.”

시운은 마지못해 허락했다.

*

덜컹-!

누군가의 검이 땅에 힘없이 떨어져 뒹구는 소리였다.

레이논이 웃었다.

“하하하하.”

무려 세 시간의 격돌이었다.

레이논은 땅에 떨어진 자신의 마검을 보며 허탈한 웃음을 이어갔다.

“대체 왜 또 내가 패한 것이지? 난 저 장발머리에게 힘에서도 밀리지 않고, 속도에서도 밀리지 않았어. 검 또한 찔리면 파상풍정도나 걸릴 것 같은 저 녀석의 낡은 검보다 내 마검이 월등한데.”

레이논은 검상은 커녕 생채기 하나 입지 않은 척준경을 보고 더욱 회의감을 느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레이논이 다시 검을 잡으려고 손을 뻗으려던 그때 시운이 그를 저지했다.

“그만해라. 네가 패했다.”

“주군!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패배도 수용할 줄 알아야 성장하는 법이다.”

시운의 조언에 레이논은 이를 아득아득 갈며 척준경을 노려봤다.

세 시간이나 검술을 펼쳤는 데도 땀 한 방울 베어있지 않은 척준경의 얼굴에 더욱 화가 났다.

“네가 생각을 말해봐라. 난 왜 네게 또 패한 것이냐! 패인이 뭐냐고!”

“넌 훌륭한 검술을 지니고 있다. 헌데….”

“헌데 뭐!”

“네 검에는 사사로운 감정이 담겨있다. 검에는 신념을 담아야 한다. 감정은 신념의 하위 개념. 그게 네 패인이다.”

“꼰대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시운은 웃으며 레이논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달랬다.

마왕이란 녀석이 꼭 게임에서 지고 승복하지 못해 화내는 애 같은 모습이다.

“스승님..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주군.”

그 말을 끝으로 망자들이 척준경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새로운 주군에 대한 예의를 보내었다.

*

현계로 돌아온 시운의 삶은 원래대로였다.

바쁘게 병동을 움직이고 때론 밤을 새가며 일했다.

그렇게 집으로 와서 뻗는다.

방안에는 여러 의학책들이 줄줄이 꽂혀있다.

저걸 보니 생각난다.

다시 시간이 돌아갔던 그때 시운은 속독의 힘으로 수능 만점을 받고 최고의 의대에 갔다.

인턴으로 구르면서 누구보다 빠르게 의학 기술들을 습득했고 현재 어리진 않지만 젊은 서른네 살의 나이로 한국에서 인정받는 의사가 되어있다.

누군가를 목숨을 살린다는 건 기쁘고 대단한 일이다.

허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계랑 현계를 계속 왔다갔다 하면서 살 수 있다면 그거 참 개꿀일텐데.’

그렇게 된다면 인생 참 재밌겠지.

허나 그것은 망상일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망상을 한다.

그러나 그 망상에 계속 빠지게 되면 도태되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된다.

이계에 남겨진 녀석들이 벌써부터 보고 싶다.

불이 꺼져 어둑한 천장이 눈에 들어온다.

“거기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라. 때가 되면 꼭 다시 찾아가서 너희들을 볼 테니까….”

“아이!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옆에 누워서 자고 있던 천세정이 떠지지 않는 눈으로 시운을 흘겨본다.

“방금 뭐라고 한거야? 뭐? 행복하게 잘 살라고? 설마 당신... 전여친 꿈 꾸고 혼자 그런거야?”

“아니. 아니야.”

“정말 아니야? 수상한데? 그럼 뭔데!”

“얼른 자자. 내가 재워줄게.”

“어이! 이시운 씨! 말 돌리지 말고…….”

시운은 천세정을 껴안고 기분좋게 웃었다.

천세정은 미간을 찡그리며 시운을 귀엽게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충분히 행복한데 더 큰 행복을 바라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소중한 추억으로 잠시만 묻어두고 살자.’

때론 추억은 두 번은 없을 한 번이라 더 소중하고 그리운 순간들이 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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