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어쩌다 알바
* * *
하나 누나랑 그 일이 있고 난 후. 시간이 흘러갔다.
유익하고, 내 미래의 인생에 충분히 도움 될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고등학교 수학을 배울 때 보다 더 정신 나가버린 강의들 들었고. 지금도 오늘 하루 마지막 강의가 끝나길 일보직전이었다.
그래도 고등학교는 어찌어찌 이해해 보려고 하면 한 70% 이상은 문제를 풀 수 있게 되었는데. 이건 도통 뭔지 모르겠다.
고등학교 수학은 너무 빨리 쓸데없는 것들을 마구 배우다 보니 이것만큼 끔찍한 건 없다고 생각했거늘. 그 이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교수님이라는 작자는 강의를 하는 게 맞는 건지. 이해가 하나도 안 되는데 지는 당연히 이쯤은 이해했을 거라 생각하며 쑥쑥 진도를 빼고 있었다.
그럼 내가 이해 못한 거지. 왜 교수님을 탓하냐고 할 수 있는데.
쿨......
뿅. 뿅.
강의실에 앉아있는 나와 같은 입장인 학생들의 모습을 힐끔. 엿보았다.
아주 극소수의 인원들만이, 대부분 재학생들로 구성된 인원만이 앞자리에 앉아 강의를 듣고 있었다.
그 외에는 잠을 자거나 거의 대놓고 폰을 만지고 있는 상황.
참고로 내 옆자리에 앉은 지영이는 어제도 나랑 밤새도록 침대 위에서 뒹굴었기에 그녀도 역시나.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그것도 책상에 베고 자기 딱 좋은 베개를 베고.
"하아......“
그나마 고등학교 때랑은 다르게 이 전공에 꼭 필요한 것들이라 생각하면서 강의를 머릿속에 담으려고 노력을 해 보는 데도 너무 힘들 따름이다.
이래서 고등학교 졸업 전이나 졸업 예정인 우리에게 선생님들이 그렇게나 대학 가면 고등학교 수업이 그리워질 거라는 둥, 거의 독학하다시피 한다는 둥 했던 거구나.
"아. 시간 다 됐는데.“
결국, 나는 나중에 지영이에게 물어보기로 하며 포기한 듯,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 재밌어.
이런 재미를 느끼고 있던 와중. 어디선가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내 귀에 들어왔다.
그래서 시계를 보니.
아. 긴 바늘이 11을 가리키고 있었다.
"언제까지 하냐.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 몰라. 뭐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 어찌 말해?“
"하. 집 가고 싶어.“
하필 종소리 같은 게 없어서 강의를 끝내는 건 오직 교수 마음이었다.
이대로 계속 끌고 가도 되고, 아직 시간이 안 되었지만 빨리 끝내는 것도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보지 못하고 중요한 부분을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교수님을 강의 안 듣고 딴 짓하는 애들이 보면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왜 다 끝날 때 쯤 그리 중요한 부분을 하는 거냐고 투덜거리지만 자신있게 시간 다 되었는데요 라는 말을 할 정도의 강심장은 이곳에 없었다.
그렇게 긴 바늘이 정각을 가리켰다.
"아. 설명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나 지나갔네요.“
저 말이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라고 말하려는 발판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벌써부터 짐을 싸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근데 이게 중요한 부분이라 마저 설명하고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교수는 그런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 몸을 돌렸다.
아아아.
교수가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짜증을 표출했다.
총 15분이 지나가서야 강의가 끝이 났다.
"지영아. 집에 가자.“
"으응......“
참. 부럽다 부러워.
나도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한 번 보면 바로 이해하다 못해 응용 문제들 전부를 풀 수 있는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나도 이렇게 강의 내내 잠이나 잘까나.
아니면 지영이와 다르게 세상의 발전에 이바지 한다거나 돈을 왕창 끌어모으려나.
"다 끝났어.....?“
지영이는 덜 떠진 눈을 가지며 고개를 들었다.
너무 귀여웠다.
"어. 이제 가면 돼.“
나는 짐을 쌌다.
지영이도 마찬가지로 책상 위에 올려진 베개를 가방에 넣었다.
