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은정이
* * *
"으읏... 읏.“
이것은 내 입에서 흘러나온 신음성이었다.
마치, 지영이가 내 몸을 탐하듯. 은정이의 손은 자비 없이 현란하게 움직여 민감한 부위를 찾아다녔으며, 찾았다 싶을 때, 그곳만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좋아?“
"......“
지영이의 곁에서, 나와 섹스하는 걸 제일 오랫동안 봐온 탓인지. 어느새 그녀 또한, 내 여자친구님과 비슷한 고혹적이면서도 음흉한 표정과 분위기로 내게 물어왔다.
나는 오로지 지영이뿐인데. 그녀 말고는 다른 여자에게 가슴이 뛸 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난 은정이에게 두근거렸다.
저, 정말 나는 평생을 사랑하기로 마음 먹은 지영이 외에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왜. 말 못 하겠어?“
자신이 생각하기로는 긍정적인 답변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에 어서 대답을 재촉하듯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그녀의 손은 거침없이 팬티 속으로 들어와 힘차게 발기한 자지를 움켜쥐었다.
"왜 갑자기 평소대로 좋다는 말을 못 할까?“
원래라면 기분 좋다면 좋다고, 안 좋다면 안 좋다고 말하던 내가 갑작스럽게 입을 꾹 닫고 말을 아끼는 모습이 더더욱 보기 좋은지 옆으로 길게 찢어진 입꼬리는 내려올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괜찮아. 말하지 않아도. 혼란스럽겠지. 나도 지영이와 너를 사이에 두고 얼마나 혼란스러워했는데. 이해해.“
은정이 또한, 지금의 나처럼 지영이만을 좋아했다가 그 틈에 나라는 존재가 생겨났었다는 예전의 느낌을 잘 안다는 듯이 긍정하며 내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받아들이기 힘들 거야. 그게 사랑이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무척이나 상냥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웃었다.
"나는 이렇게 사랑을 갈구해도 아예 돌아보지 않아 사랑의 대상이 완전히 변했는데 너는 아쉽게도 그렇게 되진 않을 것 같네.
"......“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대충 감이 잡혀갔다.
일단은 고등학교 시절의 은정이는 지영이를 좋아했다만 그녀는 은정이에게 단순한 친구일뿐. 그 이상의 감정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손쉽게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할까. 지영이로 가득 차 있던 그녀의 마음에는 가뿐하게 내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 말인즉슨 사랑이 바뀌기란 쉽지는 않지만 충분히 바뀔 수도 있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네로라세 성향을 가진 내 여자친구님이라서 내게 다가오는 은정이를 철저히 몰아내지 않아 시간만 있다면 내 굳건한 마음을 움직일 수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그런 나를 지영이가 싫어 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좋아하며 평소와 다름없이 사랑해준다면 어느새 나는 여러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바람둥이가 되어 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인간의 욕심은 그만큼 제어하기 힘든 거니까. 그 증거로 나도 모르는 사이 은정이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그리고 아까 그녀가 한 혼잣말을 생각해 보자.
'그 말이 맞았네. 네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게. 처음에는 미친 소리인 줄 알았는데.'라는 말을.
처음에는 당연히 이해하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 물으니 돌아온 대답은 내 여자친구. 지영이에게 물어보라고 했었다.
"요즘... 자주 그러더니.“
생각해 보니 요즘 지영이는 혼자 집에 가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싸우지도 않았는데, 기분 나빠 할 짓도 하지 않았는데 정말 이유를 모르겠었다.
그야 그럴 것이 집에 돌아가면 잘 갔다 왔냐면서 나를 반기며 침대에 올라가 뜨거운 밤을 보내니 우리 사이에 금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럼 무슨 하나의 플레인가 생각해 보아도 무슨 플레이인지 영 감이 안 잡혔는데.
설마.
"중동 갈 생각이야?“
지끈지끈 아파져 오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제야 알겠다.
은정이나 누나를 포함한 여자들에게 자꾸만 나를 빌려주었던 것이 자신에게로만 향하는 100%의 사랑이라는 내 감정을 다른 여자들에게도 나눠줄 생각이었던 거다.
조금 황당한 계획이긴 한데 바보같이. 나는 그 계획에 제대로 넘어가 버렸다.
"흐응? 알아차린 거야?“
"너도 알고 있었어?“
"물론, 나 말고도 언니도 알고 있어.“
"......“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사람이 은정이뿐만 아니란다.
왜 하필 나일까. 외모도 재력도 가진 게 하나 없는 나한테 이렇게나 예쁘고 착하고 좋은 여자들이 들러붙지 못해 안달인 걸까.
물론 남자로서 예쁜 여자가 내게 사랑을 갈구한다는 건 기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길게 생각해 보면 중동의 국가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에서는 일부다처제는 금지되어 있을뿐더러 내가 과연 혼자서 그녀들 전부에게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할 수 있을지. 나 혼자서 부양할 수 있을지. 부가적인 문제가 수도 없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주위 시선들까지 생각하면 골치 아픈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가 대체 뭐라고.“
"뭐. 별거 없지.“
혼잣말에 은정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있잖아. 별거 없으면 뭐 어때? 내가 좋아한다는데 사랑한다는데. 심지어는 애인이 있어도, 결혼할 대상이 있어도 포기할 수 없다는데 어쩔 수 있을까? 그래도 좋아한다고 사랑하다는 건 변함이 없는데.“
자신이 봐도 미친 짓인 건 변함이 없는지 통제할 수 없는 마음에 한숨을 픽 내쉬었다.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지. 그 어떤 여자가 수많은 애인을 둔 남자와 사랑하고 싶겠어.“
"그럼......“
"다른 남자 찾으라는 말은 하지 마. 내가 안 만나봤겠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전부 내 몸이 목적인 쓰레기들이란 게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좋아할 수 있을까?“
남자라는 생물은 여자를 볼 때 먼저 보는 게 당연지사 외모일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눈길이 가는 건데 은정이는 그 시선이 몸을 탐하려는 목적밖에 담겨있지 않은 시선으로 생각하나 보다.
