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8화
아버지와 아들
점점 흐려져가는 천생도깨비의 육신에 손을 뻗었다.
“일어나라.”
그 순간 천생도깨비의 잘려나간 상체가 꿈틀거리며 머리도 없이 일어나다가 다시 쓰러졌다.
[현재 상태로는 불가합니다.]
‘....!’
방금 귓전으로 들려온 음성보다 다른 것에 집중해있었다.
순간 무언가가 교차해지며 낯익은 기운이 느껴졌다.
“스승님… 아직 살아있구나.”
시운은 팔자주름이 깊은 입가를 올리며 웃었다.
척준경.
그의 기감이다.
분명 느껴졌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이 기운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오랜만에 칠순 가까이 먹은 노친네가 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었다.
“이것은 주군의 기운이다!”
준경의 눈이 빛났다.
팔이 끊어지도록 검을 휘둘러 마물을 베어내면서 뻐근하게 느껴졌던 감각도 사라지는 기분이다.
순식간에 전장에 있던 마물들을 모조리 도륙한 뒤에 카이칸을 타고 시운의 석상 앞으로 향했다.
“이 석상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아니었다.”
분명 그랬다.
주군의 형상을 한 석상에서 기운이 느껴질 리는 없다.
그러나 분명 등골을 타고 뇌리로 오래토록 그리던 그의 기운이 느껴짐을 알 수 있었다.
─그르윽!
카이칸은 이시운의 동상을 보며 짧게 울부짖었다.
동물들의 왕인 짐승 카이칸은 그를 부르듯 낮게 포효했다.
“카이칸. 내가 분명히 주군을 느꼈다. 주군은 아직 살아계신다.”
준경의 말을 듣고 카이칸이 거대한 귀를 쫑긋 세웠다.
“난 그동안 주군을 찾을 방법을 모색해볼테니 자네는 군단을 이끌고 조금만 힘 써주게.”
준경이 말한 ‘군단’이라 함은 카이칸들의 동족인 동물들을 뜻한다.
카이칸은 대답이 없었다.
“자네와 반드시 약속하지. 주군과 다시 재회하게 해주겠다고.”
척준경이 약속이란 말을 붙이자 카이칸은 대답하듯 포효하며 가버렸다.
“그토록 원하고 바라면 하늘이 돕는다고 했던가. 딱 그 말 그대로네.”
준경은 시운의 석상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반드시 주군을 다시 뵙겠습니다.”
그때 뒤에서 짚신 소리가 들려와서 돌아보니 척소한이 멀그러니 서있었다.
“넌 왜 여기 있느냐! 내가 한 말을 잊었냐?”
“어머니는 안전한 곳에 모셔놨습니다.”
“지키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일갈하는 준경의 육성에도 척소한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언제나 아버지를 어렵게 생각하던 그였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저도 아버지를 돕고 싶습니다.”
“안 된다.”
“소자를 과소평가 하시는 겁니까? 검술만큼은 아버지를 따라가지는 못하지만 아버지께 십 년간 검술을 배우며 그 누구와 대련해도 진 적이 없습니다.”
척소한은 검을 빼어들었다.
“너무 위험하다. 난 네가 위험해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저도 아버지의 아들이기 전에 이 나라의 백성이고 남자입니다. 나라를 지키는데 힘을 보태고 싶을 뿐입니다.”
그 말은 준경의 가슴을 건드렸다.
이제 스무살 밖에 안 된 척소한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대장부 같았다.
“마음은 잘 알겠지만 안 된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척소한은 빼어든 검을 준경에게 겨누었다.
“소자가 아버지의 검을 십 분간 버틴다면 허락해주시는 걸로 하시죠.”
준경은 소한이 겨누고 있는 칼의 검신을 쭈욱 바라봤다.
검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검에 신념이 담겨있구나.’
척소한이 검술만큼은 귀재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일류 무사가 갖춰야 할 것을 갖추고 있는지도 여태 몰랐다.
“네가 너를 너무 몰랐구나.”
그 순간 준경의 눈에서 안광이 뻗어나왔다.
‘최대로 하실 생각이다.’
척소한은 대륙제일검인 준경이 완연한 내공을 발산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직감했다.
‘나도 반드시 아버지께 인정받는다.’
척소한은 순식간에 지면을 밟고 준경에게 튀어나갔다.
척소한의 검이 두 동강이 났다.
소한은 호흡을 헐떡이며 휘청이다 지면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딱 십 분 일초 버텼네요.”
“시간도 세고 있었단 말이냐?”
준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들 척소한이 허튼 생각을 하짐 못하게 전력으로 검을 휘둘러 포기하게 만드려고 했으나 소한은 생각보다 끈질겼다.
“아버지와 검을 맞대면서 시간도 세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9분 째부터 정말 힘들더군요.”
그 말에 준경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자신과 검을 맞대면서도 동시에 시간까지 세고 있었다니.
검과 검이 맞대는 검수들은 목이 날아가는 실전 대련을 펼칠 때 잡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척준경은 분명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소한은 십 분간 무너지지 않았고, 심지어 시간까지 세고 있었다고 한다.
‘내 아들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
그는 살면서 소한이 거짓말을 한 것을 보지 못했다.
“허락해주시는 겁니까?”
“…네가 어쩌면 나보다 뛰어난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정말요?”
“발카스 국경단으로 들어가라. 네가 할 일이 있을거다.”
소한은 준경이 돌아서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검술에 대해 인정받은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현재 이계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진 상황이다.
대형 게이트에서 쏟아진 마물들이 이카루스 대륙의 곳곳에 퍼져나갔다.
