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0화
번외편- 강춘식 작가와의 재회 (1)
내게 강춘식 작가는 특별한 존재다.
그로 인해서, 나의 삶 일부분이 달라졌다.
아니. 일부분이라는 표현은 부족하다. 내 삶이 너무나 소중해졌다고나 할까.
여자에 대해서 통달한 그의 백태 튀겨가는 피드백에 난 그토록 사랑하던 천세정과 결실을 맺을 수 있었고 세상을 구할 용기를 얻을 수도 있었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오늘 날짜로 된 강춘식 작가의 작품 후기를 보았다.
-이로서 완결입니다.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오늘 저는 말이죠. 이번 작품을 연재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러 저만의 소소한 시간을 보낼 겁니다. 방해받지 않고 구속받지 않는 시간 말이죠. 힌트는? 술과 함께하겠죠.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그런 퇴폐 뭐 그런 건 아닙니다! 아시겠죠? 다음 작품에서 뵙도록 하지요. 아! 오늘 뭔가 기분이 색다르네요. 까치를 만날 것 같다는 예감? 흠흠.
우연찮게도 오늘 작품 하나를 완결쳤단다.
그리고 저렇게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 내가 생각한 그것이 맞을 것이다.
한 번쯤 재회하고 싶었다.
그의 완결 후기는 그답게 참 유쾌했다.
아무튼 난 그에게 플랫폼을 통해서 쪽지를 보냈다.
그리고 답장이 왔다.
쪽지에는 어느 바의 주소만이 적혀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예감하는 듯한 이 작가는 대체 정체가 뭘까.
참으로 오랜만에 바에 와본다.
중년이 된 나는 안경 하나를 걸치고 수수한 차림으로 토킹바에 도착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직 그는 오지 않은 것 같다.
손님을 접대하는 바텐더와 남자들 무리가 떠드는 광경이 익숙하게 눈에 들어온다.
“바는 처음이세요?”
눈웃음을 살살 치며 바텐더가 물어왔다.
그녀의 눈에는 바 주변을 훑는 내가 그렇게 보였나 보다.
“처음은 아니고 오랜만에 와보네요.”
“처음이 아니시구나. 저녁은 드셨어요?”
“바빠서 못 먹었네요.”
“여기 안주들도 기가 막혀요! 저희 바는 처음이신 것 같은데 여기 양주 세트 메뉴로 시키시면 안주 서비스 특별히 많이 드릴게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50대인 내게 익숙하게 말을 건다.
“발렌타인 17년산 이걸로 시킬게요.”
내가 별로 고민하지 않고 양주를 시키자 바텐더의 얼굴이 은근스레 환해진다.
“오빠 안주는요? 세트로 시키면 더 싼데.”
“오빠라뇨. 나이 많아요.”
“에이. 딱 봐도 30대 후반 정도 밖에 안 돼보이시는데요?”
립서비스도 참 철판을 깔고 해준다.
쑥쓰러워서 시선을 피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오늘 바는 20대, 30대의 젊은 청춘들만 가득했다. 그 젊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이 교차했다.
나이를 먹어서 젊은 사람들을 보면 나도 저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들 한다는데 그런 생각은 내게 들지 않는다.
‘지금 나는 너무나 행복하니까.’
다만 저 나이 때의 내 모습을 잠시 회상했을 뿐이다.
바텐더가 양주를 가져와서 자기보다 더 어린 바텐더 한 명을 데려온다.
“안녕하세요.”
어색하게 인사하는 20대 바텐더를 보니 일한지 얼마 안 됐나 보다.
난 눈인사로 답해주고.
“저 혼자 먹을게요. 어차피 한 분 더 오기로 해서.”
“네? 오빠. 저희랑 같이 먹어요. 혼자 먹으면 무슨 재미로 먹어요.”
“아뇨. 괜찮습니다. 저는 결혼도 했고 곧 오실 분이랑 대화하려고 온 거라서.”
“여기 결혼한 분도 많이 와요. 뭐 어때요? 고민 같은 거 털어놓으면 저희도 들어드리고 같이 술 먹고 그러는 거죠.”
“괜찮습니다.”
아무리 이야기만 하러 오는 곳이라 해도 난 결혼한 가장이다.
젊은 여자랑 말 섞으면서 술을 먹을 수는 없다.
“…저쪽 테이블에는 손님이 맥주만 시키는데 오빠 저 양주 먹고 싶은데 진짜 가요?”
20대 바텐더가 옆 테이블을 힐끗 거리며 내게 애교가 곁든 투로 묻는다.
내가 가라고 하면 저 테이블에서 맥주나 마셔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럼 좀 이따가 부를게요.”
“…네.”
시무룩하게 바텐더 둘이 가버린다.
좀 이따 부를 생각은 없다.
나는 바텐더가 개봉한 양주를 스트레이트잔에 넣고 얼음이 들려있는 잔에 희석시켰다.
바에서 나오는 발라드를 들으며 양주를 한 모금 삼켰다.
그리고 두 잔.
