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네토라세 여친님-53화 (53/142)

〈 53화 〉 은정이

* * *

강민훈과의 첫 만남은 가히 최악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은정이는 고등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외모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하다 보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소이 인간관계에 벽을 쌓은 모범생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방금 말했다시피 외모를 가꾸지 않았다고.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고 안경까지 쓰니 정말 공부만 할 것만 같은 소녀가 되어서는 시험 날이나 문제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면 그녀의 곁에는 애들이 다가오지 않았다.

이런 생활이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잘하면 대학 졸업하고서도 죽을 때까지 쭉 이어질 줄로만 알았는데 어느 시점에서 완전히 틀어졌다.

그 이유는 바로 옆 반의 윤지영이라는 여자 때문에.

드라마나 영화에서 익숙하다 못해 반드시 쓰이는 요소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그녀였는데 잘생긴 남자도, 그저 평범한 남자도 아닌 같은 여자에게 그런 감정을 느껴서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이게 대체 무엇인지. 이런 감정을 왜 느끼는지에 대해 답을 도출해내니 결국에는 사랑이라는 것을 느꼈다.

당연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는데 어느새 자신은 공부에서 손을 떼고 스토커처럼 윤지영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러기를 몇 주가 흘러가고.

"너 뭐야?“

계속될 것만 같은 스토킹은 그녀의 입장에선 너무도 빠르게 발각되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탐색하는 시선. 아아. 그것마저도 너무 예뻤었다.

아무튼, 따라오지 말라고, 그런 짓 하지 말라는 말에도 자꾸만 따라다녔더니 끝내 먼저 포기한 지영이가 어차피 계속 그럴 거면 옆에 있으라고 해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짓말......“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은 데다가 동성애게 사랑받는 당사자가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대충 짐작이 가는 상황이라 사랑이라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그저 한 명의 친구로서 지영이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작스럽게 그녀는 남자친구가 생겼다.

애초에 자신과 사귀지도 않았으면서 배신감이 들었고 뒤늦게 슬픔이 밀려왔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대로 빼앗길 수 없다며 남자친구라고 했던 그, 강민훈을 따로 불러내 헤어지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던 와중에.

"으음... 바람?“

그녀가 보았다.

협박하는 모습을. 그러나 바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 얘기까지 듣지 못한 듯 보였다.

"마, 맞아! 좋아해!“

"아니야! 절대 바람 아니라고!“

다른 여자와 단둘이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바람으로 의심하기 충분할 터. 거기다가 외모도, 재력도, 능력도 없는 남자가 사귀기 시작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른 여자에게 들이대는 장면을 보면 사랑이란 감정은 빠르게 식지 않을까.

물론, 바람 상대인 자신에게까지 좋지 못한 결과로 낳아질 수 있는데 어차피 이어지지 못할 관계라면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가질 수 없다면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하게 만드리라.

"꽤... 나쁘지 않은 감각인 걸?“

근데... 근데 이상하게도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둘이 섹스해 봐.“

불안한 감은 틀리지 않은 듯. 그녀가 이해하기 힘든 말을 건네왔다.

"시, 싫어!“

세, 섹스라니? 아무리 공부에 빠져있었더라도 그게 무엇이고, 무슨 행위인지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거절했다.

"왜?“

"왜라니! 말도 안 되잖아! 일단 네 남친이고!“

"괜찮아.“

"아니 안 괜찮다니까?!“

"왜?“

"왜가 아니라고!“

"왜. 애는 어차피 내 건데. 내가 너한테 빌려주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을까?“

그리고 이어지는 의미 없는 질문과 대답의 공방이었다.

"너... 이상해.“

처음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친구에게 자신의 남자친구랑 섹스하라고 하다니.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이상할 따름이었다.

"싫어?“

"으응... 싫어. 아니, 절대 못 해.“

해, 해도 아름다운 꽃을 더럽히는 이 쓰레기 같은 남자가 아니라 지영이와 몸을 섞고 싶었다.

"그럼 우리 끝내자.“

"어...? 끄, 끝? 그게 무슨 말이야?“

"너 나 좋아하지 않아?“

흠칫.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부터 알아차린 걸까.

스토킹 하다 걸렸던 그때? 아니면 친구 사이로 지내던 도중에?

아니... 아니지. 지금은 어떻게 걸렸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는 게 중요했다.

먼역 이 일로 역겹다고 소름이 돋는다며 곁을 떠나갈까 싶어서 문득 겁이났다.

"다른 애들도 비슷하긴 한데 너는 너무 노골적이었어. 마음에 안 들어.“

"아, 아아. 미,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아줘.“

그, 그럴 수가...! 마음에 안 든다니.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 할게. 섹스할 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야만 한다.

