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7화
후일담- 만렙의 노인네
‘기운이 심상치 않다.’
게이트 안에 들어온 시운은 앞을 바라봤다.
빛 한점 없이 까마득한 사방. 죽은 피가 말라있는 냄새까지.
영락없는 미궁의 광경이다.
“게이트를 닫으려면 보스를 죽여야 하니깐.”
고요하게 살기가 피부결로 느껴진다.
일본도를 쥔 채 앞으로 걸어갔다.
이제 칠순이란 나이라 예전같지는 못하지만 오랜만에 심장이 뛰었다.
‘신안.’
[신의 눈을 개안합니다.]
[시신경의 혈류가 증가합니다.]
[시신경의 세포가 활성화 됩니다.]
[시각을 담당하는 시각피질이 변모합니다.]
번쩍-.
그러자 미궁 속 저 멀리 모든 것까지 뇌리에 속속 박히기 시작했다.
‘이거… S급 이상의 게이트인데?’
이곳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그랬다.
계속해서 나아가다 이제 뛰었다.
손에 쥔 칼날이 뛰는 소리에 의해 종이 휘날리듯한 금속음을 뿜었다.
마수들이 보인다.
네 개의 적색안을 하고 있는 마물들은 시운의 기척에 이를 갈았다.
그리고 달려들었다.
퍼억!
쇄도해오는 마물의 안면을 왼손으로 밀어내고 그대로 일본도를 뱃속으로 집어넣었다.
푸우욱.
무언가를 처지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시스템이 백 퍼센트 활성화가 되지 않았는지 마물의 명칭은 들리지 않았다.
진한 피냄새가 느껴진다.
이름조차 모르는 마물들을 미친듯이 베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시운을 마주하고 달려들 때는 맹수같던 놈들이 시운의 칼질 한 번에 고양이처럼 깨갱 거리며 죽어갔다.
어깨를 가볍게 풀며 길을 막아대는 마수 수십 마리를 베어내자 뒤에서 다른 마수보다 몇십 배는 큰 무언가가 형상을 드러낸다.
─그오오오오.
“네가… 보스인가?”
거대한 마수가 성대를 긁어대는 소리는 시운의 몸을 흔들 정도였다.
쿠웅! 쿠웅!
네 발이 달린 마수.
마수의 앞발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미궁이 뒤틀릴 정도의 진동이 울렸다.
시운은 마수의 머리 위로 떠오른 것을 보았다.
[네이카르 Lv. 192]
“.....192?”
그 독백에 마물은 자신의 강함 수치를 보고 놀란 줄 알고 기괴한 흉음을 냈다. 마치 웃듯이.
“192면 몸도 안 풀리겠는데.”
─그르?
의외의 말에 거대한 얼굴을 갸웃거리던 마수의 앞발이 날아왔다.
화물차만한 앞발의 그림자가 시운을 뒤덮는다.
콰앙!
─그오오…….
앞발이 지면을 뭉갬과 동시에 늘어지는 신음을 뱉은 거대한 마수의 육신이 옆으로 넘어갔다.
시운은 마물의 미간에 꽂아넣은 일본도를 가볍게 빼냈다.
단 한 번의 공격이면 충분했다.
[누군가가 당신의 기운을 감지합니다.]
[던전이 활성화됩니다.]
[던전의 지형이 변합니다.]
예전 초보 헌터 때였다면 저 시스템 소리에 섬뜩함을 느꼈지만 웃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아무런 긴장도 되질 않았다. 조금의 미동도 말이다.
“나와라.”
시운의 목소리에 공간이 소용돌이치며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 공간 속에서 아주 오랜만에 보는 녀석의 인영이 보인다.
“뭐냐? 넌 누구냐?”
“누구긴. 네 주인이지.”
“……이시운? 그런데 얼굴이 많이 갔구나.”
“너도 나이 먹어봐라.”
일미호는 얼굴에 주름살이 져있는 시운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보다 너도 외형이 변했구나.”
시운의 말대로 일미호의 외형은 전과 달랐다.
두피에 솟아있는 세 개의 뿔과 하얀 털을 휘날리는 아홉개의 꼬리.
일미호의 눈은 전보다 더욱 고고해져있었다.
“멋이 좀 나냐? 난 전과는 다르다.”
“그게 네 최종 형태의 모습이냐?”
“아직 하나 남았다.”
“꼬리?”
“그래. 그보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이지?”
“앞에 보이는 건 죄다 쓸어버려.”
시운의 말에 일미호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일미호의 시선으로 먼지를 일으키며 무언가가 몰려오고 있었다.
“귀찮은데 한방에 간다. 귀 좀 막고 있어라. 주인놈아.”
그리고 일미호의 부풀어진 아가리에서 광대한 브레스가 뿜어졌다.
콰아앙!
그 브레스는 전방으로 멈춤 없이 날아가며 닿는 모든 것들을 그대로 녹여버렸다.
