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만 3회차-273화 (273/278)

제 273화

번외편 누군가를 기리는 마음

시련의 탑은 이계인들에게 파멸을 가져 올 것이라고 모두가 말했다.

그러나 시련의 탑은 대륙제일검과 그의 군대에 의해 붕괴 되었고 다시 이계는 평화를 찾게 되었다.

이계에 사는 모든 이들이 대륙제일검 척준경을 동경했다.

동경의 시선을 받던 척준경은 그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날 동경하지들 마라.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는 모든 근원은 나의 주군 덕이다.”

이시운.

이계의 멸망을 구하고 현계에 살아가고 있다는 인간.

그의 이름은 이계의 역사 문헌에 기록되어 앞으로도 역사 속에서 영원히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백 년이 흘렀다.

준경은 이시운의 동상 앞에 섰다.

항상 하던 것처럼 묵념하는 자세를 취하며 시선을 내리깔고 묵념을 한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시운의 동상을 살폈다.

해맑게 웃고 있는 동상.

마치 자신을 위해 웃어주고 있는 것 같아서 준경은 가슴이 미어졌다.

“주군. 이제 주군이 제가 있는 곳에 돌아올 거라는 희망은 버렸습니다.”

그게 맞는 말이었다.

수도 없이 지나간 세월에 그는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쓸쓸하게 웃고 있는 동상을 준경은 애틋하게 바라보다가 잠시 옆을 둘러봤다.

이제 시운을 찾는 동료들은 없었다.

데스나이트와 베른. 아콘. 아레스. 등등.

그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 떠났거나 죽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다른 곳에서 자신과 같이 주군을 기리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지.

“주군이 말씀하신대로 모든 것을 이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인간이 아닌 제 몸이 다하는 날까지 주군을 그리워 할 것 같습니다.”

그의 낮은 음성이 이어짐에도 동상은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비가 내렸다.

준경은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아가면서 동상이 비에 젖어 씻겨져 내려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준경은 눈을 감았다.

이시운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스승님은 제가 사는 나라의 역사 속 영웅이지만, 제겐 영웅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소인은 주군께 어떤 존재입니까?”

“어떤 존재긴요. 제 사람이죠.”

“신하 관계와 같은 뜻이옵니까?”

“스승님과 제 관계는 누가 위고 누가 아래가 없습니다. 같은 인격이고 우리는 서로를 위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

“제 소중한 사람이란 뜻이에요. 그렇다고 친구 먹기에는 나이 차이가 너무 나서요.”

그리고서 이시운은 천진난만하게 웃었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준경은 입꼬리를 올리며 쓸쓸하게 웃었다.

“보고 싶습니다. 이제는 볼 수조차 없지만.”

그가 준경에게 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스승님. 세상에는 보고 싶어도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은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거니까요. 그럴 때는 그냥 마음껏 생각하세요. 그리고 그리워 하세요. 만나지 못해도 그 마음만으로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

가슴이 아리는 상념에 흠껏 잠긴 채 어깨가 비에 젖어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다가 기척이 느껴져 눈을 떴다.

“항상 이 곳에 계시네요?”

우산으로 얼굴이 덧가려져 고혹적인 입술만 보였으나 목소리와 몸매로 여성임을 알 수 있었다.

“방해하지 말거라.”

“그럴 생각 없어요. 다만 비를 많이 맞으셔서 감기 걸리실까봐요.”

그리고 여성이 우산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준경은 여성의 얼굴을 보고 세상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경국지색의 미인이구나.’

너무 아름다운 흑발의 여성의 얼굴을 보자 그렇게 느꼈다.

굳이 경계하진 않았다.

그 어떤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고, 살수 타입도 아니었다.

만약 이 여성이 살수라면 진즉에 기습했을 것이다.

그녀는 우산을 들어 준경이 비를 맞지 않게 해주었다.

“이 동상인 분과 깊은 관계셨군요.”

“나의 주군이셨다.”

“주군이라.”

자신의 이마까지 정수리가 닿는 훤칠한 키의 여성은 우산을 가만히 든 채 상념에 고요하게 젖어있는 준경 옆에 서 있었다.

“뭐하는 거지?”

준경은 한 시간이 지나도 옆에서 지켜주던 여성이 의아했다.

“당신이 매일 이 동상 앞에 찾아오는 것을 봐왔어요.”

“그런데?”

“누군가를 그토록 그리워 하는데 비도 맞고, 혼자 있으면 적적하잖아요? 그래서 같이 있어 드리려구요.”

“왜지?”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준경은 여성의 말투가 주군 이시운과 비슷하단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한 시간이 흘렀다.

감은 눈을 뜬 준경은 옆에 아직도 서서 가만히 자신을 기다려주는 여인을 보고 신기했다.

“아직도 가지 않은 것이냐?”

“방금 말했잖아요? 같이 있어 준다구요.”

“…!”

미소로 반달눈이 된 여성을 보며 준경은 시간이 멎는 듯 했다.

-스승님!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제가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구요!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주군 이시운과 말투가 닮은 미녀.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다 보았다.

“이제 묵념은 다 끝났나봐요?”

“덕분에 비는 맞지 않았군. 고맙다.”

그리고 준경은 돌아서서 가버렸다.

그러나 준경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흑발 여성은 우산을 쥔 채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날.

폭우가 쏟아지는 발카스의 도시.

준경은 비에 젖어 축축해진 지면을 밟아가며 석상에게 걸어갔다.