세 잔이 들어가자 목구멍이 따끔거리며 뜨겁게 타오르고 뇌리가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바쁘게 사느라 양주는 참으로 오랜만에 먹어본다.
나쁘지 않다.
그렇게 양주가 든 글라스를 훌쩍이면서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 삼십 분이 지났을까.
바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떠들던 바텐더들이 일제히 “작가님!” 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고동치는 설렘으로 뒤를 돌아보자 후줄근한 차림의 남자 인영이 보였다.
‘뭐야?’
강춘식 작가가 아니었다. 츄리한 복장에 젊고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보고 강 작가가 아님에 난 고개를 돌렸다.
근데 내 등에 손이 얹혀지는 기분이 들었다.
“독자님? 오랜만이네요. 이게 몇 년만인가.”
“...강춘식 작가님?”
내 물음에 젊은 남자는 씩 웃어보였다.
내가 알고 있던 강춘식 작가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앞머리가 눈썹을 가리고, 옆머리를 쫙 붙인 트렌디한 머리에 고운 쌍커플과 높은 콧대의 얼굴.
아이돌 느낌의 얼굴은 내게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그 검은 눈과 마주쳤을 때 그 눈에서 고요함과 그만의 차분함이 일렁인 것을 봤을 때 그임을 확신했다.
강춘식 작가는 바텐더들과 인사를 하고 대화 몇 마디를 섞다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작가님. 어떻게 된 건가요? 내가 기억하고 있던 작가님의 얼굴이 아닌데.”
“독자님. 우리의 만남에 있어서 내 생김새는 중요하지 않아요.”
화등잔만하게 커진 내 두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난 느꼈다.
저 얼굴은 나의 젊은 시절 내 얼굴과 흡사하단 것을.
그때 태훈이가 내게 했던 말이 뇌리로 스쳐갔다.
-어쩌면 그 작가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어낸 사람이고 우린 그 속의 캐릭터가 아닐까.
마치 나의 외모를 투영한듯한 춘식의 얼굴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우리는 스트레이트잔을 부딪히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
“예지야! 오늘은 우리 둘이 긴밀한 대화를 해야 하니까 나중에 이야기 하자.”
“아, 왜? 오빠. 같이 놀자. 우리 오빠만 오길 기다렸다고. 오빠처럼 재밌는 손님이 어디 흔한 줄 알아?”
“다음에.”
강춘식 작가는 유부남인 나를 배려해 바텐더들을 오지 않게 해주었다.
“작가님은 마치 내 생각을 다 꿰뚫고 있는 느낌이네요.”
강춘식은 사람 좋은 특유의 미소로 씩 웃으며 잔을 위로 꺽었다.
“우리 독자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죠.”
“여러모로 고맙단 말씀도 드리고 싶었고, 무엇보다….”
슬픈게 아닌데 이상하게 내 말끝이 흐려졌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강춘식은 말 없이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위로 받을 타이밍이 아닌데 그의 손길에 느껴지던 그 묘한 감정이 찬찬히 녹는 기분이다.
“작가님에게 묻고 싶은게 참 많아요. 뵙고 싶기도 했지만 정말 궁금한게 많습니다.”
난 그의 두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들에 그가 대답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시간이 돌아가기 전에도 관찰자로서 독자님을 좀 지켜봤어요. 내 모습과 나의 성격, 나란 존재가 어떠함은 중요하지 않아요. 독자님은 내가 몇 년동안 고민하고 아파했던 한 세상의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 대답만 해줄게요.”
그리고 그는 그 부분에 대해 더 얘기해주지 않았다.
이로서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김태훈이 내게 했던 비현실적인 그 말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누군가가 들으면 미친 소리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상황들이 그 미친 소리가 사실일 수도 있음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더 묻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사실은 이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걸 떠나서 이 사람과의 만남을 난 기다려 왔고, 그 이유는 이 ‘사람’을 보고 싶었으니까.
사람 대 사람으로서 말이다.
“어때요? 나이 들어보니.”
춘식이 물었다. 그때보다 그의 태도가 묵직해진 느낌이다.
“음…. 아직은 50대라서 그런지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몸이 아픈 곳도 없고, 행복하네요.”
“행복하다라? 그거 참 반가운 말인데.”
“이 나이를 먹으니 사람을 보면 대충 보여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그게 인생의 내공이라는 거죠. 20대 때는 패기. 30대 때는 노련미. 40대 50대 때는 중후함이라고 하잖아요. 참 웃긴게 뭔 줄 알아요? 20대에는 놀고 30대에는 일을 하면서 벌어놓은 돈을 60대가 되어서는 아픈 몸을 치료하기 위해 쓴다고 해요. 아 잡소리가 참 길어졌네. 나 오늘 스트레스 풀면서 독자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고 온 건데.”
“잡소리가 아니고 공감도 되고, 참 여러 생각이 드는 말씀입니다.”
“독자님. 참 많이 달라졌네요. 그때는 마냥 사회에 갓 던져진 애기 같았는데.”