끝.
그게 끝이다.
필기구? 책? 지영이는 그딴 것들은 사물함에 넣어두고는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마냥 꺼내질 않았다.
그래서 개강한 지 이 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새것들이라며 중고 시장에 팔 수 있을 정도였다.
"지영아. 오늘 갈 곳 있어?“
앞자리에 앉아있던 이다혜가 조심히. 지영이를 향해 물음을 던졌다.
"어......“
응? 진짜?
그녀의 물음에 아무런 고민도 없이 갈 곳 있다며 대답하는 지영이의 모습에 나조차도 의문을 가졌다.
"아... 그래?“
"빨리 집 가서 자고 싶어.“
"......"
역시나.
근데 집 가면 잠 다 깨서는 날 괴롭히지 않나?
"그래...? 같이 카페 가자고 하려 했는데.“
이다혜는 학교 끝나고 지영이와 논 적이 단 한 번도 없기에 나한테 뭘 어떻게 해 보라는 식으로 눈 짓을 줬다.
나한테 그래도 뭐가 안 되는데. 애초에 내 여자친구님은 네토라세 섹스를 제외하곤 친구 따위 흥미가 없는데.
유일한 친구인 은정이조차 지영이는 그녀를 친구라기보다는 나와 섹스하는 모습을 보여줄 성욕 처리 도구로 인식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한 번 갔다 오는 게 어때?“
"귀찮아......“
역시. 내가 뭐라 해도 당사자 앞에서 귀찮다는 티를 팍팍 내었다.
"그... 민훈아. 너도 갈래?“
"나?“
"으, 으응. 너도 가자.“
딱 보니 이다혜는 대학에 들어와서 친해진 여자애들이랑 가려는 생각이었을 텐데.
지영이가 가지 않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를 꾀어 내기 시작했다.
아니, 왜 나야. 불편하다고. 남자 한 명 없는데 여자가 여럿인 무리에 속하라고?
친한 사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겠는데. 이제 고작 인사와 간단한 얘기를 나누는 여자애들의 틈에 끼기는 정말 싫었다.
"하아... 알았어.“
하지만... 하지만. 지영이가 친구도 없이 학교 생활하는 꼴은 도저히 못 본다.
나도 친구가 없긴 하다만. 그래도 상황이 달랐다.
계획대로라면 1학년 끝내고 군을 갈 생각이기에 지금 친구를 만들지 않더라도 병역 의무를 모조리 끝낸 후, 복학한 다음에 그제서야 친구를 만들면 된다.
근데 군을 가지 않는 지영이로서는? 휴학할 필요가 아예 없는 그녀로서는? 필치 못하게 나 대신할 친구가 필요하겠지.
"지영아. 가자.“
나까지 간다고 말하니 그녀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왜? 무엇 때문에.
이유는 간단했다.
굳이 외모를 따지자면 불량식품과도 같은 이다혜와 그녀의 친구들과 내가 섹스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알았어.“
참 알기 쉬운 대답이다.
*
"와~ 줄이 엄청나게 길어!“
"여기 커피가 엄청 맛있데!“
우리가 도착한 곳은 커다란 카페였다.
브랜드 카페도 아닌데 건물은 무척이나 컸으며, 출근 시간인 오전도 아닌데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음식점이라면 이해를 한다만. 고작 카페에, 그것도 오후에 이런 줄이 생기다니. 이해가 잘 안 될 수가 있는데.
"여긴......“
누나와 은정이가 하는 카페라면 얘기가 달랐다.
우선 줄을 선 사람 대부분이 남자인 것만으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둘을 보기 위해서 찾아왔을 게 분명하며, 간간이 여자들도 보이는 이유는 정말로 은정이가 타준 커피와 누나가 만든 간식들이 맛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와봤어?“
"어응... 와 봤지.“
"정말? 맛있었어?“
"여기 일하는 사람들이 엄청 예쁘다던데 봤어?“
"어. 예뻐. 그리고 맛은......“
솔직히 말하면 맛있었지. 요리까지 잘하는 지영이의 아이디어로 발전했는데. 맛이 없을 리가 없지.