“역시 오늘도 오셨네요?”

석상 앞에서 어깨에 우산을 걸치고 서 있던 여인이 물었다.

어제 그 여인이었다.

“왜지?”

“오늘도 혼자 비를 맞아가면서 몇 시간이나 이 동상 앞에서 있을 거잖아요? 그래서요.”

“…….”

말도 안 되게 친절한 여성의 얼굴을 살펴봤다.

무언가 목적이 있는 건 아닐까.

사람은 어떤 목적이나 악의가 있으면 눈빛과 얼굴에서 드러나게 돼있다.

척준경은 인간들이 지을 수 있는 천의 얼굴과 표정들을 모두 봐왔던지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저 여성에게 다른 동기는 없는 것 같다.

“그 말이 진심이군.”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을까요?”

준경은 몇 시간동안 주군을 위한 묵념을 하고 나서 옆을 바라봤다.

비에 흑발 머리칼이 축축해진 여성은 큰 눈으로 준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가지 않았군.”

“몇 번 말해요. 같이 있어준다고 했잖아요. 아저씨.”

혹시나 이 여인은 주군의 환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만 자르면 참 미남일 것 같은데.”

“이제 그만 가겠다.”

“당신은 어디로 가시나요?”

“나는 이리저리 떠도는 방랑자다.”

그 말에 여성이 킥 웃었다.

“왜 웃지?”

“낭만이 가득한 사람이네요. 춥지 않아요?”

춥지 않냐는 물음이 준경에게 참으로 묘하게 느껴졌다.

대륙제일검.

망자 부대를 이끄는 검신.

모든 생물이 그렇게 불렀다.

그런 그들이 자신에게 그런 물음을 해오지 않았었다.

추움도, 더움도 그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렇게 물어오고 있다.

“찻집가서 가서 차나 한잔 해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 것이냐?”

“참. 딱딱하시네. 검을 차고 도복을 입은 것을 보니 무사인 것 같은데 무사는 뭐 감기 안 걸린데요?”

“나는….”

준경의 말이 끊어졌다.

여인이 준경의 팔을 이끌었고, 준경은 무언가 모르게 거부하지 못하고 끌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산 하나에 둘이 엉켜붙어 찻집으로 향했다.

준경은 순간 오묘한 감정을 느꼈다.

일평생 검수로 살아왔던 자신으로서는 처음 느껴보는 당혹스런 감정이었다.

찻집에 들어섰을때 사람은 몇 없었다.

나무 테이블에 마주 앉아 여인과 차를 마셨다.

여인은 찻집 사장에게 수건을 빌려 준경에게 내밀었다.

준경은 축축해진 물을 수건으로 닦았다.

“근데 저기요.”

“말하거라.”

“왜 이렇게 말이 없어요?”

“…….”

준경은 순간 할 말이 없었다.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여인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마치 세상에 천사가 내려온다면 저런 모습일까 하는 미인이 말이다.

“그러니까….”

그리고 정적이 흘렀다.

“이 아저씨 완전 낭만파네.”

“여인과는 말을 해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준경의 말에 여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둘은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차를 음미하며 차가워진 몸을 달랬다.

“그렇다면 내가 재밌는 이야기 해줄게요. 잘 들어봐요.”

그러면서 여인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왔다.

그 이야기는 준경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묘하게 듣고 있는 자신이 의아했다.

-스승님도 좋은 사람. 좋은 여자가 생기면 연애하세요. 마냥 홀로 살다가 늙어 죽으면 그만큼 슬픈 일도 없을 것 같아서요.

시운이 준경에게 검술 훈련을 받다가 문득 던진 말이었다.

그 말이 이제서야 기억이 났다.

‘그것도 주군의 뜻이니까...’

“저기요!”

“...왜지?”

“내 말 듣고 있어요? 웃기라도 하던가. 아니면 맞장구라도 쳐주던가 하죠?”

“그래.”

그리고 준경이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모습에 빵 터진 여인은 고개를 내밀어 준경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뭘 그렇게 보느냐?”

“귀여워서요.”

“뭐? 그게 어떤 뜻이지.”

“당신같은 사람이 가끔 보이는 면모. 그런 뜻으로 알면 돼요.”

준경은 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쁜 뜻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는 잠시 고개를 돌려 바깥을 바라봤다.

찻집 밖으로 우수수 떨어지던 비들이 점점 줄어져 갔고, 해가 떠올라 지상을 내리쬤다.

십 년이 흘렀다.

이제 이시운의 동상을 찾는 사람은 하나가 아닌 셋이 되었다.

“아빠! 이 동상은 누구야?”

여인은 남편이 온전히 생각에 잠길 수 있도록 아이의 입을 막고 검지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아빠 잠시 하실 일이 있으니 우리는 가만히 아빠를 지켜보는 거야. 알겠지?”

어머니의 큰 눈과 아버지의 체격을 쏙 빼어닮은 아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빠는 저 동상으로 만들어진 사람과 무슨 사이인걸까...’

아이는 숨을 죽이고 생각에 잠겨있는 아버지와 동상을 번갈아보며 생각했다.

여인은 그런 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려 토닥여주며 남편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오늘따라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해는 쨍쨍했고, 발카스의 도시인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거리를 누비며 준경 옆으로 스쳐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남자는 동상 앞에 서서 그를 기리는 마음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고.

여인과 아이는 그런 남자의 뒤에서 가만히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지켜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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