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8화
후일담- 이세계 무신 아카데미
시운은 그때의 시간보다는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
자신과 가족들을 핍박하던 사촌들은 지금 시운을 무시하지 못했다.
최고의 복수는 용서라고 했던가.
시운은 그들에게 그런 복수심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저 그들이 결혼하면 시운은 축의금을 많이 냈고 그들은 전화로 시운에게 고맙다며 넙죽거렸다.
그들과 정을 나누며 가깝게 지내지는 못하겠지만 시운은 자신이 잘 되니 그런 부류의 인간들도 본인에게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개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함을 다셨다.
시운의 병원을 통해 연락을 해온 장타오라는 인물은 중국에서 큰손이라 불리던 재벌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시운과 함께 천신전쟁에 참여했던 언데드왕이다.
-한국은 본받을 것이 많은 나라입니다. 그리고 기자분들 제 앞에서 대한민국을 욕한다면 평생 들어보지도 못한 쌍욕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한국과 우호적인 무역 교류를 하는 재벌 장타오는 기자들을 불러놓고 그렇게 말했다.
그는 자신의 주군의 나라가 욕 먹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중국의 한 유명 연예인이 티비에 출연해 대한민국 음식을 조롱하는 일이 있었고 장타오는 그 연예인과의 스폰을 모두 끊었고, 그 연예인에 어떤 스폰서도 붙지 못하게 보이콧을 쳤다고 한다.
-우리 중국도 좀 바뀌어야 합니다. 씨발. 이러니까 우리 나라가 세계적으로 욕을 먹고 있는거 아닙니까?
그가 기자회견에서 남긴 인터뷰다.
중국에는 막대한 큰손들이 많다.
특히나 그는 그 큰손들 중 막강한 자본력을 가진 인물이었기에 그로 인해 중국의 일부 사람들은 공공연한 매체에서 한국을 비하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장타오가 시운을 찾아왔었다.
시운의 대학병원에 정차한 아파트 한 채 가격이나 하는 외제차에서 내린 장타오는 시운을 보며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보였다.
“주군을 항상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주군과 대화하기 위해 한국말을 배우며 기다렸습니다.”
그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장타오가 시운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무한으로 자본을 지원 해드릴 생각입니다. 주군만 원하신다면 재단을 설립하시게 만들어드리지요.”
시운은 그 제의에 고민했다.
재단을 설립하면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많이 도울 수 있다.
곰곰히 고민한 끝에 시운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이기도 하고 지금 자신의 스탠스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강요하는 건 아닌데... 그냥 부탁이 하나 있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이제 난 너에게 강요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이건 그냥 내 소망이 담긴 부탁인데.”
시운은 대한민국의 어려운 이들을 위해 소액이라도 좋으니 매번 기부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부탁에 장타오는 속으로 시운의 인간성에 감탄하며 대한민국의 보육원부터 아픈 환자들과 노인 복지시설 등등에 거금을 기부했다.
“주군의 이름으로 기부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뜻은 주군의 뜻이니까요.”
“아니. 너의 이름으로 하도록 해. 기부는 그런게 중요한게 아니야.”
“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주군의 이름으로 기부를 하면 언론 매체에서 주군을 더욱 좋은 이미지로 볼 것이고….”
“나에 맞지 않는 좋은 이미지는 오히려 나를 갉아먹는 프레임이 돼.”
시운의 뜻에 장타오는 또 한 번 감탄했다.
그리고 8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시운은 예전과 달리 위치는 변화했지만 인간성은 변하지는 않았다.
그가 살아가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사람은 뭐든 행한대로 언젠가는 돌아온다는 것.’
그래서 항상 겸손하고 나쁜 일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아갔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변하지 말고 항상 선하게 살아가자.
그런 마음으로.
어느새 시운의 집은 둘에서 네 식구가 되었다.
그들이 키우는 강아지와 시운의 아들. 그리고 천세정. 이시운.
이렇게 말이다.
아들 시형이가 시운에게 물었다.
“아빠. 아빠는 엄마가 첫사랑이야?”
“그럼. 첫사랑이지.”
“누가 먼저 좋아한거야?”
그 말에 시운은 당황했지만 씩 웃었다.
“좋아한 건 아빠가 먼저 좋아했어. 엄마는 정말 너무 예쁘고 마음씨도 좋잖아?”
“그럼 아빠가 엄마 쫓아다녔겠네?”
