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5화
후일담- 중년 배우의 각성 (2)
허공에 뚫린 커다란 구멍.
그 사태로 인해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 언론 매체가 난리가 났다.
누군가는 외계인의 침략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고.
또 누군가는 초자연적인 과학적 현상이라며 그 의의를 밝히려고 했다.
대한민국은 물론 전 세계를 뒤덮고 나타난 검은 구멍은 반나절 후 사라졌다.
그러나.
세계 특정 사람들의 귓가에 메세지가 들려왔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각성했다는 메세지 말이다.
환청이라고 듣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경험했기에 그렇게 치부할 수 없었다.
-각성했다는 소리 듣고 몸이 이상해진 것 같은데..
-저도요!
-저는 헬스장에서 일하는 보디빌더인데 그 소리가 들려오고 레벨업을 했다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마치 게임처럼요...
-이게 무슨 상황임?
다양한 사람들이 그런 현상을 겪었다고 커뮤니티에 게시글을 남겼다.
그 사이에서 이시형은 낡은 기억을 뒤지며 이 현상이 단순한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나 혼자만 3회차에 나온 그것과 똑같잖아.”
벤의 뒷좌석에서 테블릿에 눈을 박으며 시형이 중얼거렸다.
“형님한테도 각성했다는 그 말이 들려왔어요?”
운전하던 매니저 박성훈이 물어왔다.
“아니.”
“근데요. 형님.”
“왜?”
“형님이 예전에 출연했던 그 드라마가 이런 내용 아니었어요? 게이트가 생기고 사람들이 각성을 하고…… 무슨 게임마냥.”
“그러니까 나도 그 생각 중이었다.”
“미친.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래.”
“아무튼 나 좀 쉴 테니까 운전이나 해라.”
“옙!”
시형은 눈을 질끈 감고 생각에 잠겼다.
성훈은 룸미러로 보이는 마흔줄 이시형의 모습은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모습이었다.
‘뭐 어쨌든... 별 일이야 일어나겠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겠지.’
과학자들이 밝히지 못한 초자연적인 현상 뭐 그런거 아니겠나.
낙천적인 성격의 성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살다 보면 참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이 일들을 단정지었다.
‘이번 사극도 종영했고 나랑 형님도 좀 쉴 수 있겠군.’
성훈은 슬쩍 룸미러로 시형을 관찰했다.
‘그나저나 저 형님은 언제 결혼하실려나.’
눈을 감고 사색에 잠겨있는 이시형의 모습은 젊은 청년 모습 그 자체였다.
그런 그의 입술이 뻐끔거렸고, 순간 그의 눈꺼풀이 번쩍 들어올려졌다.
“악몽 꾸셨어요?”
매니저로 몇 년간 시형을 뒷바라지한 성훈은 시형의 저 눈빛이 굉장히 혼란스러울 때 나오는 눈빛이란 걸 잘 알고 있다.
“…아니다.”
“제가 형님 몇 년을 모셨는데 그 표정은 딱 귀신 꿈이라도 꾼 표정인데요?”
“운전이나 해. 넌 말이 너무 많아.”
“옙!”
“그래놓고 또 말 걸거지?”
“옙!”
시형은 조용히 귓가에 이어폰을 꽂았다.
‘진짜로 내 눈에 떠오르다니.’
시형은 놀라운 마음을 곧 숨겼다.
속으로 상태창이라는 단어를 외쳤더니 눈 앞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눈을 비비며, 홀로그램창이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다시 속으로 읇조리니 상태창은 다시 눈 앞에 떠올랐다.
‘이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오래 전 정확히는 이 나이의 반절 정도 됐을 나이에 출연했던 드라마 ‘나 혼자만 3회차’의 내용과 흡사한 부분이 많았다.
상태창. 그리고 게이트.
믿을 수가 없었다.
이제 불혹의 나이에 다다랐지만, 외모나 신체적인 능력은 팔팔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쭉 배우 생활의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런 이 시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그리고 줄기차게 쏟아지는 뉴스 속보를 보면서 특정 인원만이 각성이라는 판결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파트 자가에 도착한 시형은 쇼파에 앉아서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고민했다.
만약 그 드라마와 세상의 흐름이 같아진다면 이 세상에는 마물들의 침략이 이어질 것이다.
그런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기에는 맘에 걸리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때 걸려온 전화에 시형은 전화를 받았다.
-시형아.
아버지의 육성이 무겁다.
나이는 이제 칠순에 가까워졌지만 시형에게는 항상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하던 아버지인데.
“아버지 식사는.”
-하나만 물어보자.
말을 자르고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
곧 다음 물음이 뭔지 예상하고 있다.
결혼은 언제 할거냐는 아버지의 추궁과 곧이어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들어야 할 것이다.
“아버지……. 결혼보다도 저는 아직 일이 더 좋아요.”
-혹시 너 각성했냐.