-………처치 하였습니다.
-………처치 하였습니다.
-………처치 하였습니다.
-………처치 하였습니다.
콰아아앙!
끝내 브레스가 완전히 터지는 폭발음이 저 멀리서 들려왔다.
섬광이 한 번 번뜩이며 미궁의 잔해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단번에 미궁을 싹쓸이한 일미호가 대견했다.
“이야... 대단한데? 진짜 많이 컸구나.”
“자존심이 상하네.”
“왜?”
일미호는 전방 저 멀리를 턱짓했다.
“한 놈이 내 브레스를 맞고도 버텨냈다.”
완전체 일미호의 브레스를 몸으로 받아냈다면 그건 분명 이 게이트의 보스일 것이다.
‘설레는데.’
다른 잔챙이에 비해 강한 보스를 온 몸으로 부딪혀 보고 싶은 마음에 심장이 고동쳤다.
“일미호. 오랜만에 등 좀 내줘라.”
이제는 말 한필만한 일미호의 등에 탄 시운은 순식간에 앞으로 달려나가는 일미호에 몸을 맡겼다.
생물들의 꿈속을 관장하는 몽환계(夢幻界)를 관장하는 천생도깨비는 가슴팍이 따가운 느낌에 눈빛이 진지해졌다.
“생각보다 강한 놈들인 것 같구나.”
천년종의 브레스와 맞먹는 푸른 불꽃의 구체를 몸으로 받아내며 그렇게 직감했다.
천생도깨비는 등뒤에 감춰둔 방망이를 지면에 내리쳤다.
지면이 박살나며 천둥 소리가 미궁 전체를 뒤덮었다.
“나와라.”
그때 천생도깨비 앞으로 유유히 걸어오는 인간의 형태가 보였다.
인간이라니.
생각보다 김이 식었다.
천생도깨비는 크기를 가늠 할 수 없는 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작은 인간의 형태가 개미만하게 보인다.
“방금 그 브레스는 네가 쏜 것이냐?”
믿기지가 않아서 물었다.
“네 질문에는 대답해줄 필요는 없고…… 네가 보스냐?”
“날 보고도 전혀 주눅들지 않는군.”
천생도깨비는 곧 저 인간을 육편으로 만들 것이다.
그 전에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오랜만에 인간을 만나보는지라 몇 가지가 궁금했다.
“이 곳의 마물들을 단신으로 처리한 것을 보니 평범한 인간은 아닌 듯 한데.”
“평범한 인간이 아니고…… 이제는 노인네다.”
“인간은 나이를 먹고 몸이 노쇄하지. 한심한 종족.”
“근데 너는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가소롭다.”
인간에 대해 질문을 하려던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저런 건방진 노인네에게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다.
그때.
“군왕의 기운.”
“……!”
인간이 작게 읇조린 말 한마디에 치켜들었던 방망이가 손에서 떨어져 나가 지면에 나뒹굴었다.
천생도깨비는 순간 당황했다.
‘뭐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도 깜빡일 수가 없다.
마치 심장이 콱 막힌 느낌과 함께 몸이 말을 듣질 않는다.
“어…… 어째서?”
노인네는 검 한자루를 든 채 유유히 자신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마법이란 말인가!’
자신은 명계와 맞먹을만한 몽환계를 관장하는 신의 존재다.
그런 자신이 손 하나 까딱할 수 없게 할 정도의 마법은 대륙, 아니 그 어떤 차원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때 천생도깨비의 눈이 튀어나올만큼 커졌다.
-Lv. 999
노인네의 정수리 위로 떠오른 그 수치를 보고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노친네 정체가 뭐냐?”
믿을 수가 없었다.
레벨이 999라니.
저런 수치를 가진 ‘존재’는 세상에 태어나서 있다고 들어보지도 못했다.
아니. 그딴 헛소문조차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고작 늙은 ‘인간’이 저런 레벨을 가지고 있다니.
“마물아. 너희들이 어떻게 해서 다시 이 땅에 나타난지는 모르겠는데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쉽지 않을거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내공에 눌려본 적이 없던 천생도깨비는 살려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야가 뒤엉키면서 천장과 바닥이 동시에 교차하며 보였다.
‘날 죽인 너의 이름이라도 알고 싶다.’
그러나 말이 내뱉어지지 않았다. 두 눈에 미궁 깊숙한 바닥만 보이고 목덜미에서 거친 따가움이 느껴질 뿐이었다.
천생도깨비는 자신의 머리가 날아갔음을 그제야 직감했다.
드드드드!
머리가 날아간 천생도깨비의 경직된 몸이 지면에 무너졌을 때 미궁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던전을 공략하였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싱거운데?”
시운은 일본도를 검집에 밀어넣으며 아쉬움을 느꼈다.
오랜만에 칼을 쥐어보는데, 몸조차 풀리지 않은듯한 느낌이다.
곧 사방의 풍경은 변화하여 여의도의 경치로 변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