“먼저 좋아한 건 난데…. 먼저 고백하고 쫓아다닌 건……… 엄마지. 근데 아빠는 우리 시형이가 엄마한테 이건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 엄마두 자존심이란게 있잖아?”
“아….”
시형은 동그래진 두 눈으로 핸드폰을 들어 세정에게 전화한다.
-어! 우리 아들? 아빠랑 잘 놀고 있어?
“엄마. 아빠가 그러는데 엄마가 먼저 아빠 좋다고 쫓아다녔다던데?”
아. 말하지 말라니까.
시운은 표정이 보이지 않게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구겼다.
-……아빠가 그래?”
“응! 아빠가 그러던데?”
-그.. 그렇지. 엄마가 좋아서 먼저 따라다녔어.
“아. 그렇구나. 알겠어. 엄마!”
-……아빠랑 잘 놀고 있어. 엄마 곧 가니까.
전화를 끊은 시형은 시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시운은 그 시선을 보면 뭔가 모르게 조금은 죄책감을 느껴서 멋쩍게 웃었다.
“시형아. 엄마한테는 말하지 말지 그랬어... 사람은 자고로 입이 무거워야 돼.”
‘또 한 소리 듣겠네..’
시운은 세정이 이마를 찡그리고 그 특유의 표정을 지으면서 왜 아이에게 거짓말을 했냐고 한 소리 하는 그 얼굴이 벌써부터 상상이 되서 좀 난감했다.
“아빠 집안일 좀 할게. 우리 시형이 장난감 갖고 좀 놀고 있어.”
“응! 아빠.”
시형은 천세정을 닮은 크고 또렷한 두 눈을 꿈뻑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운은 밀린 설거지와 집안일 등을 하기 위해서 몸을 움직였다.
그녀에게 한 소리 좀 덜 듣기 위해서는 집안일이라도 좀 해두는 게 맞을 테니까.
이게 대한민국 남편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 *
이계의 발카스 대륙에는 히토리아라는 거대한 산맥이 솟아있다.
그 산맥에 둘러쌓인 3만평 남짓 되는 아카데미의 광경을 데스나이트는 팔짱을 끼고 늠름하게 바라봤다.
‘주군이 가신지도 벌써 십 년이 되어가는군.’
그의 눈으로 아카데미의 운동장에서 열심히 검술을 훈련하고 있는 생도들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주군 이시운의 뜻을 받들어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망령의 군단들을 키워나가려 했다.
허나 이 아카데미가 입소문을 타면서 강해지고 싶은 인간들이 무수히 지원해 입학했다.
망자들과 인간들이 뒤섞여있는 아카데미 정문에 도착했다.
-무신 아카데미.
통나무로 만든 네모난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아카데미 이름은 아카데미의 원장인 척준경이 작명했다.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것이냐?”
일미호가 꼬리 두 개를 흔들며 데스나이트에게 걸어왔다.
“단장은 지금 실습 중인가?”
“장발머리는 수업 중이다. 듣다가 나왔다.”
“왜 듣다가 나왔지?”
“지루하다. 네가 들어가보면 알 것이다.”
데스나이트는 건물 3층으로 향했다.
교실 안으로 들어서자 원생들이 데스나이트를 슬쩍 쳐다보며 눈인사를 하고 교탁에 선 척준경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린다.
“나 척준경의 역사는 고려에서 시작되었으며………”
데스나이트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일미호가 왜 수업이 지루하다고 한지 이제 이해가 됐다.
표정이 없던 척준경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눈을 빛내며 수업을 이어간다.
고려시대 제일검이었던 그가 생각보다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그 한이 맺혔던 것일까.
자신의 출생부터 고려를 지켜내기까지의 긴 역사를 수업의 내용으로 원생들에게 학습시키고 있다.
“원장님! 질문 있습니다.”
“이야기 해보게.”
“……근데 원장님이 살아왔던 이 과정이 검술 수업과 무슨 연관이 있는거죠?”
“그건.”
척준경이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연다.
“지나간 역사를 알아야 검술을 다루는 머리도 깨어나는 법이니까.”
“그건 현계의 역사지. 이곳의 역사는 아니잖아요? 근데 왜 배워야 해요?”
원생 하나의 질문에 척준경이 당황했는지 한동안 입을 못 연다.
검술은 귀신같이 다루면서 말은 잘 못하는 모양이다.
지루한 역사 시간이 끝나고 척준경은 원생들을 데리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모래가 가득한 운동장에 원생들이 우두커니 서서 척준경을 바라본다.
이제는 실습 시간.
