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조별 과제
* * *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점심시간을 코앞에 둔 11시 강의의 끝자락.
교수님은 마칠 시간인 50분에 긴 바늘이 다가가는 것을 힐끔 보고는 짐을 정리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에 따라 강의를 듣던 수강생들도 끝이라고 생각하며 짐을 싸기 시작했고, 나는 오늘도 옆자리에서 엎어져 잠들어있는 지영이를 깨웠다.
참고로 아무리 대학에서 교수님들이 학생에게 관심을 잘 가지지 않는다고는 해도 매강의마다 자고 있으면 깨우기 마련이다.
그래서 당연히 지영이도 교수님의 말을 들은 내가 몇 번 깨워 보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엎어졌으며,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난 듯한 교수님이 어려운 질문을 툭. 던졌었다.
하지만 팔방미인인 내 여자친구님은 손쉽게 질문에 모두 답하며 다시 엎드렸고, 그 후로 지영이를 건드리는 교수님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게 아니라면 이번 중간고사를 보고 방법을 달리할 생각이겠지.
아무튼,
"과제 하나를 내주겠어요.“
입학하고 벌써 한 달이 흘러갔다.
그로 인해 교수님들은 조금씩 과제를 내주고 있었다.
"사람 수가... 음. 아, 마침 서른두 명이네.“
출석부를 뒤적거리던 교수님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4명씩 짝을 이루어서 오늘 제가 설명한 것에 대해 조사해 리포트를 작성해 오세요. 별로 어려운 건 아니니까 기한은 다음 주로 하고, 다음 주 마지막 시간에 발표 시간을 가져보도록 할게요. 그럼.“
자기 할 말만 다 끝내고 교수님은 뭐가 그리 바쁜지. 강의실을 뛰쳐나갔다.
그렇게 강의실 안에는 하필 해도 조별 과제냐고. 한탄하는 재학생들과 왜 그러는지 의미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제자리에 앉아서는 조를 짤 만한 사람이 있나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중. 나는 후자에 속해 있었다.
"음.....“
나는 우선 앞자리를 바라보았다.
앞자리에는 유일하게... 유일... 유... 후우. 그냥 일면식을 텄고, 단순히 얘기를 간단하게 나눌 만한 사람인 이다혜의 이다혜의 등판을 바라보았다.
여자치고는 꽤 넓은 등판이라 옆구리를 한 번 만져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저 넷이서 하겠네.“
그녀의 친구들이 하필 정확히 네 명이라 꼽사리를 끼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럼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하는 건데.
같은 학번 중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이미 거의 다 자리를 꿰차고 들어간 듯 보이고, 재학생들 몇몇이 우릴 노리고 있기는 한데 대부분 남자들이었다.
예상대로 지영이를 노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영이의 유식함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거라면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인데.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믿음이 가는 선배들은 애초에 우리와 같은 조가 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지영이를 노리는 질 나쁜 놈들 때문이겠지.
그래서인지 남은 놈들은 전부 탐탁지 않은 것들 뿐이고, 여자 선배들도 마찬가지로 지영이를 좋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앞길이 막막했다.
저 중에 지영이를 보고 동성애에 눈을 뜬 사람이 있을 수야 있겠지만 그걸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도 고등학교 다니면서 그런 애들을 여럿 보았었다.
그녀들은 태연하게 지영이를 뒤에서 욕하는 년들과 함께 지영이를 곱씹으며 가슴 아파했었지 아마?
"못해도 한 명만 있으면 될 텐데.“
왜 한 명일까. 이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했다.
수많은 강의 중에 딱 한 강의만 겹쳤었던 하나 누나가 무슨 이유에선지 수강 신청 변경 기간에 나와 같은 강의들로 모조리 바꾸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런 짓이 쉽지가 않았다.
서울권에 위치한 대학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예쁜 외모와 학교 내 높은 입지로 어찌어찌 강의들을 모두 변경했으며, 지금 지영이와 마찬가지로 내 뒤에서 잠들어 있었다.
"하나 누나. 하나 누나.“
몸을 돌려 책상 위로 길게 뻗은 팔을 베고 잠들어 있는 하나 누나를 불렀다.
"아, 아응. 응. 훈아 왜?“
헤실헤실.
비몽사몽한 표정으로 두 눈을 떴지만, 이내 다시금 두 눈이 감겨왔다.
그래도 내가 불렀다고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대답해 주었다.
"4명이 조를 만들어서 하는 과제를 내 주었는데 저희 조에 들어올래요?“
"응... 들어갈래.“
"그래요? 그럼 더 자세요.“
"고마워.“
세 명은 맞췄다.
이제 남은 건 단 한 명뿐이다.
교수님의 말처럼 이번 강의를 듣는 사람 수가 정확히 서른두 명이라 무조건 8개의 조가 만들어졌다.
그렇다 보니 이대로 가만히만 있어도 낙오된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으며, 나는 남은 사람을 데리고 가면 되었다.
이런 간단한 상황임에도 나는 걱정을 놓치지 못하고 있었다.
"민훈아. 자리 남았어?“
"나 들어가도 될까?“
"열심히 할게.“
등.
마음은 있지만 재학생들에게 괜히 찍혀서 힘든 학교 생활을 보내고 싶지 않은 어린 양인 신입생들은 이미 조를 만들고 점심을 먹으러 강의실을 떠나간 후였다.
그래서 아직 조에 속하지 못한... 정확히는 지영이와 하나 누나가 속한 우리 조에 들어오고 싶어 안달이 난 남자 재학생들이 이때다 싶어. 달려들었다.
분명 말은 나한테 걸고 있는데 눈은 하나 누나와 지영이에게 꽃혀 있었다.