근데 신기한 건 그들은 지능이 있는 듯 했다.
무자비하게 인간들을 살육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영지를 찾아 하나둘씩 몸을 숨겼다.
그것은 어쩌면 더욱 불행이었다.
그리고 시련의 탑이 있던 곳에 데스나이트와 척준경이 도착했다.
그들은 무너진 탑의 잔해들을 파헤치고 또 파헤쳤다.
“이 탑이 왜 생겼는지 알 것 같다.”
준경의 말에 데스나이트의 걸음이 멈췄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이 시련의 탑은 날 유인하기 위해서였던 거야.”
“계속 얘기해보게.”
‘바람의 군왕’인 준경은 특정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런 그가 데스나이트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시련의 탑이 생겨난 이유에 대해 말했다.
“……그게 정말이라면 더욱 큰일이 아닌가.”
“큰일이지.”
“그러니까 자네가 말한 ‘바람의 군왕’은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고 그 힘을 끌어들여 흡수하려고 어떤 존재가 탑에 유인해 오랫동안 그 탑에 자네를 머물게 하면서 점차 자네의 기운을 포식했다는 말이지?”
“그렇네.”
“그렇게 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아마도 현계와 이계를 다시 이을 심산이겠지.”
준경은 시련의 탑 최상층에서 느꼈던 미지의 기운을 떠올렸다.
그 기운은 탑의 보스가 가지고 있던 기운이 아니었다.
“주군을 찾을 방법이 여기에는 없는 것 같군.”
“자네 말대로라면 기다리면 되는 거 아닌가?”
데스나이트의 물음이 맞았다.
척준경의 말 그대로라면 현계를 잇는 차원이 열릴 것이고 그렇다면 그 차원을 통해 현계에 진입하면 그만이다.
“듣고 보니 그렇네?”
“척 공. 자네…… 생각보다 우둔하군.”
그러던 그때 준경의 검집에 박혀있던 데몬소드가 묘한 기운을 뿜어냈다.
마치 준경에게 언어를 전하듯이.
그때 준경의 눈이 번뜩 뜨였다.
“잠깐!”
“왜 그러는가?”
“이 곳에 있다. 그 문이.”
“…뭐라고?”
“뭐, 뭐야?”
이시형은 뉴스속보를 핸드폰으로 보며 기겁을 했다.
여의도에 게이트가 열렸다는 사실보다 더 놀란 것은 속보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단 것에 더 놀랐다.
정확하게는.
-배우 이시형의 부친 이시운 교수 각성자로 알려져.
-이시운 교수의 동영상이 커뮤니티에서 화제 조회수 1억 돌파.
시형은 너튜브에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영상이 올라온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기절할 뻔 했다.
눈을 의심했다.
항상 가운을 입고 환자들을 돌보던 아버지의 모습이 절반인 그의 기억과는 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으니 말이다.
“형님. 그 영상 보십니까?”
벤을 운전하던 매니저 성훈이 물었으나 시형은 대답하지 않고 영상에 집중했다.
‘이게 우리 아버지란 말이야?’
붕괴된 대교 위에서 보기만 해도 아득한 괴물을 물리치는 아버지의 모습이 낯설다.
칼 한자루를 들고 공중에 솟아 한강물을 가르고 용을 벤다?
마치 영화 속 히어로 같다.
“형님! 그 영상 보시는 중이냐구요. 요즘 재앙때문에 드라마도 못 찍고 일거리도 없는데 다른 일이나 알아보실래요?”
“좀 닥쳐봐. 넌 말이 너무 많다고.”
“넵.”
시형은 그 영상을 다시 돌려보았다.
다시 봐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강원도 별장에서 자신이 아버지에게 손도 쓰지 못하고 넘어간 일이 오버랩되어 스쳐갔다.
시형은 곧바로 시운에게 전화했다.
그러나 전화를 받지 않는다.
“형님! 형님?”
“또 쓸데없는 말 하려고 말 거는거면 너 회사에 얘기해서 자른다?”
“그게 아니고요. 형님! 대박 속보 떴어요. 정부에서 각성자 협회를 만든다고 하는데요?”
“뭐? 각성자 협회?”
속보를 확인했다.
정부가 각성자들에게 대대적인 지원을 할 것을 약속하며 협회를 만든다고 전해왔다.
정부가 발표한 그들의 연봉은 최소 대기업 임원급 연봉이었고.
혜택은 군면제에 노후 혜택에 공무원을 뛰어넘는다.
하기야 이 빌어먹을 사태를 구원할 유일한 사람들인데 그 정도는 해줘야 하겠지.
“문제는 그게 아니다. 성훈아. 강원도 별장으로… 아니다. 차 돌려.”
“어디로요?”
“내가 아는 삼촌 집으로 간다.”
시형은 이시운에게 레벨업을 하라는 어이없는 말을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아버지는 어차피 내게 얘기 해주지 않을거야.’
그가 아는 시운은 아들에게 모든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아버지였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가장 가까운 사이인 김태훈에게 가서 모든 것을 물어봐야겠다.
‘삼촌이라면… 알고 있을거야.’
벤은 우회하여 태훈의 집으로 향했다.
자신이 출연한 ‘나 혼자만 3회차’ 라는 드라마가 현실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미 모든 것을 아는듯이 행동했었고, 살면서 가장 의아했던 것은 그 드라마 속 주인공이 아버지와 묘할 정도로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강춘식 작가는 아버지를 모티브로 했다고는 하지만 너무나 많은 요소들을 가져다 썼다.
그 이유를 물어도 그 작가는 답하지 않았었다.
‘어쩐지 너무 이상하다 했어. 여러가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