연인 사이는 무리라도 친구 사이로는 남고 싶은 생각으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아까 말했던 그것을...원치 않지만, 저 남자에게 몸을 내어주었었다.

"그땐 정말 싫었는데 말이지.“

좋아했던 여자의 앞에서 처녀를 잃으며 아프다고 괴성을 내지른 다음 집에 돌아가서 정말 많이 울었었다.

부모님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라 학교에 연락하기도 하며 난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자살하고 싶었을 정도였고, 지영이의 앞에서 자신을 범한 강민훈을 저주를 하다못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원망했었는데.

뜬금없이 허탈한 웃음만 나오게 만드는 과거의 기억이 생각난 나머지 혼자 중얼거렸다.

"응? 무슨 말 했어?“

같은 과 선배라는 사람에게서 도망치듯이 재빨리 살 것들을 카트에 담은 뒤 계산대로 향하고 있던 그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은정이를 바라보았다.

분명 잘생긴 건 아닌데 왜 이렇게 잘생겨 보이는 걸까.

은정이는 멍하니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붉어진 얼굴을 돌려버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는 지영이에게 품었던 사랑이라는 감정은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 그렇게 텅 빈 마음속에 지영이가 사라지자마자 바로 자리 잡은 강민훈이라는 존재는 그녀에게 너무도 커다랬다.

그래서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외모를 가꾸기 시작했고, 그에게 이미 여자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접근해오는 남자들을 모두 내쳤다.

"어머어머. 둘이 정말 잘 어울리네.“

".......“

계산을 하기 위해 줄을 섰다.

우리보다 먼저 줄을 서서 앞에 있던 한 아주머니가 뒤를 힐끔 돌아보다가 이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여자친구가 이렇게 예뻐서야. 잘 맞춰줘야겠는데? 떠나가지 않게 하려면?“

"하, 하하하. 그렇죠?“

"......“

괜히 여자친구가 아닌데요라고 말해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민훈은 진짜 여자친구라는 듯이 말하자 안 그래도 붉어져 있던 은정이의 얼굴은 더더욱 붉어졌다.

"복 받았어. 복!“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꽈악.

그녀는 민훈의 소매를 강하게 붙잡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으니까.......‘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인데. 꾸미고 나니 예뻐졌다고 한들 그의 여자친구는 넘사벽인 수준이라 가망이 없음에도 도저히 포기되지 않았다.

그 어떤 잘생긴 남자들을 보아도, 심지어 돈이 많고 착하면서 동시에 오직 자신만 바라봐 준다고 해도 이 마음은 굳건하게 오직 한 명. 애인이 있는 강민훈에게로만 향해 있으니까.

*

"오늘... 바빠?“

"응?“

바쁘다니. 당연히 바쁜 거 아닌가? 이제 저녁 시간이 다가오기도 해서 한참 바쁘기 시작할 때인데. 그걸 은정이가 모를 리가 없었다.

"바쁘지 않을까?“

"아니. 카페 일 말고는 다른 건 없냐고.“

"어... 없지?“

"그래? 다행이네.“

물어보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네.

애초에 오늘도 알바가 도망쳐서 빈 일손을 채우려고 온 건데 말이지.

"이거 배달할게요.“

"......?“

두 사람이면 충분히 들고 돌아갈 수 있을 정도인데 은정이는 무거운 쌀도 없으면서 굳이 배달시키려 하고 있었다.

"배달은 왜?“

"내가 낼 테니까 신경쓰지 마.“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들고가면 되는데 왜 배달하냐고."

"오늘 한 번만 뛰어줘. 점 오 더 줄게.“

내 말은 들을 가치도 없는지. 바로 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는 말을 보아서는 대타를 구하는 것 같은데 무슨 바쁜 일이 있는 걸까?

"점 오 더 줄게. 오늘만 해줘.“

끊자마자 다시 전화를 걸었다.

먼저 전화를 걸었던 사람은 거절하지 않은 것 같은데 또 전화를 걸었다는 것을 대타를 두 명 구한 것.

"가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누나와 지영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배달을 맡긴 뒤. 은정이는 내 소매를 끌고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어, 어딜...? 카페 안 가?“

"오늘 쉬자.“

"갑자기?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것도 없어. 그냥... 단지. 단지 데이트를 좀 하고 싶어서.......“

"어?“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데이트를 하자는 걸까?

내가 은정이와 비록 연인 사이는 아니더라도 갈때까지 간 사이라서 데이트 하자고 하면 나중에 시간을 비워서라도 만나줄 텐데.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데이트를 하나는 건지.

그것도 이렇게 바로.

"말이라도 하는 게 낫지 않아?“

"괜찮아... 지영이라면 몰라도 언니는 귀찮게 하니까. 그냥 가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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