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대학
* * *
저번에 한 번 대학교를 탐방했기 때문에 우리는... 정확히는 내가 강의실을 올바르게 찾을 수가 있었다.
물론, 지영이는 그럴 기력도 없는지 눈을 감은 채로 내게 기대어 힘없이 걸음만 옮겼다.
그렇게 강의실에 도착하고, 신입생들의 첫 강의라 그런지 강의가 시작하기까지 약 2~30분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안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런 이들의 시선이 이제 막 강의실에 들어온 우리에게 몰렸다.
"민훈아~! 여기! 여기!“
어디 앉을까.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때.
창가 쪽, 중간 자리에서 이다혜가 손을 흔들며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녀는 이미 친해진 여자애들과 함께 앉아 있었는데 그녀들 뒤로 딱 두 자리가 비어있었다.
일부러 우릴 위해 남겨둔 건지, 아니면 부담스러워서 저기 앉지 않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저렇게까지 날 부르는데 무시하고 차마 다른 자리에 가서 앉을 수는 없었다.
"지영이는 왜 그런데?“
"그냥... 좀. 밤을 새웠지.“
"밤...? 밤을 왜 샜데? 혹시 긴장해서?“
이다혜는 보기보다 순수한 모습이 엿보이는 지영이로 인해 입꼬리가 귓가에 걸렸다.
정말 그랬더라면 겉모습과 비교하면 무척 귀여운 모습이 아닐까.
"근데 네가 어떻게 알아?“
이제야 알게 된 하나의 사실. 이다혜는 OT 때 같은 방을 썼던 신입생들과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 중 한 명이 내게 물어왔고.
"같이 사니까.“
"......“
"......“
동거한다는 사실을 굳이 숨길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우리가 사귄다는 사실은 소문을 내고 싶지 않더라도 알아서 퍼져갈 소식인 데다가 동거하는 게 뭔 죄를 짓는 것도 아니니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아니라 지영이라도 마찬가지로 태연하게 털어놓았겠지.
"가, 같이...? 그, 그럼 밤을 샌 이유가... 하와와.“
아. 맞다. 얘, 우리 말 엿들었었지?
이다혜는 OT 때, 버스 안에서 우리의 대화를 바로 옆자리에서 생생하게 엿들었었다.
그때 아마 적극적으로 내게 달려든 지영이의 말을 똑똑하게 들었었지. 그래서 지금 나와 지영이의 밤 생활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얼굴을 붉힌 것일 테다.
"다혜야 왜?“
"그, 그거 아닐까?“
"그거?“
"응... 그, 그거.“
"아, 아아아.....!“
이내, 그녀의 친구들도 뒤늦게 이해했다.
몬가... 몬가 주위에서 시선이 더더욱 날카롭게 내 몸을 찔러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만.
아무튼, 재수강으로 인해 우리와 함께 강의실에 앉아 있는 재학생들을 제외하고 침묵만이 흐르다가 시간이 점차 흘러 교수님이 안으로 들어왔다.
"다 왔나?“
안경을 슬쩍 들어올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엎드려 자고 있는 지영이를 발견하였고,
"쟤 좀 깨워.“
"네.“
더 재우고 싶은데... 어쩔 수 없나.
"지영아. 지영아.“
"으응......“
"일어나. 교수님 오셨어.“
"아......“
어깨를 살며시 흔들어도 엎드린 자세를 풀지 않았던 그녀가 교수님이라는 말 한 마디에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자퇴할까.“
"......“
"......“
잠을 방해해서 다시금 자퇴가 급 당겨오는지. 필터링도 걸치지 않고 그대로 내뱉었다.
그로 인해 그녀에게 모여 있던 시선들의 주인들이, 심지어 교수님까지 똑똑히 들었고, 교수님은 황당하다는 듯이 허탈하게 웃었다.
"자퇴는 자유지만 조금 다니다가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이름이... 지영아?“
얼굴이 워낙 예쁘다 보니 교수님들 사이에서도 벌써부터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했나 보다.
"하암~“
나라면 당황한 나머지 아니라고, 죄송하다고, 헛소리가 무심코 나왔다며 변명을 했을 텐데.
지영이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하품을 길게 내뱉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교수님은 여전히 허탈하게 웃음을 흘려보내며 시선을 거둬들였다.
"첫날이기도 하니, 강의는 하지 않고 앞으로 어떻게 강의할 건지 간단하게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교수님은 그 말과 동시에 곧장 PPT를 올려두며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했다.
학점 비율, 과제를 어떻게 낼 것인지, 시험은 또 어떻게 될 것인지 등등.
그렇게 간단하다고 말한 것에 비해 30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고, 그제서야 첫 강의가 끝이 났다.
쿨.
오리엔테이션을 열심히 들은 나와 달리 옆에서 지영이는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엎드려 잠을 청했다.
이럴 거면 시작 전에 왜 깨운 걸까. 갑자기 교수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다음 강의를 위해 지영이를 깨워야 하는 나도 원망스러웠다.
고등학교는 그냥 앉아만 있으면 교수님이, 아니, 선생님이 찾아와서 전교 1등이자 전국 10위권 안에 드는 지영이를 깨울 필요가 없었는데. 대학에서는 우리가 강의실을 찾아가야만 하니 가슴이 아파도 깨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지영아. 일어나.“
"으으......“
"가서 자자.“
이왕이면 먼저 강의실로 이동한 다음에 재우는 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그쪽 강의실을 쓰던 교수님도 우리처럼 빨리 끝냈을 것만 같은데.