지금이라도 진심이 보인다면 받아줄 의향이 있었는데... 역시인가.
"그... 저. 죄송한데요. 다 찼어요.“
"뭐?“
"다 찼다고? 언제?!“
"마지막 한 명은 누군데?“
조원을 다 모았다고 거짓말을 쳤다.
이러면 에이씨. 어쩔 수 없네 하며 지들끼리 조를 만들지 않을까.
그리고 다 찼으면 찬 거지. 뭘 조원의 정보를 내놓으라는 식으로 말하냐. 기분 나쁘게. 물론 그 조원은 없지만.
"나, 나야!“
무조건 남은 조원을 알아내려는지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그럴 때. 이들과 다른 목소리 하나가 내 귀를 간질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여성의 것.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가져가니 그곳에는 수영 누나가 서 있었다.
"수영 누나?“
외모나 집안, 성적 등, 모든 게 평범하지만 성격과 분위기 때문에 남자나 여자에게 인기가 무척 많은 수영 누나였다.
이번처럼 조를 만들어서 하는 과제가 있다면 여자 쪽에서나 남자 쪽에서나 누나를 데려가려고 하지 않았을까.
애초에 나랑은 친한 사이가 아니라서 같은 조를 해 주기는커녕 물어보기도 전에 조를 벌써 구했다고 거절할 줄 알았는데. 누나 스스로가 우리 조라고 말하니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건 한순간이었다.
"......“
마지막 조원이 여자라는 사실에 순순히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자기가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그 자리를 수영 누나에게 빼앗겼다는 생각에 화를 내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끝은 보기 좋게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자기들끼리 조를 만들었다.
"그... 혹시. 진짜 다 찬 거야? 곤란해 보여서 그렇게 말을 하긴 했는데......“
나를 도와줄 생각으로 거짓말을 했지만 혹시나 진짜 조원을 구했으면 어쩌나 싶은 생각으로 수영 누나는 조심스럽게 내게 질문을 던져왔다.
"아니요. 거짓말이에요. 그것보다 누나는 어때요?“
"으응... 나, 나는 아직.“
"그래요? 누나라면 서로 데려가려고 싸웠을 것 같은데.“
"아, 아니야! 그정도는......“
내가 누나를 부끄럽게 했던 말이 있었던가. 수영 누나는 얼굴을 붉히며 끝말을 흐렸다.
"그럼 저희 조에 들어오실래요?“
"그, 그래도 된다면.“
"저야 좋죠. 뭐.“
수영 누나라면 나는 만족을 넘어 대만족을 할 정도였다.
그야 그럴 것이 혼자서 다 해버리지. 이런 거에 관심이 없다 못해 협력하려는 생각조차 없어서 내가 다 해야 할 판인 지영이와 도대체 여긴 어떻게 들어왔고, 어떻게 아직도 유급 없이 바로 3학년인 건지 의심이 들어올 정도로 멍청한 하나 누나까지.
당나라 군대. 그 이상이었다.
그런 상황인데 수영 누나가 들어온다면 얘기가 끝난 거지 뭐.
"그래? 그럼 들어갈래.“
들어오겠다는 누나의 긍정적인 의견을 들었다.
혹시나 지금이라도 거절할까 싶어 마음을 쪼리던 내가 한심해질 지경.
"다행이네요. 이 둘을 데리고 어쩌나 싶었는데.“
여전히 잠들어있는 둘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다가 마지막 조원으로 이 둘을 노리는 늑대였다면. 어후.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그러네. 훈이가 많이 고생할 뻔했네.“
쿡쿡.
웃으면서 내 심정에 동조하는 듯이 누나는 말했다.
"근데 누나. 안 가셔도 돼요?“
"어, 어어? 어딜?“
"친구분들은 이미 나가셨는데.“
"아, 아아. 오늘은 내가 싫어하는 걸 먹으러 간다고 했거든. 그래서 혼자 빠져나왔어.“
"그래요?“
편식하는 것 없이 무엇이든 다 잘 먹을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같이 점심 드실래요?“
"응... 좋아.“
내가 뭘 먹을 줄 알고 바로 허락하는 걸까.
그나저나.
"싫어하는 게 뭐예요.“
"싫어하는 거?“
"네. 피해야죠.“
얼마나 싫었으면 친한 친구들이랑 따로 먹을 생각을 할 정도아니.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일단 과제를 하려면 만나서 그곳을 탐방해야 하는데 그럼 어쩔 수 없이 함께 출출한 배를 부여잡고 밥을 먹으러 갈 것이며, 그때 깜박하고 수영 누나가 싫어하는 음식이 뭔지 물어보는 걸 깜박할 수도 있으니. 그냥 미리 듣자.
"그, 그게.“
이게 고민할 정도인가. 누나는 대답을 주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니까......“
하나 누나랑 지영이가 깨어 있었다면, 배가 고프다고 했다면 재촉했을지도 몰랐다.
"호, 홍어.“
"......?“
홍어?
"점심으로 홍어를 먹으러 간대요?“
"아... 응. 먹어 보고 싶다고 가더라고.“
"그래요?“
신기하네. 이제 스무 살 초반 여자애들이 점심으로 홍어를 먹으러 가다니. 근데 이 주변에 홍어하는 가게가 있던가?
"싫어할 만하네요.“
호불호가 극히 갈리는 음식이다 보니 싫어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나도 나나 지영이도 홍어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기에 나중에 문제 될 점은 없겠지.
"간단하게 중국집 갈까요?“
"그래!“
누나의 대답을 들은 나는 아직도 잠들어 있는 두 사람을 깨우고 중국집으로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