실제로 만났던 남자중에 그랬을 수도 있는데 남자들 전부가 그렇다고 생각하기엔 힘들었다.
아니면 전자의 경우인 질 나쁜 남자들만 만났다던지.
"옆집 그새끼도 똑같잖아?“
맞는 것 같네. 남자 운이 참 별로다.
심지어 나까지도.
"오히려 만나면 만날수록 네가 더 좋아져서 그런지 차라리 너의 수많은 여자중에 하나가 나을 것 같아.“
확고한 의지가 표정에서 엿보였다.
이래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마음을 돌리기 어려워보였다.
"참고로 언니도 나랑 비슷한 생각이야.“
누나까지 도라니. 환장할 노릇이다.
"하아... 미치겠네.“
대학을 그만두고 돈 잘 벌리는 일이나 해야 하는 건가?
이제 와서 지금 느껴지는 감정은 전부 거짓된 것이라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아.
지영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니, 그녀에게는 너무 좋게 나는 은정이에게도 특별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한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해 버렸으니까.
밀어내기에는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알아차리는 게 늦었을 뿐이지 이와 같은 감정은 예전부터 느꼈으니까. 애써 외면했던 게 큰 화를 불러왔다.
"왜? 좋지 않아? 모든 남자들의 꿈 아니야?“
그렇게도 볼 수 있지. 하지만 난 그런 걸 원한 적이 없는데.
"나도 내가 왜 이러는 지 모르겠다. 정말.“
한숨을 내쉬며 섹스할 마음이 사라졌는지 은정이는 내 옆에 몸을 뉘였다.
"나 하나라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옆에 지영이나 언니까지 그러니까 이게 정상이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서 결국에는 이렇게 되어 버렸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몰라. 지영이가 다 생각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일부다처제를?“
"어. 정확하게는 모르는데 일단은 돈을 벌고 있다더라고.“
"......?“
뭐? 돈을? 지영이가?
"아닌데?“
나는 부정했다.
강의 때마다 맨날 잠을 자는 게 밤에 돈 때문에 일하는 거라 생각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밤에는 나와 뜨거운 밤을 보내느라 그런 거고. 그리고 밖에 나가 일을 하는 흔적은 동거하는 내가 찾아보지 못한 것도 말이 안 되었다.
모델 일이라도 하면 한 번씩 혼자서 집을 나가거나 늦게 들어온 것도 본 적이 없는데 말이지.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동거인인 나에게 수상한 점을 흘리는 게 당연했다.
지영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맞아. 그 뭐냐... 코인? 그리고 주식? 이런 거로 벌었다는데?“
"뭐...? 얼마나?“
"내가 들었을 땐 코인으로 수십 억을 먹었고, 주식으로는 이미 이름난 대기업의 주주라던데?“
"......“
미치겠네. 아니, 무슨 스무 살에 자수성가를 할 수가 있어.
만약 이게 소설이라면 작가가 대가리 없이 글을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 지금쯤 이걸 쓰면서 '흐흐. 이러면 나중에 스토리 풀기에 막힘없이 조금은 편해지겠지' 하고 기분 더럽게 웃고 있겠지.
"그래서 돈 문제는 걱정 없다더라.“
"유능하네.“
"그게 또 문제지. 돈이라도 없으면 여자를 적당히 늘릴 텐데. 이젠 돈이 많아졌으니 여자가 더 늘어날 거 아니야?“
"하아......“
이상하다. 뭔가 이상하다.
남자인 내가 여자를 늘릴 생각이 없는데 자꾸만 내 곁에는 여자가 늘어만 갔다.
"그래도 나한테 두 번째 부인 자리를 준다고는 하는데.“
왜 나도 모르게 두 번째 부인이 생긴 걸까.
"아... 시발. 몰라.“
생각하면 할수록 대가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아니, 애초에 지영이가 하는 일에 내가 생각이란 걸 잘 하던 성격이었나?
그녀가 원한 거니 순순히 따르고, 그녀가 틀린 걸 할 리가 없으니 광신도처럼 믿었을 뿐이지 의문을 가진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 거의 처음으로 의문이 계속 생기고 있었다.
나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욕을 입에 담았다.
"꺅?!“
나는 옆에 누워있는 은정이의 몸 위로 올라갔다.
놀랐는지 동양인치고는 커다랬던 눈동자는 더더욱 커졌다.
"그래. 하자. 시발. 하렘 하자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했다.
이미 사랑하는 여자가 늘었음에도 지금 와서야 다시 지영이 하나만을 본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애초에 그녀 하나만을 바라봤으면 네토라세 성향을 가졌다고 해도 다른 여자를 품에 앉았을까.
사실 나도 그녀 하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해서 다른 여자들을 품에 안은 거겠지. 지영이가 원했다는 생각으로 내 자신을 보호하면서.
"헤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던 은정이는 내 말을 듣더니 만족한 표정으로 감탄했다.
"그럼 나 사랑해?“
"어. 사랑해. 사랑한다고!“
나는 한 마리의 짐승처럼 은정이에게 달려들었다.
* * *