"지영아.“
도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네.
조금 더 과하게 몸을 흔들자 지영이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키스해줘......“
"......“
지, 집이라면 좋다구나 하고 입을 맞출 텐데. 여긴 학교인데. 그리고 이다혜를 비롯한 그녀의 친구들과 다수의 학생들이 아직 강의실을 나가지 않은 상태인데.
"어머어머!“
"키, 키스래!“
이다혜와 친구들은 호들갑을 떨어대며 서로의 몸을 투덕거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질투의 시선도 있는데 정말 여기서 키스를 할지에 대한 의문, 기대가 서려있는 얼굴이 더 많았다.
거기에 더해 지영이는 정말 키스를 해 주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책상 위에 올려진 팔에 여전히 머리를 올려둔 상태였다.
조금 창피하긴 하지만. 뭐, 입학식때도 대놓고 했으니까.
쪼, 쪼옥.
역시나. 입술을 갖다 대었다가 바로 떼려고 하니 지영이는 내 뒤통수에 손을 얹어 잡아당기고선 혀를 집어넣었다.
대뜸 사람 많은 강의실에서 질척한 키스를 한 우리.
"가자.“
지영이는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한품을 한 차례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응.“
나는 먼저 자리를 뜨는 그녀를 따라나섰다.
*
세 번의 강의 모두 오리엔테이션만 하고 끝이 나다 보니 남는 시간이 상당했다.
그러나 점심시간을 앞둔 11시 강의가 빨리 끝나니 다른 시간 때보다는 훨씬 기뻤다.
"지영아~ 밥 먹으러 가자.“
우리를 졸졸 따라서 수강 신청을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인 이다혜는 이번에도 엎드려 자고 있는 지영이에게 다가와 말했다.
"내가 맛있는 곳 알아 놨거든. 같이 가자~!“
지영이는 귀찮아할 따름이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친구가 되어 보려고, 아니 이미 친구가 된 듯이 지영이의 몸을 살며시 흔들어 깨우면서 말을 이어갔다.
"아......“
더 자고 싶은데 하는 한탄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고.
"알았어......“
배는 고팠는지 순순히 일어났다.
"가자가자! 빨리 안 가면 꽉 차 버린다고!“
12시까지는 아직 30분이나 더 남았는데 뭘 그리 급한 건지 원. 이해할 수가 없......
떠들썩. 떠들썩.
이유가 있었다.
눈대중으로 보기에도 음식점은 무척 컸는데 안에는 학생들로 보이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으니까.
그래도 다행인지 자리가 하나 남아 있어서 우리는 그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밥을 먹었다.
이다혜의 말대로 꽤 맛있었다.
가격도 저렴했고.
다시 시간이 흘러 학교에서의 강의가 모두 끝이 났다.
지영이는 아침과 다르게 눈이 초롱초롱해진 상태로 집에 갈 생각에 기쁨이 가득 찬 얼굴이었건만.
이를 어쩌지. 우리 집에 못 갈 텐데.
"회식...? 꼭 가야 해?“
"그러는 게 좋지 않을까?“
"OT 했잖아. 근데 뭘 또 술 마시러 가는 건데?“
"몰라. 마시자는데 가야겠지.“
"하아......“
신입생 환영회? 그런 걸 연다며 선배들이 지금 당장 어느 가게로 오라고 말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한, 빼도 좋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망할 꼰대 새끼들.
특히 지영이를 무조건 데려오라는 듯이 남자친구인 내게 말을 하더라.
딱 봐도 남친이 옆에 있는데도 뭘 어떻게 해 보려는 음흉한 속셈이 있는 것 같은데 잘 못 골라도 한 참 잘못 골랐다.
술조차도 잘 마시는 그녀에겐 상대가 되지 않을 거니.
"진짜 자퇴할까.“
내가 왜 대학에 들어온 건지. 자괴감이 든 지영이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다시금 한숨을 토해냈다.
끙... 지영이와 함께 행복 단란한 대학 생활을 망상했는데 이거야 원. 선배라는 탈을 쓴 쓰레기들에게 그런 생활은 꿈조차 꾸지 못할 것만 같았다.
"자퇴는 하지 마.“
자퇴만은 안 돼!
지영이는 굳이 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잘 살 거다.
지금도 혼자 직장을 구해 억대 연봉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확신하지만, 그녀가 내 곁에 없는 게 너무나 불안했다.
질 나쁜 것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무조건 곁에 두어야만 안심이 된다.
"그... 지영아.“
"응?“
재학생, 복학생, 졸업을 앞둔 4학년까지 거의 모두가 모인다는 환영회에 지영이만 가지 않는다? 그럼 단단히 찍힐 테지.
차라리 한 번 얼굴을 비추고 가는 게 훨씬 나아 보였다.
그래서 그녀를 끌어들일 카드로.
"2학년에 예쁜 선배도 온데.“
"예쁜 선배?“
"응. 너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학교 여신이라고 불리더라고.“
"......“
이름과 얼굴은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여 선배가 오늘 회식 때 온다고 한다.
원래 남자애들에게 이런 말을 하며 끌어들이는 게 정상인데 같은 여자에게 예쁜 선배가 나온다고 말하며 회식에 오라고 하다니.
지영이는 우리 학교 여신이라는 말 하나로 눈빛에 흥미가 잔뜩 일렁거렸다.
"거기 어디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적극적으로 변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