“나이를 먹다 보니까 저도 달라졌죠.”
춘식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술을 연신 마셨다.
신기한게 저 양반은 술을 저렇게 빨리 마셔도 얼굴이 달아오르지도 않고 취한 느낌도 없다.
“드라마화 하는 그 작품에 왜 제 아들을 그렇게 쓰고 싶다고 하신 건지 물어봐도 되나요?”
“그걸 굳이 물어봐야 알아요?”
“...예?”
“50대인 독자님이 그 드라마 주연배우로 연기하실 수 있겠어요?”
“그건 아니죠.”
난 대답하면서 웃었다.
A라는 질문을 했는데 B도 아니고 C라는 대답을 들고 나오면서 그 대답에 공감이 간다.
이거 참 웃긴 일이다.
“그래서 왜 내가 독자님 아드님을 출연 시키고 싶은 거냐고요? 독자님 아드님이니까요.”
“참 단순한 대답이네요.”
“단순명료한 대답이라고 해두죠.”
어느새 우리는 양주 한 병을 다 털어낸 상태였다.
어느새 시간은 많이 기울어져 있었고 난 양주 한 병을 더 시키려고 바텐더를 불렀는데 강춘식 작가가 날 저지했다.
“나이 먹으니까 양주보단 소주가 땡기지 않아요?”
“진짜 저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네요. 작가님.”
“나갑시다. 나가서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해요.”
“작가님은 양주 좋아하시는 거 아니었나? 작가님이 드시고 싶은 거 드셔도 되는데...”
“나도 소주 좋아합니다.”
나는 일어서서 양주값을 계산했다.
근데 카드로 23만원이 긁혔다는 문자가 날아왔다.
와이프에게 바가지 긁힐 생각에 순간 머리가 아득해졌다.
그래도 이곳에 온다고 사실대로 얘기하고 왔다.
절대 허락을 해주지 않으려는 그녀에게 난 상황을 설명했다.
-여보. 여자랑 말 섞지 말고 그 분하고만 마셔. 나중에 그분에게 다 확인해 볼 거니까. 아니 그냥 그 바에다가 내가 직통으로 전화할 수도 있어. 알겠지? 그리고 싼 거 마셔.
그녀가 집 나오기 전 내게 했던 말이 뇌리에 아른거린다.
바에 나오며 쌀쌀한 겨울냄새가 코와 살을 찔러왔다.
“독자님 요즘 돈 잘 벌죠?”
“뭐... 아닙니다.”
“아니긴 뭘 아니야.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인데.”
“돈을 월 오백도 벌어봤고, 천만원도 벌어봤는데 오백 벌 때랑 천만원 벌 때랑 생각해보면 제 인생이 확 바뀌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내 말에 춘식의 하관에 공감한다는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보다 좀 더 버는데 그럼 뭐해요! 난 와이프 눈치 보면서 달에 얼마 이상 쓰지도 못하는데.”
난 낄낄 웃으며 말했다.
내 옆을 나란히 걷던 강춘식도 내 말에 따라 웃었다.
“원래 결혼하면 그렇게 사는게 좋은 거지요. 대한민국 남자 대부분이 그렇게 삽니다.”
우린 어느새 자그마한 고깃집에 들어와 있었다.
자연스레 소주를 시키고 고기를 구웠다.
“아들이 있으니 이제 제 인생이 좀 없어진 느낌입니다.”
“이시운이라는 남자가 아닌 ‘한 아이의 아빠’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네. 근데 그게 썩 나쁘지 않네요. 오히려 좋아요. 아들이 커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부모가 되어보니 부모님의 마음을 알겠죠?”
춘식은 불판에 고기를 구워 내 앞접시에 올려주었다.
“어릴 때에는 철 없이 원망했어요. 더 여유있는 부모님 아들로 태어났으면 하고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참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알 것 같아요.”
내 말에 우적우적 삼겹살을 씹는 강춘식은 내 말을 듣고 있는건지 마는건지 소주를 또 들이킨다.
저 양반은 이번 내 인생에서도 술 참 좋아한다.
“...듣고 계시죠?”
“당연히 듣고 있죠. 계속 얘기해요.”
“나이먹고 알았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당시에 하실 수 있는 노력을 모두 다 하시며 저를 키우셨단 것을. 그 마음을요.”
내 육성이 떨림을 느꼈는지 강춘식이 조용히 나와 두 눈을 마주쳤다.
“그래서 지금은 후회 되죠?”
“부모님에게 더 잘하고 감사해 할 것을... 참 후회하죠.”
“인간은 원래 후회하며 사는 동물이랍니다. 한 번 사는 인생이잖아요? 실수하고 후회하면서 살아가는 거지. 그게 인생이지, 뭐 있나요?”
짠-.
우리는 말 없이 소주잔을 부딪혔다.
“나도 독자님에게 질문 하나 합시다.”
“뭐든 좋죠.”
“독자님은 왜 의사의 길을 택했는지요?”
내게 물은 춘식의 두 눈이 순간 빛났다. 그 질문 속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