다만, 그게 커피랑 간식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는 거지만.
왜냐하면 난 여기 가게가 들어서고 커피나 간식 대신에 거기 사람들을 맛있게 먹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사람 외 커피나 간식거리의 맛은 알고 있어도 먹어보지 않은 상태.
"맛있어.“
"오오. 기대된다!“
이제 막 소녀 티를 벗긴 이다혜와 친구들은 설레발을 치기 시작했다.
음. 지영이도 저런 모습을 보이면 참으로 좋을 텐데.
한 번 쯤은 순수한 모습의 지영이가 보고 싶었다.
주위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내 팔을 끌어안고,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은 그녀가 아니라.
그나저나. 이 정도 손님들이라면 둘이서 벅차겠는데.
지금쯤이면 벌써 알바생을 구했을지 모르겠다.
뭐, 이곳보다 사람 수가 훨씬 적은 고향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구하지 않았을 리가 없......
우우웅.
전화 왔나 보다.
나는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들었다.
어라. 발신이가 지금 몰린 사람들 때문에 쉴 틈 없이 움직이고 있을 누나에게서 온 것이다.
"여보세......“
[어디야?!]
"읏.....?!“
전화를 받자마자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귀 아파라.
[어떻게... 어떻게 한 번을 전화를 안 해! 난 당연히 알바 할 거라고 생각하고 여태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뭐야. 설마 여기서도 우리가 알바 할 줄 알았던 거야? 그럼... 다른 알바생은?
"누나... 혹시 설마. 정말로. 거짓말 안 치고. 은정이랑 둘이서 하고 있어요?“
[흐엉엉. 도와줘... 도와줘 훈아!]
"......“
돌겠네. 진짜. 생각이란 게 있는 건가. 애초에 이주일 동안 어떻게 버틴 거야.
그것보다 왜 먼저 전화 안 하고 기다린 거야. 이해할 수가 없네.
"알았어요.“
[아! 고마워!]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누나는 바쁜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누구야?“
이다혜가 물어왔다.
"다혜야. 지영이 좀.“
"응?“
"나 잠시... 아니, 그냥 천천히 들어와.“
피곤해 하는데 일하자고 할 수는 없어서 나 혼자 길게 늘어진 줄을 이탈했다.
"야. 너 뭐해?“
그렇게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는 데. 줄을 서고 있던 한 남자가 내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아마 새치기한다고 생각하겠지.
"아. 여기 알바생이라서요.“
"알바생? 하. 지랄은.“
"네?“
"여기 직원은 두 명밖에 없는 거 몰라?“
"정말요?“
진짜 둘이서 하고 있던 거냐?!
"그중 한 분이 사장님이신데.“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아세요?
"개소리 하지 말고 꺼져라 그냥.“
"아니요. 정말 여기서 일할 거예요.“
"일 할거예요라고? 시바알하학학학.“
뭐가 그리 웃긴지. 남자는 폭소했다.
"여기 알바생 안 구하는 거 모르냐? 뭘 일할 거라고 하냐?“
미친. 심지어 공고도 안 낸 건가. 장사할 생각이 있는 건지 모르겠네.
아니지. 애초에 알바생을 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손님이 알 정도면 얼마나 일하고 싶다면서 오던 알바생을 내쳤다는 말인가.
"아. 좀 놔요.“
한소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어깨에 올라간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곤 내게 뭐라고 소리치는 남자를 무시한 채,
새치기한다고 줄을 선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시선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친구 있어요?“
"하아. 주문 안 하실 거면 나가주시겠어요?“
"아니요. 할 거예요. 할 건데. 그쪽 전화번호는 메뉴에 없나요?“
연예계로 나가면 외모로만 최상위 권에 머물게 될 정도인 누나에게 질 나쁜 남자가 꼬였다.
누나는 차마 손님에게 뭐라 하지 못하는 입장이라 좋게 좋게. 말하고는 있는데. 영 답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가.
"앗...! 후, 훈아!“
누나는 나를 발견하곤 눈물을 촉촉하게 물들이며 잊지 못하는 헤어진 연니을 부르는 목소리로 날 바라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