척준경은 자세를 잡고 검을 뽑아 들었다. 조용히 흔들리고 있늠 그의 검끝에서 뒷목까지 소름이 돋는듯한 서늘함이 느껴진다.
“검을 뽑는 이것을 발도라고 한다. 발도는 검술의 기본이지.”
휘익!
척준경이 허공에 검을 겨누며 멈춰선 채 말을 잇는다.
“발도는 조심하지 않으면 엄지가 날아간다. 발도하는 것에도 마음을 품어야 한다. 검을 뽑으려는 이유가 사사로운 감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척준경은 팔자에도 없던 선생 노릇을 하며 열심히 교생들을 가르쳤다.
망자들은 척준경의 검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잘 따라했으나 인간인 원생들의 자세는 엉성했다.
‘확실히…… 주군의 병사들은 인간들보다 월등하군.’
척준경은 원생들의 자세를 바로 잡아주면서 망자들을 보고 감탄했다.
역시 주군이 통솔했던 군단들답게 적응력도 성장력도 인간 그 이상이었다.
망자들은 외형은 인간들이 보기에도 섬뜩했으나 원생들은 그들을 딱히 무서워하지 않고 신기해했다.
우우우우!
운동장 한복판을 카이칸이 하울링을 내며 걸어간다. 원생들은 카이칸을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척준경에게 검에 집중하란 호통을 듣고 다시 검으로 눈을 돌린다.
망자들은 기계처럼 그들의 단장 척준경의 말만 듣고 따로 잡말은 하지 않았다.
“장발머리! 맨날 검술만 가르쳐서는 한계가 있지 않겠냐?”
일미호가 퉁명스레 물었다.
“힘이 약하든 강하든, 검 하나만 있으면 누구도 상대할 수 있는 법이다.”
“난 그 반대로 생각한다. 검은 사정거리도 있고 한계가 있어. 검은 부러지면 그만이잖아? 차라리 아카데미를 마법 아카데미로 차리지 그랬냐?”
일미호의 핀잔에도 척준경은 반응없이 자신이 들고 있는 검끝을 날카롭게 바라봤다.
“단장. 얘네들 대련하려면 멀었겠는데?”
“데스나이트. 처음부터 잘하는 인간이 어디 있겠나? 내 아카데미에 온 이상 수준급 검술 실력을 쌓고 나가게 되어있다.”
“아. 그러셔….”
척준경은 한껏 진지한 표정이다.
그는 주군 이시운의 명을 받들어 선한 자들을 지키기 위해 선한 군단들의 전력을 이끌어내고 있다.
세상에는 선한 자들만 존재할 수는 없는 법이다.
탐욕을 품은 이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를 갈고 있을 것이고 언젠가 세상에 나타나 선한 자들을 위협할 것이다.
“들어라! 검은 무언가를 지키려고 들었을 때 가장 날카로워지는 법이다. 그게 조국이든… 사랑하는 여인이든 가족이든 말이다.”
척준경의 연설에 나무벤치에 걸터앉아 그것을 구경하던 메두사가 픽 웃었다.
“무슨 무협 영화 찍냐? 지랄하네.”
데스나이트는 그녀에게 걸어갔다.
“나도 좀 앉게 좀 비켜라.”
“싫은데?”
“언제까지 그렇게 퉁명스럽게 굴거냐?”
“그게 띠꺼우면 말 걸지 말던가.”
그러면서도 메두사는 데스나이트가 앉을 수 있게 몸을 움직여 공간을 내어준다.
데스나이트가 앉자 메두사가 고개를 찌푸린다.
“이 자식 엉덩이 큰 거 봐. 내가 앉을 틈도 없어졌잖아.”
“너는 남자들을 대할 때는 좀 투박하군.”
“무슨 소리야?”
“한 남자를 빼고 말이야.”
그 말에 메두사의 얼굴이 붉어진다.
“뭐라는 거야! 그 큰 엉덩이 발로 걷어차 버리기 전에 꺼져.”
“너도 보고 싶지 않나?”
“뭘!”
“주군 말이야.”
그 말에 메두사의 표정이 깊어진다.
“당연히 보고 싶지. 너무나.”
“주군은 언제 돌아오실까...”
“그 양반은 꼭 돌아올 거야. 쓸데없이 잔정이 많은 남자니까.”
정말 그는 돌아오긴 하는 것일까.
벌써 십 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그와 작별하기 전에 말한 것을 지키고 있었다.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그만을 사랑하며 기다린다는 약속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