“...예?”
아버지 역시 요즘 화두에 오른 그 현상에 대해 관심이 있으셨던 것 같다.
이실직고 해야할까.
“저기….”
-각성했구만.
“…….”
-말이 없는 것을 보니 각성한게 맞네.
‘아버지는 날 단박에 꿰뚫으신다니까.“
그리고 아버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잠시 정적이 수화기 너머로 이어졌다.
-지금 별장으로 와라.
“거긴... 강원도잖아요.”
-그러니까 빨리 튀어와. 너도 어릴 때 날 닮아 참…… 토를 많이 다는구나.
“저도 이제 마흔이 넘었는데.”
아버지는 할 말만 하고 끊으셨다.
시형은 차를 끌고 아버지가 머무르는 강원도 별장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생각이 많아지거나 잠시 쉬고 싶을 때 이 별장에 계시곤 한다.
500평에 달하는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별장 안에는 아버지가 키우는 화초들과 잔디가 어우러져 있고 저 멀리서는 바다가 넘실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그리고 들어서자 츄레한 차림으로 아버지가 나와 시형을 반겼다.
나보다 한 뼘은 작은 키지만 아버지는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나 정정했다.
그 나이에 비해 주름도 없고, 체력도 좋으시다.
뭐 그런게 지금 중요한게 아니지만.
“앉아라.”
“오늘따라 되게 딱딱하게 구시네요?”
아버지는 테이블에 양주가 든 글라스를 손으로 흔들며 날 바라봤다.
-전문가들은 이 기이한 현상에 대해 제대로 의견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 시각…….
틀어진 텔레비전에서 아나운서의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각성한지 얼마나 됐지?”
“…그보다 잘 알고 계시네요.”
의사일도 은퇴하고, 세상에 별 관심이 없어보이던 아버지가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 좀 놀라웠다.
“얼마나 됐냐고.”
“이틀 전이요.”
“이틀 전?”
시형은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낯설었다.
평소 아버지에게는 보이지 않는 초연적이고 단단한 눈빛이다.
“잠깐 일어나봐.”
“...방금 앉으라면서요?”
“말대꾸는 진짜.”
일어선 이시형을 아버지가 올려다봤다.
“날 한 번 넘겨봐라.”
“술 취하셨어요?”
“넘겨 보라고. 너 요즘 사극 찍는다고 무술 연습 많이 했다며. 유도도 배우고.”
“아버지! 저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풀로 액셀 밟아서 두 시간만에 내려왔다고요.”
“네가 지금 날 넘기면 다신 너에게 결혼하라고 독촉하지 않을게.”
“…예? 정말요?”
“내가 약속 안 지키는 거 봤냐?”
아버지는 약속은 칼 같이 지키신다.
그동안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결혼 독촉을 뇌에 물리적 데미지가 가도록 받아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약속 하나 더 할게. 어머니한테도 독촉 하지 말고 네가 알아서 할 때까지 널 존중하라고 할게.”
“....정말요?!”
“그러니까 일단 해봐.”
“술 취했다고 무르시기 없깁니다.”
이 무슨 웃긴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술에 취해서도 뱉은 약속은 억지로라도 지킨다.
그것을 알고 있는 시형은 한편으로는 아버지를 유도 기술로 넘기기가 미안했지만 적당한 힘을 써서 다치지 않게만 한다면 그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시형이 두 손을 뻗어 위아래로 흔들며 유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반면 아버지는 가만히 시형을 바라봤다.
‘이거 진짜... 넘겨도 되나.’
아버지는 나이에 비해 정정하다고는 하지만, 아버지에 비해 힘이 넘치는 나이인 데다가 약 일 년간 작품을 위해 유도에 매진한 시형에게는 손 쉬운 일이었다.
탁.
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이제 허리를 뒤틀어 업어치기만 하면 된다.
순간적으로 허리를 비틀며 아버지의 팔을 잡아 당겼다.
“죄송…”
쿠웅!
‘뭐야?’
시형은 순간적으로 시야에 천장이 들어오면서 바닥에 뒹구르고 있는 자신을 보며 어안이 벙벙했다.
“다시. 마지막 기회다.”
분명 자세는 완벽하게 들어갔는데.
“요즘 취미로 유도 배우셨나보네요. 그럼 전력으로 갑니다. 죄송합니다만.”
“말이 길다.”
시형은 온 힘을 다해서 아버지의 티를 양손으로 잡고 그대로 왼 다리로 안다리를 시도했다.
쿠덩.
“...어?”
그러나 아버지가 슬쩍 민 것에 엉덩방아를 찧은 것은 자신이었다.
납득할 수가 없는 시형이 아버지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하아.”
아버지는 바닥에 앉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뜬 시형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눈 감을 나이가 돼서도 싸워야 할 판이구나.”
“....예?”
"너 얼른 레벨업이나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